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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슨 흔적을 남겼는가?
(갈6:17-18)
<도 입>
세월은 유수와 같이 빠르게 지나갑니다. 2012년 1월 1일, 송구영신예배 시작한지가 어제 같은데, 벌서 2012년 한 해를 보내는 시점에 와 있습니다. 오늘과 내일 이틀이 지난 번 2012년이라는 한 해는 우리의 곁을 떠나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게 될 것입니다. 이틀은 아주 짧은 시간입니다. 이틀은 결코 긴 시간은 아니지만 아주 중요한 시간, 의미 있는 시간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틀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와 중요성은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이틀의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려면 2012년 한 해를, 하나님 앞에서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틀을 의미 있게 보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주의 시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시작하였으며, 하나님으로부터 끝이 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을 “알파와 오메가”되심을 거듭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계 1:8) (계 21:6) (계 22:13)
“알파와 오메가”는 말은 처음과 끝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뜻은 모든 역사 속에 있는 시간은 하나님이 주관하고 계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시간 속에서 능력을 베풀고 계시며, 앞으로도 계속 베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까지도 하나님 앞에서 소중히 여기며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보편적으로 시간을 자기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간마저도 하나님의 것임을 의식하는 사람은 시간을 활용하는 것도 다른 사람과 사뭇 다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틀의 시간을 하나님 앞에서 조명해 보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은 2012년 한 해를 마무리 하는데 적합한 말씀이며 좋은 말씀이 될 것입니다.
<본 문>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교회에 보낸 서신으로 마지막을 부분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6장까지 있으며, 6장 17과 18절은 마지막 절이기 때문에 당연히 결론에 해당됩니다.
저도 2012년 마지막 주일 설교이기 때문에 본문을 선택하여 한 해를 마무리 하는 의미에서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이 “2012년 나는 무슨 흔적을 남겼는가?”입니다. 설교 제목이 마지막 설교라는 뉘앙스가 풍겨나지요.
:17) 다 같이 봅니다.
18절은 마지막 인사이기 때문에 실상은 17절이 결론입니다. 그래서 17절과 18절은 각각 다른 문장으로서, 독립적인 문장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이후로는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여기 ‘괴롭다’는 말은 좋은 말이 아닙니다. 성경에 고난에 대한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괴로움’은 좋은 것은 아닙니다.
“나를 더 이상 괴롭게 하지 말라” 이 말은 바울이 갈라디아교회를 향하여 마지막으로 하는 호소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말은 권면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호수문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호소문은 권면보다 더 강한 요구성이 담겨있습니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것 같습니다만 우리 공부할 때는 학생들이 ‘웅변’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전국학생웅변대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입상만 하면 말 잘하는 학생으로 인정되었습니다. 중국에도 옛날에는 이런 웅변 문화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옛날에 웅변했던 연사(演士)들이 갑자기 생각나서 지금 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연사들은 어떤 당위성에 대해 구구절절 말한 다음에 끝 부분에서, “한 손을 높이 들면서(제스처), 나 000연사는 ~~~ 여러분에게 이렇게 호소합니다.”라고 관중들에게 최대한 호소력으로 유도하면 그때 관중들은 열렬한 박수로 화답을 해 줍니다. 호소력이 강할수록 박수 소리는 크고 오래 갑니다.
여기 바울이 갈라디아교회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마치 어린 연사들이 호소했던 것처럼 호소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권면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호소문 속에서 당시 두 가지 정황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바울의 호소문에는 당시 바울의 깊은 고뇌가 들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사도권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선택한 12제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바울을 불러 제자 훈련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항상 사도권에 대한 도전이 있었습니다. “네가 예수께 언제 사도로 임명을 받았느냐. 12사도 명단에 바울이라는 이름이 어디 있느냐.”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사도 바울은 괴로웠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사도 훈련을 받은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복음서에 몇 번 나오는 사도 명단에도 그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바울은 사도가 되어 있습니다. 물론 바울은 예수님이 공생애 시작하면서 선택된 사도는 아닙니다. 그러나 부활 이후에 하늘로 승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사도로 칭함을 받았습니다. 영적으로 사도가 된 바울에게 세상적이며 현실적인 관점으로 증거를 제시하라고 하면, 바울은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도 당당하게 사도가 되었기 때문에 “이후로는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당당함은 그의 서신 서두에 나오고 있습니다.
둘째로 바울의 호소문에는 갈라디아 지역에서 사도권에 대한 도전이 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갈라디아서 1:1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作使徒的保罗, (不是由於人, 也不是藉着人, 乃是藉着耶稣基督,与叫他从死里复活的父神)”
갈라디아서는 바울의 사도권에 대한 변호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갈라디아 지역에서 바울의 사도권에 대한 도전이 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보충설명)
그리고 서신 마지막에서는 ‘이후에는 괴롭게 하지 말라’고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 ‘괴롭게’라는 말은 내면적인 고통이나 슬픔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괴로움은 단순히 육체적인 괴로움만을 뜻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괴로움은 두 가지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첫째는 육체적인 괴로움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사도권의 도전은 심리적, 정신적 고통으로 오는 괴로움입니다. 그리고 유대주의자들로부터 받은 폭력도 바울에게 있어서 적잖은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육체적인 고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영적인 괴로움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유대주의자들에게 잘못된 복음, 즉 율법주의에 미혹되는 것과 완전히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이단에게 유혹받고 있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영적인 괴로움도 있었습니다.
바울의 서신에는 교리적인 성격을 띤 서신들이 있습니다. 로마서가 제 1의 교리 서신서 라면 갈라디아서는 제 2의 교리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가 교리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은 갈라디아 교회에는 그 만큼 교리적인 것이 필요로 했다는 것을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바울을 괴롭게 한 것은 복음을 전하면서 받은 고난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여러 환경 속에서 다양한 괴로움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이며, 동역자인 디모데에게 목회 서신을 보내면서 “너는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이기 때문에 복만 받아야 하되, 10배, 20배 받을 것”이라고 격려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고난과 핍박을 받아야 할 것”을 당부하고 또 당부하고 있습니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딤후1:8, 12, 2:3, 9, 3:11-12, 4:5 등 거듭 강조)
바울에게 있어서 ‘고난과 핍박’은 앞으로 다가올 것을 예측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복음을 전하면서 경험했던 체험담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하늘에서 상급으로 주어지는 것이지 이 세상에서 주어지는 복덩어리가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복음’과 ‘고난’은 지폐 앞뒤 면과 같은 원리이며, 기차 레일과 같은 길이기도 합니다.
돈 100원 짜리가 앞면은 진짜인데 뒷면은 가짜라면 화폐의 가치가 전혀 없는 ‘위조지폐’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설명, 위조지폐)
복음은 자신 있게 당당하게 전하겠는데 고난이 있는 복음은 전하지 않겠다는 말은 100원 짜리 앞면은 진짜인데 뒷면은 가짜와 같은 것입니다. 화폐가 양면이 진짜일 때 진정한 가치가 있듯이 ‘복음’과 ‘고난’도 함께 했을 때 진정한 가치가 있으며, 하늘의 상급이 되는 것입니다.
기차 레일은 어떻습니까? 기차 레일은 항상 동일한 거리를 두고 있어야 합니다. 레일이 일정한 거리에서 조금이라도 이탈을 하면 기차는 탈선하고 말 것입니다. 복음의 길은 기꺼이 가겠다고 하면서, 고난의 길은 굳이 가지 않는다면 마치 레일이 변형되어 대형 사고가 난 것과 같습니다. 기차의 대형사고, 듣기만 해도 무서운 이야기일 것입니다. 고난을 싫어하는 복음은 기차 탈선 사고와 같이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비롯한 다른 사역자들에게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과 ‘고난’은 결코 각각 별개의 길이 아니라 반드시 같이 가야 할 길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사도 바울은 다음으로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 흔적에 대해 먼저 이해를 해야 합니다.
흔적의 사전(명사)적 의미는 이렇습니다. “어떤 일을 한 후에 뒤에 남겨진 것”을 말합니다. 어린 아이가 밥을 먹은 다음에는 어떤 흔적을 남길까요. 흔적은 어린 아이만 남기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남깁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애쓰며, 어떤 사람은 남긴 흔적을 없애버리려고 애씁니다. 흔적은 이 만큼 우리의 생활 속에 깊숙하게 들어와 있습니다.
도둑이 빈집에 들어와 물건들을 훔쳐갔습니다. 공안에 신고하면 공안들이 즉각 출동하여 집안을 샅샅이 뒤집니다. 왜 경찰들이 집안을 샅샅이 뒤집니까? 흔적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공안은 머리카락 하나라도 눈에 보이는 흔적을 찾지만, 지문과 같은 보이지 않는 흔적도 찾습니다. 왜냐하면 머리카락 한 개를 가지고도 범인을 잡을 수 있는 첨단 과학 수사가 가능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몸에 남긴 예수의 흔적이란 무엇이며, 어떤 흔적이 남아 있기에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바울이 말하고 있는 ‘흔적’에 대해 당시 언어적 의미와 사회적 문화도 함께 알아야 합니다. 앞에서 말한 ‘흔적’은 지금 우리가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단어적 의미로 말한 것입니다.
신약 성경은 헬라어로 기록되었습니다. 헬라어로 ‘흔적’에 해당되는 ‘스티그마타’라는 말은 주인이 자기 소유인 것을 나타내기 위해 소나 양에게 불도장인 화인(火印)을 찍어 ‘자국’을 남기는 것을 말합니다. 불도장으로 찍어야 확실한 흔적을 남길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소유권을 불도장으로 확실하게 표시하는 것입니다.
도적이 머리카락을 남기고 갔지만 바람에 날아 가버리면 확실한 흔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문을 남기고 갔다면 그것은 확실한 흔적(증거가)이 됩니다. 그래서 범인은 지문의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장갑을 끼고 범죄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공안은 육안으로 보이지도 않은 지문이라도 찾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불도장인 화인은 지문보다 더 확실한 흔적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한 예수의 흔적은 분명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바울이 말하는 흔적은 예수의 복음을 전하면서 받았던 수많은 육체적 고난과 핍박의 흔적 그리고 몸에 실제로 남아 있는 박해의 상처들을 뜻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몸에 구체적으로 남아 있는 흔적들은 어떤 것들일까? 사도 바울은 자기 몸에 남아 있는 예수의 흔적들에 대해 고린도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다음과 같이 남기고 있습니다. (고후 11:22-29)
“저희가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아브라함의 씨냐 나도 그러하다.”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다.” 이런 흔적들은 유대주의자들에게 받았던 고난과 핍박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과 복음에 충돌로 받은 고난과 핍박을 말합니다.
그 나머지 고난들 “옥게 갇힌 일, 강도의 위험, 추위에 굶고 목마름, 헐벗음” 등은 복음을 전하는 선교 현장에서 일어났던 일이기 때문에 몸에 지닌 ‘예수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8, 29)절을 다 같이 봅시다. 28, 29절은 육신적인 고난이라기보다는 심령의 고난, 영적으로 싸우면서 가졌던 고난입니다. (보충설명)
사도 바울은 육적인 흔적, 영적인 흔적 모두 지니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이러한 육적인 고난과 영적인 고난은 고린도서에만 나타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전 서신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의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예수의 흔적을 남겼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 있게 흔적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제자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까지 신앙생활 하면서 어떤 예수의 흔적을 남겼습니까? 아니 멀리 가지 않더라도 2012년 한 해 동안 남긴 예수의 흔적은 무엇입니까?
이제 본문으로 돌아가 18절을 봅니다.
18절은 바울의 마지막 인사입니다. 흔히들 바울의 서신에 나타난 통례(通例)적으로 하는 마지막 인사라고 합니다. 물론 바울 서신에는 이런 형태가 특징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하는 인사말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이 반드시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 ‘은혜’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구속사적인 은혜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은 각 사람의 행위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에 있기 때문에 은혜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구원에 근원에 대해 말하고 있는 에베소서에서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전제하면서, 사람의 행위에서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엡2:8, 9)
<결 론>
사람은 어디를 가든,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어떤 형태라도 흔적을 남기게 됩니다. 그리고 그 흔적에 따라 평가나 결과는 판이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좋은 흔적은 좋은 결과로 나타날 것이며, 나쁜 흔적은 나쁜 결과로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흔적을 남기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율법의 사상을 중심으로 하는 유대교에서 복음을 중심으로 하는 오늘날기독교로 개종을 했습니다. 만약에 바울이 유대교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유대교의 대한 ‘충성의 흔적’은 남아있었겠지만 ‘예수의 흔적’은 아마 찾아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반면에 바울은 잘못된 유대주의적인 교리를 가감하게 버렸고, 그리고 율법의 울타리에서 완전하게 벗어나서 예수의 복음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예수의 흔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바울의 두 흔적의 역사를 가름해 주고 있습니다. 아마 유대교의 대한 충성의 흔적은 “율법으로 구원받는 다는 교리, 예수 믿는 사람들을 옥에 가두고 죽이는 일” 이런 등등에 유대교의 흔적들을 남겼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2012년에 어떤 흔적을 남겼습니까?
서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흔적’은 우리 생활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가 머문 곳에 흔적을 남기게 됩니다. 직장에서, 사업장에서, 가정에서 그리고 사회(이웃)에서 자기의 의식과 상관없이 자연스럽게 흔적을 남깁니다.
여러분은 2012년 한 해 동안 어떤 흔적을 남겼습니까?
혹시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애쓰지는 않았습니까?
혹은 자기가 남긴 흔적을 팍팍 지우려고 애쓰지는 않았습니까?
혹은 1년 동안 나의 흔적과는 무감각하게 살지는 않았습니까?
여러분은 이 네 가지 중에 어디에 해당됩니까?
그리고 우리는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다면 또 다른 흔적, 예수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이 있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바울처럼 보일만한 예수의 흔적은 있습니까?
여러분! 바울이 말하고 있는 예수의 흔적은 고난과 핍박에만 함축되어 있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삶의 실천(순종)적 의미로서 수많은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끝까지 예수의 복음을 전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몸에 남겨진 예수의 흔적은 고난에 참여하여 얻은 거룩한 증표이기도 합니다.
바울에 있어서 고난과 핍박은 소극적인 흔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러한 환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복음을 전한 것은 적극적인 흔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남긴 예수의 흔적은 바울이 남긴 흔적이지 결코 내가 남긴 흔적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다시 한 번 묻습니다.
“여러분! 2012년 1년 동안 예수의 어떤 흔적을 남겼습니까?”
이 물음이 오늘 설교의 핵심이면서 결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2012년이 우리의 날(시간)만이 아니기 때문에 2012년에 예수의 흔적을 남기지 못했다면 2013년에는 예수의 흔적을 꼭 남기기를 바라는 메시지가 오늘 설교의 담겨져 있습니다.
이틀 동안에 2012년을 잘 마무리하시고, 2013년 새해를 기쁨으로 맞이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영혼과 삶 속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멘)
<묵상합니다>
첫댓글 베리칩 종말론자들은 베리칩 흔적만 남을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으로 본 설교를 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