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영이는 갔지만… 어머니는 호스피스, 동생은 입양 실천 장학금 받은 사람들은 '쉼터' 만들고…
1994년 10월 21일 아침. 서울교대 국어교육과 3학년 이승영(여·당시 21세)씨는 성수대교 교각과 함께 20여m 아래로 떨어진 16번 시내버스 안에서 압사(壓死) 당했다. 교생 실습을 위해 강북 초등학교에 버스로 출퇴근한지 닷새 만의 일이었다. 성수대교 붕괴로 이날 숨진 사람은 32명. 사고 직후 오열 속에 승영씨 유품을 정리하던 어머니 김영순(56)씨는 딸이 남긴 일기장을 읽어내려가다 눈물을 멈췄다. ‘내가 일생동안 하고 싶은 일’이란 구절 밑에 빽빽히 적어놓은 ‘14가지 소원’. ‘100명 이상에게 전도한다’는 종교적 소망과 ‘장학금을 만든다, 한 명 이상을 입양한다, 이동도서관을 강원도에 만든다, 복지마을을 만든다’는 사회봉사를 위한 소망까지…. 11개월 전 군인이던 남편까지 과로사로 잃고 흔들리던 어머니는 딸이 못이룬 소망을 대신 이루기로 결심한 뒤 강해졌다.
먼저 어머니는 딸의 시신을 고려대 의과대학에 해부 실습용으로 기증했다. 승영씨는 14가지 소원엔 쓰지 않았지만 “죽으면 장기(臟器)를 남에게 주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하지만 딸의 시신이 제대로 수습된 것은 장기 기증을 위한 시한(時限)인 ‘사망후 6시간’을 넘긴 뒤였다. 어머니는 ‘해부실습용’이란 차선책을 택해 딸의 소원을 실천한 것이다. 다음 유족에게 지급된 보상금 2억5000만원을 전액 교회에 장학금으로 기부해 ‘승영장학회’를 만들었다. ‘장학금을 만든다’는 딸의 소망을 따른 것이다. ‘100명 이상에게 전도한다’는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어머니 스스로 전도사가 돼 호스피스(죽음을 앞둔 사람을 돌보는 봉사자), 장애인 봉사에 뛰어들었다. 그후 10년….
그동안 형편이 어려운 신학대학원생 50여명이 300만원씩 승영씨의 목숨과 바꾼 장학금을 받았다. 장학생 중에는 청각장애인이면서 같은 처지의 장애인을 모아 공동체를 꾸리는 사람, 암(癌)을 이겨낸 뒤 말기 환자 병동에서 기타로 음악을 들려주는 사람도 있다.
승영장학금을 받아 작년에 뒤늦게 신학대학원을 마친 최만재(47)씨는 인천시 부평구 산곡1동 백마마을 산곡중학교 뒷골목에서 갈곳없는 노인들을 모아 ‘작은손길 공동체’를 꾸리고 있었다. 무허가 월세 건물이지만 파지(破紙)를 주워 연명하는 65세 이상 노인 11명을 모아 식사를 무료로 제공하는 복지 공동체다. ‘복지마을을 만든다’는 승영씨의 소원을 장학생들이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누가 연락하지 않아도 승영씨의 기일(忌日)이 되면 해뜨기 전 고려대 의대 뒤편의 감은탑(感恩塔)에 모여 꽃을 바치고 고개를 숙인다. 두 손을 모은 모양의 탑에는 ‘이승영’ 이름이 10㎝ 크기로 새겨져 있다. 최씨는 “‘승영’이라는 이름은 ‘오늘은 내가 무엇을 부족하게 살았나’ 하고 되묻게 하는 이름”이라며 “마음이 지칠 때마다 성수대교를 찾아 나 자신을 채찍질한다”고 말했다.
작년 8월 승영장학회가 강원도 인제군 서흥리의 한 포병연대에 전천후 이동도서관 차량(흰색 무쏘스포츠)을 기증하면서 ‘이동도서관을 강원도에 만든다’는 소원도 실현됐다. 이 차량은 7개 부대 500여 장병들 사이를 누비고 다니면서 휴전선 바로 아래까지 식료품을 나눠주러 가는 무료 PX이기도 했고, 군생활을 힘겨워하는 사병들을 나들이 데려가는 이동상담소 역할도 했다. 부대 조준묵(55) 군목은 “여대생이 남긴 사랑이 10년 후, 여기 강원도 오지(奧地)까지 미치고 있다는 것은 생각하면 ‘이것이 기적이구나’ 하고 느낀다”고 말했다. 승영씨는 어린 시절 군인인 아버지를 따라 강원도 전방 부대를 다닌 기억 때문에 그런 소원을 적은 듯하다고 한다.
‘신앙소설을 쓴다’는 소원은 95년 승영씨의 초등학교 때 쓴 시(詩)를 ‘연기는 하늘로’란 제목의 책으로 묶어 출간함으로써 이뤄졌다. 이 때 받은 인세(印稅) 400만원도 김장김치가 돼 장애인 재활시설 4곳에 골고루 전해졌다. 장학회는 또 ‘맹인(시각장애인)을 위해 무언가 한다’는 소원을 위해 연말까지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책 보급을 시작할 계획이다.
‘한 명 이상의 아이를 입양하고 싶다’는 또다른 소원은? 올해 초 결혼한 동생 상엽(29)씨는 “내가 실천하겠다”고 약속했다. 상엽씨는 “누나는 인생을 길게 볼 수 있는 눈을 주고 갔다”고 말했다. 10년 동안 승영씨가 남긴 14가지 소원 중 실현됐거나 곧 실현될 소원은 7가지. 이를 실천한 어머니 김씨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 교회 근처 연립 8평 원룸에 혼자 살고 있다.
하지만 어머니는 찾아간 기자에게 “나는 한 일이 없기 때문에 해 줄 말이 없다”고 했다. “세상에 대한 미움 따위도 없다. 세상에 사랑이 이어지고 있으니 우리 딸, 아직 살아 있는 것 아니냐”는 말만 남기고 현관 문을 닫았다.
첫댓글 사고 당시 승영이 어머님의 씩씩한 모습이 생각난다...
보통 사람이 아니었어...
20년 후에 이런 큰 결실을 맺으셨네...
성수대교 붕괴라는 참사 가운데 이렇게 거룩한 소명을 갖고 있던 젊은이가 있었구나...
그녀의 어머님이 할렐루야 하며 슬픔을 참았던게 기억난다
승영이는 죽음으로 자신의 꿈을 다이루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