【김인전 金仁全(1876 ~ 1923)】 "제10회 임시의정원회의 전원위원회 위원장"
1876년 10월 7일 충청남도 서천군(舒川郡) 한산면(韓山面) 지촌리(芝村里)에서 수원(水原) 군수를 역임한 부친 김규배(金奎培)와 모친 김씨 사이의 두 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호는 경재(鏡齋, 經齋), 이명은 김인옥(金仁玉)이다.
6세 때부터 향리의 사숙에서 한학을 공부하여 유교 경전에 정통하였다. 부친은 서천군 한산면 출신인 이상재(李商在)와 함께 황성기독청년회YMCA를 조직하고 계몽운동을 펼친 개화 지식인이었다. 부친의 영향으로 근대적인 의식을 품고 27세 때인 1903년에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06년 11월에 가산(家産)을 출연해 향리인 충남 서천군 화양면에 중등과정의 한영학교(韓英學校)를 설립하여, 후학들에게 신학문을 교육하며 구국교육운동에 뛰어들었다.
1910년 8월 국권이 피탈되자 한영학교 운영을 숙부인 김영배에게 맡기고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예수교 장로회 계통의 평양신학교에서 송병조(宋秉祚) 등과 공부하였다. 방학 기간을 이용해 전북 군산의 영명학교(永明學校)에서 임시 교원으로 학생을 가르쳤으며, 서천군 화양면 완포리에 교회를 설립하고 장로로 시무하기도 하였다. 1914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 목사안수를 받았다. 1915년에 전주 서문외(西門外) 교회 목사로 부임하였다. 목회 활동을 하면서 예수교 장로회 성경학교 교수와 전북노회장(全北老會長) 등의 교직을 맡았다. 전도 활동을 통해 교인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 넣었다. 전주 서문 밖에 있는 교회에는 신흥학교(新興學校)와 기전여학교(紀全女學校) 등의 교사와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기전여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을 지도해 비밀결사 송죽형제회(松竹兄弟會)를 결성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이 발발하자 3월 5일 군산 영명학교(永明學校) 교사와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일어난 만세시위와, 3월 13일 전주의 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의 학생과 교사, 그리고 기독교 신자들과 천도교도가 합세해 전주 시내 남문에서 전개된 만세 시위운동을 지도하였다. 만세시위대의 배후에서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의 표적이 되자, 가사를 정리하고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길에 올랐다. 상하이에서는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에 가입해 재무부장직을 맡았다. 1919년 4월 11일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도 참여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재무부 비서국장 겸 임시공채관리국장으로 임명되어 공채 발행을 통한 독립운동 자금의 조달에 노력하였다. 1920년 임시의정원 의원에 피선되어 재무상임위원회와 예산결산상임위원회, 그리고 정무조사특별위원회 군사분과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1년 4월 9일 제8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같은 해 5월에는 임시정부 학무부 차장으로 임명되었다. 중국 망명 전에 학교를 설립해 민족교육을 펼쳤던 경험을 바탕으로 상하이 교민 자제들을 위한 교과서 편찬을 추진하였다. 또한 재정난에 처한 인성학교(仁成學校) 유지회장으로 학교 운영에 힘을 기울였다. 1922년 9월에는 김종상(金鍾商)의 뒤를 이어 인성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미국 워싱턴에서 1921년 11월 11일부터 ‘태평양회의’(워싱턴군축회담)가 열린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임시정부는 이승만(李承晩)을 전권대사로, 서재필(徐載弼)을 전권부사로 하는 대표단을 구성하였다. 1921년 8월 17일 ‘태평양회의 외교후원회’의 재무서기로 선임되어 외교활동을 후원하기 위한 모금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어 9월에는 한국 독립의 승인을 요구하는 「외교후원회의 대(對)태평양회의 선언서」 를 발표하였다. 임시의정원 의장 홍진(洪震)을 비롯한 의원 25명 명의로 “세계의 평화, 동아의 행복과 정의 인도를 위하여 한국 독립 및 자주의 완전한 해결”을 요구하는 「한국독립 청원서」 를 11월 11일에 개회한 태평양회의 각국 대표들에게 발송하였다. 손정도(孫貞道)·송병조·김병조(金秉祚)·이원익(李元益) 등 임시정부 내의 기독교 목사 출신 인물들과 더불어 대한야소교진정회(大韓耶蘇敎陳情會)를 조직하였다. 대한야소교진정회는 한국의 기독교 역사와 일제의 기독교 핍박 사실을 알리고, 기독교와 독립운동의 관계 및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국한문·중문·영문 진정서를 각국 정부와 기독교 단체 등에 발송하였다. 1921년 5월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 사원으로 가입해 한중 연대활동에 참가하였다.
1922년 2월에 개최된 제10회 임시의정원회의 전원위원회 위원장, 그리고 내외무 상임위원회·재무상임위원회·교육실업상임위원회 등의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2년 4월 3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4대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의장으로서 임시정부의 유지 강화와 독립운동을 활성화하는데 힘을 쏟았다. 당시 임시정부는 1921년 1월 26일 이동휘(李東輝)가 국무총리직에서 사임하였고, 이어 5월 12일 노동국총판 안창호(安昌浩)가 사직하였으며, 임시대통령 이승만 또한 상하이로 왔다가 5월에 하와이로 돌아감에 따라 정부 기능이 마비되었던 상황이었다. 이에 임시정부를 개편하기 위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 소집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되었고, 6월 6일 국민대표회기성회가 출범해 국민대표회의 소집 준비 작업이 본격화되고 있었다. 1922년 7월 안창호·신익희(申翼熙)·김구(金九)·조소앙(趙素昻)·이시영(李始榮) 등 50여 명과 함께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였다. 시사책진회는 임시의정원과 국민대표회주비위원회 사이에서 일어나는 반목과 갈등을 해소시켜 국민대표회의가 원만히 개최될 수 있도록 제반 여건을 조성하기 위해 조직되었다.
1922년 2월 태평양회의가 성과 없이 끝나자 독립운동계는 외교활동을 통한 독립운동의 무기력함을 깨닫고 무장 독립투쟁의 필요성을 새삼 인식하였다. 그리하여 같은 해 10월말 김구·손정도 등과 함께 “모두가 노동하며 군인이 되는” 노병일치(勞兵一致)를 원칙으로, “조국 광복에 공헌하기 위하여 향후 10년 이내에 1만 명 이상의 노병을 양성하고, 100만 원 이상의 전비(戰費)를 조성”을 목표로 표방한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발족하였다. 한국노병회의 이사 겸 경리부원으로 선임되었고, 주도 인물로 청년들을 중국 군사교육기관에 유학시켜 독립군 장교로 양성하고 독립전쟁에 대비한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23년 1월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 전라북도 대표로 참석하여 분주하던 중, 5월 3일 과로로 쓰러졌다. 상하이 동인병원(同仁病院)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5월 12일 4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5월 14일 임시정부 주관으로 장례식이 거행되었고, 유해는 상하이 정안사로 인근의 만국공묘에 안장되었다. 만국공묘 내 안장된 유해는 1953년 도시개발 과정에서 상하이 쑹칭링(宋慶齡) 능원 안 외국인 묘지로 이장되었다. 1993년 8월 5일 박은식(朴殷植)·신규식(申圭植)·노백린(盧伯麟)·안태국(安泰國) 등의 유해와 함께 고국으로 봉환되어 국립 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전주시 완산구 중화산 다가공원 내에 기념비, 충남 서천군 화양면 화한로에 추모비, 서천군 마서면 도삼리에 흉상이 건립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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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전 장례식 사진(1923. 5. 14) [판형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