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길도 윤선도 원림 곡수당(曲水堂), 낙서재(樂書齋)
보길도(甫吉島)는 전라남도 완도군 보길면에 속한 섬이다.
완도군 남서쪽에 위치하며 2개의 유인도와 14개의 무인도와 함께 보길면을 이루고 있다.
보길도는 완도에서 남쪽으로 32km 거리에 있는 섬으로 동서가 12km, 남북이 8km, 노화도, 소안도, 넙도로 둘러싸여 있다.
섬의 면적은 32.98㎢, 해안선의 길이는 41km이다.
전설에 따르면 영암에서 온 사람이 이 섬에 선친의 묘자리를 잡기 위해 풍수지리에 능한 지관을 불렀는데
지관이 이 섬을 두루 살핀 뒤에 남긴 글인 '十用十一口'에서 甫吉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보길도의 북쪽해안은 비교적 수심이 얕고 니질로 구성된 간석지가 형성되어 있다.
예송리에서 선창리까지의 남서편 해안은 해안을 벗어나면 곧 20m이상의 수심을 보인다.
이 해안은 산지나 구릉이 연속되고 그 말단 부분이 해수의 침식에 의해 깎여 낭떠러지 해식대와
이에 연속되는 파식대로 해수에 의한 퇴적작용은 볼 수 없고 주로 해식이 강한 암석해안으로 형성되어 있다.
보길도에는 여러 종류의 해빈(海濱)이 있다.
모래만으로 이루어진 사빈(砂濱, sand beach)은 해수욕장으로 이용되는데, 중리, 통리 해수욕장 등이 있다.
역(礫)으로 구성된 비치를 역빈(礫濱, shingle beach)라 하며 역시 해수욕장으로 이용된다.
자갈(몽돌) 해안이라고도 하는데 예송리 해수욕장이 이에 해당한다.
보옥리는 ‘공룡알 해변’으로 불리는데 공룡알처럼 생긴 돌들로 이루어진 역빈 해안이다.
예송리와 보옥리는 외해에 접해 있어 역빈 해안 발달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2025.11.23(일) 노화도 갈꽃섬모텔에서 1박후 오전 6시 기상, 노화도 기사식당에서 아침 식사후
보길대교를 건너 윤선도 원림 곡수당과 낙서재 탐방을 위해 부용마을(芙容洞) 낙서재 주차장으로 이동하여
보길도 수리봉이 바라보이는 낙서재 주차장에 도착하여 약 30여분간(07:50~08:20)
윤선도 원림 곡수당(曲水堂), 낙서재(樂書齋) 탐방시간을 갖는다.
부용마을 주변엔 적자봉(赤紫峰:425m)· 광대봉(廣大峰:311m)· 망월봉(望月峰:350m)의 세개의 산이 있다.
대부분의 지역이 해발고도 300m 이하의 산지를 이루고 있는데 섬이면서도 바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전형적인 산간분지라고 한다.
그래서 이 지역을 부용동(芙容洞) 이라 이름짓고 삶의 터전으로 자리를 잡았다..
윤선도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시인이자 정치가로 수차례의 유배를 겪었지만 그 속에서 오히려 자연과 사유를 꽃피웠다.
그의 말년 유배지는 바로 남도의 바다 위 작은 섬, 보길도였으며 유배 중에도 그는 학문과 예술을 놓지 않았고
그 결과물이 바로 오늘날의 ‘윤선도 정원’, 즉 부용동이다.
윤선도는 ‘부용(芙蓉, 연꽃)’처럼 깨끗한 마음으로 세속을 떠나 자연 속에서 살고자 했는데 이 뜻은 부용동이라는 이름에도 담겨 있다.
그는 마지막으로 보길도에 정착해 부용동을 조성하며 남은 생을 보낸다.
부용동은 단순한 정원이 아니라 윤선도의 철학과 문학 정신이 응축된 공간이다.
정원은 산세와 물길을 그대로 품어내며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기보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조선 선비의 이상을 표현한다.
부용동 윤선도 정원은 계곡을 따라 세연정, 곡수당, 낙서재, 동천석실로 이어지며
물과 바위, 건축이 조화를 이루는 남도 원림의 정수로 평가받고 있다.
이곳에서 윤선도는 어부사시사를 비롯한 수많은 시조를 남기며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노래했다.
그에게 부용동은 은둔의 장소이자 동시에 조선 문학과 정원 예술이 만난 이상향이었다.
낙서재 매표소
보길도 세부 안내도
하연지
곡수당 앞 개울 건너 편에 제법 커다란 정사각형 모양 하연지가 복원되어 있다.
풍수학에 따르면 연못은 땅의 기운을 보완하고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조선의 궁궐이나 종묘에 있는 연못은 사각형이고 가운데 작은 둥근 섬이 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동양의 우주관, 천원지방(天圓地方)을 나타낸 것이다.
조선의 건국이념인 성리학이 반영된 것이다. 이 곳에는 네모진 연못만 있다.
하연지의 형태는 정방형에 가깝고 한변의 길이는 13m 정도이다.
호안 축대의 높이는 약 1m 가량되며 발굴당시 입수구와 출수구가 일직선으로 배치되 있었다.
연못옆에 석정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곡수당에 들어가려면 아치 형태의 석축물인 홍예교를 건너야 한다.
격자봉에서 흘러 내려오는 계곡물은 월하탄을 거쳐 서재앞 일삼교와 유의교, 홍예교 밑을 흐르며
곡수당 옆에 조성한 상연지와 곡수당 홍예교를 마주보고 있는 하연지에 저수된다.
아치 형태의 석축물인 홍예교
오늘의 보길도 격자봉 산행 이정표를 확인한다.
넓은 판석으로 연결된 곡수당 유의교
곡수당은 고산의 5남 학관이 거주한 공간이다.
곡수당은 ‘굽은 물의 집’이라는 이름 그대로 곡수연(曲水宴)이 열리던 전통 양식을 계승한 정자이다.
정자는 세연정에서 약 2km 떨어진 격자봉 중턱에 위치하며 섬돌과 초석까지 세밀하게 다듬어 웅장함 대신 단정한 기품을 보여주고 있다.
고산의 아들 학관이 거주하며 휴식을 취할 목적으로 조성한 공간으로 1칸짜리 집으로 사방에 퇴를 달고 반자를 두었으며,
남쪽 난간에는 취적, 서쪽은 익청이라는 편액을 학관의 글씨로 새겼다.
원형 돌확 수조
나무로 만든 물길로 계곡의 물을 끌어들이고 있다. 이 물은 상연지로 떨어진다.
상연지
곡수당 옆에 만든 연못으로 높이가 한 길(보통 사람키) 정도되는 방대위에 가산을 만들고
허리 부분에 구멍 하나를 뚫어 돌로 된 통을 끼워 뒤에서 끌어온 물이 구멍을 통해 연못으로 쏟아지게 하고 이를 '비래폭' 이라 하였다.
곡수당 옆의 상연지는 바닥을 깊이 파고 돌로 바닥을 조성하였고 담수할 수 있을만큼 높이 돌을 쌓아올려
바로 마루로 나오면 항상 모자라지도 넘치지 않게 일정한 양으로 담기며 흐르도록 설계되어 있다.
곡수당 옆면의 모습이다. 아담하지만 품위있는 건물이다.
곡수당은 계곡물이 굽이쳐 흐르는 곳이라는 뜻이다. 오후 햇볕도 잘들고 남서향이다.
곡수당은 앞쪽으로 축대를 높이 쌓고 그곳에 정면 2칸 옆면 1칸 규모의 건물로 사방 반칸의 툇마루를 놓았다.
상연지 바닥에는 특이한 모양의 큰 돌들이 놓여 있다. 물에 잠기면 멋진 섬처럼 보일 것이다.
한 쪽 벽에는 깊은 홈이 있어서 수면이 높아지면 빠져나가도록 해 놓은 것 같았다.
강학을 위한 공간인 서재
곡수 남쪽 두 골짜기 중앙에 건립된 강학을 위한 건물로 건립 당시에는
학유공 정유악, 심진사단(沈進士檀), 윤학관(고산 5남) 등이 고산에게 배우던 곳이다.
중당협실형으로 중앙에는 마루를 두고 좌우로 온돌방을 둔 형태다
서재 앞에 놓인 일삼교(日三橋).
일삼교는 고산의 5남 학관이 하루 세 번 아버지께 문안을 드리러 건넌 다리로 효행의 돌다리이다.
동와
보길도 지에 의하면 낙서재와 무민당 사이에 이곳과 서와를 지었다 하며 각기 한 간씩인데 사방으로 퇴를 달았다고 한다.
낙서재 마당 바로 앞에는 귀암이 있다. 바위를 쪼아 거북이 모양의 만든 바위라 하여 귀암이라 명명하였다.
어두운 한 밤 중에도 만물을 밝게 비추는 벗이다. 귀암 덕분에 낙서재 원형 복원에 도움이 되었다.
「고산유고』귀암 시편에 나오는 4령 중의 하나요, 윤선도 선생이 달맞이하던 장소로 기록된 이 바위는
화강암을 쪼아 거북 형상을 만든 370cm X270cm 규모의 바위로서 선생이 낙서재 터를 고르는데 중요한 지표였다.
달은 윤선도의 다섯 친구(오우) 중 하나이다. 달맞이는 그가 즐기던 풍류의 한 가지였다고 한다.
2011년 이 바위의 발견으로 윤위의「보길도지」에 기록된 소은병, 낙서재, 귀암의 축선을 확인하게 되어
낙서재 원형복원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낙서재는 곡수당에서 약 100m 떨어진 언덕 위에 자리하며, 원래는 윤선도의 서재로 쓰인 공간이다.
작은 규모지만 바람길이 열려 있어 조용히 책을 읽거나 글을 쓰기 좋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지금의 낙서재는 팔작지붕으로 복원되어 있어 원형보다 정제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낙서재는 단아한 기와 한옥이다. 처음에는 모옥이었다. 모옥은 띠나 이엉 따위로 지붕을 만든 집이다.
낙서재는 북향집으로 항상 왕이 있는 한양을 바라본다는 의미도 있었다고 한다.
낙서재는 고산이 51세인 1637년 세상을 등지고 은둔 생활을 위해 제주도로 향하던 중 이곳의 자연경관에 매료돼
1671년 돌아가실 때까지 섬의 주산인 격자봉의 자락에 3칸의 초가로 된 집으로 독서와 작품활동을 하며 살았던 집이다.
뒤편의 큰 바위인 소은병, 달 구경하던 귀암, 서재, 전사청, 무민당 등 25동 건물을 지어 신선처럼 살았다고 전한다.
소은병(小隱屛)
낙서재 뒤 경사면에는 고산이 소은병이라고 명명한 바위가 있다.
소은병은 주자가 경영한 중국 복건성 무이산의 대은봉 건너편에 있는 봉우리 이름이라고 한다.
산속에 은거하며 학문에 정진했던 주자를 모범으로 삼는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소은병과 낙서재, 귀암이 거의 일직선으로 배치되었던 모양이다.
주자가 경영한 중국 복건성 숭안현 무이산의 대은봉 차분 건너편에 있는 봉우리 이름으로
윤선도는 산속에 은거하며 학문에 몰두한 주자의 행적을 따른다는 뜻에서 낙서재 뒤편 바위에 이 이름을 붙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자가 하나 있었는데 정확한 위치를 몰라 복원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당
고산 윤선도 선생이 낙서재에서 돌아가신 뒤 이곳에서 얼마간 초장을 지낸 곳으로
사당은 낙서재 뒤편에 있으면 돌담으로 구역이 구분되어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옆면 1칸으로 맞배지붕 형태의 건축물로 옆면에는 풍판이 덧대어져 있다.
진사청
제사에 올릴 음식을 장만하고 제물, 제기 등 제사에 필요한 여러 가지 도구들을 보관하던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