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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입은 영혼을 위로하는 연주를 시작하며"
나는 아래 글에서 인류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언어가 어떻게 타인을 파괴하는 '무기'로 타락해왔는지 그 궤적을 짚어봅니다. 레닌의 낙인과 알렌스키의 조롱은 민주주의라는 탈을 쓰고 여전히 인류 사회의 건전한 담론장을 오염시키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고백하건대, 나 또한 그 독한 언어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운 성자가 아니었습니다. 타인을 향해 쏘아붙였던 나의 서슬 퍼런 말들 역시, 사실은 내 안의 결핍과 가난이 만들어낸 '상처의 비명'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정치는 적을 섬멸하라고 말하지만, 문학은 그 적 또한 상처 입은 인간이니 보듬으라고 말합니다. 이제는 나부터 무기가 된 언어를 내려놓고, 내 영혼의 감옥문을 열어준 '식은 죽 한 그릇'의 성찰을 통해, 우리 삶이 나아가야 할 진정한 '유희'의 길(헤르만 헷세가 말한 길: 고결한 정신적 가치를 어떻게 현실의 삶 속에 뿌리내리게 할 것인가? )로 가고자 합니다. 그래서 문학에 깊이 빠져들고 문학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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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가 된 언어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맹렬하게 일어났던 공산주의자들의 정권 탈취 전술과 그 현대적 변용에 대하여)
언어는 인간의 생각(사상)을 공유하고 합의를 이끌어내는 소통의 도구입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정권 탈취 전술을 살펴보면, 언어는 소통의 도구가 아닌 상대를 무력화하고 대중을 선동하는 강력한 ‘무기’로 기능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사용한 언어는 단순한 수사학적 표현을 넘어, 치밀한 심리전과 정치 언어학의 교범을 따르는 전략적 행동이었지, 진실과 진리를 향한 이해와 깨우침을 위한 언어 본연의 기능인 소통을 위한 도구가 아니었습니다.
1. 파괴의 도구로서의 언어: 레닌의 유산
공산주의 혁명의 기틀을 마련한 블라디미르 레닌은 언어를 설득의 수단이 아닌 ‘부수고 파괴하는 도구’로 정의했습니다. 그에게 언어가 갖는 목적은 상대방의 논리를 진실에 기반하여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대열을 흩어놓고 섬멸하는 데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핵심 전술이 바로 ‘낙인찍기’입니다. 반대 세력을 ‘반동’, ‘인민의 적’, ‘파시스트’와 같은 극단적인 용어로 규정함으로써 대중이 그들을 이성적으로 판단하기 전에 감정적으로 혐오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폭력적 언어 사용은 상대방을 대화의 주체가 아닌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전락시키며, 이른바 ‘미운 오리 새끼 만들기’ 전략을 수행합니다.
2. 사고의 개조와 이분법: 마오쩌둥의 선전술
마오쩌둥은 언어를 통해 대중의 사고방식 자체를 개조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모든 인간관계를 적과 아군으로 나누는 계급 용어를 일상화했습니다. 중립적인 태도를 허용하지 않는 이분법적 언어는 대중을 끊임없는 갈등과 투쟁의 장으로 끌어들였고, '대자보'와 같은 매체를 통해 자극적이고 단정적인 문구를 반복적으로 주입했습니다. 이는 대중의 논리적 사고를 마비시키고 분노를 극대화하여 군중 심리를 조절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3. 현대적 변용: 용어 혼란 전술과 프레임 전쟁
3-1. 안토니오 그람시의 진지전 이론
현대에 이르러 이 전술은 더욱 교묘한 ‘용어 혼란 전술(Terminological Warfare)’로 발전했습니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진지전 이론과 비판 이론을 거치며 고도화된 이 기법은 단어의 의미를 재정의하는 방식을 취합니다. ‘민주주의’, ‘자유’, ‘인권’과 같이 보편적으로 긍정적인 단어들을 자신들의 이념에 유리하게 재해석하여 사용함으로써 대중에게 혼란을 줍니다. 도덕적 우위를 점하는 단어를 선점하고 반대파에게는 부정적인 프레임을 씌움으로써 논의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입니다.
3-2. 사울 알렌스키의 '조롱'과 '개인화'
사울 알렌스키는 레닌의 파괴적 언어를 현대 민주주의 시스템에 맞게 최적화했습니다. 그의 저서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에서 제시된 언어 전술은 진실 여부보다는 오직 '승리'와 '굴복'에만 집중합니다.
(1) 조롱의 무기화
알렌스키는 "조롱은 인간을 무너뜨리는 가장 강력한 독이자 무기다"라고 단언했습니다. 상대를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조롱과 비하의 언어는 상대방을 이성적 대화가 불가능한 '바보'로 낙인찍어 방어 기제를 무력화합니다. 이는 건전한 비판을 '멸시'로 치부해버리는 오염된 언어 환경을 조성합니다.
(2) 표적의 개인화
추상적인 대상이 아니라 구체적인 '개인'을 표적으로 삼아 악마화합니다. 정책적 시시비비 대신 특정 인물의 인격과 도덕성을 집요하게 공격하여 대중이 그 인물 자체에 혐오감을 느끼게 만듭니다.
(3) 중도층의 이탈 유도
의도적으로 자극적이고 독한 언어를 살포하여 갈등을 극대화합니다. 이는 합리적인 중도층이 피로감을 느껴 논쟁에서 이탈하게 만들고, 결국 목소리 큰 극단주의자들이 담론의 장을 독점하게 만듭니다.
4. 언어 전술의 주요 특징과 메커니즘
이러한 전략들은 몇 가지 공통된 교범적 요소를 갖습니다.
(1) 반복과 주입
짧고 강렬한 구호를 반복해 비판적 사고를 차단합니다.
(2) 흑백논리
중간 지대를 없애고 극단적인 대립 구조를 만듭니다.
(3) 도덕적 타락화
정책적 비판 대신 인격을 공격해 사회적으로 매장합니다.
(4) 위장 용어
‘평화’, ‘연대’ 등 부드러운 단어 속에 과격한 목적을 숨깁니다.
5. 참 문학인의 자세: 깨어있는 시민을 위한 언어의 회복
사울 알렌스키의 전술이나 조지 오웰의 『1984』 속 '신어(Newspeak)' 개념에서 볼 수 있듯이, 언어를 독점하고 오염시키는 행위는 전체주의적 통제의 시작입니다. 공산주의 전략 전술에서 나타나는 독한 언어들은 단순한 감정의 분출이 아니라, 치밀하게 계산된 파괴의 정치학입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 문단에서도 이러한 언어적 선동과 프레임 전술이 건전한 문학 발전의 장을 오염시키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알렌스키가 설파한 전술에서 언어는 상대를 파멸시키기 위한 '비수'였으나, 문학인의 언어는 죽어가는 가치를 살리는 '생명'이어야 합니다. 선동 전술에 포섭된 언어는 문학을 정치의 하녀로 전락시킬 뿐입니다. 언어의 독성을 제거하고 단어 본연의 의미를 회복하는 것, 그리고 자극적인 수사 뒤에 숨겨진 의도를 냉철하게 꿰뚫어 보는 것만이 건강한 민주 사회를 지키는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2025.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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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 인사와 식은 죽 한 그릇
- 나의 문학적 편린과 정치적 단상
찬 기운이 스미는 계절, 어제는 땅속 깊이 무를 묻으며 겨울을 맞을 준비를 했다. 오늘 아침에는 헤르만 헷세의 시 <꽃에게 물을 주며>를 읽는다. 세상을 울리는 작품 하나 써내지는 못했지만, 나는 희미하게나마 문학의 본질과 문학이 아름다워야 하는 이유를 느끼고 있다. 문학에서 쌍스러운 말과 욕설을 경계하는 것은, 그것들이 인간의 영혼을 황폐하게 만드는 독과 같기 때문이다. 거친 언사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에게서는 인간으로서의 성숙함을 느끼기 어려워, 나는 그들과 쉬이 가까워지지 못한다.
'격물치지, 성의정심,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는 인간 정신세계의 발달 단계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성찰이 담긴 언어라 생각한다. '격물치지'에 머무르고 진실한 마음인 '성의정심'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세상의 모순을 향해 분노와 욕설이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오기 마련일 것이다. '격물치지'를 넘어 자신을 다스리는 인내, 즉 '수신제가'의 노력이 뒷받침될 때, 비로소 타인을 이해하고 공동체를 사랑하는 '성의정심'이 싹튼다. 그리고 그 힘을 바탕으로 이웃과 세상을 평화롭게 다스리는 '치국평천하'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이는 미분에서 적분으로, 소승적 세계관에서 대승적 세계관으로 확장되는 인간 정신의 자연스러운 성장 과정이라 생각한다.
깊은 상처를 가진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비난과 공격이 아닌, 따뜻한 위로와 공감일 것이다. 가난했던 시절의 아픔을 독기로 품고, 오직 성공과 복수를 위해 질주하는 사람의 내면에는 깊은 '한(恨)'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 '한'은 연민과 사랑으로 보듬어야 할 인간적인 고뇌이지, 복수를 통해 해소될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복수는 또 다른 '한'을 잉태하는 악순환을 낳을 뿐이다. 작가로서 나는 복수심에 불타는 독재자보다는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자유주의자를 지향한다. 그것이 또한 문학의 숭고한 사명이라고 믿는다.
아련한 기억 속, 초등학교 5학년 무렵이었을까. 점심도 거른 채 아버지와 드넓은 보리밭을 매던 날이었다. 보릿고개를 이겨내려고 어머니는 어린 동생을 업고 괴나리봇짐을 짊어진 채 장사를 나섰다. 뜨거운 햇살이 쏟아지고 종다리가 높이 날아 지저귀면, 그 소리에 홀려 배고픔마저 잊곤 했다. 건너편 밭에서는 재종 누님이 보리밭을 매고 있었다. 보자기에 싼 점심을 꺼내 먹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함께 먹자고 부르지도 않네' 하는 서운한 마음이 스쳤지만, 나와 아버지는 긴 보리밭을 기며 김을 매었다. 시간이 흐르고, 누님도 식사를 마쳤는지 일어서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같이 먹자고 부르려다가 멀어서…" 하며 멋쩍게 웃었다. 그 순간, 보리밭 이랑에서 벌떡 일어선 나는 누님을 향해 쏘아붙였다.
"헛 인사는 식은 죽 한 그릇보다 못해요!"
어디서 그런 당돌한 말이 튀어나왔는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어른들의 이야기를 어렴풋이 주워들은 것이 무의식 속에 박혀 있었던 것일까. 그말 속에는 가난에 대한 트라우마, 세상에 대한 숨겨진 미움과 증오의 덩어리가 웅크리고 있었지만, 그때는 알지 못했다. 작가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그 미움과 증오를 자식처럼 끌어안고 세상을 살아왔음을 깨달았다. 자학과 가학 사이를 오가며, 그것이 나만의 방식으로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는 방식이라고 착각했던 것이다. '한'이라는 트라우마의 포로가 되어, 나의 영혼은 자유를 잃고 좁은 감옥 속에 갇혀 있었다.
"로또 복권을 사는 심리",
"한 번에 떼돈을 벌어 한을 풀고 싶다는 욕망",
"절대 권력을 쥐고 마음대로 하고 싶다는 심리"
속에는 타인을 향한 진정한 마음, 즉 '성의정심'이 부재한다. 금수저, 흙수저 논쟁 역시 마찬가지다. 사랑이 없다면, 결국 서로를 타도의 대상으로 삼게 된다. 그래서 '한'이 많은 사람들의 귀에는 "부르주아"나 "프롤레타리아" 같은 낯선 단어가 신비롭게 들려서 쉽게 빠져드는 것이다. 세상에 그 어떤 생명도 함부로 짓밟고 타도해야 할 존재는 없다. 선과 악조차 인간 사회 속에서 인간의 정신 작용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다. 홀로 자연인으로 살아간다면, 선악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 톨스토이의 <부활>,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과 같은 불후의 명작들은 모두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랑을 주제로 담고 있다. 진실한 사랑이야말로 인간의 깊은 상처,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궁극적인 힘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유희'로 변질된 잔혹한 생존 경쟁을 보여주는 <오징어 게임 >이 전 세계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는 소식이다. 어쩌면 사이버 공간에서나마 인류의 억눌린 '한'풀이가 시작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이라고 표현할 때는 쉽게 와 닿지 않던 감정이 '트라우마'라는 단어로 바뀌니 비로소 가슴 깊이 그 의미가 새겨진다. 만약 내가 대통령이 된다면, 인간 생존에 필수적인 의식주를 해결하고, 모든 이들이 건강하고 자유롭게 삶을 즐기는 아름다운 세상, 문학과 예술이 꽃피는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고 싶다. 이것이 나의 정치적 소신이자, 문학을 통해 궁극적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나의 철학이다. 나눠 먹을 것조차 없어 많이 미안했던 그 누님도, 가난했던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이제는 이 세상에 없다. 깊어가는 가을밤, '살아내면서' 무심코 던졌던 모진 말들이 천둥소리처럼 밤마다 귓가를 맴돈다. 유희해야 할 젊은 날에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고 미움과 증오의 독기를 품고 살았던, 가난이 죄처럼 느껴졌던 그 시절이었다. 나로 인해 상처받았던 모든 영혼들에게 진심으로 사죄한다. 용서를-.
주어진 시간이라는 오선지 위에서 자신의 삶을 연주하는 사람들이여! 부디, 저마다의 아름다운 선율로 삶을 채워나가기를 바란다. 그것이야말로 이 땅에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가장 숭고한 정치적, 문학적 소명이 아닐까. 오늘 밤, 나는 헤르만 헷세가 마지막으로 남긴 걸작, <유리알 유희>를 다시 펼쳐볼 생각이다.(2021.11.14.)
(추신)현대인들에게 서울의 번듯한 아파트는 단순한 거주지를 넘어, 과거의 가난과 무시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정신적 성벽'이자 '보상'이 되었습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무시당하지 않는다"는 무의식적 외침이 폭등하는 가격 뒤에 숨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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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든 남자
저는 어릴 때 우리 집이 없는 환경에서 초등학교를 다녔습니다. 학교에서 동요 <꽃밭에서>라는 노래를 배우며 내 꽃밭을 가져보는 게 소원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종조모 댁 사랑방에서 더부살이로 살았는데 나는 그 집 담 밑에다 논흙을 퍼다 와서 작은 꽃밭을 만들고 해바라기 씨 하나를 심었지요. 그런데 동생이 장난치다 그만 그 해바라기 싹을 밟아 뭉개 버렸어요. 튼실한 떡잎 두 장이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솟아오른 늠름한 자태가 무개념한 동생의 실수로 참혹하게 무너진 정경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어른이 되어 꽃밭에서 살고파서 오래전에 다사읍 고향 산 기슭의 고즈넉한 양지쪽 대전밭에다 매화나무를 심고 비닐하우스 창고를 한 동 지은 후 화개정이라 이름을 짓고 틈나는 대로 달려가서 꽃밭 가꾸기에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요즈음은 토요일 일요일 연속 휴무인지라 휴일이 되면 뚜렷이 할 일도 없고 그렇다고 새털 같이 많은 날들을 등산이나 여행만 다닐 수도 없는 처지라 아직은 풀밭에 불과하지만 제 나름의 꽃 왕국을 만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저는 전쟁베이비 세대입니다. 한국전쟁은 우리 사회 모든 곳에 폭력이 난무하게 한 시대적 후유증을 남겼지요. 전쟁세대와 전쟁베이비 세대는 한평생을 폭력의 시대를 살수 밖에 없었어요. 강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 시대는 언어적 폭력, 신체적 폭력, 성폭력, 패거리 싸움, 뇌물과 촌지 같은 권모술수가 일상이었어요. 가정 폭력은 물론 학교에서 부터 언어폭력과 빳다와 구타가 다반사였지요. 그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의 나이가 지금 60대에서 80대의 사람들 입니다. 우리 수필가들의 대부분도 이 시대 사람입니다. 이 분들의 정신세계가 문학이나 문단의 활동에서도 그대로 나타나 보이지요. 우리는 이러했던 과거의 상처가 남긴 집단무의식세계를 정화시키는 살풀이 작업이 필요한 불쌍한 세대입니다.
경제성장 시킨다며 밤마다 독한 양주를 퍼 넣고 룸살롱에서 불나비처럼 모여든 젊은 여인을 희롱하는 것을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아니했고 사내들 세계에서 배꼽 밑의 이야기는 불문에 붙인다며 날밤을 세우며 그런 술 상무 노릇을 잘하는 사람을 능력 있는 사람으로 대접했지요. 공적 조직의 본래 이념과 목표는 뒷전이었고 조직의 구성원을 한 통속으로 몰아넣어 개인의 졸개로 만들려고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면서 군림하려고 했지요. 그런 선배들 밑에서 일하면 저녁마다 술이었고 조직에서 “왕따” 되면 죽을 수밖에 없으니까 함께 미친척하며 따라 다녔지요. 이런 정신세계에서 살다가 철이 드니 순수가 그리워져 문학에 발을 디디게 되었는데 여기도 집단 패거리 정신이 그대로 남아 있었지요. 그걸 무너트리려고 만든 게 수필가협회 입니다. 오직 문학적인 정신과 순수로 모여서 활동하고 파괴된 인간성을 회복시키고 정화시키는 일에 오로지 수필로 일조하자고 뜻있는 의식들이 뭉쳐서 만든 것이지요. 그 정신이 가끔씩은 구시대 정신과 충돌을 일으키기도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높은 정신세계에 비하면 문학상 그런 것은 하찮은 이미테이션에 불과한 것이고, 문단의 감투는 순수 문학정신을 고양시키는 선한 청지기 의무를 다 할 때 그 존재의 의의가 있는 것인데도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구시대의 상처가 남긴 집단무의식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지요. 새 옷을 조각내어서 낡은 옷을 수선하는 어리석음에서 우리의 의식이 벗어나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마땅한데 혁명하듯이 헌 옷을 벗어 쓰레기 통에 넣어버릴 수가 없으니까 "꽃을 든 남자"가 되어서 ‘외로운 가슴 가슴에다 꽃씨를 뿌리면서“ 세상을 바꾸려는 것입니다.^^
# 우리사회 모든 분야의 개혁도 이와 하나 다르지 않습니다. 물질로만 채워진 육신에 담겨있는 정신영역에서의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2020.0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