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2. 20(대림4주)/ 미가5:1-4, 히브10:5-10, 루가1:39-45
따뜻한 마음으로 서로를 감싸주어라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라는 시가 생각났습니다.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누군가에게 뜨거운 사람이 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 안에 성탄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 전례는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가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을 방문한 사건을 기억하게 합니다. 아주 평범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성서는 이 두 여인의 만남을 통해 어떻게 우리가운데 임마누엘이 임하고 있는지 들려주고 있습니다.
엘리사벳에게 한 여인이 찾아왔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마리아가 왜 그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엘리사벳을 찾아왔을까요? 하는 것입니다. 가만해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엘리사벳을 찾아온 마리아의 마음을 어땠을까요?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기를 갖게 되었으니 기뻤을까요? 메시아가 태어날 것이니 흥분되었을까요? 자랑하고 싶어서 찾아왔을까요? 아닙니다.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을 요셉에게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이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남몰래 파혼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을 가장 사랑하고 이해해 주리라 믿었던 요셉마저도 마리아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가족도 어느 누구도 마리아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처녀가 아기를 가졌으니 누가 믿겠습니까? 마리아는 두렵고 떨렸습니다. 견딜 수 없는 고통과 두려움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었을 것입니다.
나는 사제 생활을 하면서 과연 나는 누군가의 엘리사벳이 되어주고 있는가? 생각해보았습니다. 부끄럽게도 여기에는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적어도 우리가 참된 신앙인이라면 자신의 아픔을 안고 누군가를 찾아갈 수 있는 관계, 그리고 누군가를 따뜻하게 안아줄 수 있는 관계가 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우리 안에 이런 관계가 없다면 우리 안에는 임마누엘은 없습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라고들 하였지만, 그 늙은 나이에도 아기를 가진 지가 벌써 여섯 달이나 되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 되는 일이 없다.”
이 말씀 속에는 “네가 정말 힘들다면 엘리사벳을 찾아가 보아라” 하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 아픔, 고민을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내 자신의 문제를 누구에게 털어놓을 수 있습니까? 그리고 다른 누군가가 나에게 이런 문제를 갖고 찾아올 수 있도록 내 마음을 열어 줄 수 있습니까?
마리아는 절벽과 같은 상황에서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엘리사벳이 있었습니다.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아픔을 이해해 주리고, 어떻게 이 어려움을 헤쳐 나가야하는지 알려주리라 믿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엘리사벳을 찾아왔겠습니까?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문안을 받자마자 엘리사벳은 놀라움과 기쁨을 감추지 못한 체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 되십니다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 주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라고 합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일은 자기의 뱃속에 든 아기가 뛰놀았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남자들은 잘 모를 것입니다. 그런데 아기를 가진 여인은 압니다. 임신한지 6개월이 되면 뱃속에서 아기가 움직이는 것을 감지합니다. 아기가 여인의 뱃속에서 움직이는 일은 아주 평범한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엘리사벳은 뱃속에서 움직이는 아기의 평범한 움직임을 통해 태중의 아기까지 마리아를 보고 기뻐 뛰놀았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이런 위로와 격려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말에 꿈보다 해몽이란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벳이 그렇습니다. 아기를 가진 여인이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이 평범한 일을 통해 마리아를 위로 하고 격려해 주고 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마리아의 아픔과 고민을 이해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마리아의 선택과 헌신이 얼마나 아름다운 행위인지를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무모한 일이라고, 율법을 어긴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엘리자벳은 하느님의 뜻을 위해 자신을 드리는 아름답고 고귀한 헌신이라고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대로 믿어주고, 인정해 준 것입니다.
그렇다면 엘리사벳이 어떻게 마리아의 뱃속에 든 아기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태어날 아기임을 알았을까요? 그리고 어떻게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임을 알고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을까요?
마리아를 그토록 사랑했던 요셉마저도 가족마저도 믿지 못했던 일을, 누구도 믿을 수 없었던 이 사실을 놓고 어떻게 복되다고 찬양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오직 이타적인 사랑만이 가능하게 합니다. 내 생각, 내 경험이 아닙니다. 지금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마리아의 입장에서 생하고 느꼈던 것입니다. 이것을 역지사지라고 합니다.
고린도 전서 13장 7절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그렇습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 처지에서 느끼고 이해하는 마음으로 마리아의 말을 들었습니다. 때문에 마리아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었고, 또 믿어줄 있었고 감싸줄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이런 사랑의 마음이 아니었다면 “너 어떻게 그런 무모한 짓을 했니,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려고 하니..”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말은 마리아에게 아무른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거룩한 희생을 인정했습니다. 이런 일치는 그 사람의 입장에서 볼 수 있는 사랑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잃은 양의 비유를 보십시오. 100마리의 양을 치던 목동이 한 마리의 양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양은 금빛 털을 한 양일까요? 너무나 값이 나가고 귀한 양일까요? 사실 요즘은 백보다 하나가 중요한 시대입니다. 은메달 동메달 백 개를 따도 소용이 없습니다. 금메달 하나면 일등입니다. 야구선수 100명이 필요 없습니다. 박찬호나 이승협 같은 선수 하나만 있으면 됩니다. 모든 사람이 스케이트를 못 타도 좋습니다. 김연아와 같은 선수 하나만 있으면 됩니다. 세상은 이런 가치에 젖어 있습니다. 뭐만 보입니까? 99은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만 보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여기서 말하는 한 마리는 이런 양 같지는 않습니다. 주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실 때 “너희는 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업신여기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루가18:10)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이 한 마리의 양은 틀림없이 빌빌한 양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업신여기는 양입니다. 오죽했으면 길을 잃었겠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이 빌빌한 양을 두고 똑똑한 99마리 산에 두고 그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설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의 계산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부모가 되어 보십시오. 천재소년이나 장동권보다도 이 별 볼일 없는 내 아들이 그토록 소중하고 사랑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무엇이 이해득실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를 사랑하게 될까요? 그것은 사랑입니다.
지금 엘리사벳이 복되다고 찬양한 것은 마리아를 사랑의 마음으로 보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하느님의 천사가 요셉을 찾아와 요셉의 굳어진 마음을 녹여줍니다. 그러자 자신의 이기적인 마음 때문에 자신의 감정 때문에 파혼하려고 했던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마리아와 아기를 위해 자신의 일생을 바칩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엘리사벳처럼 지금 아파하고, 상처 입은 자들을 감싸 안아줄 수 있는 사랑이 넘쳤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느낄 수 있는 사랑입니다.
루가복음은 왜 아기를 잉태한 두 여인이 만나게 한 장면을 기록했는지 여기에 비밀이 있었습니다. 한 여인은 메시아가 올 때를 준비할 예언자를 잉태하고 있고, 또 한 사람은 이 땅을 구원하기 위해 오실 메시아를 잉태하고 있는 여인이라고 성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기는 바로 사랑의 결정체입니다. 예수가 하느님 사랑의 결정체라면 요한은 인간 사랑의 결정체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를 주셨듯이 우리도 형제를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서로의 아픔을 나눌 수 있고, 이해하고 감싸줄 수 있는 관계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요한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랑 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께로부터 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1요한4:7)
그렇습니다. 사랑은 우리를 하나 되게 하고, 격려하게 하고, 치유합니다.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고 평화와 기쁨을 누리게 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 시대의 엘리사벳이 되야 합니까?
바로 우리입니다. 지금 내 자신이 엘리사벳이 되어야 합니다. 독일의 신악자 에크하르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마리아아에게서처럼 우리 각자 안에서도 아기 예수의 잉태와 탄생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예수를 낳지 못한다면 마리아가 그때 거기에서 예수를 낳았다는 사실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 시대의 엘리사벳이 되어 내 이웃의 아픔을 안아줄 수 없다면 오늘 이 말씀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주님은 바위를 쪼개시거나 알을 쪼개시고 오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실 뿐이 아닙니다. 오직 필요로 하는 것은 바로 나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나를 통해 태어나시길 원하고 계십니다. 내가 마리아가 되고, 내가 엘리사벳이 되어야 합니다. 이 비밀을 아는 것이 바로 성탄의 비밀입니다.
주님은 태어나셔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희망이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없는 미래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없이는 생명, 평화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희망과 꿈을 이루기 위해 주님은 바로 나를 필요로 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인 프란시스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용서를, 상처가 있는 곳에 치유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위해 써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프란시스는 저 사람을 써달라고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나를 도구로 써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나를 부르십니다.
자 대림의 촛불이 다 켜졌습니다. 이 대림초가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심을 알리기 위해 내 자신을 태워야할 초로 보이십니까? 지금 엘리자벳처럼 지금 내 형제의 아픔을 감싸주고, 안아 주라고 하십니다. 성탄은 이렇게 할 때 우리 안에 임하는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