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보헤미아의 아녜스( 1211-1282)는 보헤미아(지금의 체코 공화국 서부)를 통치하던 오토카르 왕과 헝가리 왕국의 공주인 콘스탄스 왕비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프라하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역사학자들은 그녀를 프라하의 아녜스라고도 부른다.
아녜스는 당시 공주들이 받아야 할 소양 교육과 공주가 수행하여야 할 역할에 대한 교육을 트레브니즈에 있는 시토회 수녀들에게서 받았다. 아녜스는 공주로서 필요한 교육을 받기 위해 그 수도원에 갔지만 오히려 그곳에서 수도성소의 은총을 받았다.
그러나 왕국으로 돌아와 공주로서 생활을 하다 보니 수도성소를 키워가기에는 너무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당시의 관습대로 아녜스 공주도 3살 때 이미 슐레지엔 공작의 아들 볼레슬라우스와 약혼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볼레스라우스가 어린 나이에 죽자 그녀는 다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레데릭 2세의 아들 헨리 왕자와 약혼하였다. 그러나 헨리 왕자가 정치적인 이유로 오스트리아 공작의 딸과 결혼하자 헨리 왕자의 아버지인 프레데릭 2세는 이전부터 아녜스를 눈여겨 보면서 배우자감으로 아주 훌륭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자신이 아녜스에게 청혼하였다. 그리하여 아녜스는 세 번째로 약혼하게 되었다.
부모 밑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았고 자녀로서 부모에게 효도하여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수도성소를 느끼고 있던 아녜스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에게 시집가는 것을 거부하였다. 아녜스가 완강하게 이 결혼을 거부하자 궁정의 관리들도 황제와 결혼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설득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아녜스는 혼자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게 되자 이 문제를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게 탄원하였다. 교황께 황제와 약혼한 관계를 무효로 해주기를 청한 것이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와 유럽의 왕족들은 벌써부터 아녜스가 수도성소에 대한 강한 열망을 품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사태가 이쯤에 이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프레데릭 2세는 이렇게 한탄하였다고 한다. “아녜스 공주가 만일 다른 남자와 결혼하기 위하여 나의 청혼을 거절하였다면 내 칼로 이를 응징했겠지만 공주가 천상의 임금님을 정배로 맞이하기 위하여 나와 파혼을 하겠다고 하니 내가 이를 어떻게 막을 수 있겠소.”
외가 쪽으로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과 친척인 아녜스는 엘리사벳 성녀가 왕비였을 때 작은 형제회 제3회 회원으로 살다가 나중에는 수녀가 되어 마르부르크에서 살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당시 유럽의 궁정에서는 엘리사벳 왕비가 수녀가 되어 자신의 생애를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한 것에 매우 감동을 받고 있었다. 그러면서 어떻게 하여 한 나라의 왕비가 전격적으로 수도원에 들어가 수녀로서 온 생애를 겸손과 청빈의 삶에 온전히 투신할 수 있었는지에 대하여 매우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녜스 공주는 엘리사벳 성녀가 하느님의 은총에 응답한 것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자신도 그 성녀와 같은 열정으로 하느님의 은총에 전적인 응답을 하겠다고 결심하였다.
1225년 작은 형제회 수사들이 프라하에 도착하여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정신을 소개하였다. 아녜스 공주는 수도회의 정신에 매료되어 자신도 일생을 이 영성에 따라 살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오빠인 벤체슬라우스 1세에게 청하여 상당한 토지를 하사받고 그 땅에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위한 병원을 지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기증하여 수사들이 이를 운영하게 하였다. 아녜스 공주는 또한 이 병원에서 일할 사람들을 위해 붉은 별 십자군 형제회를 창설하였다.
1234년 아녜스는 성녀 글라라의 가난한 자매 수도회의 성 구세주 수도원을 프라하에 세웠다. 그러나 이 수도원이 글라라회의 정신과 규칙을 제대로 살고 있는지가 궁금하였다. 그래서 이를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아시시에 있는 성 글라라(1194-1253) 수녀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자신이 세운 수도 공동체를 도와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응답하여 글라라는 아시시에서 5명의 수녀를 프라하에 파견하여 이 봉쇄 수녀원이 글라라회의 정신에 따라 훌륭하게 운영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아녜스와 글라라는 서로 만나지는 못하였지만 20년 이상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수도자롯 교분을 돈독히 쌓아갔다. 1234년 성령 강림 대축일에 아녜스는 성 구세주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그리고 그 수도원에서 거의 50년을 은둔 수도자로 생활하였다. 아녜스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수도자의 모범이라는 칭송을 받았고 수도자로서 연륜이 쌓이자 수도원 원장이 되었는데 그녀의 탁월한 덕행은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아녜스는 병을 치유하는 은사와 예언하는 은사를 받았다. 그래서 그녀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하여도 말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오빠인 벤체슬라우스 1세가 오스트리아 공작과 전쟁을 하게 된다는 것과 그 전쟁에서 오빠가 승리할 것이라는 예언도 있었다. 아녜스는 프라하의 성 구세주 수도원에서 46년 동안 글라라회 수녀로 살다가 1282년 선종하였다.
1989년 11월 12일 로마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보헤미아의 아녜스를 성인으로 선포하였다. 교황은 시성식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성녀 보헤미아의 아녜스는 시대적으로 매우 오래전에 살았던 분이지만 이분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보인 탁월한 믿음과 영웅적이라고 할 수 있는 뛰어난 자비심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빛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을 사는 우리를 성녀 자신의 삶으로 초대하고 있으며 우리의 삶을 다시 돌아보게 합니다.”
글...교회와 역사, 송영웅 바오로
성가연주곡1.mp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