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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 5일차(2022.11.6)
35. 구룡공소
첩첩산중인 깊은 산골 구룡산 산정에 위치한 박해 시대 교우촌이다.
아마 1815년 을해박해 때 청송 노래산 등지에서 피난 온 신자들이
처음에는 구룡산 바로 아래서 교우촌을 이루고 살다가 다시 박해를 만나자
이곳 구룡산 정상으로 올라와 교우촌을 이루어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병인박해 후 1882년 경상도 지방을 순회 전교하던 로베르
(Robert, 金保祿, 1853∼1922, 바오로) 신부가 이곳에 와서 판공성사를 주었을 때는
공소 신자가 60명이었으며, 그중에 53명이 고해성사를 보았고
50명이 영성체를 하였으며 6명의 외교인이 세례를 받았다고
교세 통계표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그 후 1893년 11월에는 뮈텔(Mutel, 閔德孝, 1854∼1933, 아우구스티노) 주교가
언양, 선필, 진목정, 의실 공소 들을 방문한 후
이곳 구룡 공소와 자인 큰골 공소(용성면 매남리)에서 성사를 집행하였다.
구룡공소는 구룡산(675m) 정상 가까이에 위치하여
하늘 아래 첫 동네라 불릴 정도로 깊은 산중이다.
공소는 용평 본당(1907), 하양 본당(1928), 금호 본당(1963),
자인 본당(1972)을 거쳐 1995년부터 용성 본당의 관할이다.
1997.11월 이문희 대주교는 공소 개축 미사를 봉헌했다.
구룡공소의 특이한 점 2가지
첫째, 박해시대 교우촌이지만 단 한 명의 순교자도 없었다.
보통 배교자에 의해 교우촌이 발각되는데, 이곳은 배교자가 없어
발각되지 않고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둘째, 교우촌은 보통 옹기를 구워 팔거나 짚신등을 엮어 팔아서 생계를 유지했지만
이곳 구룡 교우촌은 천수답을 일구어 쌀농사를 지어 생계를 유지했고
인근 마을 주민과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신앙생활을 했다.
한국 천주교 순례지 167곳 중에서 다녀오기 힘든 곳 중에 하나이다.
구룡공소는 들어가는 입구가 겨우 차 한 대만 통과할 수 있을 만큼 좁아서
1.8km 거리를 반대편 차량과 마주치면 피할 수가 없다.
후진으로 한참 동안 절벽길을 운전하기가 쉽지않기 때문이다.
들어갈 때는 주일 아침 7시 20분 경으로 초행길이라 그냥 들어갔는데,
순례를 마치고 나올 때는 3분여 동안
들어오는 차와 마주치면 어쩌나 걱정이 많이 되어
마주치지 않게 해 달라고 둘이서 간절히 기도를 하면서 운전했다.
거의 입구에 왔을 때 마침 차 한대가 들어오는 것이 보여서 걱정하는데
바로 옆에 피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유일한 공간이었다.
'주님 감사합니다!'
공소에 도착해보니 공소에 오는 길이 2개 있었다.
우리가 들어간 길과 공소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 있었다.
조금 우회하더라도 이암지와 구룡농원을 거쳐서 매남 4리 쪽으로
돌아오는 길이 도로 상태도 훨씬 양호하고 상호 교행간에
옆으로 피해줄 만한 공간이 곳곳에 빈번하게 있다고 한다.
36. 경주관아와 옥터
경주 관아와 옥터는 1815년 을해박해와 1860년 경신박해, 1868년 무진박해 등
역대 박해 때마다 천주교 신자들이 사학죄인으로 몰려
관장 앞에 끌려가 문초와 형벌을 받았던 곳이며,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허인백(許仁伯,1822∼1868,야고보), 김종륜(金宗倫,1819∼1868,루카),
이양등(李陽登, ?∼1868, 베드로)이 울산 장대벌에서 군문효수되기 전 체포되어
갖은 문초와 형벌을 받고 천주교 신자임을 고백하고 굳건하게 신앙을 증거하던 곳이다.
현재 경주 문화원으로 이용되고 있는 경주 문화원 정원에는 초석(礎石),
장대석(長臺石), 연화대석(蓮花臺石) 등의 석조물이 전시되어 있다.
경주 옥터는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우방명사 아파트 내에 있었다.
지금은 아파트 단지 조성으로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성건성당
방문한 시간이 9시 30분 경으로 주일 미사(10시 30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제주에서 성지순례 왔다고 하자 한 자매가 신부님이 아래층 휴게실에 계시니
만나보라고 안내를 하여 신부님을 뵙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신부님은 아프리카 선교를 다녀오셨다고 하며 당신이 쓰신 책에
직접 서명을 하여 우리에게 주셨다. 파는 것이 아니라고 하시며~
우리는 제주에 도착해 신부님께 귤 한 상자를 보내드렸다.
성당 입구에서 여러가지 식품을 팔고 있어서 젓갈류를 구입했다.
오늘 일정이 여유가 있어서 20년 만에 석굴암을 가고 싶었다.
불국사 근처에 가자 차량이 정체가 되었고 석굴암 오르는 길은
마치 주차장처럼 차들이 밀려 거의 움직이지를 않았다.
20여분을 기다리다가 포기하고 U턴을 하여 진목정으로 향했다.
일요일이라 수학여행 온 학생들이 많았다.
석굴암 가다가 되돌아 오는데 1시간 이상 시간을 허비했다.
37. 진목정 성지
경주 건천읍을 지나 청도로 넘어가는 단석산 자락에
발이 닿으면 진목정 성지가 있다.
이곳은 125위 시복시성 대상자이기도 한 허인백(야고보), 이양등(베드로),
김종륜(루카) 세 순교자들이 박해를 피해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바위굴(범굴)에 숨어 살았던 옛 신앙의 터전이며,
처형된 이들의 시신을 허인백의 아내 박조이가 옮겨 묻어
그들의 피로써 은총의 성지가 된 곳이기도 하다.
순교자들의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이곳에서
마치 그때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간 듯 그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세 순교자가 묻혔던 도매산 아래에는 오래된 진목 공소가 있다.
이곳은 1858년 경 한국인으로서 두 번째 사제인 ‘땀의 순교자’ 최양업(토마스) 신부가
지방을 순회하며 전교하던 때부터 교우촌을 이루었다고 전해진다.
공소를 지나 약 700m 정도 산길을 따라 오르면
1932년까지 세 순교자가 안장되었던 묘지(가묘)가 있다.
진목 공소에서 약 3.6km 떨어진 단석산(소태리 단수골)에는
세 순교자가 박해를 피해 숨어 살았다는 범굴이 있다.
내일 1리 마을을 지나 소태골 피정의 집에서부터 시작되는
십자가의 길을 따라 산을 오르면 범굴에 이르게 된다.
이제는 무너져 내려 그 원형을 가늠하기 힘들기는 하지만
이곳에서 세 순교자와 그 가족들은 함께 기도하며
서로의 신심과 용기를 북돋우며 살았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동굴은 본래 호랑이가 살던 굴이었다.
우연히 발견한 동굴에서 생활한 지 며칠 후
큰 호랑이가 나타나 위협했을 때 허인백 야고보가 나서서 성호를 그은 뒤,
“우리는 지나가는 길손인데 체면 불구하고 너희 집에 들어왔다.
매우 미안하지만 너는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고 동정하는 뜻으로
너희 집을 다른 데로 정해 가 있으면
박해가 끝나는 대로 너희에게 돌려주겠다.” 하자
호랑이가 물러갔다고 한다.
그리고 동굴 맞은편 산 중턱에 있는 큰 바위 위에서
밤중에 이따금 ‘어흥 어흥’ 하고 소리를 냄으로써
근처 다른 짐승들이 이들이 머무는 동굴에 침입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진목정 성지 찾아가는 오르막길을 한참 오르자 삼거리가 나왔다.
위지도 현위치라는 빨간표시가 된 곳이다.
우측으로는 피정의 집이라는 표시가 있는데 나오는 출구에 통행정지 막대가 있었다.
자동차 내비게이션은 이 근처임을 알려주어 어디로 갈까 망설이는데
여러대의 차량이 직진하였다. 그들을 따라 조금 오르니 차량들이 주차해 있었다.
우리는 계속 직전했는데 전망대, OK 청소년 수련원이 나와서 다시 내려왔다.
조금 전 몇 대의 차량이 주차된 곳에 주차하고 내려다 보니 밑에 순교자 성당이 보였다.
오늘도 길을 찾는데 시행착오를 했지만 갈 수 없었던 전망대를 알 수 있었다.
산티아고 순례 때에도 사인을 믿지않고 스페인 사람을 믿고 따라갔다가
2시간을 고생한 후 '사람을 믿지말고 사인를 믿어야 한다'고 후회했는데
오늘도 다른 사람의 차량을 뒤쫓다 시행착오를 겪었다.
석굴암, 진목정 두 곳에서 시간을 많이 허비했는데 왠지 오늘 일정이
순탄치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든다.
38. 살티공소 (김영제 묘와 김아가다 묘)
신유박해(1801년)와 기해박해(1839년)를 거치면서
간월, 죽림굴로 숨어들었던 시자들이 경상도 지역에 본격적으로 행해진
경신박해(1860년)와 병인박해(1866년)를 피해 더욱 안전한 곳을 찾다가
모여든 곳이 안살티(현재 청수골 주변)이다.
현재 살티 공소에서 500여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김영제의 묘소는
1981년 11월 언양 성당 신자들이 정성을 모아 말끔하게 단장하고 기념비를 세웠다.
1994년 4월 2일 부산교회사연구소 주관으로
서북쪽으로 약 18m 지점인 현재의 위치로 유해를 이장하고,
울산 본당 신자들의 후원금을 모아 분묘를 재단장하고 순교비를 건립하는 동시에
십자가, 제대, 예수 성심상, 성모상, 성지 표지석 등을 세웠다.
그리고 2008년 3월 4일 간월에 있던 여동생 김 아가타의 묘도
김영제 묘 옆으로 이장하여 그해 9월 29일 축복식을 가졌다.
나란히 자리한 남매 묘소 우측에 있는 가족묘 상단에는
부친 김상은과 모친 최 마리아의 묘도 있다.
살티공소에서 500여미터 떨어진 김영제와 김 아가다 묘를 찾지 못해 30분을 헤맸다.
살티공소와 묘소의 화살표는 있는데 살티공소 화살표는 계속 있지만
묘소의 화살표는 도중에 없어진 것이다.
다른 순례객 2팀도 있었지만 우리처럼 길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주민에게 겨우 물어서 자동차길로 나가 겨우 묘소를 찾았다.
묘소에서 살티공소로 표시된 화살표를 보고 걸으니 살티공소가 나왔다.
그래서 자세히 살펴보니 집 담벼락에 화살표를 표시했던 안내판이
떨어져나간 흔적이 보였다.
그 표지판이 없어서 결국은 묘소를 찾지 못했던 것이다.
계속되는 길찾기의 시행착오를 겪는 오늘이다.
산들바람(점심)
아내가 오래 전부터 즐겨시청하던 유튜브 채널 산들바람 주방장을 만나고
직접 음식을 먹고 싶어 1시에 예약을 했지만,
일요일 단풍나들이 인파를 예상하지 못해 도로에서 시간을 까먹어
예약시간을 계속 미루었다.(1시 → 2시 →3시)
늦어도 3시까지는 와야한다는 업소측의 요구(3시부터 종업원 휴식)에도
부응하지 못해 사정을 해서 겨우 3시 30분 경에 업소에 도착했다.
통도사를 100미터 남겨두고는 아예 차가 움직이지를 않아
아내는 차에서 내려 뛰다시피 업소에 간 것이다.
허기도 지고 차에서 받은 스트레스로 식욕도 나지 않았다.
막걸리를 한 잔 하고 나니 조금 안정이 되어 민어조기 정식을 시켰다.
밥을 먹고나서 오늘 일정 중 죽림굴을 내일로 미루고
아내가 그토록 만나고 싶어했던 주방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사진도 함께 찍었다.
39. 언양성당
부산교구 유일한 석조고딕성당
언양 성당은 교구 내 가장 오래된 성당이며 인근 울산 장대를 비롯하여
순교 선열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순교자 후손들의 본거지다.
전국적 성소의 온상지로 70여 명의 성직자와 수도자,
20여 명의 동정녀를 배출시켰다.
그리하여 대주교 1명, 주교 1명, 수도회 관구장 2명이 배출 되었고,
또한 교구 내 가장 많은 16개 공소를 둔 본당으로
순교 선열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중심지가 되었다.
오늘 5일차 여정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어제 천사 루시아 자매를 만나 숙소를 해결하여 130,000원 짜리 호텔을 취소하고
이틀 예정이던 대구 성지를 하루에 끝낼 수 있었다.
전주에서 하루를 벌고, 대구에서 하루를 벌어 이틀의 여유가 생겼다.
이제부터는 중간에 관광도 할 요량으로 오늘은 20여년 만에 석굴암을 가기로 했다.
경주관아와 옥터를 순례한 후 석굴암으로 향했는데 이것이 첫번째 실수였다.
일요일 관광객이 너무 많아 불국사 입구부터 석굴암 올라가는 길이
흡사 주차장같아서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30여분 지체하다 포기하고 중앙선을 침범하며 U턴하여 내려왔다.
경주관아에서 출발한 것보다 1시간을 길에서 까먹은 것이다.
아내는 요리 유튜브 채널에서 본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자고 했다.
시간상으로 1시경에 도착할 것 같아 예약을 했다.
그런데 진목정을 거쳐 살티공소를 가는 도중 석남사를 거치는 길에서
또 암초를 만났다. 단풍으로 유명한 석남사를 1Km를 앞두고 차들이
거의 움직이지를 않아 그곳을 지나는데 1시간이 지체되었다.
그 이후에도 길 양옆으로 차를 주차시켜 놓아 길이 온통 주차장이었다.
아내는 예약시간인 오후 1시를 전화로 계속 변경했다.
통도사 앞에 있는 산들바람은 오후 3시면 휴식시간이라
손님을 받을 수 없다고 하며 3시까지는 기다리겠다고 했다.
그런데 2시에서 3시로 변경하면서 제주도에서 왔는데 배려해 달라며
통사정을 하였는데 또 통도사를 500미터 앞두고는 아예 차가 움직이지 않았다.
3시가 넘자 아내는 통도사 100미터를 앞두고 내려서 걸어갔고
나는 역주행을 하면서 겨우 식당앞에 차를 주차했다.
교통경찰의 통제가 되지않아 통도사 앞 도로는 5방향에서 오는 차들이
뒤엉켜 흡사 실타래가 엉킨듯 풀수 없는 상황이었다.
제주에서 한적한 길을 운전하다가 오늘 겪는 도로상황은
서로 교통지옥을 빠져나가려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 역시 그 무리의 한 인간이 되고 만 순간이었다.
겨우 3시 반에 도착해 배가 고프다 못해 허기진 몸으로
주방장(유튜브 채널 운영자)이자 실제 간판스타인
김숙희 주방장(아내 이름과 같음)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차려내 온 점심겸 저녁을 먹었다.
종업원들이 쉬는 시간이라 손님은 우리뿐이었다.
그토록 좋아하는 주방장을 불러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기념사진을 찍고 판매하는 몇 가지(된장,젓갈 )를 구입했다.
죽림굴은 내일로 순례를 미루고 숙소가 있는 언양성당을 둘러보고
숙소로 향했다. 너무나 피곤한 하루였지만 언양에 온 이상
언양불고기는 맛 보아야 할 것같아 음식점으로 가서
안주삼아 술 한 잔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숙소 SS모텔(60,000원)
첫댓글 응원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