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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에 흔들림 없어야 쉬고 또 쉴 수 있지요.
고불총림방장 수산 지종 스님
고불총림이 ‘백양사’(白羊寺)라는 이름을 얻게 된 일화를 들여다보면
그 유명한 ‘백장야호’(百丈野狐) 선문답이 아른거린다.
조선 선조 때 환성지안 (喚醒志安) 스님이
정토사 영천암에서 경을 설하고 있었다.
운집한 대중과 법회를 연지 삼일 째 되던 날
하얀 양이 뒷산에서 내려왔고,
7일 법회가 끝나는 날 흰 양이 스님의 꿈속에 나타났다.
“나는 천상에서 죄를 짓고 양으로 변했는데
이제 스님의 설법을 듣고
다시 환생하여 극락으로 가게 되었습니다.”하고는 절을 올렸다.
이튿날 암자 아래를 살펴보니 흰 양이 죽어 있었다.
이후 정토사는 백양사로 이름을 바꾸고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으며
환성 스님의 법호도 환양(喚羊)으로 바꿨다.
『무문관』 2칙에 나오는 ‘백장야호(百丈野狐)’도 의미는 다르지만
유사한 구조를 갖고 있다.
백장이 설법할 때 한 노인이 백장에게 물었다.
“저는 사람이 아니라 여우입니다.
옛적 가섭불 때 저는 이 절의 주지였습니다.
그때 어느 학인이 제게
‘수행을 많이 한 사람도 인과에 떨어집니까?’ 라고 묻기에,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不落因果)했습니다.
그렇게 대답한 이후부터 저는 500생 동안 여우의 몸을 받았습니다.
여우의 몸을 벗어나도록 좋은 말씀을 해주십시오.”
백장이 여우에게 말했다.
“수행을 많이 한 사람은 인과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不落因果),
인과에 어둡지 아니하다(不昧因果).”
그 말끝에 여우가 깨달음을 얻고 절을 올렸다.
여우가 물러난 뒤, 백장이 대중에게 말했다.
“공양 후에 승려의 장례식이 있으니 화장할 준비를 하라.”
대중이 절 뒷산으로 올라가보니, 여우 한 마리가 죽어 있었다.
환성 스님의 일화를 ‘백장야호’에 비추어 본다면
‘환성야양’(喚醒野羊)이라 해야 할까.
고불총림 백양사는 서옹 스님 입적 이후
세수 87세, 법랍 68세의 수산 지종 스님이 방장으로 주석하며
눈푸른 납자를 제접하고 있다.
닦겠다는 마음은 어디서 나오나
“간파(看破)하는 나는 누군가.
조사의 뜻 만물에 역연할진데
그 어찌 명리 따위에 마음을 쓰는가.
염라의 심판을 안 받으려면
최상승(最上乘)의 관문(關門)을 똑바로 뚫으라.”
수산 지종 스님이 사부대중에 내린 결제 법문 중 일구다.
최상승의 관문을 뚫는다는 것.
그 관문을 뚫는 힘은 다름 아닌 화두타파일 것이다.
화두 ‘시심마’를 들고 있는 선사답게
‘나는 누군가’(이뭣꼬)라는 의심 속에
관문을 여는 열쇠가 있음을 전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나’는 어떤 존재로 있을 때
열쇠를 손에 쥘 수 있는 것인가!
“마음을 닦아 무명을 걷어내야 합니다.”
그 마음을 닦겠다는 마음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십신, 십행, 십주, 십회향을 말하는 연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등각, 묘각을 말하고 생각하기 전에
십신의 첫 단계인 신심부터 보아야 합니다.
신심을 돈독히 하지 않고는 참선 뿐 아니라
그 어떤 수행법도 무용지물이지요.
『화엄경』에서도 믿음은 열반에 이르는 최상의 길이라 하지 않습니까.”
『화엄경』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믿음은 도의 근원이며 공덕의 어머니다.
믿음은 모든 훌륭한 일을 잘 길러내며,
의혹의 그물을 끊고 애착의 물결에서 벗어나게 한다.
믿음은 열반이라는 최상의 길을 열어 보인다.’
믿음은 신심이며, 신심 없는 불자는 없다.
부처님 법에 의지해 살려는 모든 사람들을
우리는 ‘불자’라 하며 ‘도반’이라 하고,
부처님께 올리는 삼배에서 부터 ‘석가모니불’과
‘관세음보살’을 염하는 그 염송 하나하나에
자신의 신심은 녹아 있다.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무엇을,
어떻게 믿고 행하느냐에 차이가 있을 것이다.
“삼보에 귀의한다는 것은
내 삶의 방식을 바꾸겠다는 의식의 대전환이요, 의지의 표현입니다.
사실 그것 하나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라 할 수 있지만,
여기서 그치지 않고 내 불성, 내 자성을 보겠다는 의지를
하나 더 보태야 합니다.
모두 다 성불할 수 있으니
지금 이 자리에서 수행에 들라는 것이 부처님 뜻입니다.
이 점을 항상 잊어서는 안 됩니다.”
원효 스님에 따르면 신심에는 네 가지가 있다고 한다.
근본을 믿어 진여법을 즐겨 생각하는 마음.
부처님께 한량없는 공덕이 있다는 것을 알아
항상 부처님을 공양 공경해 선근을 일으켜
일체지(一切智)를 구하려는 마음.
바라밀을 행하는 마음, 자리이타 원력을 세워 수행하려는 마음.
지종 스님은 이 네 가지 마음 중에서 공덕을 통한
선근을 내리는데 머무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불자라면 한 번쯤 들어 보았을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에 귀를 기울여 보세요.
부처님 법 만난다는 것은 백천만겁의 세월을 기다려도
어렵다 말하지 않습니까. 여기에 사람 몸 받아 이 법을 듣고 있으니
이 자체만으로도 일대사 인연입니다.
그러나 그 인연의 소중함을 우리는 체감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신심이 돈독하지 못해서입니다.
지금, 우리가 맺은 세연을 안다면 이 순간 가만있을 수 없습니다.”
『천수경』에서 이른 말씀이다.
‘위없는 깊고 깊은 미묘한 법은
백천만겁 오랜 세월 동안 만나기 어렵도다.
이제 저는 보고 듣고 받아 지닐 것이니
원컨대 여래의 진실한 뜻을 알게 하소서.’
(無上甚深微妙法 百千萬劫難遭遇
我今聞見得受持 願解如來眞實意)
발심하라는 뜻이다.
원효 스님이 발심수행장을 통해 설한 사자후가
아직도 쩡쩡하게 울리고 있지 않느냐고
지종 스님은 반문하고 있는 것이다.
‘부서진 수레는 구르지 못하고, 사람도 늙으면 닦을 수 없다.
이 몸이 얼마나 살 수 있어 한 평생을 공연히 지내는가.
덧없는 몸은 마침이 있을 것이니,
내 생은 어떻게 할 것인가. 정말 급하고 급한 일이로다.’
1922년 전남 장성에서 태어난 스님은
16세 때 부모를 여의고 3년 상을 올린 후
열아홉(1940년)에 백양사 산문에 들어섰다.
“살기가 워낙 어려웠습니다. 부처님 그늘에 있으면 사는데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마음에 산을 올랐습니다.”
불연은 부모님과의 이별 후 시작됐지만
발심은 승복을 입은 직후부터 솟아났다.
법안 스님의 위패상좌가 될 수밖에 없었던 스님은
부전을 살며 강원에서 공부해야만 했다.
직계 스승이 살아있었다면 공부할 형편이 나아졌겠지만
그리도 할 수 없었던 터라 불공과 불경을 함께 해야만 했다.
도량 청소를 비롯한 산사의 궂은일은 스님의 몫이었다.
어쩌면 이러한 환경이
스님의 마음을 더욱 분발케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불공 올리는 일도 중요했지만
강원에서 불경을 읽는 도반들이 참 부러웠어요.
나도 그들과 법담을 나누고,
그들처럼 부처님 법 하나라도 더 새기고 싶은데
경 보다는 목탁과 빗자루를 더 들어야 했습니다.”
비구계를 수지한 스님은 만암 스님을 시봉하기 시작했다.
큰 스님은 무슨 일만 있으면 지종 스님을 찾았다.
작은 절 살림부터 불사까지 맡기니 어찌할 바를 몰랐지만
큰스님의 뜻이기에 묵묵히 따라야 했다.
만암 스님의 청빈한 삶과 생명존중 사상을 누구보다
곁에서 지켜보며 큰 스승의 말없는 가르침에 얻은 바도 많았지만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는 늘
‘내 공부해야 하는데’하는 아쉬움은 더욱 커갔다.
주지 맡고 땅을 치다
결국 지종 스님은 1957년 완도 신흥사를 시작으로
부산 개암사, 백양사, 불갑사 주지로 임명되며
주지에게 내려진 맡은 소임을 다해야만 했다.
“그 때 정말 땅을 쳤어요. 내 공부 내 수행을 해야지,
남 공부 남 수행시키는 일만 하고 있는
내 자신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지요.
그래도 어른들이 ‘도량일은 부처님 일 아니냐?’고 하면
반문할 명분도 딱히 없었습니다.
그저 그냥 제 그릇이 이 정도구나 할 수 밖에요.”
그러나 주지직을 맡은 후 지난 50여 년 동안
만암 스님에게 받은 ‘시심마’ 화두는 놓지 않았다.
절 살림을 맡기면서도 화두를 준 큰 스님의 뜻을 믿었으며,
자신이 궁극에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법랍만도 올해 68년인 스님은
자신의 신심을 일상에서 점검할 수 있는 방법 하나를 일러주었다.
부처님처럼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자신이 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이 일치하고 있는지를 들여다보면
자신이 지금 어느 선상에 놓여 있는지를 알 수 있다고 했다.
“스님들이 산문에 들어서 배우는 과목 중 하나가 치문입니다.
치문을 공부하며 배웠던 이 한 마디를 좋아합니다.
‘자신의 이름을 알리려 하지 않아도
세상이 자기 이름을 떨치게 한다.’
내가 내 자신을 자랑해 보아야 별 소용없는 건 다 아는데
그리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일까요?
이름을 알리려 하는 순간 자기집착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나를 알리려 하기 전에 내 자신의 언행이 어떠한지를 보아야만 합니다.
내가 한 말은 정당한 것인지,
내가 한 말을 상대는 이해하고 있는지부터 철저히 점검하고,
내가 말한 그대로 나는 최선을 다해 지키고 있는지 보아야 합니다.”
지종 스님은 자기집착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참사람’을 찾으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라 한다.
서옹 스님이 주창한
‘참사람’은 임제선사의 무위진인(無位眞人)에 기인한다 할 수 있다.
‘진인’은 참사람을 이르는데 어떠해야 참사람인지가
‘무위’에 담겨있다. 임제선사 어록에 비추어 보면
‘무위’는 ‘차별 없음’이다. 따라서 차별 없는 사람,
어떤 상태, 모습에도 머물거나 고정되어 있지 않은 사람을
‘무위진인’이라고 그 사람이 ‘참사람’이라 하고 있다.
“빈부귀천도 따지지 않고,
분별심과 삼독심이 없는 사람이 참사람이요 무위진인입니다.
무애자재한 무위진인은 하루아침에 되기 어렵다 해도
그 무위진인이 되려는 노력은 지금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참사람을 찾고, 주인공을 찾는 것은
모두 다 자성을 본다는 말입니다.”
임제선사는 ‘무위진인’을 말하며 ‘오직 나 한 사람이면서
형상, 이름, 색깔, 소리도 없는 사람이면서,
또 모든 것인 사람’이라 했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자성’은 분명 우리 안에 있기는 있는 것일까?
역대 선지식은 한결같이 그 자성 또한 밖에서 구하지 말고
자신에게서 찾으라 했지 않은가.
“멋진 자동차가 있습니다. 휘발유가 가득 들어 있지요.
배선도 잘 연결돼 있으니 상호 신호 교환도 원활할 겁니다.
이 완벽하고도 멋진 자동차는 지금 제대로 주행하고 있습니까?”
그럴 리 없다. 누군가 차에 시동을 걸지 않으면 차는 움직이지 않는다.
“멋진 몸에 맑은 피가 돌고 시신경이 연결돼 있어도
그 모든 것을 조종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합니다.
자동차를 움직일 운전자를 찾아야 하듯이,
우리도 우리 자신을 움직이는 주인공을 찾아야만 합니다.
주행하고 있는 자동차의 운전자를 어디서 찾습니까?
자동차 안에서 찾아야 하지요.
지금 이 순간 살고 있는 내가 내 자성을 어디서 찾아야 합니까?
우리 자신에게서 찾아야 하지요.
그러나 내 이름 알리려 해 봐야 소용없다는 것 뻔히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하듯이, 우리 자신도 자성을 찾으라 하니까
‘나’에만 집착할 뿐 자신의 ‘불성’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납 80여년의 고불청림 방장 지종 스님은
이제 쉬고 또 쉬고 있는지 궁금했다.
한 생각 돌이키면 ‘부처’가 될 수 있고,
한 생각 쉬면 마음자리가 확연히 보인다고
역대 선지식은 물론 지금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선사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잘 쉬고 있는 듯 보입니까?
이 기회에 ‘쉰다’는 의미를 다시 말해야 하겠습니다.
일반 대중분 중에는 선사분들이 전한
‘쉰다’는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좀 많은 듯합니다.
쉰다고 하니 일손 놓고
낮잠 한 번 잘 자는 것쯤으로 생각하는데 아닙니다.
쉰다는 말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 있고
그 뜻 또한 다양하게 풀 수 있겠지만
경계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 어떤 경계가 자신의 주위에 도사리고 닥쳐와도
눈 하나 깜빡 않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무애자재 하지요.
연못 속에 핀 꽃처럼
오탁악세 속에서도 그 청정성을 잃지 않지요.
또한 그러한 사람은 모든 것을 내려놓지요.
무엇이 청정하고 무엇을 내려놓겠습니까?
물론 일반인들의 일상에서 힘든 일을 잠시 내려놓고 쉬며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는 것도
그 의미와 일맥상통한다 할 수 있지만 궁극에는 좀 다릅니다.
더 나아가야 합니다.”
자신의 수행은 조사도 못 도와
전 고불총림 방장 서옹 스님도 무차선대법회를 열 당시,
전국에 모인 납자들은 자신의 살림살이를 내보이며
묻고 또 물었지만 법석에서 내려진 한 마디는
“투과하고 투과하라”였다.
어쩌면 그 어떤 경계도 투과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부처님 법을 온전히 체득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전까지는
정진하고 또 정진해야 한다는 심오한 뜻을
‘투과하라’는 한마디에 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무엇을 내려놓고, 무엇을 보고, 어떻게 쉬어야 할까!
그것을 알고자 한다면 다시 신심부터 돈독히 해야 할 것이다.
신심은 처음이요 끝일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종 스님의 당부가 지금도 들린다.
“우린 그냥 태어난 게 아닙니다. 인연 따라 온 것입니다.
일대사 인연을 그냥 보낼지 말지는 자신의 몫일 뿐,
저도 역대조사도 어찌 할 수 없습니다.”
지금의 인연으로
‘불락인과’와 ‘불매인과’의 심오한 뜻을 알 수 있을까!
또 다시 ‘여우’같은 ‘의심’만 내며
한 자도 안 되는 알음알이 잣대로 바다를 재려 한다.
신심부터 다시 점검해 보아야 할 때다.
채한기 상임 논설위원
법보신문
첫댓글
불락인과 (不落因果)
"도를 이룬 사람은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 .
불매인과 (不昧因果)
"인과응보의 세계에 살기는 하되
그것에 의해 마음이 어두워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