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의 생에 가 보았는가 / 고형렬
천신만고 끝에 우리 네 식구는 문지방을 넘었다
아버지를 잃은 우리는 어떤 방에 들어갔다
아뜩했다 흐린 백열등 하나 천장 가운데 달랑 걸려 있어
밖에서 들어오는 바람에 간혹 줄이 흔들렸다
우리는 등을 쳐다보면서 삿자리를 건너가고 있었다
건너편에 뜯어진 벽지의 황토가 보였다 우리는 그리로
건너가고 윙 추억 같은 풍음이 들려왔다
귓속의 머리카락 같은 대롱에서 바람이 슬픈 소리를 냈다
모든 것은 이렇게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인간들에게 어떤 시절이 지나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방에 늙은 학생같이 생긴 한 남자가
검은 책을 보고 있었다 우리는 그 남자의 바로
책 표지 밑을 지나가고 있었다
머리를 뒤로 넘긴 것 같은 조금 수척한 남자가 멈칫했다
앞에 가던 형아가 보였던 모양이다 남자는
형아를 쓸어서 밖으로 버리고 다시 책을 보기 시작했다
모친은 그 앞을 가로질러 나아갔다 아들이
사라진 지점에서 어미는 두리번거리고 서 있었다
그때 남자가 모친을 쓸어받아 문을 열고 한데로 버렸다
먼지처럼 날아갔다 남자는
뒤따라가는 아우에게 얇은 종이를 갖다대는 참이었다
마치 입에 물라는 듯이
아우는 종이 위로 올라섰다 순간 남자는
문을 열고 아우를 밖으로 내다버렸다
나는 뒤에서 앙 하고 소리치며 울었다 그 울음이
들릴 리가 만무했지만
그때 남자가 무언가 골똘한 생각에 빠진 것 같았다
혈육들은 그후 어떻게 됐는지 알 길이 없다
바람소리만 그날 밤새도록 어디론가 불어갔다 어둠속
삿자리 밑에서 나는 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알 수 없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스쳐지나가는 생각이
슬프다는 생각조차 없었다
이것이 우리 가족의 긴 미래사였다
남자는 단지 거미를 죽이지 않고 내다버렸지만
그날밤 나는 찢어진 벽지 속 황토 흙 속으로 들어갔다
고형렬|「거미의 생에 가보았는가」를 배달하며…
시인들은 종종 아버지 흉을 봅니다. 실비아 플라스는 시에다 “아버지, 개자식”이라고 쓰기도 했어요. 이 시의 늙은 학생 같은 남자 역시 좋은 아버지는 아닙니다. 아버지, 장남이라 귀하게 여기고 막내라서 이뻐하는 일도 없이 참으로 공평하게 내다버리셨군요.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시에서 미움 대신 슬픔이 느껴집니다. 찢어진 벽지 속으로 들어갔던 ‘나’는 아버지처럼 늙은 학생 같은 아버지가 되었어요. 식구들은 내다버리고 검은 책만 챙겼던 아버지, 검은 책으로 혼자만의 집을 짓던 아버지처럼. 그러고 보니 거미는 참 쓸쓸한 곤충이네요. 늘 뿔뿔이 흩어져, 바람에 자기의 실이 가닿는 대로 집을 지으니 말입니다. 거미의 생에 가보니 혼자 집을 짓는 일이 우리의 숙명인 듯 느껴집니다. 그리고 아버지, 당신의 생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문학집배원 시인 진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