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이오전쟁으로 온 나라가 황폐하였고,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유엔군의 군사기지로 사용되었다. 우리는 추운 날 산으로 들로 나가 나무판을 목에 걸고 산비탈에 앉아서 야외수업을 했다. 바람이 불면 지푸라기가 사방으로 날아다녔고 나무판 위에 있던 공책도 여차하면 바람에 휘날려 갔다.
전쟁은 지루하게 계속되었고, 밀어 올렸다가 밀리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유엔군이 학교를 떠난 후 우리는 본교 뒤쪽에 임시로 세운 교실에서 겨우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날은 추석이 막 지난 후였다. 교실에서 내가 앉은 자리는 북쪽 창가였고, 창문에서 밖으로 내다보면 봉화산이 보였다. 그날따라 공부는 뒷전이고 눈이 자꾸만 봉화산으로 향했다. 계속 바라보니 산은 점점 크게 내 앞으로 다가왔다. 가슴이 콩콩 뛰었고, 수업이 끝나 어서 저 산으로 올라가 보아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산으로 내달렸다. 가끔 산 중턱쯤에 봄 소풍을 가기는 했으나 산꼭대기까지 가본 적은 없었다. 어린아이에게 봉화산 오르기가 무척 힘들었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산의 정상이 한눈에 들어왔지만 아무리 올라도 산 정상은 좀체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올라왔는가 싶어 두 종아리에 힘을 주고 까치발을 하고 서서 올려다보아도 산꼭대기는 보이지 않았다.
몇 번이나 오르고 쉬기를 거듭하여 끝내 정상에 올랐다. 정상에서 본 하늘은 끝없이 넓었고, 더없이 푸르렀다. 그런데 그렇게 힘들게 올랐던 그 정상에서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온 세상이 텅 비어 있었다. 그저 마음이 먹먹하고 까닭 모를 눈물이 났다. 그때는 몰랐다. 무슨 생각으로 봉화산에 허겁지겁 올랐는지.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저 산꼭대기에 올라가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성인이 되어서 음악학원을 운영하며 한참 일을 할 때였다. 밤낮도 없고, 설과 추석, 공휴일도 나에게는 없었다. 오로지 일에 매달리기만 했다. 그 무렵 시즌마다 다가오는 피아노 콩쿠르에서 제자들이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었다. 어느 해였다. 초등, 중등, 고등부까지 전 학년을 내가 가르치던 아이들이 일등을 했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날을 어렵고 힘들게 보냈던 것을 생각하면 하늘을 날듯 기뻐해야 했다. 그러나 기쁨의 순간은 찰나였다. 곧 내 마음은 허탈했고 허무했다. 이런 감정이 무엇인지 잘 알 수도 없었고 왜 마음이 그렇게 공허했는지 몰랐다. 그 후에도 나는 몇 번이나 새로운 인생길에 도전했고, 바뀐 궤도에서도 어느 정도 올랐으나 허한 마음은 반복되었다.
사람마다 자신에 대한 부족함과 만족감이 다를 것이다. 남이 나를 칭찬하거나 성과에 대한 찬사를 하여도 나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남이 나를 어찌 알 것인가. 자기 자신이 가진 능력, 지식, 지혜, 부족함 등이 어떠한가를 누구보다도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에 산 정상, 망망대해 같은 그곳에서 본 허망함이 그랬고, 그리고 살아오면서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부은 후 이루어진 것에 대한 맥 빠짐과 허탈감 등도 그랬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나의 삶 자체가 끊임없는 갈망과 갈구의 연속이 아니었나 싶다. 나이 칠십 살이 되어서까지도 항상 자신에게 결핍을 느꼈고 언제나 마음 한구석이 허하고 빈듯했다. 생각해보니 젊었을 때는 그렇게 살아야 했고 또 그것이 살아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난 나이가 팔십이 되어서였다. 항시 불안했고, 부족하다고 느꼈던 그 허한 마음은 어디로 갔을까. 이제는 온갖 것이 있는 그대로 아름답고 예쁘고 사랑스럽고 소중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비로소 행복한 마음이 어떤 것인지도 알 것 같다. 내 마음이 한없이 순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