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列國誌] 528
■ 2부 장강의 영웅들 (184)
제8권 불타는 중원
제 24장 쓰러지는 부도옹(不倒翁) (4)
역사는 이따금씩 아이러니한 일화를 보여준다.
귀족 집권시대를 알리는 미병지회(弭兵之會)가 열린 그 해, 제(齊)나라의 최고 권력자인 최저(崔杼)가 멸망의 수렁 속으로 빠져든 것이었다.
쓰러지는 듯하면서도 다시 일어나 권력을 움켜쥐었던 최저.
그 부도옹 최저(崔杼)도 끝은 있었다. 그런데 그 종말이 너무나 허무했다.
- 자살.
역사의 기록까지 바꾸려 하며 영원한 권력에 도전했던 최저의 최대 적은 결국 자신이었다.
제장공을 죽이고 제경공을 옹립한 지 2년.
그 2년 동안 최저(崔杼)는 부러운 것이 없었다. 조정은 그의 저택으로 옮겨온 듯했다. 그는 나라의 일을 자신의 집 안에 앉아 처리했다. 정무를 보는 방을 따로이 마련했을 정도다.
그런 최저를 가장 가까이 모시는 측근은 아내 당강의 오라비인 동곽언(東郭偃)과 당강의 전 남편 소생 당무구(棠無咎)였다. 이를테면 비서실장과 경호실장이다. 그들 또한 엄청난 권력을 거머쥐었다.
아들 최성(崔成)과 최강(崔彊)은 최저가 갖고 있는 권력의 핵심부에서 제외되었다.
다만 막내인 당강의 소생 최명만은 늘 최저 곁에 머물렀다. 최저(崔杼)는 틈만 나면 동곽언과 당무구를 앞에 앉혀놓고 말했다.
- 나를 대하듯 잘 보필하고 가르치도록.
앞으로 최씨를 계승할 사람은 최명이라는 암시였다.
장남 최성(崔成)은 아버지의 뜻을 알았다.
공연히 후계자리를 노려 피곤한 싸움을 벌이느니 임치성을 떠나 편안하게 지내자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를 찾아가 간청했다.
"모든 상속권을 최명에게 넘겨주십시오. 소자는 최읍(崔邑)에 가서 조용히 지내겠습니다."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유를 내걸어 상속 권한을 포기하겠다는 것이었다. 다만 먹고 지내는 일만은 보장해달라는 의미에서 식읍인 최읍(崔邑)을 요구했다.
"좋다."
최저(崔杼)는 그 자리에서 허락했다. 그로서는 가장 껄끄러운 일 하나가 해결된 셈이었다.
최성(崔成)은 심지가 깊었다.
성품이 과격한 동복동생 최강(崔彊)에게도 함께 임치성을 떠날 것을 권했다.
"어떠냐, 공연히 이 곳에 남아 시끄러운 일에 휘말리지 말고 나와 함께 최읍으로 떠나는 것이?"
최강(崔彊)은 불만이긴 하였으나 집안을 평온하게 하려는 형의 마음을 읽고 생각을 바꿨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이대로만 되었더라면 최저에게 별일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최저의 측근 가신인 동곽언(東郭偃)과 당무구(棠無咎)가 돌을 던졌다.
"최읍(崔邑)은 최씨의 영지입니다. 시조를 모신 사당도 그 곳에 있습니다. 후계자를 최명으로 정했으면 그 땅 또한 마땅히 최명에게 상속해야지, 어찌 적자(嫡子)에서 물러난 최성(崔成)에게 내준단 말입니까? 그것은 안 될말입니다."
"그런가?"
최저(崔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면담 내용이 최성과 최강의 귀에 전해졌다.
최성(崔成)은 안색이 창백해졌고, 최강(崔彊)은 분노를 이기지 못해 얼굴이 벌개졌다.
"형님께서 적자의 자리까지 양보했는데, 그까짓 고을 하나 내주지 못하겠다고 한다면 말이 되질 않습니다. 동곽언(東郭偃)과 당무구(棠無咎)는 후일 우리 집안을 말아먹을 작자들입니다. 도저히 이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아무런 힘도 없는데, 어쩔 수 없질 않느냐?"
"제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좌상 경봉(慶封)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경봉(慶封)은 아버지 최저의 국정 동반자다.
아버지만큼은 아니지만 막강한 권력을 독자적으로 갖고 있었다. 더욱이 경봉은 최성을 최씨 일족의 후계자로 알고 있다.
"반드시 도와줄 것입니다."
최성(崔成)과 최강(崔彊)은 몰래 경봉의 집으로 가 면담을 신청했다. 조용한 방으로 들어가 그간의 경위와 자신들의 처지를 호소했다.
"우리가 동곽언과 당무구를 죽일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순간, 경봉(慶封)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이번 최씨 형제들의 분란이 최저의 약화를 가져오지 않을까.'
이런 기대감이 스쳤다. 평생을 최저의 그늘에 가려 지내온 경봉(慶封)이다. 제 1의 자리로 도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경봉의 머릿속은 바쁘게 움직였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이내 무겁게 가라앉았다.
결정적으로 그를 망설이게 하는 것이 하나 있었다.
- 최저(崔杼)는 쓰러지지 않는다.
라는 두려움 같은 믿음이 경봉의 마음속을 절반 이상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최고 권력자 최저의 집안일이다.
공연히 끼어들었다가 자신에게 해가 미치지나 않을까 염려되었다. 그렇다고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기도 아까웠다.
경봉(慶封)은 일단 최성, 최강 형제를 부드럽게 위무했다.
"자네들의 처지는 충분히 알아들었네. 일단 돌아가서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게. 조만간 사람을 보내 연락해주겠네."
경봉(慶封)은 깊은 상념에 젖었다.
'이럴 때 좌(佐)가 살아 있었더라면..........'
동생 경좌는 형 경봉과 달리 과감한 면이 있었다. 그러나 지난해 전염병으로 죽었다. 경봉으로서는 훌륭한 참모를 잃은 셈이다.
발소리가 나는 바람에 경봉(慶封)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방문이 열리고 한 가신이 들어왔다.
노포별(盧蒲嫳)은 경씨의 가신으로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는 신참이었다. 제장공의 측근 무사 노포계의 동생이다. 하지만 형과는 진작에 연을 끊었다고 했다. 매우 성실하고 일 처리 솜씨도 깔끔하다.
- 괜찮은 자를 얻었다.
노포별에 대한 경봉(慶封)의 인식이었다. 다만 마음에 꺼림칙한 것은 어딘지 모르게 어두운 눈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럼 이만........."
노포별(盧蒲嫳)이 물러가려 할 때였다.
"잠깐!"
경봉(慶封)은 자신도 모르게 노포별을 불러앉혔다.
"무슨 분부라도........."
"만일 자네라면 이런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
경봉(慶封)은 얼마 전 최성, 최강 형제가 다녀간 일을 노포별에게 숨김없이 얘기해주었다. 특유의 어두운 눈빛으로 경봉의 말을 끝까지 듣고 난 노포별(盧蒲嫳)이 뜻밖에 밝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최씨 일족이 어지러우면 그만큼 좌상께서는 큰 이익이 생기겠지요."
최저(崔杼)와 경봉(慶封)은 국정 동반자 관계인 듯하지만 실제로는 종속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제 1인자와 제 2인자의 차이다. 그 간격을 좁힐수 있거나 역전시킬 수 있는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는다. 경봉의 힘만으로는 최저를 타고 누를 수 없다.
그런데 그 기회가 왔다. 최저 쪽에서 스스로 그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경봉(慶封)은 노포별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속으로 놀랐다.
'이자에게 이런 면이 있었던가?'
다른 한편으로는 기쁨이 샘솟듯 차올랐다. 자신의 내면 깊숙이 숨어 있는 욕망을 정확히 끄집어내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새삼 야망이 끓어올랐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보게."
"하늘이 좌상을 위해 내린 기회입니다. 최성, 최강 형제를 이용해 먼저 최저의 양팔인 동곽언(東郭偃)과 당무구(棠無咎)를 처치하십시오.
그렇게만 된다면 최씨 일족의 힘은 반으로 줄어들 것이요, 경씨 일족의 힘은 배로 늘어날 것입니다."
"그대가 이번 일을 맡아줄 수 있겠는가?"
"주인님을 위한 일이라면 얼마든지........!"
노포별(盧蒲嫳)이 이번 일에 적극적인 것은 다름이 아니다.
망명한 형 노포계의 소원인 제장공의 원수를 갚을 둘도 없는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런 기회를 노리고 경봉의 가신으로 잠입한 것이 아니던가.
그 날 밤이었다.
노포별(盧蒲嫳)은 최저의 저택으로 가서 비밀리에 최성, 최강 형제를 불러냈다.
"좌상께서 그대 형제를 지원하기로 결심하셨소. 하지만 눈에 띄게는 도와줄 수 없소."
"그야 당연하지요.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우선 갑옷 1백 벌과 필요한 병장기를 내준다 하셨으니 인수해가시오. 만일에 대비하여 내가 그대들을 도우러 달려오겠소. 그대들은 안심하고 거사하시오."
"고맙습니다."
두 형제는 어금니를 깨물며 각오를 다졌다.
🎓 다음에 계속..........
< 출처 - 평설열국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