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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의 사역의 회고와 다짐
사도행전 20:13~3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저희는 2021년 마지막 주일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올 한 해를 시작한 지 얼마 안되는 것 같은데 이렇게 한 해의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세월은 유수 같다고 말하는데, 참으로 흐르는 물처럼 금새 지나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올 한 해를 보내고 이제 이번 주 금요일 밤에는 송구 영신의 밤이 지나면 토요일은 2022년의 새해가 밝아오게 됩니다. 그래서 이번 한 주간은 우리가 지나온 이 한 해를 돌아보는 회고적 반성과 또 다가오는 새해를 맞이하는 새로운 각오와 다짐을 갖는 복된 한 주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하여 사도 바울이 그의 사역의 중반이 지날 때 과거의 자기의 사역을 돌아보고 또 앞으로의 남은 생애의 사역을 새롭게 다짐하는 내용이 담긴 사도행전 20장을 함께 잠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도행전 20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그 동안 약 10년 넘게 세 번에 걸쳐 행한 이방 선교 사역을 일단 마무리하고서 예루살렘의 여러 사도들과 교제하면서 그 동안의 이방 선교 사역을 보고하고자 예루살렘에 배를 타고 올라가는 중인 상황입니다. 특히 사도 바울의 이번 예루살렘 방문에는 그가 세웠던 여러 이방인 교회 성도들이 사랑과 정성을 담아서 드린 구제 헌금을 모아서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과 유대 지역의 유대인 기독교회는 사도 바울에 의하여 급속하게 성장하는 이방 교회의 세력을 보면서 별로 달가와하지 않았고, 약간 의심스럽게 생각하고 거리를 두려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번 기회에 이방 교회의 진실한 신앙과 사랑을 증거하여 이러한 거리감을 해소하려고 오랫동안 기도하면서 이번 방문을 추진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 본인으로서는 이번 여행이 여간 위험한 여행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십년 넘게 이방 지역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중에 각처에서 살던 유대인들은 나사렛 예수 이단 종교를 전하는 이단의 괴수로 사도 바울을 낙인찍고 그를 잡아 죽이려고 수없이 애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사도 바울이 유대인들의 본거지인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은 마치 사람이 호랑이 굴에 제 발로 들어가는 것과 같이 위험 천만한 일이었습니다. 실제로 여행을 출발하려는 장소였던 헬라 지역 고린도나 겐그레아 항구 도시 지역에서 사도를 해치려는 음모가 진행되어 직접 예루살렘으로 가려는 배편을 취소하고 급히 항해 노선을 변경하여 마게도냐를 거쳐 소아시아를 거쳐 멀리 동쪽으로 돌아오는 뱃길로 예루살렘에 가는 길을 택하였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그의 사역의 중반부로서 새로운 큰 비전도 있지만 그는 지금 그의 미래를 가늠하기 어려운 현실과 맞부딪쳐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를 떠나 지금의 터어키 서쪽 해변 도시 드로아에 들러서 성도들에게 밤을 새면서 설교한 후 아침 일찍 동료들과 드로아를 떠나기로 한 날에 갑자기 동료들과 헤어져 잠시 홀로 육로로 걸어가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13절,14절의 내용입니다. 함께 한번 다시 읽어볼까요?
“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고 가니 이는 바울이 걸어서 가고자 하여 그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 바울이 앗소에서 우리를 만나니 우리가 배에 태우고 미둘레네로 가서”
사도 바울이 드로아에서 다음 항구인 앗소까지 육로로 홀로 걸어가는 것은 본래 없던 사도 바울의 단독의 결정이 분명합니다. 전날 밤을 새면서 드로아 교회의 성도들에게 가르치는 일을 했으니 사도 바울은 분명 몸이 몹시 피곤하였을 것입니다. 밤중에는 유두고라는 청년이 설교 도중에 창문에 걸터 앉고 졸다가 등불의 열기에 몸이 고단하여 졸다가 삼층에서 떨어져 죽는 불상사가 있었고, 그 일로 사도 바울이 내려와 그 청년 위에 몸을 구푸리고 간절히 기도하여 살려내는 아찔한 일도 있었기에 이런 저런 피로감이 사도에게 있어서 다음날에는 휴식이 필요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홀로 육로로 다음 행선지 항구인 앗소까지 50킬로 거리 곧 120리 길을 걸어서 가는 일은 몹시 무리이고 당시 육로 여행 길은 혼자 가는 것이 강도를 만나기 쉬운 위험한 길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사도가 그렇게 일행과 떨어져 혼자 걸어서 한 이틀 동안을 걸어가는 길을 굳건하게 고집한 것은 그 혼자만의 도보 여행을 통하여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면서 자기의 과거를 돌아보고 앞으로 예루살렘에서 맞닥뜨릴 일들에 대하여 주님께 아뢰고 자기의 앞날의 사역을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기도의 시간으로 보내고자 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하여 사도는 그 한 이틀 동안의 혼자만의 도보 여행을 통하여 성령과의 깊은 교제와 확신이 섰기에 이제, 마음에 담대함과 굳건한 결심이 그 심령 속에 생겨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하지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지나 배 타고 가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러 급히 감이러라”
사도 바울은 홀로 도보 여행을 작정하였을 때는 분명 마음에 복잡함과 미래의 불확실함으로 인한 주저함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이번 여행이 과연 지혜로운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망설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혼자만의 도보 여행 기간 동안에 주님과의 교제를 통하여 여전히 미래에 대한 확실한 것이 주어진 것은 없었지만, 자기의 모든 생애를 주님께 온전히 맡겨 놓아드린 후에 찾아온 평온함이 있었습니다. 다가올 고난도 기꺼이 감내할 영적인 담대함도 생겨났습니다. 어떤 일이 자기 앞에 닥칠지 몰라도 사도는 자기에게 주어진 남은 생애를 자기를 불러 이방인의 사도로 헌신하라는 주님이 맡긴 사명을 감당하다가 주님을 뵙겠다는 굳은 각오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이제 예루살렘에 가는 길이 두렵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에 가는 길이 오히려 설레고 무슨 일이 벌어질지 기대가 되고 그래서 가는 동안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에베소를 지나갔습니다. 그가 에베소를 지나쳐 밀레도 항구까지 간 것은 에베소에는 잠깐만 머물 수 없고 도리어 오랫동안 머물 수밖에 없는 끈끈한 애정이 깃든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 항구에 머물렀다가는 꼼짝없이 오순절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갈 수 없고 일정이 한참 동 지연될 수밖에 없을 것이 뻔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소아시아 지역의 중심 교회로서, 사도 바울이 그곳에서 무려 삼년 동안이나 계속 머물면서 혼신의 힘을 다하여 사랑을 쏟은 교회이기에 이번에 방문하면 하루 이틀이 아니라 한 달 두 달 머물러도 그를 사랑하는 성도들이 사도를 붙잡고 대접하면서 놓아주려 하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를 그냥 지나친 후에 가까운 밀레도 항구에서 사람을 에베소 교회에 보내어 교회의 장로님들만 어서 오시라고 전갈을 보낸 것입니다. 약 48킬로미터 떨어진 거리라니까 백리가 좀 넘으니까 달려오면 하루 이틀이면 그들이 왔을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 장로님들이 전갈을 받고 달려와서 사도 바울을 다시 만났을 때에 참으로 기뻤을 것입니다. 그들이 헤어진 지도 약 일년 정도 지났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만난 장소는 바다가 보이고 사도를 태우고 떠날 배가 내다 보이는 항구 주변이었을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과 만나고 곧 헤어져야 할 아쉬움 속에서 그들을 불러 오게 한 주목인 장중한 고별의 설교를 시작하였습니다. 그의 고별 설교 속에는 사도의 지난 시절 그의 생애 속에 주님의 일꾼으로서 행했던 사역의 자세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그가 겪게 될 사역의 미래에 대한 그의 각오와 결심도 잘 나와 있습니다.
먼저, 사도는 자기의 지난 날의 사역을 요약하여 여러 가지를 고백합니다.
그의 고백 중에는 많은 교훈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 한 가지를 먼저 살펴보자면, 그는 겸손과 눈물과 고난 중에 인내로 주를 섬겼노라고 고백합니다.
17절로부터 19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에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사도는 자기가 그들 가운데 ‘주님을 섬겼다’고 고백합니다. 사도의 사역의 주 대상이 바로 주님인 것입니다. 그는 언제나 주님을 섬기는 초점을 잃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려고 하면 시험을 당하지 않습니다. 실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섬기려 하면 실망하게 됩니다. 시험에 들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은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교회도 섬기고, 직장도 섬기고, 심지어 가정도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시험도 이기고 참된 보람도 얻고 모든 일에 정성스럽게 행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을 잘 섬기고자 하지만 그것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이는 주님을 잘 섬기는 것을 방해하는 내적인 방해 요소가 있고, 외적인 방해도 있습니다.
내적인 방해 요소로는 교만이 있습니다. 사도는 19절에서 “모든 겸손으로 주님을 섬겼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인간의 내면에 자기 자신을 대단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고, 자기를 드러내려는 속물 근성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늘 그것과 싸웠습니다. 겸손으로 주님을 섬기고자 몸부림쳤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교만할 이유가 많은 사람입니다. 많이 배운 사람이요 문벌이 좋은 사람이요 가문도 탁월한 사람이요 지식이 대단한 사람입니다. 영적으로도 삼층천 곧 천국을 들어가서 이루 말할 수 없는 말도 들은 영적 체험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각종 은사가 그를 통하여 나타나 그의 손수건만 가져다 얹어놓아도 병이 낫고 귀신이 쫓겨나갈 정도로 영력이 대단한 열매가 있었습니다. 그는 육신적으로나 영적으로 교만해질 요소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럴수록 자기를 쳐서 복종의 자세로 주님을 섬기려고 몸부림쳤습니다. 고린도전서 9:26 말씀에,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라고 고백한 것을 보면, 그가 참으로 자기를 쳐서 늘 겸손의 마음을 유지하려고 얼마나 몸부림쳤는가를 보여줍니다. 우리들은 교만할 꺼리가 별로 없는데도 늘 교만한 생각이 시도 때도 없이 올라오곤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사도를 본받아 늘 겸손하고 또 겸손하기를 주님께 간청합시다. 조금만 교만한 생각이 올라오면 그런 자신을 보고 어처구니 없음을 깨닫고 비웃으며, 자신 안에 자리잡고 있는 이 타락한 본성을 주님 앞에 솔직히 고백하면서, 또 다시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으며 겸손의 은혜를 달라고 간청하며 주님을 낮아진 마음으로 섬기며 교회와 가정과 이웃과 직장 동료들을 겸손한 마음으로 섬기는 자가 되도록 힘씁시다.
또한 사도는 자신이 주님을 눈물로써 섬겼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을 우리가 생각할 때 강직한 마음과 굳건한 의지를 가진 피도 눈물도 없는 철인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눈물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편지 곳곳에서 그의 눈물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0:31 말씀에서도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년 동안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고린도후서 2:4 말씀에서 고백하기를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고 하였습니다.
빌립보서 3:18 말씀에서도 고백하기를
“내가 여러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고 말하였습니다. 사도는 성도들 앞에서 설교할 때에도 눈물로 설교하곤 했고, 신앙이 잘 자라지 않고 시험에 든 성도들을 생각하면서 편지를 쓸 때에도 편지 쓰는 중에 계속 눈물을 흘리면서 편지를 구술하곤 하였고, 마음에 악심을 품고 교회를 훼방하며 소란케 하는 악한 자들을 생각할 때 그들의 영혼이 영원히 받게 될 화를 생각하며 가슴 아프고, 그들의 시험과 유혹으로 교회의 성도들이 입을 해를 걱정하면서 또한 가슴이 아파서 눈물을 흘리곤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사도 바울은 울보 목사였던 것입니다. 영혼을 사랑하고 진리를 사랑하는 그의 심령의 간절함이 그로 하여금 설교할 때에도 울고, 기도할 때에도 울고, 편지 쓸 때에도 눈물을 흘리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거의 눈물로써 하나님을 섬겼던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성령의 사람 다윗 역시 눈물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쓴 시편 56:8절에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는 고난 중에 늘 눈물을 흘리면서 주님께 하소연하곤 하였습니다. 사울 왕에게 쫓겨다닐 때에 그는 굴 속에서, 수풀 속에서, 황량한 광야와 무너진 요새의 돌틈에서 숨어서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눈물로 호소하곤 하였습니다. 그는 중년에 밧세바의 사건으로 죄책감의 무게가 양심을 흔들어놓을 때마다, 주의 징계가 그의 영혼을 찌를 때마다, 하나님 앞에 회개의 눈물과 긍휼을 간구하는 눈물을 흘리며 엎드리곤 했습니다. 다윗 역시 눈물로 하나님을 섬겼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의 백성들의 눈물에 약합니다. 주님의 백성의 눈물에 쉽게 마음을 돌이키십니다. 주님의 백성의 눈물에 즉시 진노를 풀고 도리어 긍휼을 베풀어주십니다. 주의 백성의 눈물의 탄원에 그의 능력의 손을 즉시 내밀어 일하십니다. 우리도 눈물로 주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고, 눈물로 가정을 섬기고, 세상의 잃어버린 영혼을 위하여 눈물로 기도하고, 세상의 악과 재난을 인하여 눈물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눈물의 사람이 됩시다.
이 한 해를 돌아보면서 우리의 눈물 병에 얼마 만큼의 눈물이 고였을까 돌아보게 됩니다. 이제부터라도 자기의 죄성을 깨닫고 깊이 깨어지고 부서진 마음으로 울 수 있는 자가 됩시다. 사랑하는 가족과 교우들을 생각하며 긍휼히 여겨 눈물로 중보 기도할 수 있는 성도가 됩시다. 아직도 완고하게 주님께 돌아오지 않는 영혼을 두고 눈물로 간구하는 성도가 됩시다. 사랑하는 우리 동족을 바라보면서, 점점 영적인 열망이 없어지는 이 세대를 바라보면서, 예루살렘을 보시며 울면서 울면서 탄식하시던 우리 주님처럼, 이 나라를 놓고 울면서 기도하는 사람이 됩시다. 그리하여 하늘에 있는 주의 병에 우리의 눈물들이 한 방울, 한 방울 더해지는 주님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 한 가지 시험 중에 인내하면서 주를 섬겼다고 사도는 고백합니다.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라고 말한 대로, 사도는 에베소 지역의 수많은 유대인들로부터 지속적인 방해와 간교한 위협을 당했습니다. 그를 죽이려는 위협은 에베소에서 대규모 폭동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위협과 시험 속에서 사도는 계속하여 삼년 동안 목숨을 걸고 주님과 에베소 교회를 섬겼던 것입니다. 모든 것이 평온한 중에 주님을 섬기는 것도 복된 일이지만, 이렇듯 하루 하루가 칼끝을 걷는 것 같은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신실하게 주님을 섬기는 것이 참으로 귀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실함, 충성됨, 이것이 주님께서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신 섬김의 모습이었고, 사도들과 믿음의 선진들이 보여준 신앙의 본보기였습니다. 우리들도 평온한 중에도 신실하게 주님을 섬겨온 것도 주님은 기억하시고, 우리이 여러 시련과 시험 중에도 신실하게 주님을 섬겼던 것을 주님은 기억하고 계십니다. 올 한 해 뜻밖의 시련과 역경을 만난 성도들도 있습니다. 본인이나 가족의 육신적인 질병과 이런 저런 사고와 불 같은 시련 속에 마음이 큰 고통을 겪은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시련 속에서도 주님을 신실하게 섬긴 것을 주님은 기억해주실 것입니다. 코로나의 감염의 시험 속에서도 주님께 자신과 가족의 안위를 맡기고 주님을 섬기는 가장 기초된 의무인 예배를 지키려고 위험을 무릅쓴 것도 주님은 기억해주실 것입니다. 앞으로도 그 어떤 상황을 만날지라도 그 어떤 시련 속에서도 주님을 신실하게 섬기는 복된 성도들이 됩시다.
또 사도의 당부가 여럿이 있지만, 한 가지만 더 언급하자면, 그의 회고 속에서 그 자신의 모범을 언급하면서 에베소 장로들에게 베푸는 삶을 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33절로부터 3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사도가 에베소 장로들에게 한 가지 자신의 삶에서 추천하며 권면한 것은 물질에 대한 탐심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 에베소 교회에서 사역할 때에 은과 금과 의복을 탐내지 아니하고 도리어 유대인 랍비의 전통을 따라 천막 만드는 일을 하면서 생계를 담당하며 동역자들의 필요를 채우려고 힘썼던 것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물질에 대한 욕심을 갖지 말고 사역하라고 사도는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이 말씀을 기억하라고 그들에게 상기시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받는 삶보다 주는 삶이 더 고귀하고 더 복이 있고 더 행복한 삶이라고 사도는 주님의 권면을 상기시킵니다. 세상 이치로 보면 주기만 하는 삶이 도대체 불가능하고 어리석게 느껴지겠지만, 주님께서 만사를 다스리시는 분으로서 항상 끊임없이 모든 만물에게 생명을 주시고 그들의 기도에 응답을 주시는 분이시지 않습니까? 저 태양처럼 항상 빛을 주고 열을 주어도 태양이 식지 않는 것처럼, 주님은 한없이 주고 또 주어도 계속 줄 것을 갖고 계신 분입니다. 반면에 베풀지 않고 계속 손에 쥐기만 하면 도리어 가난하고 메마르게 되기도 합니다. 저 이스라엘의 두 바다가 있는데 북쪽의 갈릴리 호수는 늘 요단강 아래로 계속하여 물을 흘려 내려줍니다. 하지만 끊임없이 북쪽 지역의 헤르몬 산쪽에서 새로운 물을 공급받습니다. 반면에 남쪽의 사해는 요단강물을 통하여 물을 받아 들이지만 다른 곳으로 흘려 보내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그렇게 받기만 하는데도 오히려 그 바다는 물고기 한 마리 살지 못하는 ‘사해’ 곧 이름 그대로 ‘죽음의 바다’가 되었습니다. 잠언 11:24,25 말씀에도 이르기를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
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우리에게 주어진 각종 은혜, 곧 지식과 재능과 재물과 지혜와 건강과 시간을 잘 간직하며 가꾸어가기도 해야 하지만, 이것들을 내 자신과 가족에게만 국한하여 쓰지 말고, 주님을 위하여, 이웃과 동료들과 생면부지의 저 먼 나라의 주리고 고통받고 복음에 목마른 이들을 위하여서도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베풀 줄 아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베푸는 자만이 베품의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넉넉하지 않을 때에도 기꺼이 얼마의 소유를 나누어 더 가난하고 더 연약하고 더 불쌍하고 뒤처진 이들을 생각하며 내 분량 안에서 기쁨으로 베풀 때 우리 심령에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만족과 보람의 은총이 주어집니다. 그렇게 베푸는 삶에 주님께서도 더 풍성한 건강과 재물과 재능도 더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순종하여 그 행복을 누리는 삶을 살아갑시다.
이렇듯 사도가 과거의 삶을 반추하면서 장로들에게 당부했다면, 한 가지 사도가 자기의 앞길을 바라보면서 그들 앞에서 각오를 다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의 사명을 완수하려는 각오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22절로부터 24절까지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도 바울이 이 말씀을 할 당시가 성경역사학자들이 연구한 바로는 주후 57년 봄이라고 합니다. 그 이후 그가 순교하게 되는 디모데후서 편지를 쓸 당시는 주후 65년이나 주후 67년 겨울 경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안디옥 교회에서 선교여행을 시작한 것이 주후 47년경이라고 추정하니까, 바로 밀레도에서 사도가 에베소 장로들에게 해변에서의 설교를 한 이 때가 바로 선교 사역의 딱 중반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10년을 달려왔고, 이제 앞으로 또 십년을 앞두고 있는 사역의 중간 지점에 도달한 것입니다. 바로 그 때 그는 지난날을 돌아보면서 안주하지 않습니다. 앞길에 환난과 결박이 기다리며 불확실성과 생명의 위협이 현실적으로 닥칠 것이라는 성령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머뭇거리며 도망치지 않습니다. 그는 다시 한번 주님께 받은 사명을 굳게 붙듭니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이방 땅에 증거하라는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완수하기를 각오합니다. 이 사명을 완수하려고 달려가는 길에 그의 목숨이 제물로 요구된다면, 기꺼이 자기 목숨을 초개처럼 바치겠다고 여기서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이러한 굳은 결심과 각오는 며칠 전에 홀로 드로아에서 앗소로 도보여행하면서 다시 한번 성령 안에서 교제하며 기도하면서 마음에 굳건하게 다진 결심과 각오임이 분명합니다.
그렇습니다. 처음 사명을 위하여 시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사명을 끝까지 완수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주님께 받은 직분을 처음 소중히 여기며 열심을 다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받은 직분을 끝까지 충성스럽게 받들어서 완수하고 주님 앞에 서는 것이 중요합니다.
몇 년 전에 TV에서 어느 여자 마라톤 경기를 중계하는 것을 시청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영국의 한 선수가 계속하여 일등으로 달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뒤를 여러 나라 선수들이 뒤따르고 있었는데, 그 중에 일본의 여자 선수 두 사람이 키도 작은데 꾸준히 선두를 바로 뒤따라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들은 서양 사람들이 우리보다 훨씬 더 강하고 그들에게 강인함을 느끼게 됩니다. 동양인들은 왜소하고 약하게 보입니다. 제가 시청하면서 중계자가 해설하기를, 그 영국 선수는 이미 많은 경기도 우승했었고 이번 경주에서도 가장 유력한 우승 후보라고 중계하였습니다. 그 앵커가 말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 때 그 양상이 지속되면 이번 경기에서도 1등을 당연히 영국선수가 차지할 것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런데 마라톤 중반쯤 갔을 때 비탈길이 몇 번 지났을 때에 그 잘 달리던 영국 선수가 그만 달리다가 중단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만만하던 얼굴은 온데 간데 없고 일그러진 얼굴로 기권해버렸습니다. 결국 그 경기 우승은 끝까지 뒤에서 따라만 달리던 일본의 두 여자 선수가 결승점을 통과하여 일등, 이등을 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것을 보면서, “페이스(pace) 조절을 하면서 자기와의 싸움에서 끝까지 인내해서 끝까지 가는 것이 중요하구나.”를 절실히 느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라톤 경기와 같습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듯이, 신앙의 첫 출발도 중요하지만, 주님 앞에 서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끝까지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사명 받은 첫 순간도 중요하지만 그 사명을 끝까지 붙들고 완수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사도는 이 사역의 중반까지 잘 달려왔지만,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지만 자기의 사명의 끝날이 언제일지 모르지만, 그 사명을 끝까지 완수하고야 말겠다고 굳은 결심을 하고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결심을 끝까지 잘 지켜서 그가 순교를 코 앞에 앞두고 쓴 그의 마지막 편지 디모데후서 4장 6절 이하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디모데후서 4:6~8)
그렇습니다. 그는 사역의 중간 결산을 하고 난 후에는 굳은 결심과 각오를 하고 완주할 것을 다짐하고서 또 다시 자신의 사명의 결승점을 향하여 달려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의 달음질을 마치고 마침내 주님 앞에서 귀한 면류관을 받을 거룩한 소망을 가지고 그의 생애의 마지막을 정리하였던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위대한 선지자 다니엘도 나이 늙도록 사명에 충성하였는데, 모든 사명을 마치고 하나님께 돌아갈 날을 기다리는 다니엘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날에는 네 몫을 누릴 것임이라”(다니엘 12:13)
참으로 끝까지 사명을 붙들고 달려간 자의 마지막은 이처럼 복스럽고 지극히 소망이 충만한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다니엘처럼 이러한 아름다운 마지막을 맞이합시다. 이를 위하여 우리 생애의 한 해가 저무는 2021년 마지막 주간에 다시 한번 우리 신앙의 완주를 굳게 다짐합시다. 우리 주님이 맡겨준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기로 결심합시다. 우리에게 주신 귀한 가족들을 믿음의 가정, 믿음의 가문으로 잘 세워가며, 부르심받은 교회를 충성스럽게 세우며 맡겨주신 직분을 최선을 다하여 받들며, 어떤 시련과 시험 속에서도 믿음의 달음질을 쉬지 않으며, 맞닥뜨리는 영적 싸움에서 끝까지 뒤로 물러가지 않고 끝까지 내 기도의 자리를 사수하며 나아가 사탄의 진지들을 하나씩 무너뜨리며 앞으로 전진하다가 이 신앙과 사명의 길 끝에서 마침내 주님을 만나고야 말겠다는 굳은 결심을 새롭게 합시다. 할렐루야.
사도 바울은 그의 사역 중반의 전환점을 맞아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홀로 도보 여행을 하면서 주님과 깊은 교제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지난 날을 성철하며 앞으로 달려갈 길을 주께 의탁하면서 새롭게 사명감을 부여받았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사명의 길을 완주할 것을 다짐했습니다. 우리도 각각 이 한 해를 보내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볼 계기로 삼아봅시다. 앞으로 얼마를 더 가게 될지 모르는 우리 신앙의 노정의 끝날에 승리자로 주님을 만나도록 고쳐야 할 것이 있다면 고치고, 버려야 할 것은 버리고, 더욱 끈기있게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가 헤아려 봅시다. 그리고 믿음의 선배인 사도 바울이 했던 결심을 우리도 굳게 가져봅시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그리하여 이 선한 결심이 우리 심령에도 굳게 세워져서 새해를 맞이하는 준비가 되는 이 한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