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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손민호
관심
국내여행 일타강사⑫ 김광석 그리고 대구 골목
한 살을 더 먹었다. 나이를 먹는 게 더 이상 즐겁지 않게 된 건 김광석을 듣고 나서부터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곳으로 가는 걸음을 선뜻 내딛지 못하고서부터고, 머물러 있는 줄 알았던 청춘이 어느새 내 것이 아닌 걸 알고 나서부터다. 나이를 먹는 건 이제,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니고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 것들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 가는 일이다.
1월이 시작하면 희망찬 새해를 노래해야 하는데, 나 같은 ‘아재’는 계절병이 도져 맥없이 가라앉는다. 1월은 김광석(1964~1996)을 추모하는 달이어서다. 그는 1월에 태어났고(22일) 1월에 죽었다(6일). 오는 6일이면 28주기다. 내후년이 벌써 30주기라니. 달력을 봐도 믿기지 않는다.
김광석이 살아 있으면 올해 환갑이다. 김광석은 서른두 해를 살았다. 마흔 살이 되면 오토바이 타고 세계 일주를 하겠다고 했었는데,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당신이 살았던 날과 당신이 떠나버린 날이 비슷해지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저린다. 이젠 당신의 웃는 얼굴도, 당신의 슬픈 목소리도 멀어져 간다는 뜻이어서다. 생전의 김광석이 허구한 날 콘서트를 열었던 대학로 학전 소극장도 곧 문이 닫힌다는 소식이다. 올 1월은 그의 노래가 더욱 귓가에 아른거린다.
김광석을 듣노라면 대구의 재래시장 옆 후미진 골목이 눈에 밟힌다. 그 골목에 가면 김광석이 예의 그 환한 얼굴로 웃고 있고, 김광석의 노래가 바람을 타고 흘러다닌다. 김광석을 추모하는 하나뿐인 공간이 낡은 시장 끄트머리 막다른 골목에 있어서 다행이다. 화려하거나 요란한 장소였으면 그렇게 뻔질나게 골목을 드나들지 못했을 터이다.
그러고 보니 대구의 시장 골목에는 참 많은 것이 담겨 있다. 김광석이 있고, 칼국수가 있고, 옛날 다방이 있고, 떡볶이 할매가 있다. 대구는 골목이다. 그물처럼 촘촘한 골목들의 총합이다. 그 골목을 따라 왁자지껄 시장이 들어섰다. 김광석 골목을 거닌 김에 대구의 다른 시장 골목도 내처 걸었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
대구 방천시장 옆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 입구. 여기에서 제방 아랫길을 따라 김광석 길이 이어진다. 입구에 ‘사랑했지만’이라는 제목의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장진영 기자
김광석 골목의 정식 이름은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이다. 여기서 ‘그리다’는 ‘그리워하다(Miss)’와 ‘(그림을) 그리다(Draw)’ 두 뜻을 동시에 아우른다. 정확한 위치는 대구시 중구 대봉동 방천시장 왼쪽 이른바 ‘신천 뚝방길’ 아래 골목길. 제방에 막혀 한 방향으로만 이어진 골목의 길이는 350m에 이른다. 폭이 2m나 될까 싶은 좁은 골목길에 김광석을 주제로 한 그림과 조형물 70여 점이 설치돼 있고, 온종일 김광석 노래가 흐른다.
방천시장은 광복 직후에 생성된 시장이다. 대구를 남북으로 가르는 신천의 제방 아래 있어 방천(防川)시장이 됐다. 방천시장은 예로부터 싸전이 유명했다고 한다. 한때는 점포가 1000개가 넘었을 정도로 흥했지만, 여느 원도심의 전통시장처럼 쇠락하고 말았다. 2000년대 중반엔 점포 수가 70여 개에 불과했다.
2023년 1월 6일 대구 방천시장에서 열린 김광석 27주기 행사 모습. 뉴스1
방천시장에 다시 활기가 돈 건 2009년 문체부의 전통시장 활성화 사업인 ‘문전성시 프로젝트’에 선정되고서부터다. 문전성시 프로젝트는 문화의 힘으로 전통시장에 활력을 불어넣은 사업이다. 그 프로젝트로 가장 성공한 사례가 여기 김광석 길이다. 본격적인 사업은 2010년 젊은 문화예술인 27명이 방천시장에 모이면서 시작됐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한 에피소드가 있다. 맨 처음 김광석 길을 기획했던 ‘㈔인디053’ 이창원(44) 대표에 따르면, 김광석 길은 ‘김우중 길’이거나 ‘양준혁 길’이 될 뻔했다.
방천시장을 되살리려고 모인 문화예술인들은 우선 방천시장이 배출한 인물들을 수배했다. 모두 3명이 최종 후보에 올랐다. 대우그룹을 창업한 김우중(1936~2019) 회장과 프로야구 삼성 라이온즈의 프랜차이즈 스타 양준혁(55) 선수, 그리고 김광석. 이들 3명 중에서 방천시장과 가장 인연이 깊은 인물은 김우중 회장이었다. 한국전쟁 직후 열네 살 소년가장 김우중은 당시 방천시장의 신문 배달망을 독점하다시피 했었다. 다른 신문팔이보다 더 빨리 배달하기 위해 그는 신문값을 후불로 받았다. 그렇게 발 빠른 수완을 발휘해 네 식구를 부양했다고 한다. 양준혁 선수는 마침 2010년 은퇴해 화제의 중심에 있었고, 아버지가 방천시장에서 가방을 팔았었다.
방천시장과의 인연은 김광석이 가장 약했다. 김광석이 신천 건너편 대봉동 어디에서 태어나 다섯 살까지 살았다고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김광석이 방천시장을 추억하는 노래를 부른 것도 아니었다. 시장 상인의 반발도 있었다. 안타깝게도, 당시 시장 사람 중에서 김광석을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나훈아도 아니고 조용필도 아니고, 김광석이라니. 김광석을 고집한 건 젊은 문화예술인뿐이었다. 공방 끝에 방천시장을 상징하는 인물로 김광석이 낙점됐다. 상인들이 ‘시장 맨 왼쪽 제방 담벼락에 누구 얼굴을 그린다고 뭐가 달라지겠느냐’는 생각으로 순순히 물러나 준 덕분이었다.
2012년 제작한 이슬기 작가의 작품 ‘로맨스’. 김광석은 생전에 "마흔이 되면 할리데이비슨 오토바이를 하나 사서 세계 일주를 하고 싶다"고 했었다. 그러자 주변에서 "다리가 닿겠어?"라며 놀렸다고 한다. 그 에피소드가 이 작품에 담겨 있다. 작품에서 김광석은 까치발을 하고 있다. 손민호 기자
젊은 문화예술인들은 각자가 생각하는 김광석 골목을 만들어냈다. 김광석 얼굴을 그린 작가도 있었고, 김광석 노래에서 영감을 받은 그림을 그린 작가도 있었다. 이를테면 이슬기 작가는 오토바이를 탄 김광석을 그렸다. 생전의 김광석이 “마흔 살이 되면 할리데이비드슨 오토바이를 하나 사서 세계 일주를 하고 싶다”고 말하자 주변에서 “다리가 닿겠어?”라고 놀렸던 일화를 소재로 삼았다. 그림에서는 오토바이에 앉은 김광석의 다리가 비록 까치발이지만 땅에 닿는다.
인증사진 배경으로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은 역시 골목 입구에 있는 손영복 작가의 김광석 동상이다. 김광석이 앉아서 기타 치며 노래 부르는 장면을 형상화했다. 동상의 김광석을 자세히 보면 얼굴이 살짝 일그러져 있다. 대표곡 ‘사랑했지만’의 후렴 부분을 부르는 순간을 포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조형물의 제목이 ‘사랑했지만’이다. 김광석 골목의 벽화는 2014년 대대적인 수정 작업을 했다. 벽화 조각이 떨어지기도 했고, 낙서도 많았다. 이후에도 몇몇 작품을 교체하거나 수정하고 있으나, 인기가 좋은 작품은 그대로 남아 있다.
윤광웅 작가의 작품 '청춘 그 빛나는'이다. '김광석 다시 부르기1' 앨범의 표지 그림을 재현했다. 2014년 작품으로 사진도 그맘때 촬영했다. 손민호 기자
2020년 다시 찾아갔더니 '청춘 그 빛나는'이 이렇게 변해 있었다. 김광석 얼굴도 달라졌고 글귀도 '일어나'의 가사로 교체됐다. 지금도 이 그림이 설치돼 있다. 손민호 기자
김광석 길을 걸을 때마다 문화의 힘을 실감한다. 원래 이 제방 아랫길은, 해가 지면 인적이 끊기는 우범지대였다. 그 으슥한 골목길이 2010년대 중반부터 소문이 나 2019년까지 해마다 100만 명이 넘은 인파가 찾아오는 대구 제일 명소로 거듭났다. 김광석을 잘 알지 못하는 젊은 세대도 벽화 빼고는 아무것도 없는 이 골목을 찾아와 인증사진을 찍었다. 특히 코레일의 ‘내일로’ 티켓으로 전국 일주를 하는 청춘들에게 김광석 길은 대구역에 내리면 꼭 방문해야 하는 필수 코스였다. 김광석을 전혀 몰랐던 시장 상인도 지금은 어지간한 김광석 노래는 다 흥얼거린다. 2010년 김광석을 반대했던 신범식 당시 방천시장 상인회장은 김광석 길이 뜬 뒤 대구시의회 의원에 뽑혔다.
최근 들어 가장 인기가 높은 벽화 김부열 작가의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다. 전국의 임영웅 팬클럽이 이 벽화 앞에서 인증사진을 찍으러 찾아온단다. 손민호 기자
요즘 김광석 길에선 뜻밖의 현상이 목격되고 있다. 임영웅 팬클럽이 김광석 길을 찾아와 기념사진을 찍는다. 임영웅 팬클럽이 성지순례 하듯이 줄 서서 사진 찍은 벽화가 있는데, 김부열 작가의 2014년 작품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다. 임영웅이 4년 전 TV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이 노래를 불렀었다. 금유임(55) 김광석 길 상인회장은 “임영웅 팬클럽은 물론이고 김호중·박창근의 팬클럽도 김광석 길을 찾아온다”며 “김광석은 가수들의 가수”라고 말했다. 이 그림 속 부부는 실제 부부다. 방천시장에서 ‘찌짐이집’을 하던 박종구씨 내외가 모델이다.
시장 골목 투어
대구는 넓고도 좁은 도시다. 250만 명이 거주하는 거대 도시라지만, 대구 사람은 비좁은 골목과 복잡한 시장에서 부대끼며 산다. 대구시에 따르면 대구에는 전통시장이 45개나 있다. 대구의 시장이 흥미로운 건, 시장마다 특색 있는 음식이 따로 있어서다. 이 시장통 음식이 대구의 대표 별미 대부분을 이룬다.
대구의 심장이라 불리는 서문시장. 대구 최대 재래시장인 서문시장은 국내 최대 규모의 야시장이 열리는 시장이기도 하다. 장진영 기자
서문시장 서문시장은 시장 그 이상의 시장이다. 대구 최대 재래시장을 넘어, 조선 시대에는 서울 시전, 평양장과 함께 팔도 3대 시장으로 통했다. 모두 6개 지구에 4000개가 넘는 점포가 모여 있다.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이 대구만 내려가면 서문시장을 방문하는 건, 대구를 상징하는 바로 그곳이어서다. 서문시장(西門市場)은 대구 읍성 서쪽의 시장이라는 뜻이다. 서문시장은 전국 최대 의류 도매시장으로 성장했지만, 여행자에게 서문시장은 칼국수의 성지다.
칼국수는 대구의 소울 푸드다. 미군 구호물자가 대구에 넉넉히 풀린 덕분에 밀가루 음식이 많아졌다지만, 대구의 국수 사랑은 훨씬 오래됐다. 전국 최초로 제분·제면 기계를 갖춘 ‘풍국면’이 대구에 설립된 게 1933년이었고, 1938년 서문시장 근처에서 문을 연 ‘삼성상회’의 주력 상품도 국수였다. ‘별표국수’ 팔던 삼성상회가 지금의 글로벌 기업 삼성이다.
대구 서문시장의 칼국수 골목은 대구를 상징하는 장소다. 대구에서 가장 북적였던 이 골목이 2020년 초 코로나 사태가 발생했을 때 텅 비었었다. 지금은 예전의 활력을 완전히 회복했다. 대구에서 칼국수는 단순한 음식을 넘어선다. 아스라한 추억이자 삶의 애환이다. 장진영 기자
서문시장에 그 유명한 칼국수 골목이 있다. 서문시장 4지구와 1지구 사이 노점 수십 개가 줄 맞춰 들어선 자리가 칼국수 골목이다. 가게 크기와 구조가 비슷해 칼국수 맛도 비슷할 것 같지만, 대구 사람에겐 “택도 없는 얘기”다. 국물과 고명이 다 다르단다. 대구 사람은 각자 단골집이 따로 있다. 여행자에겐 범접하기 힘든 경지다. 서문시장 칼국수 골목은 칼제비 골목에 더 가깝다. 칼국수보다 칼제비가 훨씬 잘 나간다.
대구 서문시장 옆 국수 골목에 있는 '합천할매손국수'의 누른국수. 면이 부드러워 씹기도 전에 스르륵 목을 타고 넘어간다. 장진영 기자
진짜 대구 칼국수는 서문시장 옆 국수 골목에 있다. 이 골목에 대구식 칼국수를 하는 노포가 줄지어 있다. 모두 밀가루 반죽을 손수 해 칼국수를 낸다. 이 골목에선 칼국수보다 누른국수가 더 익숙한 이름이다. 밀가루 반죽에 콩가루를 넣어 누른국수가 됐다는 설과 밀대로 반죽을 얇게 눌러 누른국수가 됐다는 설이 함께 내려온다. 손수 반죽을 빚어 면이 부드럽게 넘어간다. 이 골목에선 다들 칼국수를 마신다.
🔍평화시장 닭똥집 골목
평화시장 닭똥집 골목 ‘평화통닭’의 닭똥집 튀김. 장진영 기자
대구의 시장 별미 중에서 제일 독특한 별미라면 단연 닭똥집이다. 대구 동구 신암동 평화시장에 닭똥집 골목이 있다. 시장 골목을 따라 닭똥집 가게 20여 곳이 영업 중이다. 피란민과 영세 상인이 모여 살던 동네, 새벽 인력시장에서 팔려 나가지 못한 노동자들을 달래주던 궁기 어린 안줏거리에서 닭똥집 튀김이 비롯됐다. 막창·오드레기·수구레 같은 소·돼지·닭의 부산물 조리법이 발달한 대구에서도 닭똥집 튀김은 가장 싸고 헐한 음식이었다.
1972년 ‘삼아통닭’에서 닭똥집 튀김이 시작됐고, 이후 평화시장의 명물이 됐다. 처음에는 밀가루 반죽 안 묻히고 똥집을 튀겨 냈는데, 대구 별미로 거듭난 지금은 다양한 종류를 자랑한다. 양념 똥집, 간장 똥집에 반반 똥집도 있다. 요즘 평화시장 닭똥집 골목의 주 고객은 시장 근처 경북대 학생들이다. ‘삼아통닭’이 지금도 원조 닭똥집 간판을 걸고 장사하고 있지만, 주인이 바뀌어 원조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심아통닭을 비롯해 포항통닭·진미통닭·꼬꼬하우스(옛 꼬꼬통닭) 등 대여섯 개 가게가 30년 넘게 평화시장에서 닭똥집을 튀기고 있다.
대구 궁전떡볶이의 대표 차림. 떡볶이와 계란과 만두와 오뎅(어묵 튀김), 그리고 매운 입을 달래주는 복숭아맛 탄산음료. 손민호 기자
시장 떡볶이 대구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음식이 떡볶이다. 떡볶이 중에서도 밀가루 떡볶이, 밀떡이다. 대구 떡볶이는 개성이 뚜렷하다. 아주 맵고 국물이 많다. 이른바 ‘국물 떡볶이’가 대구에서 비롯됐다. 대구 토박이라면 선호하는 떡볶이집이 따로 있다. 집마다 먹는 방법도 다르다. 대구 떡볶이 4대 천황이라 불리는 곳 중에서 세 집이 시장에서 시작했고, 세 집 모두 밀떡을 한다.
대구 떡볶이의 원조로 불리는 윤옥연할매떡볶이의 두 주인공. 왼쪽이 윤옥연 할머니고, 오른쪽이 현재 대표를 맡고 있는 며느리 변인자씨다. 손민호 기자
제일 유명한 곳은 대구 떡볶이의 원조로 통하는 ‘윤옥연할매떡볶이’다. 윤옥연(84) 할머니가 1974년 지금은 사라진 신천시장에서 떡볶이 노점을 처음 열었다. 대구에선 ‘신천할매떡볶이’나 ‘마약떡볶이’로 더 자주 불린다. 이 집을 흉내 낸 ‘할매떡볶이집’이 속속 생겨나자 2005년 지금 이곳으로 옮길 때 간판에 할머니 이름을 박아버렸다. 옛 신천시장에서 가까운 곳에 본점이 있다. 현재 대표는 며느리 변인자(57)씨. 며느리의 떡볶이 경력도 27년을 헤아린다.
윤옥연할매떡볶이는 매워도 너무 맵다. 그런데도 대구 사람은 짐짓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양념장 한 숟가락을 더 떠 와 떡볶이 국물에 푼다. 지난해 이 집 고유의 주문법이 바뀌었다. 떡볶이·어묵·만두를 동시에 주문할 때 대구 사람은 “천천천!”을 외쳤었다. 대구 사람은 어묵과 만두를 떡볶이 국물에 적셔 먹는다. 세 메뉴 모두 1000원씩이어서 ‘천천천’이었는데, 떡볶이가 2000원으로 올랐다. 지금은 대신 “이천천천!”을 외친다.
대구 궁전떡볶이 주방 모습. 궁전떡볶이는 손예진 떡볶이로 더 유명하다. 손민호 기자
옛 신천시장은 대구 떡볶이의 성지였다. 동네가 재개발되면서 시장은 사라졌지만, 떡볶이의 전통은 남아 있다. 윤옥연할매떡볶이가 떠난 뒤에도 시장 터를 지키는 명가가 ‘궁전떡볶이’다. 줄여서 ‘궁떡’이라 한다. 궁떡은 1993년 시작했다. 궁떡도 국물 떡볶이다. 튀긴 만두와 어묵을 떡볶이 국물에 찍어 먹는 방식이 할매떡볶이와 비슷하다. 궁떡만의 특징이라면 카레 가루다. 카레 가루가 아주 많이 들어간다. 그래서 독특하게 맵다.
대구에서 궁떡은 ‘손예진 떡볶이’로 더 유명하다. 배우 손예진이 학창 시절 단골이었단다. 신천시장 자리가 떡볶이로 유명했던 건, 입지 조건 덕분이다. 옛 신천시장 주변에 학교가 몰려 있다. 대구중앙고·청구고·남산고·대구여고·정화여고 등 10개가 넘는 학교가 시장과 지척에 있다. 손예진이 정화여고 출신이다.
대구 신내당시장 '달고 떡볶이'. 달떡은 삼각 만두를 떡볶이 국물에 적셔 먹는다. 손민호 기자
달서구 신내당시장에는 ‘달떡’이 있다. ‘달떡’은 ‘달고 떡볶이’의 준말이고, ‘달고 떡볶이’는 ‘달성고 앞 떡볶이’의 준말이다. 시장에서 큰길 건너에 달성고가 있다. 학교 건물에서 가게까지 약 400m 거리라는데, 급식이 없던 시절 점심시간 종이 울리면 달성고 학생들이 우르르 달려 나와 줄을 섰단다. 지금은 그 시절 허겁지겁 떡볶이를 삼키던 학생들이 자녀를 데리고 와 떡볶이를 먹는다.
신내당시장에 ‘달떡’ 간판을 내건 떡볶이집이 여러 곳 있다. 이 중에서 시장 제일 안쪽의 가게가 원조 달떡이다. 1980년 고 김점분 할머니가 문을 열었고, 1998년 며느리 배미옥(67)씨가 물려받았다. 달떡도 국물 떡볶이다. 달떡의 특징은 손수 피를 빚는 삼각 만두에 있다. 만두소로 당면만 들어간 아무 맛 없는 만두를 튀겨 떡볶이 국물에 적셔 먹는다. 흐물흐물하면서도 쫄깃쫄깃한 식감이 재미있다. 달떡을 주문하면 떡볶이와 만두 3개가 함께 나온다.
🔍진골목의 명물 '미도다방'
미도다방 대표 메뉴 쌍화차. 계란 노른자를 띄운다. 손민호 기자
골목 도시 대구에서도 대표 골목으로 꼽히는 골목이 있다. 이름하여 진골목. 대구 방언으로 긴 골목이라는 뜻이다. 사실 그리 길지는 않다. 조선 시대에는 종로에서 경상감영공원까지 2㎞가 넘는 길이었다는데, 지금은 300m도 안 된다. 대신 진골목에는 남다른 내력이 있다.
진골목은 대구 제일의 부자 동네였다. 20세기 초반 대구 지역 명문가인 달성 서씨 집안이 진골목 주변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서상돈(1850~1913) 선생이 달성 서씨다. 다른 집안의 부자들도 모여들면서 진골목을 중심으로 소위 고급 문화가 형성되었다. 골목을 따라 병원과 은행이 들어섰고, 뒤이어 고급 식당과 요정이 차례로 문을 열었다. 그 독특한 전통이 진골목 명물로 통하는 ‘미도다방’에 남아 있다.
미도다방 정인숙 여사. 한결같이 고운 한복 차림으로 손님을 맞는다. 손민호 기자
미도다방은 옛날 다방이다. 복도가 분재 화분으로 가득하고, 벽에는 서예 작품과 동양화가 걸렸고, 계란 노른자 띄운 쌍화차가 대표 메뉴인 흑백사진 같은 다방이다. 손님 평균 연령대가 70대다. 이 다방을 40년 넘게 이끌어 온 사람이 있다. 미도다방 대표 정인숙(70)씨. 1980년 문을 열었을 때부터 한결같은 한복 차림으로 어르신 손님들을 맞고 있는 다방 주인이다. 어르신들은 그를 “정 여사”라고 부른다. 미도다방 정문 앞에는 다음의 시구가 걸려 있다.
‘종로2가 미도다방에 가면 / 정인숙 여사가 햇살을 쓸어 모은다 // 햇살은 햇살끼리 모여 앉아 / 도란도란 무슨 얘기를 나눈다 //…// 가버린 시간은 돌아오지 않아도 / 추억은 가슴에 훈장을 달아준다’
- 전상렬, ‘미도다방’ 부분
정 여사에게 다방은 평생직장이다. 그는 “7남매 맏이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다방 카운터에서 일하며 동생들 뒷바라지를 했다”고 말했었다. 미도다방을 열고서 모두 세 번 이사했는데, 진골목을 떠난 적은 없다. 공식 휴일은 설날과 추석 당일. 나머지 363일은 내내 문을 열었다. 2020년 2월 코로나 사태로 대구가 마비됐을 때도 미도다방은 문을 열었다. “우리 가게마저 닫으면 어르신들이 갈 데가 없을 것 같았다”고 생각해 용기를 냈다. 돈을 많이 벌었지만, 많이 쓰기도 했다. 미도다방은 아직도 월세 신세다.
대구 진골목의 명물 미도다방. 40년이 넘은 전통 다방이다. 손민호 기자
40년 넘게 어르신들을 모셨으니 사연이 안 쌓일 수 없다. 대구·경북의 고위 공직자 중 미도다방 쌍화차를 안 마셔본 사람이 없다. 전두환·김종필·박준규 같은 거물 정치인도 여러 번 들렀고, 단골 어르신의 부고가 유족보다 미도다방에 먼저 온 일도 있었다. 오래전 자주 방문했던 어르신의 손자가 손님으로 앞에 앉았을 때는 정 여사도 가슴이 먹먹했었다.
미도다방 건너편, 달성 서씨 집안이 하던 한옥 카페에 최근 ‘스타벅스’가 들어왔다. 긴장할 법도 한데, 정 여사는 젊은 손님이 늘어 좋다고 했다. 정 여사에 전화를 걸면 올드 팝송 ‘에버그린’의 멜로디가 나온다.
김영희 디자이너
에디터
관심
중앙일보 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