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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의 글은
2015년 10월 7일 포스팅하였습니다.
지난 주말 10월 3일.....
서울 자유 투어를 하였습니다.
서울을 향한 테마 출사 여행은
가을의 정취가 무르익는 시월애를 느끼게 하였습니다.
서울을 향한 출사의 길은
소풍 가는 날을 마냥 즐거워는 동심, 그 자체였습니다.
코리안 드림의 중심인 서울은
말은 태어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속담을 만들었습니다.
서울을 향한 꿈의 열망은
서울 자유 투어의 출사를 열었습니다.
90년대초에 총신을 다닐 때는 매주마다 서울 땅을 밟았는데
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 가는 길은 낯설고 멀기만 하였습니다.
대구에서 서울 다닐 일이 없었는데
출사의 길은 서울도 사정거리 안에 들어왔습니다.
지난 세월 서울의 유명한 곳은
출사의 현장으로 카메라 렌즈에 담겼습니다.
카메라 앵글로 바라보는 서울은 삶의 터전은 아니었지만
여행 작가의 꿈을 실현하는 출사의 야망이 되었습니다.
카메라만 손에 들면.....
세상의 그 어디에도 가지 못할 곳이 없었습니다.
출사의 자유는
여행과 사진 작가의 꿈을 사역의 사명으로 이루게 하였습니다.
카메라 앵글로 담아낸 세상은
허접한 것을 공간의 예술로 승화 시켰고 야생과 소통하며 마음의 상을 새롭게 하였습니다.
출사의 길은 무명한 자를 유명하게 하였고
가난한 자를 부요하게 하는 믿음의 실상을 진리 안에서 자유하는 성령의 기쁨으로 충만하게 하였습니다.
흔연히 가는 출사의 길은
찰나의 기적을 공간 예술로 승화시키는 사진의 깊이를 창조적 신앙으로 영적 삶의 체험 현장이 되었습니다.
내 안에 가득한 진리의 말씀은
흔연히 가는 출사의 여정으로 영혼의 주마등이 되어 묵상되었습니다.
아름다운 마음의 상은 출사의 길에서 얻지만
마음에 각인된 진리의 그 말씀은 순례의 여정이 되었습니다.
출사의 길을 순례의 여정으로 사역의 꽃을 피우는 삶은
창조 신앙으로 의의 열매를 맺는 위대한 발견이 아닐 수 없습니다.
출사의 길은 믿음의 여정과 같아서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출사의 시선은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것들 위에 세우셨도다는 영감의 계시를 카메라 앵글로
마음의 소통을 하였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는
보는 것 만큼 알고 아는 것 만큼 보는 눈높이입니다.
카메라의 눈은
사물을 바라보는 각도를 새롭게 합니다.
빛의 아름다움으로 사물을 느끼는 사진의 세계는
흔연한 출사의 길을 늘 항상 새롭고 풍성하게 하였습니다.
진리의 빛으로 느끼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출사의 길을 순례의 여정으로 빛나게 하였습니다.
출사를 순례의 여정으로 만들어 가는 아름다운 동행은
내 안에 진리의 복음으로 살아 계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호흡하는 믿음의 실상입니다.
출사의 여정으로 느끼는 그 모든 서정과 정취는
영적인 마음의 행복을 창조할 뿐만 아니라 윤택한 삶의 건강을 더욱 풍요롭게 합니다.
행복의 샘을 출사의 길에서 발견하는 기쁨은
햇빛과 비와 흙의 신비로운 조화로 경이로운 생명을 품어내는 싱그러운 창조의 서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행과 사진, 그리고 글은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의 삶을 살아가는 삶의 예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록 예찬의 정성된 삶을 구현하는 출사의 길은
수준 높은 삶의 함양, 그 자체입니다.
집에서 첫 차를 타고 도착한 출발지에서 관광버스에 몸을 싣고 서울 가는 길은
초등학교 수학 여행을 떠올리게 하였습니다.
대구 인근의 산촌에서 자랐는데
제일 먼저 구경한 도시가 서울이라는 사실에 새삼 놀랐습니다.
초등학교 당시에 호롱불 아래서 살았는데
서울의 전깃불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던 충격적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기만 합니다.
잠시 상념에 잠기는 동안.........
서울행 관광버스는 탑골 공원에 도착하였습니다.
탑골 공원에 내려 오후에 약속된 시간까지
각자 흩어져 서울 자유투어를 즐기고 관광버스가 주차된 탑골 공원으로 돌아오는 일정이었습니다.
먼저 횡단보도를 건너 인사동 거리를 경유하여
북촌 가는 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오전 10시경의 인사동 거리는
너무나 한산하였으며 대부분의 점포는 문이 닫혔고 한 두 집 문을 열면서 손님 맞이를 시작하였습니다.
인사동에서 북촌 가는 길은 걸어서 20여분의 거리였는데
북촌의 입구에는 아직 오전인데도 수 많은 관광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대부분 외국인이었는데
중국인과 일본인은 전문 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면서 충실한 관광을 하였습니다.
북촌 8경을 포토 스팟으로 둘러보며 정겨운 한옥마을의 전경으로
우리 민족의 근성과 뿌리를 느꼈습니다.
어릴때부터 기왓집의 전통 한옥에서 성장하여
한옥마을에 대한 남다른 애장과 정서로 옛 고을 정취가 서린 한옥 마을을 많이 탐방하였습니다.
그 동안 성주의 한개 마을과 고령의 개실 마을과 경주의 양동 마을과
영주의 소수서원과 선비촌과 무섬 마을과 안동의 하회 마을을 탐방하여 출사하였습니다.
전주 한옥 마을과 서울 남산의 한옥 마을 등 두루 탑방하였는데
북촌의 한옥 마을은 처음이었습니다.
북촌의 한옥 마을은
그 동안 탐방한 많은 한옥 마을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담장과 하나로 지어진 낮은 지붕은
그 동안 보아온 전통 한옥집과는 다른 주거형태였습니다.
담장과 지붕이 하나로 건축되어 있어서
대문을 열지 않고는 담장 너머로는 집안을 전혀 볼 수 없는 구조였습니다.
북촌은 조선 시대 왕족과 권세있는 양반들의 집성촌으로 이어져 오다가
1930년대를 전후로 지금의 모습으로 변형되어 단장되었습니다.
북촌 한옥 마을은 현재 사람들이 살고 있는 생활 터전이며
전통과 문화가 공존하는 옛 서울의 모습을 간직한 곳입니다.
북악산 기슭의 북촌 마을은 창덕궁과 경복궁 사이에 위치해 있는 한옥 밀집 지역으로
많은 사적과 문화재와 민속 자료가 있는 도심의 거리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북촌의 하늘 맑은 돌계단 길 위의 풍광은
서울의 옛 모습을 적나란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뒤로는 전통한옥이 밀집된 옛 고을의 정취를 한 눈으로 볼 수 있고
앞으로는 돌계단 언덕 너머 북악산 기슭에 청와대와 전통 민속 박물관과 경복궁이 나란히 보였습니다.
북촌의 돌계단으로 이어지는 전통 가옥과 카페와 상가는
북촌의 향기를 전통의 멋으로 고스란히 간직하였습니다.
북촌에서 민속 박물관으로 이어지는 거리의 풍광을 전통의 시선으로 느끼며
민속 박물관과 경복궁을 둘러 보았습니다.
서울은 어디를 가도
인산인해의 물결을 이루었습니다.
민속 박물관인데도 우리 나라 사람보다는
외국 사람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민속 박물관은 의외로 디딜방아와 물지게, 만화방과 이발소, 고철 저전거 등
6,70년대 생활의 모습이 그대로 전시되어 있어서 동심어린 정감이 넘쳤습니다.
우리 나라가 발전한 것이
그렇게 오래 되지 않았습니다.
어릴 때 검정 고무신과 나일론 양말을 신었고........
오늘날의 수도가 없어 샘에서 물지게로 물을 퍼다 날랐습니다.
70년대 중반 중학교 다닐 때까지 호롱불 아래서 공부를 하였고
칼라 델레비전 보급은 80년대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대학 시험은 예비 고사였고 90년대 총신 다닐 떄만 해도 컴퓨터가 없어
워드 프로세서로 레포트를 작성해서 제출하였습니다.
서울의 민속 박물관은
어릴 때의 정겨웠던 생활 보고로 가득하였습니다.
경복궁도 민속 발물관 처럼 마찬가지로 우리 나라 사람보다는
중국과 일본과 외국 사람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경복궁을 여러 차례 탐방하였지만
옛 궁궐의 자태는 구중궁궐의 위엄이 변함없이 서려 있었습니다.
경복궁 탐방......
인산인해의 물결을 따라 문이 있는 곳은 모두 들어가 보았습니다.
경복궁은 정문인 광화문, 동쪽의 건춘문,
서쪽의 영추문, 북쪽의 신무문이 있습니다.
광화문과 흥례문을 지나 근정전과 편전과 자경전과 강녕전을 둘러보고
경회루와 향원지의 향원정을 둘러보며 조선의 역사를 카메라의 손맛으로 느꼈습니다.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문과 문으로 구중궁궐의 신비를
전통 사극의 시선으로 오롯이 느껴보았습니다.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의자에 앉아 향원지의 향원정을 바라보며
조선의 역사를 사극으로 펼쳐보았습니다.
태조 이성계에서 태종 이방원을 배경으로 한 사극
용의 눈물과 정도전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습니다.
대왕 세종과 뿌리깊은 나무는
세종을 배경으로 하였습니다.
왕과 비는 문종의 승하부터 세조와 성종과
인수대비의 정치적 야망을 그리며 연산군까지 다루었습니다.
공주의 남자는 수양대군과 김종서의 권력 투쟁을 배경으로
공주인 수양대군의 딸과 김종서의 아들이 나누는 사랑 이야기를 가상으로 다루었습니다.
여인천하는 중종 반정과 연산군의 폐위로 시작하여
기묘사화와 을사사화를 다루었습니다.
대장금은
중종 시대 의녀 장금의 일대기를 다루었습니다.
불멸의 이순신과 허준, 그리고 징비록은
선조 시대 임진왜란이 배경이었습니다.
왕의 여자와 화정은
선조와 광해군과 인조를 배경으로 하였습니다.
드라마 임꺽정은 명종 시대를 배경으로 하였고
추노와 일지매는 인조 시대의 배경이었습니다.
장희빈과 동이는 숙종시대를 배경으로 남인과 서인의 치열한 싸움을 다루었는데
장희빈은 남인의 입장에서 동이는 서인의 입장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이산은 영조와 사도세자와 정조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노론과 소론의 치열한 암투를 다루었습니다.
상도는 순조 시대 상공업의 발달로
조선 상인들의 이야기를 다루었습니다.
명성황후는 철종에서 고종 시대를 배경으로
개방정책을 주장하였던 명성황후와 쇄국 정책을 펼쳤던 대원군의 대립으로
암울하였던 조선 시대 말기의 이야기를 다루었습니다.
경복궁 경내에서 늘어선 수양버들 사이로 향원정을 바라보며....
500년 조선의 역사를 사극으로 되새김하였습니다.
문득 조선의 역사를 움직였던 경복궁의 주역인
조선의 왕들을 떠올렸습니다.
태조와 정종과 태종과 세종과 문종과 단종과 세조와
예종과 성종과 연산군과 중종과 인종과 명종과 선조와
광해군과 인조와 효종과 현종과 숙종과 경종과 영조와
정조와 순조와 헌종과 철종과 고종과 순종의 27대.....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운 조선은
한양에 도읍지를 정하고 경복궁을 지어 새하늘을 열었습니다.
경복궁의 왕좌를 차지하였던 조선의 왕들은
얼마나 화려하고 영화로운 삶을 살았을까 생각해 보었습니다.
1대 태조는 57세에 왕이 되어
재위기간 6년 2개월이었으며 74세에 승하하였습니다.
2대 정종은 42세에 왕이 되어
재위기간 2년 3개월이었으며 63세에 승하하였습니다.
3대 태종은 34세에 왕이 되어
재위기간 17년 10개월이었으며 56세에 승하하였습니다.
4대 세종은 22세에 왕이 되어
재위기간 31년 6개월이었으며 54세에 승하하였습니다.
5대 문종은 37세에 왕이 되어
재위기간 2년 이었으며 39세에 승하하였습니다.
6대 단종은 12세에 왕이 되어
재위기간 3년이었으며 17세에 승하하였습니다.
7대 세조는 39세에 왕이 되어
재위기간 13년이었으며 52세에 승하하였습니다.
8대 예종은 19세에 왕이 되어
재위기간 1년이었으며 20세에 승하하였습니다.
9대 성종은 13세에 왕이 되어
재위기간 25년이었으며 38세에 승하하였습니다.
10대 연산군은 19세에 왕이 되어
재위기간 11년이었으며 31세에 승하하였습니다.
11대 중종은 18세에 왕이 되어
재위기간 39년이었으며 57세에 승하하였습니다.
12대 인종은 30세에 왕이 되어
재위기간 8개월이었으며 31세에 승하하였습니다.
13대 명종은 12세에 왕이 되어
재위기간 22년이었으며 34세에 승하하였습니다.
14대 선조는 16세에 왕이 되어
재위기간 41년이었으며 57세에 승하하였습니다.
15대 광해군은 34세에 왕이 되어
재위기간 15년이었으며 67세에 승하하였습니다.
16대 인조는 28세에 왕이 되어
재위기간 27년이었으며 55세에 승하하였습니다.
17대 효종은 31세에 왕이 되어
재위기간 10년이었으며 41세에 승하하였습니다.
18대 현종은 19세에 왕이 되어
재위기간 15년이었으며 34세에 승하하였습니다.
19대 숙종은 14세에 왕이 되어
재위기간 46년이었으며 60세에 승하하였습니다.
20대 경종은 33세에 왕이 되어
재위기간 4년이었으며 37세에 승하하였습니다.
21대 영조는 31세에 왕이 되어
재위기간 52년이었으며 83세에 승하하였습니다.
22대 정조는 25세에 왕이 되어
재위기간 24년이었으며 49세에 승하하였습니다.
23대 순조는 11세에 왕이 되어
재위기간 34년이었으며 45세에 승하하였습니다.
24대 헌종은 8세에 왕이 되어
재위기간 15년이었으며 23세에 승하하였습니다.
25대 철종은 19세에 왕이 되어
재위기간 14년이었으며 33세에 승하하였습니다.
26대 고종은 12세에 왕이 되어
재위기간 43년이었으며 67세에 승하하였습니다.
27대 순종은 33세에 왕이 되어
재위기간 3년이었으며 53세에 승하하였습니다.
가장 오래 살았던 왕은
영조(83세), 태조(74세), 광해군(67세), 고종(67세), 정종(63세), 숙종(60세) ...순이며
가장 오랫동안 재위에 있었던 왕은
영조(52년), 숙종(46년), 고종(43년) ,선조(41년), 중종(39), 순조(35년)...순입니다.
재위기간으로 보면 1대 태조에서 9대 성종 때까지 100년이요,
10대 연산군에서 16대 인조때까지 156년입니다.
17대 효종에서 20대 경종까지 75년이여
21대 영조와 22대 정조와 23대 순조 때까지 3조 시대가 111년입니다.
24대 헌종에서 27대 순종 때까지 75년으로
1392년 창건된 조선 왕조는 1910년까지 519년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졌습니다.
참고로 조선 왕조와 함께 하였던 대륙의 역사를 보면
중국의 명나라는 1398년에서 1644년까지 246년 동안 17대의 황제에 의하여 통치되었습니다.
그리고 인조때 병자호란을 일으킨 여진족인 청나라는
1636에서 1912년까지 276년 동안 12대의 황제에 의하여 통치되었습니다.
최고 권력의 암투장이 되었던 조선의 역사는
지키는 자와 빼앗는 자의 도전과 응전의 역사요, 피로 얼룩진 경복궁은 역사의 산 증인입니다.
고려의 멸망은 대룩의 왕조가 바뀌면서
신진 사대부의 등장으로 조선이라는 새하늘을 열었습니다.
원나라의 쇠퇴는 고려의 멸망으로 이어졌고
명나라의 부흥은 조선의 창건을 이루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명나라의 정치이념인 성리학은
조선을 설계하는 정치이념이 되었습니다.
성리학의 기반 위에 세워진 조선은
사대부의 정신과 중화사상의 뿌리를 가졌습니다.
조선을 건국한 사대부는 조선 왕조를 이끌어 가는 양반으로 등장하여
조선의 문화를 주도하는 중심이 되었습니다.
조선의 태조는 위화도 회군의 주역인 이성계이지만
고려말 신진 사대부의 리더였던 정몽주와 조선을 설계한 정도전을 척살한 태종 이방원은
사병을 혁파하고 왕권을 강화하였습니다.
세종의 태평성세는
태종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30년 동안 세자로 있으면서 성군의 덕을 수양한 문종은 재위 2년만에 승하함으로
세종의 태평성세를 잇지 못하고 조선은 피의 역사로 얼룩졌습니다.
사육신과 김종서의 죽음과 단종의 애사는
생육신의 절개로 이어졌습니다.
조선 전기의 역사는 훈구파가 집권하여
부국강병과 과학기술을 발달시켰습니다.
조선 중기의 역사는
훈구파와 사림피의 싸움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었습니다.
조선 중후기의 역사는 사림파의 당쟁으로
성리학의 체제가 붕당의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동인과 서인의 붕당은
동인이 북인과 남인으로 붕당되고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붕당되었습니다.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의 양명학이 들어오면서 실학이 발달하였고
정조의 죽음과 정약용의 죽음으로 실학은 좌초되고 외척에 의한 세도 정치가 구한말까지 이어졌습니다.
한편으로 실학자들의 북학파는
개화파에 영향을 끼쳐 개화사상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구한말의 혼란한 정치 상황은
쇄국 정치와 개화파의 충돌로 갑신정변과 갑오개혁이 일어났고
청일전쟁과 러일 전쟁이 발발하여 조선의 역사는 절대 무능으로 외세에 짓밟히고
결국 일제 강점기의 비극을 초래하였습니다.
주권과 영토를 뺏앗긴 한반도는
일제에 의해 식민사관으로 지식인을 세뇌하였습니다.
세계 2차 대전의 종식으로 참혹한 일제 강점기가 끝났으나
외세에 의하여 국토가 분할 통치되고 6.25사변을 맞았습니다.
휴전 협정으로 남북이 분단된 채
남한은 자유 민주주의 나라가 되었고 북한은 공산주의가 되었습니다.
국정과 검증의 국사 교과서로 혼란한 요즘......
북한이 무너지면 미국과 중국과 러시아와 일본이 북한을 분할 통치하게 될 것이다는
망언이 나돌고 있습니다.
부국강병과 민생의 복지는 뒤로한 체
이념과 붕당을 일삼는 정치 현실은 망국의 실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국정은 친일의 뿌리가 염려스럽고.....
검증은 친북의 뿌리가 염려스럽기만 합니다.
식민사관과 뉴라이트사관은 친일의 뿌리를 가졌고.....
민중사관과 주체사관은 친북의 뿌리를 가졌습니다.
친일과 친북의 뿌리가 없는
우리 나라 대한민국의 올바른 역사관은 무엇인가?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대한민국의 미래지향적인 발전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그러나 상처로 남은 역사는
올바른 역사관을 정립하지 못한 체 여전히 외세의 영향 아래 혼동의 사관만 있습니다.
국정과 검증의 대립으로 인한 역사 의식의 혼동은
더욱 깊은 이념의 골을 만들 것입니다.
혼란한 민족의 역사는
올바른 사관을 정립하지 못하였고 보수와 진보의 잔혹사만 현실 정치의 정쟁으로 남았습니다.
경복궁 탐방으로 조선의 역사를 관통하고
올바른 대한민국 역사관에 대한 국정과 검증의 대립각을 잔혹한 정쟁으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인산인해의 경복궁을 빠져 나오면서
광화문 수문장의 교대식을 카메라 앵글로 담았습니다.
북촌과 민속박물관과 경복궁을 둘러 보았는데
점심 시간이 훌쩍 넘어 오후 2시가 되었습니다.
인사동 맛집을 찾아 허기진 배를 채우고
광화문 거리와 청계천을 다녀 올려고 하다가 시간이 모자라서 인사동 투어에 집중하였습니다.
오전에 한산하였던 인사동 거리는 오후가 되면서
인산인해의 물결을 이루었습니다.
절반의 외국 사람으로 채워진 인사동 거리는
한국적인 것이 가득한 외국인의 거리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