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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의 하나님
출 19: 1-12
약속은 중요합니다. 약속에 의해 국가와 사회가 구성되고, 약속에 따라 사람들이 움직입니다. 만약 약속이 없다면 세상의 질서는 엉망이 될 것입니다. 나라와 나라가 약속에 의해 좋은 관계를 유지합니다. 사회는 기본적인 약속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약속은 지켜지기도 하고 또 어떤 약속은 깨지기도 합니다. 약속을 하쟎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대체로 우리는 약속을 얼마나 신실하게 지키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격과 사람됨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언약의 하나님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대할 때 늘 약속을 주었습니다. 그 약속에 따라 하나님은 일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도 처음부터 약속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그 약속을 믿고 갈대아 우르를 떠났고, 그 약속대로 그 후손이 큰 민족을 이루었습니다. 이삭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애굽으로 내려가지 않고 가나안에 머무렀을 때 하나님은 이삭에게 100배의 축복을 주셨고 주위의 사람들이 이삭을 두려워하게 하셨습니다. 야곱이 꿈에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았을 때 축복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시는 방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구원 사건을 보면 놀랍게도 모두가 다 하나님은 약속하시고 사람들은 그 약속을 믿고 순종했는데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를 들어 노아시대의 구원사건을 보십시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설계한 방주지요. 그리고 그 방주에 들어오는 자는 살리라고 약속했습니다. 방주안에 들어온 노아의 여덟식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방주안에 들어오지 않은 사람은 다 죽었습니다. 또 하나님은 애굽에 노예생활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한 약속을 주었습니다.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죄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라. 내가 애굽을 칠때에 그 피가 너희 거하는 집에 있어 너희를 위하는 표적이 되리라 내가 피를 볼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라’ 과연 그날 애굽 온 땅에는 죽음의 재앙이 임하였지만 이 언약을 믿고 피 바른 집에는 재앙이 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또 볼까요? 광야를 지날 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불뱀이 나타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뱀에 물린 자는 죽어갔습니다. 모세는 이 고통을 보고 하나님께 나아가서 이 백성을 살려달라고 합니다. 그 때 하나님은 놋으로 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놋뱀을 쳐다보는 자는 살리라고 했습니다. 뱀을 쳐다보는 것이 어떻게 병을 낫게 하냐?고 질문할 필요없습니다. 하나님은 약속했고 그날 그 뱀을 쳐다보는 자는 다 살았습니다. 물론 쳐다보지 않은 사람은 다 죽었지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오시기전 오래전부터 구원자를 이 땅에 보내주실 것을 약속했습니다. 인간이 범죄한 창3장에 보면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 심판을 선언하기 전에 구원의 약속을 먼저 주셨습니다. 인간을 유혹한 뱀, 사단을 저주하는 가운데 아주 놀라운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창세기3:15말씀입니다.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 여자의 후손이란 오실 메시야를 가리키는 것이고 뱀은 사단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이 말씀을 ‘원시복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오시기전 7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이 약속을 상기하면서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7:14) 더 놀라운 것은 마태는 마태복음1:23에서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난 사건을 기록하면서 바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었다고 선언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언약대로 오신 구원자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3:16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함이니라” 우리는 예수님을 눈으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고 구원얻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헛된 적이 없습니다 그 언약을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민수기23:19에서는 언약의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또 이사야 선지자는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여호와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사40:8) 고 했습니다. 마태복음5:18에서는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라고 했습니다. 차라리 해와 달과 별들이 없어지는 것이 낫지 하나님의 약속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보십시오 사람들의 약속은 쉽게 깨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아무리 신실한 사람이라도 내가 죽으면 내가 한 약속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영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영원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에서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도 살아있는 약속이 되는 것은 그렇게 약속하신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언약을 믿어야 합니다.
언약을 알고 붙잡은 자와 언약 없는 자는 다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을 소유한 언약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언약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나 언약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방황하는 것은 언약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언약없는 인생을 살기 때문에 불안합니다. 언약을 모르기 때문에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에 생을 드려야 할지도 모릅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언약이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언약이 가슴속에 있습니까?
시내산 언약
오늘 본문에 보면 언약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 이르렀을 때에 드디어 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놀라운 약속을 주셨습니다. 무슨 약속입니까? ‘너희들을 내 소유로 삼겠고 나는 너희들의 하나님이 되겠다’ ‘너희들이 내 계명을 지키면 내 백성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이 언약을 시내산 언약이라고 말합니다. 본문 1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올 때부터 제 삼월 곧 그 때에 그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니라”라고 말합니다. 애굽에서 나온지 삼개월이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오십일 쯤 되었다고 말하고 이 언약의 사건이 오순절의 근거라고도 말합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언약을 맺는 장소가 시내산입니다. 이 산의 다른 이름은 호렙산입니다. 제가 성지 순례를 가서 보니까 지금은 ‘제벨무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모세의 산’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이 맺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모세는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산으로 올라갑니다. 백성들은 산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모세가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합니다. 백성들이 응답하고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사이에 언약이 맺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시내산 언약을 통해 우리는 오늘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메시지를 듣기 원합니다.
언약의 근거
첫 번째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이 시내산 언약의 근거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원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는 히브리인이라고 불리어졌습니다. 성서학자들은 히브리인이란 종족을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고 일종의 사회 계급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말합니다. 당시 고대 근동지역에 살았던 노예나 천민을 지칭하는 말이 “합비루”라는 말인데 이 말이 ‘히브리인’의 어원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예였습니다. 볼품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학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 아브라함의 자손만이 아니라 애굽에 노예로 있었던 많은 다른 종족들도 섞여서 함께 도망쳐 나왔다고 봅니다. 광야에서의 불순종과 원망의 사건도 바로 이들 섞여나온 무리들이 원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런 히브리인들이 시내산에 와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한번 본문 4절을 보십시다.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기 전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여기까지 인도했는지를 짤막하게 설명합니다. “나의 애굽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우리는 애굽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알고 있습니다. 시내산까지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건이 있었는지도 압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한 마디로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하고 싶은 말은 하나입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너희들을 위해 놀라운 일을 행하였고 그리고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었다고 성경의 표현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보호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물학자들에 의하면 다른 새들은 새끼를 옮길 때 부리로 잡아서 옮긴다고 합니다. 그런데 독수리는 새끼를 등에 태우고 옮긴다고 합니다. 흥미있는 것은 독수리는 새끼를 옮길 때 그냥 옮기는 것이 아니라 옮기면서 떨어뜨리기도 하고, 다시 날개로 받아서 올라 가기도 하고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만히 얌전하게 여기 시내산 까지 옮기신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400년동안 노예 생활을 했습니다. 애굽같은 기질이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치 독수리가 날개로 새끼를 업기도 하고, 가끔씩 떨어뜨리기도 하듯이 그렇게 시내산까지 옮겨왔다고 말합니다. 그들을 훈련하셨습니다. 쓴물이 있는 곳으로 인도하기도 했고, 물이 없는 사막에서 샘이 솟아나게도 하셨습니다. 하늘에서 만나도 내렸고, 르비딤에서 전쟁도 경험하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드디어 언약의 자리로 인도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언약의 대상이 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민족보다 의롭기 때문이 아닙니다. 또 다른 민족보다 큰 민족이기 때문도 아닙니다. 신7:7-8에 보면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요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히브리인들, 저 노예와 천민계급이었던 그들을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은 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밖에 없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 전적인 사랑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가 구원받은 것도 바로 이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저는 어느 날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라는 이 말씀을 외우다가 저의 가슴을 적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했습니다. 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바울은 엡2:8에서 “우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라고 말했습니다.
언약의 목적
두 번째로 시내산 언약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 그들과 언약을 맺은 목적이 무엇입니까? 본문 5-6절에서는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에게 고할지니라” 어떤 성서학자들은 구약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중의 하나가 이 구절이라고 말했습니다. 구약이란 옛언약을 말하는 것이지요. 이스라엘을 내 백성 삼겠다는 옛 언약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크게 세가지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내 소유가 되겠고’, 그리고 두 번째는 ‘제사장 나라가 되며’ 세 번째는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베드로전서2:9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하나님이 오늘 이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이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오늘 우리들을 불러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신 중요한 목적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출19:5-6은 벧전2:9과 얼마나 잘 조화를 이루는지 모르겠습니다.
온 세계는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특별히 이스라엘백성을 하나님의 소유로 삼겠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내 소유’라는 말은 ‘내 보배’와 같은 의미입니다. 온 세계가 다 하나님의 것이지만 그중에서 이스라엘 백성만은 가장 보배롭게 여기겠다는 말입니다. “너는 내 보배야”라는 말입니다.
집에 많은 물건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 보배와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귀중한 보배와 같은 것은 가장 안전하게 보관합니다. 불이 나도 이것만은 건져냅니다. 도둑맞으면 안되기 때문에 비밀한 곳에 숨깁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가 너희를 나에게 있어서 보배와 같이 소중한 존재로 만들어 주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향해 ‘너는 나에게 있어서 보배와 같은 존재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대상이요, 하나님에게 보배와 같은 존재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왜 이스라엘을 보배와 같은 존재로 만드십니까? 왜 우리들을 그렇게 보배와 같이 귀하게 여깁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이 바로 ‘제사장 나라’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은 자기를 위해 존재하지 않고 남을 위해 존재합니다. 제사장이 하는 일은 다른 사람을 중보하는 것입니다. 백성들의 고통과 문제를 대신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해결해 주실 것을 간구하는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해결사, 즉 중보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 제사장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을 ‘제사장 나라’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주변의 여러 나라에 하나님을 보여주고 하나님과 열국들 사이에 서서 그들의 중보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도 동일합니다. 우리를 왕같은 제사장으로 삼아 세상의 중보자로 삼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에 하나님을 보여주는 일, 그리고 이웃의 아픔을 내 아픔처럼 가슴에 안고 중보기도하는 자가 되는 것, 이것이 오늘 이 시대 그리스도인의 존재목적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스라엘이 비뚤어진 삶을 살게된 것은 ‘내 소유가 되게 하리라’는 말씀만 좋다고 생각하고 ‘제사장 나라가 되리라’는 말씀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병들게 한 것은 선민사상입니다. 이 잘못된 선민사상, 하나님이 우리만 사랑한다는 이 이기적인 생각이 그들을 병들게 했습니다. 열방을 위한 축복의 통로가 되지 못한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병든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외모는 커졌습니다. 대형교회를 이루었습니다. 이 민족의 제사장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기복신앙에 빠져 있습니다. 나만 잘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제사장입니다. 참 흥미로운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나 자신을 위해 살면 하나님이 내 축복을 거두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기도응답을 빨리 받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중보기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남을 위해 기도하다보면 하나님은 내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어떤 사람을 교회를 위해 기도하다가 자기의 문제를 해결받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치유를 위해 기도하다가 자신의 병이 낫기도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교회만을 위해 존재하는 교회는 존재할 가치가 없습니다. 교회는 지역을 위해 존재합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존재해야 합니다. 이것이 제사장이 되는 길입니다.
제사장 나라가 되기 위해 이스라엘은 거룩해야 합니다. 거룩하지 않으면 하나님앞에 쓰임받을 수 없습니다. 보십시오 내 인생이 쓸모가 있고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거룩함입니다. 무당들은 거룩하지 않아도 됩니다. 용하게 잘알아 맞추기만 하면 되지요. 절이나 스님은 싸워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거룩해야 합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빛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교회가 세상을 살리는 마지막 보루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거룩해야 합니다. 본문 9-11절에 보면 몇 번 반복되는 단어가 나오는데 그것은 바로 성결이라는 단어입니다. ‘옷을 빨고’ ‘성결케 하고’ 라는 말씀이 계속 나옵니다. 거룩하고 성결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들은 정결해야만 합니다
피의 언약
세 번째로 우리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사이에 이 언약이 어떤 절차를 거쳐 성립되었는지 볼 필요가 있습니다. 출24장에 보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언약식이 거행되는 과정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산 아래에 있습니다. 백성들의 대표가 되는 이스라엘 장로 70인과 아론과 나답, 아비후와 함께 모세가 산에 올라갑니다. 이때 하나님은 모세만 가까이 오게 하고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율례를 백성에게 전하게 합니다. 그러면 모세는 그 말씀을 가지고 백성들에게 가서 하나님의 말씀이 이러한데 준행하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우리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다 준행하겠다’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드디어 언약식이 거행되는데 모세는 번제와 소로 하나님께 화목제를 드립니다. 짐승을 잡아 피를 단에 뿌리고 나머지 피는 양푼이에 담아 백성들을 향해 뿌립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대표인 장로들이 산 허리에 앉아 하나님앞에서 식사를 합니다.
이런 순서로 언약식이 거행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언약식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피를 단과 백성들에게 뿌리는 일입니다. 출24:8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모세가 그 피를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이때 뿌려진 피가 바로 언약의 피, 그 언약을 성립시켜주는 피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원래 언약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베리트’입니다. 이것은 영어의 ‘cut"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짜르다”라는 의미입니다. 당시 고대 근동지역에서는 계약을 맺을 때 계약 당사자들이 짐승을 잡아 반으로 쪼개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짐승사이로 지나가는 의식을 했다는 것입니다. 피를 흘림으로 언약이 성사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때 흘린 피가 바로 언약의 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이 “언약의 피”라는 단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하는 자리에게 포도주 잔을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는 이유가 바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언약을 이루기 위해 흘리는 언약의 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에 들어올 때 반드시 필요한 것이 바로 이 언약의 피를 뿌리는 것입니다.
CCC 한국총재이신 김준곤 목사님은 피묻은 복음, 피묻는 십자가라는 말을 사용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냥 복음이라고 말하지 않고 피묻은 복음이라고 합니다. 한번은 최상림 간사가 액자 하나를 저에게 선물했는데 그 액자에 새겨진 말이 “민족의 가슴마다 피묻은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자” 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액자를 보는 순간 피묻은 그리스도이라는 말이 저의 가슴에 그냥 와 닿게 되었습니다. 피묻은 그리스도! 이 말이 점점 저에게는 은혜로 와닫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 말이 참 좋습니다. 예수의 피가 모든 문제의 해결이기 때문입니다. 피 묻은 십자가, 피묻은 그리스도가 가정을 살리고 부산과 민족을 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죄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언약의 대상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을 정결하게 하고 거룩하게 하기 위해 대신 피흘려 죽은 짐승이 필요했습니다.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짐승의 피를 뿌림으로 피의 언약이 이루어졌듯이 오늘날 우리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에 들어가기 위해 짐승이 아니라 구원자 예수님이 친히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우리들은 부족합니다. 죄인입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의 상대자로 턱도없이 모자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받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셨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가능해졌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입니까?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과거에 이스라엘을 그렇게 하셨듯이 우리들을 하나님의 소유로 삼으시고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세상에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 통로삼아 세상이 하나님 살아계심을, 그리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지금도 사람들을 구원하고 계심을 보여주시기를 원합니다. 이 놀라운 소식을 전하는 것, 하나님의 은혜를 세상에 말하는 것, 세상을 중보하는 일, 이제 우리가 해야 할입니다. 언약의 하나님을 믿고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