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를 타고 온천천을 달린다. 힘차게 페달을 밟으며 속력을 낸다. 대지를 박차고 달리는 바퀴, 씽씽 공기를 가르며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상쾌하다.. 긴장감을 늦출 수 없는 스피드는 무료한 일상의 분출구다. 오늘 저녁은 수영강에서 강바람을 맞으리라.
어느 날, 외출하고 집에 오니 번쩍거리는 새 자전거가 나를 반겼다.
"지금까지 아들 키운다고 욕 받는데, 어버이날도 다가 오고해서 큰마음 먹고 샀으니 열심히 운동하소." 생각지도 않은 남편의 선물이었다.
온천천을 걸어서 운동을 하다 보니, 멋진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 부러웠다. 그래서 중고자전거를 한 대 구입해서 타고 다녔는데 성능이 말이 아니었다. 브레이크가 파열되는가 하면 타이어 펑크가 자주 나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마음이야 새것을 사고 싶지만 알뜰한 주부의 간으로는 살수 없는 가격이라 망설였다. 평소 같으면, 물어 보지도 않고 샀다고 잔소리께나 했을 텐데 내심 반가웠다. ‘어찌 내 마음을 알았는지.’
새 자전거는, 까만 몸집에 빨간색으로 포인트를 주어 산뜻하며, 세련되고 날렵하다. 가볍고 연하며, 바퀴는 미끄럼 타듯이 잘 굴러간다. 마치 말 잘 듣는 아들을 하나 얻은 것 같다. 요즘 외출이 잦다. 온천천은 물론이고 해운대 광안리까지 데이트를 즐긴다. 평소 밋밋하던 복장에도 변화가 생겼다. 안전을 위하여 빨간 헬멧도 구입하고 색감 좋은 라이닝복도 샀다. 스포츠용 선글라스까지 착용하니 세월이 비껴가는것 같다.
길거리에서 지인들을 만나면 "아니 언제 자전거는 배웠노 참 여러 가지 하네." 하며 부러워한다. 사실 내 운전 경력은 만만치 않다. 초등학교 삼학년부터 십리길 비포장 길을 자전거로 통학 했다 . 시골길은 하루에 서너 번 버스가 오갈뿐 한적하다. 사고로 이어지는 일이 거의 없다. 넓은 들판 사이로 길게쭉 뻗은 신작로를 거침없이 달렸다. 멀기만 한 십리길을 단숨에 달려가는 등교길은 그래서 신이났다.
아버지가 자전거를 사왔다. 빨갛고 깜찍한게 너무 예뻐다. 아이들이 탈수 있는 꼬마 자전거다. 초등학생들이 탈수 있는 크기라 앙증맞았다. 학교에 가면 아이들이 마치 연예인을 보듯이 우러러 모여 들었다. 친구들의 부러운 시선을 받으며 우쭐해진 나는 더 신나게 페달을 밟았다. 어린시절 자전거는 잊을수 없는 추억의 물건이다. 내 마음 깊은곳에 각인되어 언제나 행복의 징금 다리가 되어준다.
동생과 함께 자전거를 배웠다. 균형을 잡지 못해 넘어지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다리에 온통 피멍이 들고. 내리막을 내려오다 넘어져서 허벅지가 찢어지기도 했다. 그래도 멈출 수가 없었다. 될 듯 말듯하며 애간장을 태웠다. 엄마와 아버지는 번갈아 뒤에서 잡아 주며 격려해 주었다. 어느 순간, 혼자서 중심을 잡고 자유자재로 운전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세상을 혼자 굴러 가는 방법을 배웠다. 되돌아 보면 비교적 순탄하게 살아온 내 삶이지만, 어찌 좋은일만 있었을까. 삶의 구비구비마다 비틀거리기도 하고, 때로는 힘겹게 오르막을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핸들의 중심을 잡고 힘껏 달을 밟으며 인생길을 달려왔다.
부산은 온천천과 수영강에서 바다로 이어지는 자전거 길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시원하게 뚫린 길을 따라 바람을 맞으며 달리는 기분은 상쾌하다. 새로운 풍경이 스쳐 지나간다. 햇살이 비치는 온천천은 보석 처럼 빛나며 은빛 물결을 만든다. 신록의 싱그러운 풀내음이 코끝을 스친다. 젊은 청년들을 보는 재미도 솔솔하다. 헐렁한 티 하나 걸쳤을 뿐인데 그렇게 멋이 있다. 바람을 가르며 질주하는 모습이 물 찬 제비 같다. 나도 동화 되어 속력을 낸다. 가슴이 후련하다. 어찌 그들의 젊음을 부러워만 하랴.
드디어 수영강에 도착했다. 해는 서산을 넘고 있다, 한낮의 열기를 잠재우며 시원한 강바람이 넘실거린다. 주변의 고층아파트가 우후죽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한 여름의 낮 시간은 길다. 오늘은 기어히 센텀시티의 멋진 야경을 보려고 작정하고 기다린다. 사연을 담은 두집 불빛이 보이더니 빛은 급속도로 늘어난다. 고층 아파트에서 뿜어내는 불빛은 고급스럽고 화려하다. 하늘 높이 치솟은 구조물은 장산 보다 높아 거대한 불기둥을 만든다. 좌수영 다리도 아름다운 불빛으로 조화를 이룬다.그 빛은 넘실거리는 수영강에도 투영되어 화려함의 극치를 이룬다. 한참 동안 넋을 잃고 바라 본다.
무심히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달무리진 달이 둥실 떠있다. 달빛은 초라하다. 순박한 시골 아이같은 수줍은 미소를 나에게 보낸다. 도시의 불빛에 넋을 잃고 있는 나에게 오랜 친구를 기억이라도 하느냐고 나무란다.
동심의 세계로 흘러간다. 낙동강이 흐르는 감천강 다리위에서 자전거를 타는 아이들의 웃음 소리가 밤하늘을 가른다. 넘실대는 물결위에도 다리위에도 달빛이 부서진다. 시골에서 유일한 시멘트 길이다. 이곳에서는 미끄러지듯 잘도 굴러 간다. 다리시작에서 끝까지 왔다갔다 하면서 동생과 밤늦도록 타고 다녔다. 그곳은 우리들의 놀이터며 추억의 장소다. 그곳에는 내 어린 시절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아,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도 달빛은 변함없다. 그러나 엄마도 아버지도 동생도 내 곁에 없다. 참으로 많은 세월이 흘러갔다. 나는 늙어가고 그들은 어디에간 것일까. 어쩌면, 인생은 추억 뿐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