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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온통 하얗다. 하늘도 하얗고 땅도 하얗다.
막사 옆의 간이화장실에서 용무를 마치고 일어서려는데 머리가 핑 돌며 어지럽다. 온 몸에 힘이 빠져 가까스로 허리띠를 채우고 나와 몇 발자국도 떼지 못한 채 눈 위에 그대로 쓰러진다.
나의 몸은 땅속으로 마냥 꺼져 들어가는데 정신은 하늘로 날아오르듯이 왜 이리 편안할걸까. 주위에서 동료들의 웅성거림은 마치 꿈속처럼 나하고는 아무런 상관없이 아스라이 들린다. 마치 휴일 오후 낮잠을 달게 잘 때 멀리서 골목길의 아이들이 뛰놀며 떠드는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엊그제는 사격훈련 첫째 날이었다.
작년 크리스마스를 일주일 앞두고 입대했으니 벌써 두 달이 지나 새해인 1974년 이월 중순임에도 강원도 서곡의 찬바람은 맨살을 칼로 베는 듯 매서웠다. 영하 이십이도 라지만 체감 온도는 그보다 훨씬 더 악랄했다.
중대장은 사격장 사선에 백여 명의 중대원을 삼열 횡대로 세워놓고 일장 훈시를 시작하였다.
“제군들은 군인으로서 가장 중요한 사격훈련을 하기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한발 한발을 쏠 때마다 표적지를 민족의 원수 김일성이라고 생각하고 만약 표적을 맞추지 못하면 나와 나의 전우가 죽는다는 것을 명심하여 반드시 필승의 각오로 쓰러뜨려야만 합니다. 제군들이 오늘 쏘는 이 총알은 고향에 계신 부모형제가 피땀 흘려 일해서 낸 세금으로 만든 것이니 만큼 한 알의 총알이라도 헛되게 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군들은 사선에 오를 때부터 사격을 마치고 내려올 때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말 것이며, 표적을 필히 백발백중 시켜야 하고 탄피 하나라도 망실해서는 안 됩니다”
이어 선임하사의 사격 요령에 대한 간단한 교육과 기지거리 사격장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기지거리 사격은 100미터, 200미터, 250미터에서 하나씩 올라오는 표적지를 향해 개머리판을 오른쪽 어깨에 바짝 밀착시키고 눈을 최대한 가늠자에 가까이 한 다음 가늠쇠를 일치 시켜서 조준선을 정렬한 다음 표적지를 쏘게 되는데, 탄착점이 곡선을 이루므로 200미터 표적지는 표적의 중간부분을, 100미터 표적지는 약간 아래 부분을, 250미터 표적지는 약간 위 부분을 겨냥하여 쏘되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 숨을 멈추고 애인의 젖꼭지를 만지는 것처럼 부드럽게 당기는 것이 요령이다. 알겠나?”
“예!” 100여명의 중대원이 우렁차게 대답한다.
“좋다! 오늘 부터 오전, 오후 각 아홉 발씩 쏘게 되는데 그 중 각 일곱 발 이상씩 맞춰야 하고 만약 불합격한자는 나머지 시간을 교육대신 기합으로 대체한다,알겠나! 일조 사선 앞으로!“
나는 교육 받은 대로 발사 반동에 눈두덩 아래가 아플 정도로 개머리판을 눈에 바짝 당겼음에도 불구하고 오전, 오후, 각 여섯 발 씩 밖에 맞추지 못한 채 결국 부모형제의 피땀 어린 세금을 축낸 죄로 엠원 소총을 거꾸로 든 채 오리 걸음과 P.T체조로 오전, 오후, 세 시간씩 체력을 단련하였다.
훈련 둘째 날 아침
사선에 오르기 직전 분명 화장실에 들렀음에도 사선에 들어서자마자 또 소변이 마렵다. 그러나 이를 악 물고 다짐했다.
“오늘만은 합격하리라! 바짝 당긴 가늠쇠안의 표적이 바로 적이다, 만약 적을 쓰러뜨리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 오늘도 실패하면 팬티 바람으로 악명 높은 서곡의 삼 십센치 얼음을 깨고 들어가야만 한다.”
사선에 들어서자 숨고를 새도 없이 표적지가 올라왔다.
침착하고도 비장한 마음으로 총구를 원수에게 향한 채 숨을 멈추고 격발하였다.
총성과 동시에 표적지가 넘어 간다. 다시 표적지가 올라오고 다시 한 발, 또 올라오고 또 한발, 계속 올라오는 표적을 향해 계속 한 발씩, 나는 신들린 것 마냥 표적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고 뒤에 서서 사격 감독하던 소대장이 나를 가리키며 선임하사에게 소리친다.
“와 이놈 백발백중이네! 선임하사 이 녀석 오늘 오후 훈련 열외 시키고 휴식을 주도록 해”
나는 어제 오후 막사에서 하루 종일 꿀보다 더 달디 단 휴식을 취하였다.
게다가 출출하던 세 시경엔 평소 나의 고교 일 년 선배라는 학연만으로 티 나지 않는 범위에서 항상 보살펴 주던 K 선임 하사가 나에게 라면을 끓여오라고 해놓고 선 몇 숟가락 뜨지도 않은 채 갖다 버리라고 준다. 나는 냉큼 받아 반합 바닥까지 깨끗이 하여 반납하였다.
저녁식사가 끝난 후엔 총기수입과 군장검사를 마치고 열시 취침점호를 하였다. 그러나 나는 첫 번째 보초가 되어 같은 중대원 L과 함께 정문 보초를 서게 되었다.
하늘에는 청승맞게도 하현달만 어슴푸레 비치고 불빛조차 없이 칠흑같이 어두운 계곡에는 아래에서부터 얼음같이 찬바람이 불어와 손과 입술은 트고 코와 얼굴까지 가려워 동상에 걸린 듯하며 벌어진 전투화 사이로는 눈이 들어와 녹아 제자리에 서서 계속 종종걸음을 하지 않으면 얼음바닥에 그대로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총을 든 채로 제자리 뛰기를 하던 L이 문득 나에게 말을 던진다.
“너는 배고프지 않니? 나는 배고파서 군대 생활 못하겠어, 입대 하기 전엔 농사를 지었는데 하루에 새참까지 다섯 끼를 먹었었거든...”
하긴 입 짧은 나조차 배가 아무리 불러도 입에선 계속 음식이 당기는데 너는 오죽하랴 싶어
“너 그럼 돈 줄 테니까 아래 민가로 내려가 빵 사올래”하자
“그래 금방 갔다 올게” 말이 떨어지자마자 총을 참호에 세워놓고 돈을 받아 아래 마을로 쏜살같이 달려간다. 한 이 삼십분 지났을까 산 위 막사 쪽에서 한 개의 후랫쉬 불빛이 길을 따라 내려오는데 아무래도 주번사관이 순찰을 돌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순간 나의 등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눈앞은 아득하다.
“아! 이 자식은 왜 안 오는 거지? 무슨 일이 생겼나? 주번사관에게 들키면 죽음인데...”
그때 길모퉁이를 돌아 L이 나타났다.
“야 빵 사왔어”
남의 속도 모른 채 만면에 웃음을 띤 L의 낯짝을 향해 나는 낮은 소리로 재빠르게 속삭였다.
“야 순찰 온다”
기겁을 한 L이 빵을 야전잠바 안으로 숨긴 채 허겁지겁 총을 주워든다. 그제 서야 불이 우리를 비춘다.
나는 보초 수칙대로 “손들어!”로 시작하여 암구호를 나눈 후에 일직사관에 대해 소리 높여 “충성”하며 ‘받들어 총‘ 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순간 L의 가슴속으로부터 “빠지직”하는 셀로판지의 마찰음이 새어 나오고 말았다.
그 소리는 ‘지옥으로부터 울려오는 단말마의 비명’ 이었다.
순간 일직사관의 얼굴이 하현달보다 더 차갑게 굳어진 채 L의 두툼한 야전잠바 앞을 들추었고 이어서 대 여섯 개의 빵이 L의 발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어, 이 빵, 어디서 났나?”
나는 아무 말도 못한 채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었고
일직사관의 계속되는 추궁에 L은 우물쭈물 하다가 결국 이실직고 하고야 말았다.
그러자 일직사관은 비록 우리가 경계 근무 중에 큰 잘못은 했으나 보초를 기합 주거나 때릴 수는 없는 일이라고 판단했는지
“보초 교대 하는 대로 둘 다 일직 사관실로 와라” 하는 한마디 만 남긴 채 뒤돌아서 올라갔다.
나는 두려움에 몸서리치며 사색이 되어 까부라져 있는데, 한참동안 빵을 내려다 보던 L이 한숨을 쉬면서 빵을 집어 들더니 셀로판지를 뜯어서 나에게 권하고 자기도 입이 터지도록 우겨 넣으며 “죽을 때 죽더라도 먹고 죽자,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더라!”
하고 빙긋 웃는다. 그러나 나는 그의 웃는 얼굴을 한 대 패주고 싶도록 원망스러워
“너나 쳐 먹어”라고 핀잔을 준 채 입을 다물었다.
이윽고 열두시가 되어 보초를 교대근무자에게 인계하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막사로 올라가 엠원 소총과 군장을 끌러 원위치 시킨 다음 우리 둘은 일직 사관실 문을 두드렸다. 일직사관은 우리를 내려다보더니 우리에겐 일언반구도 하지 않은 채 느닷없이 확성기를 통해 중대 비상을 건다.
“149중대원 중 근무자를 제외한 전원은 팬티바람으로 오른발에 워카, 왼 발에 운동화를 신고 연병장에 선착순 집합하라!”
나는 자책감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사이에 혹독한 훈련을 받고 단잠을 자던 동료들이 아무 영문도 모른 채 허둥지둥 팬티바람으로 뛰어 나오면서 이구동성으로
“정말 너무 한다”며 불평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하였다.
일직사관은 팬티만 입고 한 쪽 발엔 운동화, 한 쪽 발엔 군화를 신은 채-일직사관은 분명 오른발에 워카, 왼발에 운동화를 신으라고 했지만 중대원들이 꿈결에 들어서인지, 선착순 집합에 경황없이 서두르다가 헷갈렸는지는 모르지만-전 중대원들을연병장에 사열 횡대로 세워놓고 ‘주먹 펴고 두 팔 벌려’ 를 시켰다.
그 다음 막사 안에서 양동이에 얼음물을 받아다가 첫 줄부터 온 몸에 바가지로 조금씩 뿌리니 연병장은 아닌 밤중에 귀곡성같은 흐느낌과 안개로 가득 덮혀 뿌옇게 변하는 것이 아닌가.
나의 잘못으로 인해 다른 동료들까지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죄책감이 몰려와 차라리 내가 모든 벌을 혼자 받는 게 맘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론 팔을 벌리고 손을 펴게 하는 바람에 애시 당초부터 추위를 참기위해 몸에 힘을 주는 요령조차 필 수 없게 만든 일직사관의 야비함에 치를 떨었다.
이윽고 한 시간여에 걸친 기합이 끝나서 막사로 들어간 중대원들은 모두 파김치가 되고, 몇몇은 통곡까지 하면서도 실상 자기들이 기합을 받은 진짜 이유도 모른 채, 여느 때처럼 그저 일직사관이 사소한 꼬투리를 잡아 중대원 군기를 잡는 것이거니 여기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로 인해 기합을 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동료들에게 숨긴 채, 사과는 커녕 시침 뚝 떼고 있으면서도 양심은 가책을 받아 나는 온 몸이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웠고 밤새도록 악몽에 시달리며 새벽까지 자다 깨다를 반복했었다.-
쓰러진 지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웅성거림 속에서 어렴풋이 들리던 엠브란스 싸이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그러나 나는 모든 것이 귀찮기도 하거니와 실상 일어 설 힘조차 낼 수 없어 그냥 눈을 감은 채 그대로 누워 있었다.
흰 까운을 입은 위생병이 나에게 뛰어와 눈꺼풀을 뒤집어 보더니 들 것에 실어 엠블란스 뒷좌석으로 들어올린다.
어딘가로 한참 달려가던 차가 마침내 병원에 도착하였는지 문을 연 후에 바퀴 달린 침대에 나를 들것 채로 올려놓고 급히 끌고 간다.
군의관이 다가와 나에게 몇 마디 묻고 눈을 뒤집어 보더니 위생병에게 뭐라고 지시 한다. 영어로 된 의학용어라 모두 알아들을 수는 없었으나 ‘출혈성 위궤양’으로 링거를 놓고 금식시키라고 지시하는 것 같다.
나는 어지럽기도 하거니와 온 몸의 힘도 빠져 그대로 누운 채 링거 한 병을 다 맞으니 제법 눈도 뜨이고 기운도 약간 나는 것 같다. 가만히 눈을 들어 옆을 보니 누군가가 나의 침대 곁에 서서 사뭇 걱정스럽다는 눈길로 나를 내려다 보고 있다. 바로 지난 달 다리가 부어 족관절 봉와직염이라는 병명으로 원주병원에 먼저 후송 온 같은 중대원 G군이다. 반가운 마음에 손을 덥석 잡고 서로에게 위로를 나누었다.
“어 벌써 점심식사 시간이네, 너 뭐 먹고 싶니? 마침 어제 어머님이 왔다 가시면서 용돈 좀 주고 가시더라, 이왕 입원한 거 민간인 식당에서 먹고 싶은 것 먹고 푹 쉬었다 가려무나. 뭐 먹을래?” G군의 호의가 눈물이 나도록 고마웠다.
나도 집에 연락해서 늦어도 다음 주쯤 면회 오시면 그때 신세를 갚으면 될 거 아닌가 하는 마음에 한번 쯤 사양하지도 않은 채 나는 즉시 “짜장면” 이라고 답하면서 몸은 이미 침대에서 내려와 앞장을 선다.
민간인 식당에 들어서자 군대 짬밥 냄새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구수한 냄새가 확 코를 찌른다. 환자복을 입은 채로 빈자리에 앉자마자 주문을 한다.
“아줌마, 여기 짜장면 둘이요, 곱빼기로”
점심시간이라 미리 면을 뽑아 놓았는지 말이 떨어지자마자 아줌마는 “네에” 하는 대답과 동시에 식탁에 짜장면 두 그릇을 탁 올려놓는다.
오! 구수한 짜장면 냄새, 젓가락을 들어 비비려다 말고 문득 머리에 떠오르는 게 있다. 잠시 후 짜장면을 먹지는 않고 젓가락을 든 채 키득 키득 웃는 나를 G군이
사뭇 이상하다는 듯 쳐다본다.
“왜 그래? 먹다 말고”
“응, 오늘 아침에 내가 짜장면을 누는 바람에 이곳에 실려 왔거든, 근데 이곳에 오자마자 내가 짜장면을 먹네..크 크 크 정말 웃기지 않니?”
< 우리 친구에게서 빌려온 글입니다 >
산당화( 명자꽃)
앵두꽃
자두꽃
첫댓글 군에서 생활이 너무 고생스럽던 지나간 사연을 글로 남겼는것 같은데 아주 고맙게 읽어읍니다..
힘들었던 군생활이 눈에 선하네요..잘 읽었습니다.
군에서 자장면이 그렇게 먹고 싶어 진다는데..
정말 추억의 자장면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