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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탄의 궁전을 개조한 보스프러스 해협의 치라한 호텔, 이스탄불 재직시 가끔 이곳에서 석양을
바라보면서 맥주를 들이키던 추억이... 아! 꿈만같던 그 시절이 새삼 떠오릅니다.
[ 터키의 국부(國父), 케말 아타튀르크 ]
< 터키인들의 아타튀르크에 대한 사랑과 존경 >
터키인들은 백척간두에 서있던 터키를 구하고 공화국을 세웠으며 서구화를 일군 케말 아타튀르크를 국부(國父)로 모시며 끔찍이도 숭배하고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는 1910년대 말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패배한 오스만 제국이 거의 멸망 단계에 이르렀을 때 그리스가 서구 강대국들을 등에 업고 옛 고토(故土)의 수복(*)을 부르짖으며 터키땅 깊숙이 침공해 왔을 당시 국민들을 규합하여 그리스군을 몰아내고 오늘날의 터키의 초석을 세운 인물입니다. 이와같이 터키인들이 그에게 그토록 열광하는 이유는 충분히 있습니다.
* 원래 소아시아 반도의 서부해안지역은 그리스인들이 밀레토스, 페르가몬, 트로이, 스미르나, 에페소스 등의 도시를 만들며 정착했던 지역이었습니다. 특히 동로마제국은 비잔틴 제국이라고 불리며 그리스인들이 다스렸던 제국이었기도 해서 그리스인들은 터키땅을 옛날 고리짝부터 자기네 영토라고 생각하여 왔습니다. 심지어 이스탄불도 비자스라는 그리스인이 일구어서 비잔틴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마을이었습니다.
아타튀르크는 아버지란 뜻의 ‘아타’와 터키인이라는 뜻의 ‘튀르크’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니까 터키의 국부(國父)라는 뜻입니다. 원래 무스타파 케말이라고 불렀는데 터키 의회가 그의 생전에 아타튀르크라는 성을 증정하면서 케말 아타튀르크라고 불리어 오고 있습니다.
* 예니체리 복장의 케말
터키에서 케말 아타튀르크에 대한 국민들의 사랑은 그야말로 종교에 가까울 만큼 열광적입니다. 길거리 노점상도 아타튀르크 초상화를 자기 노점에 걸어두는가 하면 대부분의 터키 회사들은 사무실마다 아타튀르크 사진이나 어록을 벽에 걸어두고 있습니다. 물론 터키의 모든 관공서 건물과 인터넷 홈페이지에서도 아타튀르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히 아타튀르크의 어록 중 하나인 "주권은 조건 없이, 제한 없이 인민의 것이다“라는 어록은 아타튀르크의 묘지에서부터 시작해 터키 어디에서다 볼 수 있습니다. 도시에서 가장 큰 대로에는 아타튀르크 대로라는 이름이 붙고, 도시의 중심가에는 아타튀르크의 동상이 반드시 서 있습니다. 이스탄불 공항의 이름도 '이스탄불 아타튀르크 국제공항'입니다. 이런 아타튀르크 숭배는 해외에도 유별나서 터키인이 운영하는 케밥 식당에서도 대부분 아타튀르크 사진이나 터키 국기를 볼 수 있습니다.
케말의 고향인 그리스 테살로니키에 있는 아타튀르크가 태어난 집은 터키 공화국 10주년을 기념해 1937년에 테살로니키시가 '아타튀르크 생가'라는 팻말을 세워 당시 터키 대통령이었던 아타튀르크에게 선물했습니다. 하지만 아타튀르크는 일이 바빠서 살아생전에 이 집을 방문하지 못했습니다. 이후 터키 정부가 박물관으로 만들어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터키인들이 그리스에 오면 이곳을 반드시 들른다고 합니다.
< 케말의 탄생과 성장 >
한때는 지중해를 내해로 삼고 유럽을 벌벌 떨게 했던 오스만 제국은 19세기 말에 접어들면서 유럽의 영토를 대부분 잃고 서서히 죽어가는 거인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무스타파 케말 은 바로 이런 시기에 태어났습니다. 1881년 지금은 그리스 영토인 데살로니키에서 태어난 그는 갈색머리에 피부가 흰색이고 눈이 푸른색이었습니다.
* 아타튀르크 생가
그리스나 알바니아계라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지만 그 자신은 터키계임을 확신했습니다. 부친은 퇴역 군인으로 세관원을 거쳐 목재상을 하다가 케말이 7세 때 죽었습니다. 여동생의 증언에 의하면 아타튀르크는 어릴 적부터 지도력이 있고 똑똑하고 고집 센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는 라그프 베이라는 무역상과 재혼했습니다. 라그프는 의붓자식인 무스타파와 누이동생인 마크불레에게 잘 대해줬지만 그는 자신이 일하는 무역업체에서 후계자가 되기를 바랐고 군인이 되려던 무스타파와 충돌을 빚었습니다. 결국 부모 몰래 1893년 육군유년학교에 응시하여 합격하면서 기숙사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3년 뒤에 육군군사고등학교로 들어갔는데 여기서 수학선생이 ‘완전함’이라는 뜻의 케말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고 합니다.
* 누이동생, 어머니, 케말
이후 육군사관학교를 거치면서 군인으로서 화려한 인생을 출발하게 됩니다.육군 소위로 임관된 케말은 시리아, 리비아의 주둔지에서 근무했습니다. 리비아 주둔 시절 당시의 일화가 있습니다. 케말이 고향친구들과 함께 시장을 거닐던 중 한 집시 점쟁이가 케말의 관상을 보더니 "당신은 터키의 지도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 15년 동안 통치하게 될 것이다." 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아타튀르크는 이 말을 듣고, "그래? 15년이면 충분히 긴 시간이구먼" 하면서 웃어넘겼습니다. 그러자 고향친구들은 "어디로 모실깝쇼 폐하?" 하면서 장난을 쳤다고 하는데 그것이 나중에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정확하게 15년을 대통령으로 근무하다 사망했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족집게 점쟁이도 이 정도면...케말은 리비아 근무가 끝난 후 1914년 불가리아 주재 무관을 지냈습니다.
< 케말과 청년 투르크 당 >
케말은 어린 시절부터 오스만 제국이 빈사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서구처럼 민주적이고 합리적으로 바뀌어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관생도 시절 몰래 반체제 신문을 발행하다가 발각되어 징계를 받고, 중위로 임관한 후에는 조국과 자유를 뜻하는 ‘바탄 베 휘리예트’라는 청년장교들의 비밀조직에 가담해 활동했습니다.
이 젊은 장교들은 곧 청년투르크 당으로 들어갔고, 이들은 오스만 제국의 쇄신 운동을 벌여 나갑니다. 1908년 6월, 마케도니아에 집결한 청년투르크 당의 군대가 이스탄불로 진격해 술탄 압둘 하미드 2세를 퇴위시키고 그의 동생인 메메드 5세를 술탄 자리에 앉혔습니다.
당시 이스탄불 진공 병력의 총지휘를 맡은 케말의 나이는 불과 28세였습니다. 그러나 새 정부에서 그의 입지는 불안했습니다. 사관학교 동문이기도 한 최고실권자인 엔베르 파샤(1)와 사이가 나빴기 때문입니다. 그는 다시 전장으로 나가 발칸 반도에서의 반란 진압에 힘쓰며 중앙정치와 거리를 두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독일과 손을 잡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엔베르는 정반대의 결정을 내렸습니다.
< 갈리폴리 전투와 그 이후 >
제1차 대전에 부득이 참전하게 된 케말은 갈리폴리 반도에서 제19사단을 지휘했습니다. 4월 25일, 해밀턴이 이끄는 연합군 7만 명이 상륙을 하면서 양측은 치열한 전투에 돌입했습니다. 케말은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말라! 진격을 바라지는 않는다. 오직 그 자리를 지켜달라. 전우를 위해 장렬히 싸우다 죽는 길을 택하라.”라면서 병사들을 독려했습니다.
* 갈리폴리 전장에서...
케말의 독전은 처절했습니다. 그는 단순히 독전만 했던 것이 아닙니다. 기습적인 전술로 연합군 지휘부를 혼란에 빠트렸습니다. 연합군은 그해 10월까지 막대한 희생을 치르며 여러번 돌파를 시도했으나 결국 25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내고 퇴각해야만 했습니다.
갈리폴리 전투는 풍전등화의 오스만 제국을 위기에서 구했을 뿐 아니라 근 200년 가까이 서구 열강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한 오스만 제국에게 오랜만에 값진 승리를 안겨주었습니다. 전 국민이 환호했습니다.케말은 여세를 몰아 동북부 지역에서 러시아와의 전투에서도 혁혁한 승리를 거두었으나 세계대전은 국지적인 전투에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1918년 10월, 오스만 제국은 항복을 선언했습니다. 국방부 장관이던 엔베르를 비롯한 정부 수뇌들은 외국으로 신속하게 줄행랑을 쳤습니다.
< 터키 독립 전쟁 >
1919년 5월 19일 무스타파 케말 중장은 술탄의 명령으로 흑해 연안의 삼순항으로 부임해옵니다. 아타튀르크가 맡은 임무는 술탄에게 소규모적인 저항을 벌이던 군대 진압 및 민족주의 단체의 해산이었습니다. 그러나 삼순에 도착한 아타튀르크는 도리어 휘하 병력을 이끌고 이들 반란군대와 합류했습니다.
한편 술탄 메흐메트 6세는 진압을 하러 보낸 장군이 도리어 총부리를 거꾸로 돌리자 경악했습니다. 그는 궐석재판을 열어서 케말 장군에게 사형을 선고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기울어진 제국군 상부는 그를 잡을 힘도 없었고 많은 군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앞 다퉈 그에게 합류하기에 바빴습니다. 7월 8일 그는 이제 자신이 오스만 제국의 군인이 아닌 터키 민주공화국의 군인임을 선언했고 항전결의를 합니다.
1920년 4월 23일, 케말은 군사 요충지인 앙카라에서 국민회의를 주최하고, 자신의 명성과 국민 정부라는 명분을 바탕으로 군의 지지를 확보했습니다. 4월 23일은 터키 공화국 건국기념일로 되어 있습니다.당시 그리스 국왕 콘스탄디노스 1세는 승전국인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를 등에 업고 터키를 침공하게 됩니다. 오랜 옛날부터 터키반도는 그리스 땅이어서 이제 본격적으로 나서서 그 땅을 찾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13만 명에 달하는 그리스군을 파병됐으나 무리하게 전선을 넓히면서 제대로 보급이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케말이 이끄는 터키 국민회의군은 곳곳에서 게릴라전을 벌이며 그리스군을 두들기기 시작했습니다.
* 그리스군과의 전투도
1921년 8월 23일부터 9월 13일까지 무려 3주일 동안 밤낮없이 양군이 격돌한 사카리야 전투에서 터키 국민회의군은 그리스군을 결정적으로 괴멸시켰습니다. 이 패배로 많은 전사자를 내고 사기도 떨어진 그리스는 후퇴를 거듭했습니다. 드디어 국민회의군은 그리스군의 본거지인 스미르나(현재는 이즈미르)를 점령합니다.
1922년 11월 21일 스위스 로잔느에서 새로운 회의가 열렸고 이젠 케말 장군과 국민회의 측은 정당한 정부로서 이 회의에 참석할 자격을 얻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케말 국민회의군은 이스탄불에 입성해서 술탄을 추방하며 오스만 제국의 숨통을 끊었습니다.이후 그리스가 세브르 조약으로 얻은 모든 땅을 포기한다고 물러나면서 1923년 7월 24일 로잔느조약을 새롭게 맺으며 전쟁은 끝났습니다.
* 세브르조약에 의해 갈기갈기 찢길뻔 했던 터키
케말이 없었으면 터키는 앙카라를 중심으로한 지역(흰색)만 남아 있었을 겁니다. 나머지는
이탈리아, 프랑스, 그리스, 아르메니아, 영국이 각각 다스리고 있었겠지요.
* 로잔느조약에 의해 성립된 터키 공화국
< 터키의 초대 대통령, 서구화 개혁 >
1923년 10월 29일 터키 공화국 수립과 함께 케말은 초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새로 성립된 터키 공화국에서 케말은 강력한 정교분리를 통한 세속주의 정책(2)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1924년에는 1300여 년간 지속된 이슬람식 칼리파 제도를 없앴고, 여성교육 및 근대교육 정착에 힘쓰기 시작했습니다.
이어서 1925년에는 복식법을 통과시켜 구시대의 상징인 페즈(3)와 히잡(4)의 착용을 금지시켰으며, 스위스식 민법을 도용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사용되었던 아랍 달력 대신 서양달력을 도입했고, 복잡한 아랍 문자 대신에 알파벳을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서구식 정부 제도를 받아들였습니다. 그 결과 케말의 서구화 정책은 터키를 이슬람권에서 가장 개방적인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 문자 개혁, 알파벳의 도입 >
이슬람의 영향을 받은 오스만 제국 시대에는 아랍문자를 사용했는데 워낙 까다로운 문자이다 보니 1927년 조사에 의하면 당시 터키인 중에서 아랍 문자를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은 겨우 전체 인구의 7%에 불과했습니다.이런 상황에서 케말 파샤는 서양의 알파벳을 도입하는 대 언어개혁을 벌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아랍식 외래어를 없애고 터키 고어를 샅샅이 조사해서 복원했습니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한자, 영어 외래어를 없애고 고전에 나오는 이두 등의 순우리말을 복원해서 새 단어를 만들어낸 셈입니다.
* 새로운 문자를 가르치는 케말
그리고 이 문자를 교육시키기 위해서 초등학교를 만들었고, 어른들도 4개월간 강습을 받게 하였으며, 학교가 없는 마을에는 순회학교까지 개설했습니다. 그리고 케말 자신이 순회학교에 나가서 순회학교 일일교사가 되어 문자 교육까지 하는 노력도 보였습니다.
이런 노력의 결과 1935년의 조사에서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의 숫자는 200만 명이 넘게 되었습니다.왜 하필 알파벳인가에 대한 의문이 들 수 있는데, 오스만 제국 말기, 상류사회에서는 프랑스어를 공용어처럼 사용하던 전통이 있었고, 이스탄불 같은 경우 어딜 가든 상점이든 호텔이든, 관공서든 오늘날 한글 밑에 영어표기를 병기하듯 프랑스어를 병기했습니다.
알파벳은 선진적인 유럽 문명의 상징이기도 했고, 위와같이 상류층은 이미 알파벳 사용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알파벳을 개량해서 터키어를 표기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 국제정세에 대한 탁견 >
국제정세에 대한 케말의 식견은 참으로 탁월해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놀라고 있습니다. 그는 죽기 전에 독일이 이끄는 추축국 편에 서지 말 것을 신신당부했습니다. 당시 국제적으로도 평이 나쁘지 않았던 히틀러에 대해서는 제 정신이 아닌 인물이라고 평해서 그 본성을 꿰뚫어 보았으며 무솔리니에 대해서도 "자기 국민의 손에 목이 매달릴 놈이지"라고 평했다고 합니다.
무솔리니는 2차 대전 말기에 밀라노에서 게릴라들에 의해서 목은 아니지만 발에 매달려서 거꾸로 처형당했습니다. 케말은 무솔리니를 "전장에서 한 번도 승리해 본적이 없는 주제에 군인인척 거들먹 거린다" 고 경멸하기도 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자신이 죽기 전에 머지않아 제1차 세계 대전급의 대규모 전쟁이 발발할 것이며 그 전쟁에 미국이 필연적으로 참전하게 될 것이고 미국의 손에 종결될 것이라고까지 예상했다니 참으로 놀라운 통찰력의 소유자임에는 틀림없습니다.
* 집무실의 케말 밀랍인형
< 조국을 위해 자손을 남기지 않은 케말 >
케말 아타튀르크는 카리스마도 있었지만 개인적인 매력도 상당했던지라 목숨을 건 여자가 최소 알려진 것만 4명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공화국의 미래를 위해(그의 말에 의하면) 직계 자손은 남기지 않았습니다. 대신 양자와 양녀를 합해 8명을 들이긴 했지만 친자식이 아니라서인지 그렇게 심각한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여자와의 관계가 아주 없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공화국 수립 이후 라티페 우샤키라는 여성과 1923년에 결혼한 적이 있었습니다. 허나 자신이 자손을 남기게 될 경우, 이미 터키 국내에서 영웅시되고 있는 자신으로 인해 자신의 자손들이 대대로 대통령을 해먹고 독재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걱정(?) 끝에 2년 만에 이혼했다고 합니다.
이혼했어도 우샤키는 아타튀르크를 사랑했다면서 27살의 젊은 나이임에도 다시는 재혼하지 않고 50년 동안 조용히 살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늘그막에 찾아온 기자가 "당신이 숨어서 사는 이유가 아타튀르크에 대한 가정사를 털어놓을까봐 협박당해서라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입니까?" 라고 하자 버럭 화를 내면서 "냉큼 썩 나가지 못해! 그분께서는 그런 적도 없었고, 괜히 나 때문에 그분이 곤란해할까봐 알아서 조용한 곳에서 산 것뿐이다!"라고 일갈했다고 합니다.
* 파크리에 하늠
이 외에 아타튀르크를 짝사랑했던 피크리예 하늠은 의붓아버지의 친척이었는데, 아타튀르크의 일기를 보면 피크리예 하늠은 아타튀르크를 사랑했는지 몰라도, 아타튀르크는 피크리예를 그냥 친한 동생 정도로만 여겼던 것 같습니다. 육체적 관계는커녕 주로 격무에 지친 아타튀르크와 어울려서 라크(5)나 와인을 마시며 말벗이 된 정도였습니다.
원래 케말 아타튀르크는 결혼에 대하여 관심이 없었습니다, 결혼에 대한 아타튀르크의 태도는 하면 하는 것이고 말면 마는 것이고, 결혼이 뭔 대수냐는 태도였습니다, 위에 언급한 결혼도 공화국 수립 이후에 주위에서 하도 닦달하고 지지고 볶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주위에서 맺어준 여인과 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 때문에 아타튀르크가 동성연애자다라는 악의적인 루머가 돌기도 했지만, 그의 언행을 보나 생애를 보나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됩니다..
< 죽음 >
격무에 시달리던 아타튀르크는 주치의의 만류에도 장기간 지방 시찰을 떠났고, 이로 인해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져 결국 1938년 11월 10일 오전 9시 5분에 돌마바흐체 궁전에서 운명했습니다. 때문에 터키에서는 매년 11월 10일 오전 9시 5분이 되면 5분간 묵념을 합니다.
* 돌마바흐체 궁전의 시계
돌마바흐체 궁전이라든지 여러 문화유적지에서도 시계는 항상 이 시간에 멈춰져 있습니다. 또한 아타튀르크를 열렬히 사랑하는 가정에서는 시계를 이 시간에 맞추어 놓기도 한다고 합니다. 죽은 후에는 재산의 극히 일부를 여동생에게 물려주고 나머지는 모두 국가에 기부했습니다.
케말 아타튀르크의 일생을 보면 결혼도 안하고 샌달 한 켤레, 인민복 1벌과 함께 10평 넓이의 대나무집에서 살다고 죽은 베트남의 국부인 호치민(베트남인들은 그를 ‘호 아저씨’라고 부릅니다)을 떠오르게 합니다.
* 앙카라에 있는 케말의 묘소
(1) 엔베르 파샤
이스탄불에서 출생한 엔베르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압둘 하미드 2세의 전제정부 타도를 꾀하는 청년투르크당에 가입해서 활동하다가 1908년 청년투르크당 혁명을 성공시켰습니다.
1909년 베를린대사관의 무관이 되면서 친독주의자(親獨主義者)가 되었습니다. 1914년 이후 청년투르크당 정부의 실권을 장악하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독일편에 서서 참전을 유도했습니다. 오스만 제국이 붕괴하자 망명하여 터키인들의 민족운동을 지도하던 중 1922년 적군(赤軍)과 싸우다가 전사했습니다.
(2) 세속주의
세속주의란 종교의 자유를 주장함과 동시에 믿음에 관한 것들로부터 중립적인 입장에서 국가에 의한 종교적 강요로부터의 자유를 주장할 수 있고, 종교에 대해 국가적인 특권을 주지 않아야 한다는 사상을 의미합니다. 즉, 인간 활동이나 정치적인 의사결정이 종교에 의해 간섭받기보다는 객관적인 증거와 사실에 기반 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세속주의입니다.
(3) 페즈
1826년 오스만 제국의 30번째 술탄 마흐무트 2세가 본래 착용하던 터번이 착용 방법이 번거롭고 낭비를 조장한다며 신분을 막론하고 모든 이들에게 착용하도록 한 모자입니다.
(4) 히잡
서양에서는 일반적으로 신체의 일부를 가리는 옷을 ‘베일’이라는 한 가지 단어로 쓰고 있지만, 무슬림 여성들의 상징이자 외출복으로 사용되는 가리개는 그 특징에 따라 부르카, 니캅, 히잡, 차도르 등의 이름으로 다양하게 불립니다. 천으로 머리 부분과 목 부분을 가리는 효과를 준다는 점은 공통적인 특징이며, 가장 보편적으로 알려진 이름이 바로 히잡입니다.
(5) 라크
* 라크에 물을 타면 이렇게 뿌얘집니다
터키의 전통술입니다. 무색으로서 물을 타서 마십니다. 물을 타면 뿌옇게 되는데 위스키급의 독주입니다. 그리스의 전통주인 우조와 거의 같습니다. 하지만 사이가 나쁜 두 나라에선 서로 자기들 술을 베꼈다고 까는 경우가 많습니다.전통적으로 그리스와 터키에서는 포도 재배가 성행했고, 포도주도 마찬가지로 상당한 생산량을 자랑했습니다. 포도주를 만들 때는 포도껍질 같은 찌꺼기를 거르게 되는데, 이 걸러낸 포도 찌꺼기를 이용해서 재양조를 한 뒤 이것을 다시 증류한 것이 바로 라크입니다.
[ 이스탄불의 명소, 돌마바흐체 궁전 ]
오스만 제국의 마지막 궁전인 돌마바흐체 궁전은 이스탄불 신시가지의 보스포루스 해협에 위치합니다. 돌마바흐체의 돌마는 터키어로 '꽉 찼다'는 뜻이고 바흐체는 ‘정원’이라는 뜻으로 보스포루스 해협의 작은 만을 메우고 정원을 조성해 '가득 찬 정원'을 뜻하는 돌마바흐체라 불리게 된 것입니다.
해안을 따라 600m가량 길게 뻗어 있어 '바다 위의 궁전'이라고도 불립니다.바로크와 로코코 양식이 혼재된 돌마바흐체 궁전은 웅장하고 화려합니다. 동양적인 형식미가 돋보이는 톱카프 궁전과 대비되는 서양식 궁전입니다.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을 모방해 건설되었고 내부 인테리어와 정원도 프랑스식입니다.
오스만제국 말기의 술탄들은 톱카프 궁전에서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현재는 영빈관으로 이용됩니다.돌마바흐체 궁전의 모든 시계가 9시 5분을 가리킨 채로 멈춰 있어 관람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터키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인 아타튀르크의 사망 시각을 기리기 위한 것입니다.
돌마바흐체 궁전은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었는데 아타튀르크는 1938년 11월 10일 9시 5분, 집무 중에 쓰러져 숨을 거두었습니다. 아타튀르크의 서거일이나 주요 국경일에는 아타튀르크가 머물던 당시 모습이 그대로 보존된 방을 특별히 공개하기도 합니다.
이 궁전은 19세기 중엽, 서구화를 통해 국운이 기울어가던 오스만제국의 부흥을 꾀했던 압둘 메지드 1세가 건설했습니다. 국고가 비어가는 쇠락한 제국이 이 궁전에 모든 재정을 쏟아 부었으니 앞날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이 궁전을 짓기 시작할 무렵 오스만제국은 이미 국력이 쇠약해져 ‘유럽의 병자’라는 비아냥의 대상이 되고 있었습니다. 제국 내 소수민족들의 독립운동이 끊이지 않았고, 술탄과 귀족들의 사치로 국가 재정은 고갈 상태였습니다. 돌마바흐체 궁전은 바로 이 때 무리하게 세워진 궁전이었습니다.
제국의 모든 것을 쏟아 부어 만든 돌마바흐체 궁전은 20년 밖에 사용되지 못했고 궁전을 지은 지 70년이 채 되지 않아 오스만 제국은 막을 내렸습니다. 술탄 압질 아지즈는 아버지가 기껏 지어놓은 이 돌마바흐체 궁전을 버리고 1km 북쪽 해변에 치라한 궁전을 따로 지었습니다. 이 궁전은 지금은 초호화 호텔로 개조되어 세계의 부호들이 술탄의 분위기를 만끽하는 용도로 쓰이고 있습니다. 또한 그의 아들 압둘 하미드 2세는 그마저도 버리고 바로 옆 언덕에 자신만의 이을드즈 궁전을 따로 만들었습니다.
* 치라한 궁전, 지금은 호텔로 바뀌었습니다.
술탄이 3대에 걸쳐 어려운 재정은 아랑곳 하지 않고 경쟁하듯 자기만의 궁전을 지었으니 제국의 멸망은 뻔했습니다. 게다가 압둘 아지즈는 궁전도 모자라 아시아 쪽 해안에 베이베르베이 궁전을 지어 여름 별장으로 사용했습니다. 한 나라가 몰락의 길을 걸을 때 지도자가 개인의 사치에 전념하는 것은 패망국가들의 공통점이기도 합니다.
* 보스프러스 해협의 돌마바흐체 궁전 선착장
[ 세계 최대의 유랑민족, 쿠르드족 ]
인구가 3천만 명~3천8백만 명에 달하는 쿠르드족은 세계 최대의 유랑민족입니다. 터키 남동부와 이라크 북부 그리고 이란 서부 산악지역에 흩어져서 유목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1천4백만 명의 또 다른 유랑민족이었던 유대인들이 2천 년을 떠돈 끝에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이스라엘이란 국가를 건국한 것과 비교가 됩니다.
* 쿠르드족 여전사
그러나 쿠르드인들은 아직도 국가를 세우지 못하고 주변 국가에서 더부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10세기 경 터키 동남부 디야르바크르를 중심으로 작은 왕국을 세운 적이 있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는 이란 땅 언저리에 그들의 공화국을 세운 적이 있었지만 10개월 만에 셔터를 내렸고, 지도자들은 목에 매달렸습니다.
독립국가 수립 기회가 있긴 있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인 오스만 제국이 연합국과의 세브르조약을 통해 쿠르드족의 독립을 약속했었으나 오스만제국이 멸망하고 터키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조약은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당시 승전국 측에서 협상을 주도하던 영국은 쿠르드 지역 중 석유가 매장되어 있는 곳을 자신의 식민지인 이라크에 집어넣기 위해 터키공화국과 새로운 협정인 로잔느조약을 체결하면서 세브르조약을 폐기한 것입니다.
이런 영국의 인위적인 영토구획에 의해 쿠르드 지역은 주변국에 갈갈이 찢겨졌습니다. 양떼를 몰며 물과 풀을 찾아 이동하는 유목민인 쿠르드인들에게 이주는 삶의 형태인데, 갑자기 국경이 생기면서 여기저기 갇히게 된 것입니다. 약자에게 한없이 비정한 국제사회의 현실인 것입니다.
* 쿠르드족이 사는 지역, 쿠르디스탄
현재 쿠르드족은 터키 동남부를 중심으로 인근 국가들에 흩어져 있습니다. 터키에 1천4백만 명, 이란에 7백만 명, 이라크에 6백5십만 명, 시리아에 2백만 명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러시아,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조지아 등지에도 수십만 명 혹은 수만명 씩 살고 있습니다. 이들은 독자적인 언어인 쿠르드어를 사용하고 종교는 이슬람이며 95% 이상이 수니파(1)입니다.
쿠르드족은 각국에서 온갖 탄압을 받았습니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1980~1988년의 이란-이라크 전쟁 때 화학무기를 사용해 현지의 쿠르드족 5천 명 이상을 죽여버렸습니다. 이란을 지원했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2001년 걸프전 때도 후세인의 화학무기에 의해 수많은 쿠르드족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때 많은 쿠르드인들이 후세인의 박해를 피해 시리아로 피난했는데 지금 시리아 내전으로 이들은 또 정처 없는 피난길에 오르고 있습니다. 수니파인 쿠르드족은 시아파인 이란에게도 공격을 받아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이라크에 남은 쿠르드인들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입니다. 미국이 벌인 이라크 전쟁을 거치면서 자치권을 얻은 것입니다. 북부지역에서 자치정부를 구성해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유전이 많은 지역이라 경제상황도 과히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유전 개발을 두고 이라크 중앙정부와의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2009년에는 우리나라의 석유공사와 SK이노베이션이 쿠르드 자치정부와 유전개발에 합의했으나 이라크 중앙정부는 화를 내면서 우리나라에 석유공급을 1년간 중단하고 이라크 남부지역의 유전개발에 대한 석유공사와 SK이노베이션 참여를 수년간 금지했습니다. 우리 자이툰 부대가 주둔했던 아르빌도 쿠르드 자치구에 속해 있습니다.
터키에서는 오랫동안 쿠르드어의 교육과 사용을 엄격히 금지했으며 어떤 정체성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1925년, 1930년, 1935년에 발생한 쿠르드족의 반란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적이 있었습니다. 쿠르드족은 1978년 쿠르드노동자당(PKK)을 조직해 무장투쟁을 벌여 4만 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터키가 유럽연합(EU) 가입을 추진하면서 쿠르드인에 대한 억압을 완화하고 쿠르드어의 사용을 허용하면서 상황은 조금씩 개선되고 있습니다. 쿠르드인들도 선거를 통해 국회로 진출하면서 조금씩 자기 민족에게 우호적인 정책을 펴고 있습니다. 쿠르드노동자당은 2013년 3월 무장투쟁 중단을 선언하고 터키정부와 평화협정을 채결했지만, 여전히 긴장이 완전히 해소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쿠르드족은 터키 전체 인구의 20% 정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터키에서 만난 쿠르드인들은 그들의 역사가 말해주듯 강한 정체성과 집단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십자군을 예루살렘에서 몰아내고 이슬람을 지킨 전설적인 영웅 살라딘(2)이 쿠르드족 출신인 것에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쿠르드인들은 지금은 무슬림이지만 예전엔 모두 ‘예지디’교를 믿고 있었습니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유일신 종교가 자신들의 예지디교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즉 예지디교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원조란 주장입니다. 이들은 7세기 이슬람의 확산으로 강제개종을 당하고 지금은 기독교지역인 아르메니아에 약 4만 명만이 남아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예지디인이 되는 길은 오직 그들의 자식으로 태어나는 길 밖에 없다고 합니다. 살아가다가 그 종교를 믿을 수도 없고, 예지디로 개종할 수도 없습니다. 이교도와의 결혼도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혈연에 갇힌 운명으로 예지디교는 얼마 가지 않아서 사라질 것으로 보입니다.
(1) 수니파와 시아파
수니파와 시아파는 이슬람의 두 세력입니다. 같은 종교에 뿌리를 두지만 교리가 서로 다릅니다. 그리고 서로를 인정 하지 않죠. 두 종파는 많은 차이점이 있지만 가장 대표적으로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마호메트 사후에, 뒤를 이어 “칼리프”라고 하는 지도자가 이슬람교를 이끌게 됩니다. 칼리프는 신앙적 정치적 지도자를 의미 합니다. 그런데 이 칼리프의 자격이 누구에게 있느냐로 인해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수니파 – 칼리프는 이슬람교인 중에 능력 있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된다.
시아파 – 칼리프는 반드시 마호메트의 혈통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
1~3대 칼리프는 수니파에서 배출됩니다. 그러던 중 4대 칼리프가 시아파에서 배출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칼리프가 수니파의 암살자에 의해 살해당하고 맙니다. 이게 불행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오늘날까지도 내가 옳으니 네가 틀리니하며 저희들끼리 지지구 볶구하고 있습니다 .
현재 세계 무슬림 가운데 85%가 수니파, 나머지 15%는 시아파입니다. 사우디를 비롯해 터키와 이집트, 아랍에미리트(UAE), 카타르 등이 수니파 국가입니다. 급진 테러단체 ‘이슬람국가(IS)’도 수니파로 분류됩니다. 시아파에는 이란과 이라크, 레바논의 무장조직 헤즈볼라 등이 속해 있습니다. 시리아는 수니파 주민이 다수지만 시아파 정부가 권력을 쥐면서 내전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선지자 마호메트의 말과 행동(순나)을 따르자는 다수파는 '수니', 마호메트의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4대 칼리프)의 핏줄을 따르자는 소수파는 '시아'(분파라는 뜻)라고 불립니다.
* 마호메트가 메카에서 메디나로 피신하던 경로
(2) 살라딘
중세시대에 중동지역을 제패하고 십자군을 무찌르고 예루살렘을 수복한 군주가 오늘날까지 아랍인들에게 두고두고 영웅으로 칭송받는 쿠르드족 출신의 살라딘이었습니다. 그는 1186년에 시리아와 이라크를 병합하여 중동을 석권했습니다.
살라딘은 탁월한 군사 지도자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뛰어난 정치가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포로 수백 명을 처형하거나 노예로 팔아넘기는 등, 그 당시로서는 지극히 당연시되던 전제군주 노릇까지 굳이 마다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 밖의 면에서 살라딘은 상당히 관대하고 합리적인 면모를 종종 보여주었습니다. 전투에 임해서는 수시로 단호하면서도 교활한 작전을 구사했지만, 때에 따라서는 타협과 외교라는 대안을 적극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평소에도 살라딘은 금욕적인 생활을 유지했고, 종교적 의무를 항상 앞세웠으며, 결코 정무를 게을리 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특히 가진 재산이 없었기 때문에 사후에 장례를 치를 돈조차 없었다는 믿을 수 없는 후일담이 그의 검소함과 청렴함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의외의 사실이지만 살라딘은 이슬람 세계보다 오히려 유럽에서 더욱 명성을 날리며 오래 기억되었습니다. 십자군을 소재로 한 여러 낭만적 문학작품에서도 살라딘은 종종 사자왕 리처드 1세의 숙적이면서도 존경할 만한 인물로 묘사되었습니다.
이슬람 세계에서 살라딘을 성전(지하드)의 영웅, 즉 저항과 독립의 상징으로 드높이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입니다. 그러나 이는 이슬람 여러 독재 정권에서 대외적으로 이용하거나 혹은 테러를 정당화하려는 얄팍한 선전술이라는 비판도 따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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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무수타파 케말 동상이 여러군데
있더군요
최근티브에서 갈리폴리 전투
영화가 나오길레 시청햇는디
배경을 이해하고보니 아주 쉽게
이해했읍니다
고관장님께 감사드립니다
ㅅ
위에서 살펴본대로 아타튀르크는 터키를 서구화하기 위하여 갖은 애를 썼던
인물이었는데...현재는 대통령 에르도안의 철권통치가 터키를 짓누르면서 한
편으로는 터키를 다시 이슬람국가로 돌려놓겠다고 국민들을 욱박지르고 있다
고 합니다. 지하의 아타튀르크가 통탄해 할 것 같은...그동안 케말이즘(케말의
근대화 사상)을 굳건히 지탱해 온 군부도 에르도안한테 꼼짝못하고 있다는 현
지의 안타까운 소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