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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어둠 속에 갇힌 불꽃 원문보기 글쓴이: 정중규
분통리의 여름
닷새만에 헛간에서 발견된
월평할매의 썩은 주검에서
수백 수천의 파리떼가 우수수,
살촉처럼 날아오르는 처참에 울고
빈대 뛰는 온 방안 뒤지고 뒤져
찾아낸 전화번호 속의 일곱 자녀들
기름때 묻은 머리로 하나 둘 달려와
뒤늦게 뉘우치며 목놓는 아픔에 울고
급기야 상여를 멜 남정네들 모자라
경운기로 울퉁불퉁 북망길 떠난 할매
굴삭기로 파놓은 구렁에 묻히는
그 험한 종말에 또 울었지만
어디 그뿐이랴 이 사양의 마을
그 어디건 헐린 담장, 텅 빈 마당에
개망초 눈물꽃은 흐드러지고
뻐꾹새 피울음은 종일 쏟아지고
이제 불과 예닐곱집 연기나는 곳
퀭한 눈만 남은 또 다른 월평네들의
간단없는 해소기침만 너무 질겨서
사방 산천 진초록도 목숨껏 노엽고
외로움에 대하여
들어봐, 저 처서절의 나뭇잎이
저렇게 서걱이는 소리,
풀잎들이 스치는 소리,
시방 달빛은 휘영청하고
앞들의 수숫대는 마냥 일렁이는 소리
들어봐, 저 풀섶의 씨르래기며
귀뚜라미 울어 끓는 소리에
동구밖 느티나무의 잎새들
바르르 떠는 소리,
그 옆 대숲 위에 부시럭부시럭
참새떼 뒤척이는 소리
외로운 이는 소리에 민감하나니
들어봐, 저기 저렇게
기차오는 소리,
기적 소리를 뿜으며 달려와
기차는 또 저 산모퉁이를 돌아
사라져 가버리는 소리
그러면 그러면, 그때마다
그 기차 불빛 한 줄기에도 반짝반짝
온 목숨 꽃사래치다간
이제 무척은 야위어버린, 저 간이역
코스모스들의 목 늘어지는 소리,
역사 위로는 툭, 툭
오동잎 아득히 지는 소리
소쇄원에서 시금(詩琴)을 타다
소쇄소쇄, 대숲에 드는 소슬바람
무엇을 마구 씻는가 했더니
한 무리 오목눈이가 반짝반짝 날아오른다
소쇄소쇄, 서릿물 스치는 소리
무엇을 마구 씻는가 했더니
몇 마리 빙어들이 내장까지 환하다
자미에서 적송으로 낙엽 따라 침엽 따라
괴목에서 오동으로 다람쥐랑 동고비 따라
빛나는 바람과 맑은 달이
飛潛走伏(비잠주복)을 다스리면
오늘은 상강, 저 진갈맷빛 한천 길엔
소쇄소쇄, 씻고 씻기는 기러기며와
소쇄소쇄, 씻고 씻기는 푸른 정신뿐
나 본래 가진 것 없어 버릴 것도 없나니
나 여기 와서는 바람 들어 쇄락청청
나 여기 와서는 달빛 들어 휘영청청
천지간의 네 속삭임
나, 무엇을 차마 기다리지 않았지만
무어라 무어라, 종일 속삭이는
저 봄비 아득한 숨결은 돌아와
이제 마악 옴짓거리는 살구나무의
어린 꽃망울엔 무슨 구실이 엉기는지
와르르 무너지는 해동의 담 너머
앞들 메말라터진 보리밭엔
무슨 꿈들이 파릇파릇해지는지
고요하여라, 다만 천지가 속삭이며
서로를 한없이 달래는 소리뿐
나, 무엇을 차마 기다리지 않았지만
그 오랜 자글거림도, 그 자글거림의
내 영혼 속 쓸쓸한 적막산천도
이제는 깨어나 봄비 머금는 시간,
동구밖 당산나무 둥치는
왜 그렇게 부르르 떨어대는지
거기 때까치는 젖어드는 날개를 접고
웬 생각에 골똘히 잠겼는지
나, 무엇을 차마 기다리지 않았지만
방죽가에서 느릿느릿
하늘의 정정한 것이 수면에 비친다. 네가 거기 흰구름 으로 환하다. 산제비
가 찰랑, 수면을 깨뜨린다. 너는 내 쓸쓸한 지경으로 돌아온다. 나는 이제
그렇게 너를 꿈꾸겠다. 草露를 잊은 산봉우리로 서겠다. 미루나무가 길게
수면에 눕는다. 그건 내 기다림의 길이. 그 길이가 네게 닿을지 모르겠다.
꿩꿩 장닭꿩이 수면을 뒤흔든다. 너는 내 그리운 지경으로 다시 구불거린
다. 나는 이제 너를 그렇게 기다리겠다. 길은 외줄기, 飛潛 밖으로 멀어지듯
요요하겠다. 나는 한가로이 거닌다. 방죽가를 거닌다. 거기 윤기 흐르는 까
만 염소에게서 듣는다. 머리에 높은 뿔은 풀만 먹는 외골수의 단단함임을.
너는 하마 그렇게 드높겠지. 日月 너머에서도 뿔은 뿔이듯 너를 향하여 단
단하겠다. 바람이 분다. 천리향 향기가 싱그럽다. 너는 그렇게 향기부터 보
내오리라. 하면 거기 굼뜬 황소마저 코를 벌름거리지 않을까. 나는 이제 그
렇게 아득하겠다. 그 향기 아득한 것으로 먼 곳을 보면, 삶에 대하여 무얼
더 바래 부산해질까. 물결 잔잔해져 水心이 깊어진다. 나는 네게로 자꾸 깊
어진다.
그리운 죄
산 아래 사는 내가
산 속에 사는 너를 만나러
숫눈 수북이 덮힌 산길을 오르니
산수유 고 열매 빨간 것들이
아직도 옹송옹송 싸리울을 밝히고 서 있는
네 토담집 아궁이엔 장작불 이글거리고
너는 토끼 거두러 가고 없고
곰 같은 네 아내만 지게문을 빼꼼히 열고
들어와 몸 녹이슈! 한다면
내 생의 생생한 뿌리가 불끈 일어선들
그 어찌 뜨거운 죄 아니랴
포르릉, 어치가 날며 흩어놓는
눈꽃의 길을 또한 나는 안다
수선화, 그 환한 자리
거기 뜨락 전체가 문득
네 서늘한 긴장 위에 놓인다
아직 맵찬 바람이 하르르 멎고
저기 시간이 잠깐 정지한다
저토록 파리한 줄기 사이로
저토록 샛노란 꽃을 밀어올리다니
네 오롯한 호흡 앞에서
이젠 나도 모르게 환해진다
거기 문득 네가 있음으로
세상 하나가 엄정해지는 시간
네 서늘한 기운을 느낀 죄로
나는 조금만 더 높아야겠다
날랜 사랑
장마 걷힌 냇가
세찬 여울물 차고 오르는
은피라미떼 보아라
산란기 맞아
얼마나 좋으면
혼인색으로 몸단장까지 하고서
좀더 맑고 푸른 상류로
발딱발딱 배 뒤집어 차고 오르는
저 날씬한 은백의 유탄에
푸른 햇발 튀는구나
오호, 흐린 세월의 늪 헤쳐
깨끗한 사랑 하나 닦아 세울
날랜 연인아 연인들아
별
겨울 하늘 두드리면
쨍- 소리날 것 같이 추운 날
들녘의 짚가리 밑에 앉아
거기 옥실옥실 모여 속살거리는
햇볕 속에서 놀다 오니
늙은이 혼자 거처하는 잿등집
어둔 대울바자에
쌀 씻는 소리로 반짝이기 시작하는
오, 별이여!
눈물말고 눈물말고
네 형형한 보석 무엇으로 빛나리
외로움은 자라서 산이 되지 못하고
외로움은 자라서 산이 되지 못하고
탱자울에 방자한 참새떼 소리
이제 그만 시끄럽다 한다
마을에 남은 사람들 몇몇
죄다 비닐하우스에 가버리면
하느님도 간간 바람으로 스쳐와선
후진 곳에 쓰레기 버리듯
은행나무 잎새를 우수수 쏟아버리게 한다
외로움은 빛나서 별이 되지 못하고
청대숲의 청대잎들
저희들끼리 몸을 버히게 하고
까짓것 알몸으로 알몸으로 온통 덤벼도
어느 손목뎅이 하나 건드리지 않는 홍시들
이제 그만 붉은 눈물 떨구게 한다
외로움은 질기고 질겨서
그래도 남은 무엇이 있다는 듯
삼밭의 폭배추를 포탄이 되게 하고
여차하면 날아버릴 듯 웅등거리게 하고
더는 반짝반짝 닦아내지 않는
장독대의 옹기들을 온통 검푸르게
간이 들게 하고, 간이 들어
미륵불처럼 처연하게 하고
반갑다, 어디서 개 한마리 짓는 소리에
마을 가득한 햇살만 출렁! 하게 한다
아아 외로움은 흘러서 강이 되지 못하고
봉두난발 갈대꽃만 미쳐 흔들고
강둑의 미루나무 끝으로나 달아나서는
이제는 외로움 저도 외로워
우듬지 한 떨림으로 청천하늘 치받는다
앞강도 야위는 이 그리움
그토록 흐르고도 흐를 것이 있어서 강은
우리에게 늘 면면한 희망으로 흐르던가.
삶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는 듯
굽이굽이 굽이치다 끊기다
다시 온몸을 세차게 뒤틀던 강은 거기
아침햇살에 샛노란 숭어가 튀어오르게도
했었지. 무언가 다 놓쳐버리고
문득 황황해 하듯 홀로 강둑에 선 오늘,
꼭 가뭄 때문만도 아니게 강은 자꾸 야위고
저기 하상을 가득 채운 갈대숲의
갈대잎은 시퍼렇게 치솟아오르며
무어라 무어라고 마구 소리친다. 그러니까
우리 정녕 강길을 따라 거닐며
그 윤기나는 머리칼 치렁치렁 날리던
날들은 기어이, 기어이는 오지 않아서
강물에 뱉은 쓴약의 시간들은 저기 저렇게
새까만 암죽으로 끓어서 강줄기를 막는
것인가. 우리가 강으로 흐르고
강이 우리에게로 흐르던 그 비밀한 자리에
반짝반짝 부서지던 햇살의 조각들이여,
삶은 강변 미루나무 잎새들의 파닥거림과
저 모래톱에서 씹던 단물빠진 수수깡 사이의
이제 더는 안 들리는 물새의 노래와도 같더라.
흐르는 강물, 큰물이라도 좀 졌으면
가슴 꽉 막힌 그 무엇을 시원하게
쓸어버리며 흐를 강물이 시방 가르치는 건
소소소 갈대잎 우는 소리 가득한 세월이거니
언뜻 스치는 바람 한자락에도
심금 다잡을 수 없는 다잡을 수 없는 떨림이여!
오늘도 강변에 고추멍석이 널리고
작은 패랭이꽃들이 흔들릴 때
그나마 실낱 같은 흰줄기를 뚫으며 흐르는
강물도 저렇게 그리움으로 야위었다는 것인가.
달밤에 숨어
외로운 자는 소리에 민감하다.
저 미끈한 능선 위의
쟁명한 달이 불러 강변에 서니,
강물 속의 잉어 한 마리도
쑤욱 치솟아 오르며
갈대숲 위로 은방울들 튀기는가.
난 나도 몰래 한숨 터지고,
그 갈대숲에 자던 개개비 떼는
화다닥 놀라 또 저리 튀면
풀섶의 풀 끝마다에
이슬농사를 한 태산씩이나 짓던
풀여치들이 뚝, 그치고
난 나도 차마 숨죽이다간
풀여치들도 내 외진 서러움도
다시금 자지러진다. 그 소리에
또또 저 물싸린가 여뀌꽃인가
수천 수만 눈뜨는 것이니
보라, 외로운 것들 서로를 이끌면
강물도 더는 못 참고 서걱서걱
온갖 보석을 체질해대곤
난 나도 무엇도 마냥 젖어선
이렇게는 못 견디는 밤,
외로운 것들 외로움을 일 삼아
저마다 보름달 하나씩 껴안고
생생생생 발광(發光)하며
아, 씨알을 익히고 읽히며
저마다 제 능선을 넘고 넘는가.
외로운 자는 제 무명의 빛으로
혹간은 우주의 쓸쓸함을 빛내리.
상처에 대하여
솔가지 꺽던 낫날에 왼손 집게손가락을 날렸다지요. 두어엄자리 뒤던 쇠스
랑날로 오른쪽 발등을 찍었다지요. 거친 밥 독한 소주에 가슴앓이 이십 수
년. 복부의 수술자리는 시방도 애린다지요. 좋은 일은 다 잊었는데 몸의 상
처론 환히 열리는 서러움들, 참으로 야릇하다고, 이게 다 몸으로 살아온 탓
아니겠냐고 활짝 웃는 얼굴의 주름살. 그건 그대로 논밭고랑이네요. 마치
앞강 잉어들의 비늘무늬가 그들이 늘 헤살치는 물결을 닮았듯이, 봄날 당신
이 잘 갈아논 밭을 닮았네요. 여기에 무얼 심을 거냐고 했더니 이제 복숭아
를 심겠다네요. 암종으로 먼저 간 아내가 그토록이나 좋아하던 복숭아라네
요. 복숭아 같던 아내의 젓가슴을 쉿, 처음으로 움켜쥐던 비밀도 이손이 기
억하고 있다고, 무심코 입술에 가져다대는 아, 없는 집게손가락! 그뭉툭한
상처자리가 반질반질 윤을 내고야 말더라니.
저 씻나락 담그는 풍경
하느님의 죄마저도 다 드러내 줄 듯한
청명도 쾌청명 아래
뭇생명의 기미들 한결같이 제 생명의 욕구에
스스로 놀라 부르르 떠는 모습 생생한 날
내 또한 무슨 그리움 하나 찾아볼까 들썽이며
동네 한 바퀴 돌러 나선다
봄은 와도 더는 심을 것 없는 마을에 봄은 짙어
앞집 뒷집 사방에 새하얀 한 살구꽃 보니
문득 세상의 때 벗은 죽음 같은 것이라도
와락 눈앞에 달겨들 것 같고
사시장철 대숲에서 고요지경을 시샘해쌓던
바람의 흐름 속으로 살구꽃은 또 난분분 진다
그러면 어디에 있는가 내 찾는 그리움은
이제 강아지조차도 얼씬 않는 고샅길 도니
마을 앞 삼밭의 샛노란 장다리꽃무리가
광기로도 모자란 독기로도 모자란
원색의 화냥끼로 자꾸만 꽃사래 쳐대고
그 위로 흰 나비 쌍쌍 비몽사몽 속인듯 날으고
또 바람에 물결치는 앞들 초록의 보리 앞에서
일순 내 넋은 고압의 전류 흘러 깜깜하다
하지만 그 초록의 물결 앞에서
우리는 왜 진즉 승천해 버리지 못했을까
나도 예전엔 거기에서 보리피리를 불었었다
나도 예전엔 거기에서 애써 앙탈하던
사랑 하나를 눕혔었지만
이제 한사코 한사코 바람은 불고
이제 아니라고 아니라고 보리는 도리질치고
그 위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재잘대는
종달새 노래에 나는 그만 문둥이처럼 서럽다
그러면 어디에 있는가, 길 위에서 길을 찾듯
그리움으로 그리움을 찾는 내 그리움은
썰렁한 회관 옆, 지난 겨울 끝내 밤봇짐 싼
명수형 집의 박살난 대문이거나
거기 그가 남기고 간 한숨 탄식 눈물들 하나같이
푸른 노여움의 싹이 되어 돋는 마당이거나
지난 가을 심어놓고 미처 캐가지 못한
텃밭의 한 자쯤이나 자라 있는 마늘싹
이제는 그 임자 없는 희망 속에나 있을까
익숙하던 길 위에서 문득 서먹거리는
이 쓰거운 마음의 행로
새벽이면 새벽같이 댓잎 뜬 각시샘에서 물을 긷고
푸르른 연기를 곧게 피워 올려 하늘과 내응하거나
새하얀 연기를 옆으로 흐트려 세상을 위무하던
생솔연기의 나라의, 어머니 아버지들의
곧고 부드러운 정신을 이제 더는 볼 수 없다
온통 나간 집 같다
다만 거기 파랗게 옷 입은 길섶에
좁쌀 뿌려놓은 듯한 냉이꽃 마구 피어나고
그 귀여운 제비꽃은 오늘도 꾸벅꾸벅 인사하고
논둑에 빽빽히 돋은 서러움의 쑥잎은
거기 꽃다지 개불알풀꽃 코딱지꽃들 함께
이제 짙어버린 봄의 정액을 자꾸만 탐하는데
저 뒷들 몇몇 검은 그루에 초벌갈이꾼도 있긴 하다
이논 저논의 비닐하우스에선 김도 푹푹 새어나온다
하지만 저 뒷산 바우배기에서
이제 마악 들려오기 시작하는 소쩍새의 피울음
그 피울음 먹고 이제 마악 미친듯 피어나는
저 묵정논의 핏빛 자운영꽃불은 누가 끄는가
어느 순간 걷는데 푸드득 날아오르는 들비둘기떼 쫓아
내로 산으로 달리던 함성이 환청으로나 살아온다
그리하여 고독의 키가 무척은 자라면
저 갱변 미루나무처럼 연두빛 이파리라도
온몸에 달고 반짝거릴 수는 있을까
거기 맑은 냇물에 은피라미떼가, 꿩 꿔엉
느닷없이 울리는 장끼소리에 놀라 뛰어드는
개구리 몇 마리에 혼비백산 하는 모습
물가의 빛나는 조약돌 함께 들여다보다간
냇물이 흘러가는 저 먼 곳을 또 한참은 바라보거니
이윽고 풀이란 풀은 다 썽난 들을 질러
사방산천 연두초록 물감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광경 한눈에 보이는 뒷동산에 오르니, 거기 지금은
조팝나무 새하얀 꽃자루가 자꾸만 끄덕이는 때
찔레꽃 말고 찔레꽃 속니파리가 마악 피어날 때
거기 지금은 비비비 우는 비비새거나
쭉쭉쭉 우는 머슴새거나, 한창
잡덤풀 사이로 쫓고 쫓기는 사랑놀음으로 바쁜 때
그럴지라도 내 신명나는 그리움은
저기 발치 아래 가슴 저미도록 휑한 마을의
동구밖 정자나무에 있지 않다
그 위의 까치집 몇 채에 있지 않다
하마 남은 집들은 진달래 꽃잎을 따서 술을 담고
하마 집집의 장독마다 햇간장 맑게 우러날지라도
한번 흘러버린 사랑의 뒤안길에서
슬픔의 버얼건 화농을 덧들일 뿐인 이 그리움
그러나 그러나 내가 아직 말하지 않은 것은
아까 웃뜸 샛길 접어오다
어느 집 담 너머로 그만
황망간에 바라보고 놀라 급히 고개 돌렸던
그 씻나락 담그는 풍경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것은
하늘도 알고 땅도 알고 나도 아는 일이다
바람도 알고 꽃도 알고 햇빛도 아는 일이다
지난 겨울 집채만한 외국산 태풍이
이윽고 이 들녘을 마지막으로 덮쳐
아버지도 어머니도 앞집도 뒷들도 농기계도
온통 갈기갈기 찢어놓았을 때
우리는 그저 폐허의 상처나 뒤적이던 나날 속에서
결국 씻나락만큼은 간수해왔더라니
그리하여 씻나락만큼은 그예 담그더라니
이제 그 아침 다시 오지 않으리라던 마을에
이제 다시 땅이 발정의 신열에 들떠
아지랑이를 피워올리고
급기야 저기 저렇게 논 봇도랑에서
수많은 개구리들 암놈숫놈 업고 업히어 걀걀걀걀
불 앓는 소리 만발케 하는 그 힘 그 유정 속에서
가래톳 서는 내 그리움 하나쯤은 끝내 찾나니
봄햇살 융융한 봄날 보리밭 너머 저 지평선이여
뭇 생명의 싹들 무장무장 자라는
그 경이의 찰나까지 드러내 줄 듯한 청명이여
온몸 다 문드러지는 절망, 그 뿌리에서 돋는
새싹의 욕구 하나로 또또 진저리치는 만물 위에
내 그리움의 금가루 은가루 마구 뿌려보나니.
綿綿함에 대하여
너 들어 보았니
저 동구 밖 느티나무의
푸르른 울음소리
날이면 날마다 삭풍 되게는 치고
우듬지 끝에 별 하나 매달지 못하던
지난 겨울
온몸 상처투성이인 저 나무
제 상처마다에서 뽑아내던
푸르른 울음소리
너 들어 보았니
다 청산하고 떠나버리는 마을에
잔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그래도 지킬 것은 지켜야 한다고
소리 죽여 흐느끼던 소리
가지 팽팽히 후리던 소리
오늘은 그 푸르른 울음
모두 이파리 이파리에 내주어
저렇게 생생한 초록의 광휘를
저렇게 생생히 내뿜는데
앞 들에서 모를 내다
허리 펴는 사람들
왜 저 나무 한참씩이나 쳐다보겠니
어디선가 북소리는
왜 둥둥둥둥 울려나겠니
길에 관한 생각
마음은 쫓기는 자처럼 화급하여도 우리는
늘 너무 늦게 깨닫는 것일까. 새벽에 일어나
흰 이슬 쓰고 있는 푸성귀밭에 서면
저만큼 버려두었던 희망의 낯짝이 새삼
고개 쳐드는 모습에 목울대가 치민다. 애초에
그 푸르름, 그 싱싱함으로 들끓었던 시절의
하루하루는 투전판처럼 등등했지. 그 등등함만큼
쿵쿵거리는 발길은 더 뜨거웠으니
어느 순간 텅 비어버린 좌중에 놀라,
이미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적당히 타협해 버린
연인들처럼, 그렇게, 한번 그르쳐 든 길에서
남의 밭마저 망쳐온 것 같은 아픔은 깊다.
살다 보면 정 들겠지, 아니 엎어지든 차이든
가다 보면 앞은 열리겠지, 애써 눈을 들어
먼 산을 가늠해 보고 또 마음을 다잡는 동안
세월의 머리털은 하얗게 쇠어갔으니, 욕망의
초록이 쭉쭉 뻗쳐오르던 억새풀 언덕에
마른 뼈들 스치는 소리는 생생하다. 그 소리에
삶의 나날의 몸살에 다름 아니던 별들은
또 소스라치다 잦아드는 새벽, 오늘도
푸성귀밭에 오줌발을 세우는 것은
한번도 잡아본 적이 없는 갑오패 같은 그리움
이토록 질기다는 것인지. 어디서 종은
또 울고, 그러면 황급히 말발굽을 갈아 끼우고
잡목에 덮인 저 황토잿길을 올려다보는
마부처럼, 꿈에 견마 잡힌 우리도 뚜벅뚜벅
발길을 떼야 하는 일이 새삼 절실한데
소슬바람은 부는 것이다. 계절은 벌써
깊어져, 우리는 또 한발 늦는다 싶은 것이다.
한발 늦는 그것이 다시 길을 걷게 한다면
저 산도 애써 아침해를 밀어올리긴 하지만.
풍경 속으로 꺼져버리는 풍경?
아, 싸아하게 열리는 순간
날다람쥐 눈망울같이 또글또글한
새까만 머루를 아시는지요
나는 지금 머루술을 담근답니다
산토끼 눈망울같이 똥글똥글한
새빨간 맹감을 아시는지요
나는 오늘 산행길에서 빛났지요
아, 물론 당신도 잊지 않으셨겠지요
코밑 거뭇거뭇해지는 아이들
틈만 나면 조물락거리는 불알 모냥인
다래 열매랑
으름 열매, 그 이름도 이윽한
으름 열매를 톡 까서는
한 입에 냉큼 넣고 으석 씹으면
그 달디단 향내가 온 몸에 퍼지는
순간,
아, 싸아하게 열리는 순간
난 오늘도 이슬과 바람과
햇빛과 비와 새울음을 보았답니다
나같이 메말라가는 것도
그 향내 속에 깃든
가을의 은총으로 자지러졌습니다
삼밭에서의 휘파람
늙은 소의 눈망울같이 그렁그렁한 삶에도
참깨가 온종같은 꽃을 흔들어댈 때 있다
세월의 불볕에 귀때기 퍼렇게 견디다보면
벌써 첫물이 바알간 고추처럼 익기도 하리니
고추 따는 아낙의 얼굴도 발갛게 익는다
이제 슬쩍슬쩍 스치는 바람자락을 보아라
그 바람에 온 잎새 진저리치는 옥수숫대 위로
된장잠자리떼는 즈이도 가만 있지 못한다
사람인들 왜 그리움의 물살을 모르겠느냐
이럴 때 저기 저기 뭉게구름마저 부풀면
하늘도 쟁쟁쟁 소리날 듯 쟁명하여서
우리 사는 이 순간만은 내남없이 쾌청하다
예의 땅 위에 별 낱낱을 뿌린 메밀꽃이며
주렁주렁한 콩도 팥도 어찌 아니 싱그러우랴
사람이 손 안 대어도 스스로 잘 자라선
어느덧 땅으로 절하는 강아지풀송이랑
내가 호명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풀들도 바쁘게는 바쁘게는 반짝이면서
햇빛은 따글따글 열매들을 죄 익히면서
또 우두둑거리는 아낙의 허리가 펴지는 순간
뒷산 봉우리는 더욱 더 우뚝해지면서
온갖 것이 거기 그렇게 제 설레임으로
가을의 장엄 선율을 완성시키는 삼밭에서
나는 아직 푸르른 휘파람을 부는 쪽에 선다
깊은 강은 소리없이 흘러서 깊은 것이다.
비자숲 바람소리
비 온 뒤에 젖어 있는 마악 개고 햇살이 나오는, 때마침 바람도 일기 시작
하는 숲이었지. 그 나뭇 잎새가 非非非하게 생기고, 그 둥치는 어처구니로
생긴 것들이 이윽고 반짝이며, 툭툭 털며, 솨솨솨 빗질 소리를 내는 숲이었
지. 세월로 삐그덕거리는 내 이백여 뼈마디가 살살 안 아프겠는 그 숲에 아
참, 너와 나 무엇이 정녕 시들하긴 시들해서는 찾아갔었지.
그랬더니, 아 그랬더니, 직박구리 둥지 머리에 이고 千手觀音처럼 기도하
는 나무들로 꽉 찬, 그렇지, 북제주군 조천의 비자숲은, 배배 꼬인 분재 같
은 나, 끄덕하면 세상의 상처를 운운하는 나를, 그렇게 우람하고, 그렇게 팽
팽하게 세워서는, 같이 간 너의 외로움마저도 푹 젖게 하고, 벌쭉 열리게 해
서는, 온 숲이 한바탕 처녀매미로 찢어지게 하고는, 솨솨솨 그 숲바람 소리
에 아득아득 자물 쓰게 할 숲이었지.그랬지. 우리 온갖 것으로 막인 九竅를
열어 너와 나, 너나 들이로 속속 물 흐르게도 한, 그러나 끝내 다음 일정에
쫓기는 어리보기를 숲길 밖으로 쫓아내는 그 숲에 실은 우리 안 들어갔었
지. 들어갔다 해도 그 깊고 푸르고 생생한, 그 어처구니 숲에서 내가 본 건
아무 것도 없이, 되레 세상엔 그 알 수 없는 성성한 힘이 알 수 없게 관장하
는 한 곳 쯤은 그예 감춰두어야겠다는 마음 다짐 속으로 시방도 솨솨솨거리
는 너와 나의 通風, 바람소리만을 달고 왔었지.
나무 속엔 물관이 있다
잦은 바람 속의 겨울 감나무를 보면
그 가지들이 가는 것이거나 굵은 것이거나 아예 실가지거나 우듬지거나 모
두 다 서로를 훼방놓는 법이 없이 제 숨결 닿는 만큼의 찰랑한 허공을 끌어
안고 바르르 떨거나 사운거리거나 건들거리거나 휙휙 후리거나 모두 다 제
깜냥껏 한세상을 흔들거리는데 그 모든 것이 웬만해선 흔들림이 없는 한 집
의 주춧기둥 같은 둥치에서 뻗어나간 게 새삼 신기한 일이다.
더더욱 그 실가지 하나에 앉은 조막막한 새 한 마리의 무게가 둥치를 타고
내려가 깜깜한 땅속의 그중 깊이 뻗은 실뿌리에까지 거기 흙살에까지 미쳐
그 무게를 견딜 힘을 다시 우듬지에까지 올려보내는 땅심의 배려로 산 가지
는 어느 여린 것 하나라도 어떤 댑바람에도 꺾이지 않는 당참을 보여주는
것인가.
아, 우린 너무 감동을 모르고 살아왔구나!
나락밭에 순금이 일면
나락밭에 순금이 일면
하늘은 더 청때깔 나고
양광이야 벌써부터 맑아져선
강아지풀 이삭마다에도 등불을 켜댄다.
나락밭에 순금 일수록
바람은 한결 일렁이면
뒷산 노루막이도 우뚝하게 씻고는
제 능선 위로 기러기의 길을 트고,
창공을 덮은 고추잠자리떼로
세상은 또 어린 경이에 닿는구나.
이런 날엔 그렇기로
날백정이라도 정정해져선
저 은빛 억새밭에 가서 흔들리거나
아이쿠, 나는 내 미급한 바로
가을 물소리 듣기도 어려운 처지인데
보아라, 나락밭에 순금 일수록
십리 밖까지 트이면
먼 지평으로 목례 한 번 보내지 않고
네 눈물 돋는 어디에 들국 한 점 돋겠느냐
시방은 시선이 닿는 곳마다
박하향 먹은 듯 환해선
쌔르릉, 발길에 이는 메뚜기 한톨에도
온 들판의 것들이 차랑차랑,
나락밭에 순금이 일자
하늘은 더 청때깔 나고
이런 땐, 아랫마을에 혼사라도 있어서
먼 징소리조차 세상을 넓히니
네 그리움은 어느 처음에 닿겠느냐.
서러운 사랑 이야기
저 밤나무의 밤송이들이
왜 가시옷으로 무장을 하고
왜 종주먹질을 해대는지 아시는지요
나는 기억하는데요
모내기 끝난 지난 유월
모내기 끝낸 여남은 사람들
해설피 정자에 앉아
남은 막걸리 마저 기울이다간
앞산 보고 넋을 잃었는데요
그 앞산엔 젖살빛 밤꽃무더리
뭉실뭉실, 수만 구름 떼 밀어올리며
물큰물큰, 숫컷내 마냥 풍겨댔는데요
그 꽃 보다 넋을 잃다 다 가고
샛터집 과수댁만 뿌리치고 남아
워매, 저 징헌 놈의 꽃 좀 보소
워매, 이 징헌 놈의 냄새 좀 보소
꽃멀미 한 태산 일으켰는데요
혹여 그 일 때문에
혹여 그 환장할 일 때문에
저 밤나무의 밤송이들
저렇게 가시옷에다
종주먹질을 해대는 건 아닐런지요
그렇다면, 정녕 그렇다면
저 밤나무의 밤송이를 까주어선
그 속의 알알들 쏟게 할 수 있는 건
바람 같은 세월일까요
미륵불 같은 침묵의 기다림일까요
아, 남에게는 넘치는데
나에겐 바짝 마른 사랑일까요
고재종 시인
고재종
1957 전남 담양 출생
1984 <<실천문학 신작시집>>에 시 <동구밖 열두 식구>등을 발표하며 등단
1989 시집 <새벽들>발간
주요 저서 시집 목록
저서명 부서명 총서명 출판사 출판년
시집 <바람부는 솔 숲에 사랑은 머물고> 실천문학사 1987
시집 <새벽들> 창작과비평사 1989
첫댓글 소쇄원관련 시가 기억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