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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역사문화연구모임(역사문)
 
 
 
카페 게시글
조선과 근대 토론방 조선시대 건축물이 대부분 단층인 이유는 무엇인가요?
현무 추천 0 조회 2,197 07.10.27 14:01 댓글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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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7.10.27 15:10

    첫댓글 음....님의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는 높은 건물들도 많았고 2층 3층까지 가옥이 엄연히 존재했었고 ]란 글은 어떤 근거를 가지고 쓰셨는지 궁금합니다.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 07.10.28 01:00

    조선은 유교국가입니다. 게다가 황제국 체제를 갖추지 못 했기 때문에 궁궐의 건물들 규모가 축소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그에 걸맞게 궁궐의 건물들보다 큰 건물을 허용하지 않았고, 일반 백성들의 민가.. 그리고 상인들의 상점가등의 건물들에게 기와 역시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이유에서 복층 건물들이 다 사라진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물론 다른 이유로는 온돌의 발달등을 꼽기도 합니다만 전 조선이 유교국가였기에 그랬다고 생각합니다.

  • 07.10.28 19:30

    아직 대답이 없으시군요. 현무님께 다시 질문 드립니다. 님이 쓰신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는 높은 건물들도 많았고 2층 3층까지 가옥이 엄연히 존재했었고 ]란 글은 무엇을 근거로 쓰신 것인지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그 시대 일반가옥 건축물이 남아 있는것도 없는 상태에서 그런 말을 하셨으면 무슨 기록이나 회화등을 보고 그것을 근거로 말씀하신거 같은데 그게 무엇인지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혹 아시는 분 있으시면 현무님 아니라도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위의 PSYlove님도 복층건물이 많았다는 듯이 얘기하시는걸 보니 알고 있으신거 같은데 이거 저만 모르고 있는거 같군요. ^^

  • 작성자 07.10.28 21:46

    제가 잘못된 정보를 마치 사실인듯 적어 놓는 오류를 범해버렸습니다. 그래서 소요자님의 글을 보고 도서관에 가서 고려시대 그림이나 고려에 대한 책을 찾아서 봤는데 고려시대 불화인 미륵하생경변상도와 다른 불화(인도를 배경으로 그린 불화)에 보면 2층 건물이 나오는데 제가 이것을 보고 고려의 개경도 2층이 주를 이루겠구나라고 판단해 버리는 오류를 법해 버렸네요 ^^ 그리고 고려도경을 자세히 읽어보니 궁궐 정도만 2층 건물이었고 나머지 민가들은 단층구조였고 누각이라는 것이 있는데 수십 채 중에 한 두개 정도 누각이 있었으며 귀족들은 집을 꾸미기 좋아해서 사치스럽게 꾸며놨다 라고만 적혀 있더군요^^ 잘못된 정보를 마치 사

  • 작성자 07.10.28 22:08

    실인양 알고 있었네요. 그리고 역사스페셜에서 이야기한 한 집 건너 한집은 2층 집이었다 라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닌 것 같습니다. 고려도경에는 그런 이야기가 안나오던데요(못 찾는 것일 수도 있음) 단지 고려도경 3권 편에 성읍과 누각 민가를 설명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처음에 누각은 왕성에만 있었다고 하는데 차츰 귀족들도 두게 되고 멋데로 사치스러워졌다. 선의문에서 들어가다보면 수십 채에 하나 꼴로 누각이 세워져 있었다 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게 집을 짓고 위에 누각을 세워서 높게 보이려 한 것인지 아니면 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 07.10.28 21:24

    흠.. 조선시대의 처음에 세운 경복궁은 타버리고, 조선말기에 새로 짓지 않았나요? 조선의 대부분의 궁궐이 다 그러하지요. 아마 예산부족으로 단층으로 지은게 아닐까요? 또는 당시 명,청의 궁궐보다 높게 지을 수 없다는 사상때문에 그런건 아닐까요?

  • 07.10.30 00:20

    고구려의 안악 1호분에서 귀족의 중층건물이 보입니다. 예전에는 마치 궁궐건물처럼 알려졌지만 궁궐이라는 근거는 전혀 없습니다. 지배층의 무덤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들이 살던 집일 것입니다. 고려의 12세기 임춘이 다점에 관해서 쓴 글에서 虛樓罷夢正高舂부분이 보입니다. 다점이 중층건물 구조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580년의 과거은영연도를 보면 의정부 중심건물이 그려져 있습니다. 조선 후기의 이 건물은 단층이지만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중층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07.10.30 00:22

    불교가 고대 한국에 온 뒤에 거대한 목탑이 건설되었습니다. 다른 건물은 단층이면서 이것만 중층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이상한 것이죠. 그리고 기록에서 한국의 건물이 중층건물인지 아닌지는 확실하게 나와있지 않지만 고려의 다점처럼 중층건물일 확률이 높겠죠. 고려시대의 누각구조는 화려함의 상징물인데 누각과 목탑만 중층이고 나머지는 단층이라고 추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 07.10.30 00:26

    조선 후기의 두번째 도시 평양은 삼국시대 평양에서 궁궐영역이었던 내성에 대부분 도시가 형성되었을 정도로 도시 규모가 작았습니다. 반면 고려시대에는 개경과 함께 팔관회를 개최했던 유이한 도시가 평양이었습니다. 선화봉사고려도경에서도 개경과 비견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조선 후기의 단층건물이었던 시대와 비교해서 고려시대의 도시 규모는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구는 가장 많았던 18세기에 1800만이 넘었던 것과 비교해서 훨씬 적었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상당히 뛰어난 문화와 건축 기술을 가졌다고 추정하는 것은 이상한 것도 아니고 흥왕사와 같이 절 한개의 규모가 2800칸, 둘레 4km에 달하기도 합니다.

  • 07.10.30 00:29

    조선 초기만 해도 평양은 외성에도 도시가 형성되어 있었고 개성은 조선 후기보다 훨씬 번성했던 시절입니다. 실제로 고려시대의 문화가 많이 남아있어서 여러 절과 탑은 물론이고 술집이 많았던 도시였습니다. 이러한 문화를 가졌던 조선 초기까지의 한국이 단층건물인지 중층건물인지를 평가할 때에 기록되지 않았다고 단층건물이라고만 생각하는 것은 이상한 추정이 아닐까요? 예전에 발행되었던 발해의 건축(?)이라는 책에서도 궁궐의 제 1궁전과 궁의 정문을 단층으로 복원시켰더군요. 중층이라는 확정이 없으니까 궁궐까지도 단층으로 복원시키는 이러한 선입견이 한국의 역사를 망치는 주범이 아닐까싶습니다.

  • 07.10.30 00:40

    도시가 커지고 사람이 밀집하면 건물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더군다나 한국의 역대 도시들의 규모가 다른 나라보다 작은 것도 아니고 대규모의 도시를 형성했다면 중층건물이 생기는 것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죠. 조선시대 말기의 모습만이 한국의 모습도 아니며 조선의 모습도 아닙니다. 다른 건물들은 단층이면서 수십만명이 넘는 대도시를 건설했다고 추정한다거나 절의 목탑만이 9층에 달했다고 추정한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을까요? 단층을 짓지 않아도 된다면 도시의 면적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높은 건물을 만드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 07.10.30 00:45

    [개성은]봄바람에 술집 깃발이 나부끼고, 달밤에 음악소리 들린다. 그 민물(民物)은 풍성하여 실로 다른 고을에 비길 것이 아니고, 풍기(風氣)는 밀집하니 또한 서경(평양)에 견줄 바가 아니다. -조선부(朝鮮賦, 1488년)-

  • 07.10.30 00:45

    성중의 사찰이 민가보다 더 많았으며, 그 중에도 크고 웅장하며 높고 특출한 전각은 지금까지 오히려 그대로 남아 있으니 그 당시의 존숭함이 지극하였던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연복사탑 중창기(演福寺塔重創記, 1393년)-

  • 07.10.30 00:48

    개성에 관한 조선 초기의 기록입니다. 조선 초기에 개성을 여행하는 것은 양반들의 유흥이었습니다. 당시 개성에 관한 기록만 보더라도 조선 말기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상한 선입견을 가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도시가 커지고 사람이 많아지면 면적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려는 것은 당연한 현상입니다. 한국의 문화가 그리 조악한 것도 아니고, 한국의 도시가 그리 작았던 것도 아니고, 국가에서 단층건물로 규제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그러한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따랐을 것입니다.

  • 07.10.30 00:52

    당시 술집이 중층건물이라는 기록이 없고 다점만 누각 구조인 기록이 있기 때문에 '고려시대 모든 다점은 중층, 모든 술집은 단층' 과 같은 말꼬리잡기 역사인식은 사리졌으면 합니다. 백제인은 신라에 80m의 황룡사 목탑을, 왜국에 90m의 백제대사 목탑을 건설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그 나라의 인프라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백제는 그러한 인프라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인프라로 백제인들은 백제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말이죠.

  • 07.10.30 01:16

    안악1호분에 그려진 전각은 아무리봐도 단층으로 보이는데 님은 중층으로 보이는 모양이군요. 다시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고려의 누각이 복층구조라 하시는데 조선시대에도 복층의 누각들은 많이 지어졌습니다. 그리고 사찰건물은 질문에 해당되는 사항이 아닙니다. 그러니 굳이 쓰실 필요는 없었습니다. 조선시대에도 팔상전은 지어졌으니까요. 길게 쓰시긴 했는데 질문의 요지인 복층구조물로 지어진 일반가옥에 대한 답변으론 별로 해당사항이 안보이는군요.

  • 07.10.30 01:22

    http://blog.naver.com/tiger6107?Redirect=Log&logNo=140013058695 http://blog.empas.com/docex2/15491540 단층구조는 아닙니다.

  • 07.10.30 01:31

    님이 올린 그림은 보기가 좀 불편하군요. 여기 자유게시판의 11471번 글을 보기 바랍니다. 거기에 내가 올린 그림이 있으니까요. 담장의 높이와 지붕의 높이를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 07.10.30 01:24

    물론 조선시대에도 누각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흔히 가지고 있는 그러한 이미지들의 조선 누각과 고려시대의 누각은 전혀 다르죠. 조선시대의 누각들도 상당수는 사찰건물에서 남았던 것들이 아닌지요. 그리고 규모가 있는 누각들은 사찰이 없어지면서 도시의 랜드마크 역할도 했었구요.

  • 07.10.30 01:27

    조선시대 누각들이 왜 사찰에만 있나요? 경치좋은 곳에는 많이 지었죠. 하다못해 경복궁내에도 경회루가 있고 죽서루도 유명하고...조선시대의 누각들 많습니다.

  • 07.10.30 01:27

    “내가 풍질(風疾)을 얻은 까닭을 경은 반드시 알지 못할 것이다. 저번에 경복궁에 있을 적에 그때가 바로 한창 더운 여름철이었는데, 한낮이 되어 잠시 2층에 올라가서 창문 앞에 누워 잠깐 잠이 들었더니, 갑자기 두 어깨 사이가 찌르는 듯이 아팠는데 이튿날에는 다시 회복되었더니, 4, 5일을 지나서 또 찌르는 듯이 아프고 밤을 지나매 약간 부었는데, 이 뒤로부터는 때 없이 발작하여 혹 2, 3일을 지나고, 혹 6, 7일을 거르기도 하여 지금까지 끊이지 아니하여 드디어 묵은병[宿疾]이 되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13년(1431년)-

  • 07.10.30 01:27

    궁궐이지만 참고로 올려봅니다. 잠을 잤다고 했으니까 통층구조는 아니었던 같습니다.

  • 07.10.30 01:33

    그런데 왜 자꾸 질문의 요지완 상관없는 조선시대를 계속 언급하시는 건가요?

  • 07.10.30 01:28

    제가 고려시대에 말하는 누각은 도시의 경관을 구성하는 누각을 말합니다. 고려시대에는 사치나 번성을 표현할 때에 누각이 자주 사용되죠. 이것을 말합니다.

  • 07.10.30 01:38

    조선시대에도 도시의 경관을 구성하는 누각은 있습니다. 남원의 광한루는 어떤가요? 그리고 밀양의 영남루도 유명하죠. 고려시대의 누각은 사치나 번성을 표현할 때 누각이 자주 사용된다는 것은 무엇을 근거로 하는지 좀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 07.10.30 01:31

    상대적으로 문화수준이 떨어지는 베트남도 수도의 중심에는 중층건물들이 여럿 있습니다. 19세기 초반에 건설한 수도 '훼(hue)'는 면적이 4㎢ 남짓에 불과한 곳이고 베트남은 그리 발달한 곳도 아닙니다.

  • 07.10.30 01:39

    전 베트남을 말하는게 아니라 우리의 삼국과 고려에 대해 말을 하는겁니다.

  • 07.10.30 01:35

    조선시대도 500년이 지속된 나라입니다. 전시대를 동일한 문화로 있었지는 않았습니다. 조선시대 초기도 후기와는 조금 다릅니다. 그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조선시대 초기에도 건축에 관한 것이나 도시의 경관들이 흔히 떠올리는 조선의 이미지인 조선시대 말기와는 다르다는 뜻이죠.

  • 07.10.30 01:43

    음...질문의 요지를 이해못하시는군요. 다시 한번 말씀드리면...[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는 높은 건물들도 많았고 2층 3층까지 가옥이 엄연히 존재했었고 ]란 문장에 대한 근거를 묻는게 질문이었습니다, 조선시대의 건물을 묻고 있는게 아닙니다.

  • 07.10.30 01:38

    명나라의 사신으로 왔던 동월이 쓴 조선부에서도(1488년의 조선을 기록) 옛 백제지역의 집은 사다리를 타고 가야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조선 후기의 평양을 그린 월야선유도에서 평양 바깥에 고상식 주거지가 보이지만 예외적인 것임을 감안한다면 초기 조선의 모습은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논의의 내용이었던 건축에 관해서도 관계가 있는 것들이구요.

  • 07.10.30 01:45

    바로 위에서도 말했듯이 다시 한번 질문의 요지를 파악해 주시기 바랍니다.

  • 07.10.30 01:45

    공경들의 저택이 10리에 뻗쳤는데, 엄청난 큰 누각은 봉황이 춤추는 듯 이무기가 기어 오르듯, 서늘한 마루와 따스한 방이 즐비하게 갖춰 있고 금벽이 휘황하며 단청이 늘어섰네, 비단으로 기둥 싸고 채전으로 땅을 깔고, 온갖 진기한 나무와 이름난 화초들, 봄의 꽃과 여름 열매, 푸른 숲에 붉은 송이, 그윽한 향내 서늘한 그늘이 한껏 곱고 아름다움을 뽐내네 -삼도부-

  • 07.10.30 01:47

    고려시대 권력가였던 최우도 위세를 표현할 때에 1000명이 앉을 수 있고, 100대의 수레가 놓일 수 있던 누각의 존재를 기록했습니다.

  • 07.10.30 01:49

    더 이상 말을 하면 서로가 피곤하겠군요. 결국 님은 질문에 대한 답을 하실 수 없다는 뜻으로 알겠습니다.

  • 07.10.30 01:54

    자연스럽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개경의 면적은 24.7㎢입니다. 로마의 면적은 13.86㎢입니다. 더군다나 개경은 나성 바깥으로도 도시가 확장되었다고 추정하지만 로마는 그렇지 않습니다. 도시의 규모가 커지만 그것을 더욱 효율적으로 사용하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아무런 기반도 없이 황룡사 목탑을 짓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아직 삼국통일 이전이었던 663년에 신라가 건설한 창고 건물이었던 장창이 초석 기준으로 108m*23m입니다.

  • 07.10.30 01:57

    거대한 목탑이 있는 수많은 절들을 지은 것이 삼국시대부터입니다. 그 당시에 이미 여러 대규모 도시들이 건설되었습니다. 사람이 밀집되고 인구밀도가 높아진다면 건물의 높이는 당연히 높아질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선입견이라고 여겨집니다.

  • 07.10.30 02:18

    선입견이란 단어의 뜻을 잘못 알고 있으시군요. 선입견이란 어떤 대상에 대해 근거도 없이 미리 어떤 결론을 내세우는걸 말하는 겁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사람이 밀집되면 건물이 당연히 높아졌을거고 그러니 삼국과 고려시대에 복층건물이 많았을거란 결론을 내리는 님이야말로 바로 선입견에 빠져있는 것이죠. 전혀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 07.11.01 20:09

    음.... 오랜만에 글을 쓰네요. 잠시 끼어들겠습니다. dsagd 님의 이야기 중 '사람이 밀집되고 인구밀도가 높아지면 건물의 높이는 당연히 높아진다' 라는 말에 대해 반론이 있습니다. 조선 후기 서울은 10~30만 정도가 밀집해 살던 대도시로 발전했던 것으로 보이는데(물론 그 이상일 수도 있습니다), 인구가 밀집하자 서울은 건물 높이를 높이는 수직 방향으로 발전하기보다는 4대문과 도성의 경계를 넘어서 인근 지역으로 도시가 확장되는 수평 방향으로 발전해 버렸습니다. 최소한 전통사회에서는 높은 인구밀도와 인구집중이 반드시 건물 높이를 높이는 결과로 이어진다고 볼 순 없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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