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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어느 날 가까운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의 믿음을 통한 관계회복이 있고, 의의 행실을 통한 실체적인 자기회복이 있다. 물론 자성自省적 입장에서는 후자가 본질이지만, 보다
근본적인 관점에서는 아버지와 더불어 믿음으로 하나 되어야 비로소 사랑의 회복이 시작된다. 그 사랑이 곧 생명이다.”
성서와 꾸란을 두루 이해하고 아브라함과 모세와 무함마드와 예수님의 향기를 두루 간직해야, 아브라함권의 화해를 이루어 낼 수 있습니다. 또한 한자문화권과 힌두문화권이 보존해 온 동양 영성을 깊이 파악해야 합니다. 그래야 아브라함과 모세와 무함마드가 서 있던 자성영성의 대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Hong, 1209)
무함마드의 향기? / [Audio]
“예수님께서는 어느 날 가까운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의 믿음을 통한 관계회복이 있고, 의의 행실을 통한 실체적인 자기회복이 있다. 물론 자성自省적 입장에서는 후자가 본질이지만, 보다 근본적인 관점에서는 아버지와 더불어 믿음으로 하나 되어야 비로소 사랑의 회복이 시작된다. 그 사랑이 곧 생명이다.’” 근본적인 관점에서는, 즉 히브리성서적인 관점에서는 하나님과 더불어 믿음으로 하나 되는 것, 그것으로부터 비로소 사랑의 회복이 시작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아래 단락을 보시면, “성서와 꾸란을 두루 이해하고, 아브라함과 모세와 무함마드와 예수님의 향기를 두루 간직해야”, 아브라함과 모세와 예수님은 알겠는데, 무함마드,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에게도 향기가 있을까요? 비이슬람권에서 바라볼 때, 무함마드에게서 향기를 느끼기란 참으로 어려울 것입니다. 우선 꾸란이 굉장히 칼날 같은 전형적인 선지자의 메시지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에, 신약성서를 제외하고 구약성서만을 통하여 전형적인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을 만난다면, 그들의 인상은 꾸란 속에 담겨 있는 무함마드의 그것과 유사합니다.
그러하기에 우리 같은 동양권 사람들이 구약성서와 꾸란을 통하여 선지자들에게서 예수님의 향기 비슷한 것을 느끼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나마 신약성서 복음서 속에 인용된 구약성서의 많은 예언들 때문에, 그 예언서 구절들과 친숙해지다 보니, “아, 그분들이 우리가 사랑하는 예수님을 이렇게 예언했구나~”하는 인식을 통해 구약성서 속의 선지자들을 만나니, 그들이 굉장히 친숙해 보이고 따듯해 보이기도 하고 그렇게 된 거에요. 사실 구약성서 속의 사무엘은 아말렉 족속의 아각을 데려오게 해서 칼날로 쪼갰잖아요? 실상 무함마드의 이미지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입니다.
모세와 여호수아도 가나안 땅에 진입하면서 사람들을 많이 살육했잖아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그리고 가나안 땅 사람들의 죄악이 관영해서, 인신제사를 바치면서 엄청난 사람들을 죽이고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그러한 우상숭배가 성행하던 땅이었기 때문에, 그 엄청난 우상숭배를 종식시키기 위해서 그러한 전략을 펼칠 수밖에 없었지만, 사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설복시킬 수 있는 역량이 이스라엘에게 있었다거나, 그들이 복음을 통하여 감복되고 바뀔 수 있는, 마치 요나서 속의 니느웨 백성들처럼 일시적으로나마 회심할 정도의 심상을 지니고 있었다면, 그렇게 몰살시키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나름대로 그러한 심성적 토양을 갖추고 있던 사람들이 기브온 족속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브온 족속은 여호수아 일행과 마주쳤는데도 살아남았잖아요? 본래는 그것이 A급 노정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의 31개 부족이 모두 기브온 족속처럼 현명하고 온건하게 여호수아와 협상을 하고 대화를 했다면, 좋았을 것입니다. 여리고의 라합이라는 여자와 일족도 살아남았잖아요? 본래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던 A급 노정이었습니다. 로마에 복음이 전해진 것처럼, 엘리야의 복음을 듣고 사르밧 과부가 살 수 있었던 것처럼 되지 않으니, 칼을 대서 정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러한 모세와 여호수아의 행동을 표피적으로만 본다면 잔인한 전사의 모습이 되는 것인데, 이러한 이미지가 무함마드에게도 있었습니다.
무함마드의 시대착오
그런데 문제는 이 무함마드가 구약시대 인물이 아니고, 예수님 이후 600여 년이 지난 뒤의 인물이라는 점입니다. 기독교 시대에 구약성서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서 그러한 역사를 펼친 것입니다. “꾸란이냐, 칼이냐?”하는 방식으로 선교를 해서 13억의 이방인들이 아브라함권으로 들어오게 한 공적도 있기는 하지만, 그가 기독교와 예수님 말씀을 더욱 온전하게 이해해서 ‘개혁된 기독교’로 나아갔다면, 기독교의 선지자 모습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면, 더욱 좋았겠지요. 그것이 무함마드에게 천사를 보내신 하나님의 기대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함마드는 태생적으로 아랍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랍적인 사고 속에서 유대인들과의 갈등 가운데 ‘아랍화된 유대교’ 단계에 머물고 만 것이지요. 그래서 무함마드에게도 ‘향기’가 있다면, 구약성서 속의 선지자들이 풍기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그들은 ‘알라’라고 명명하지만,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향하여 치열하게 충성하고 성실하던 인간 무함마드는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이사야와 예레미야와 에스겔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엘리야와 호세아와 모세의 깊은 세계를 알고 있는 우리에게는, 그게 그렇게 크게 와 닿지 않습니다. 왜? 상대적으로 낮은 단계이니까요. 이미 예수님을 알고 있으니, 그게 눈에 들어오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나 13억 이상의 무슬림이라는 존재는 지구상에 명확히 실재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미래적으로는 그들에 대한 이해도 있어야 하기에, 아브라함과 모세와 예수님을 이해하는 기본 위에서, 무함마드에 관한 이해도 사실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이슬람권과 담을 쌓고 살 수는 없는 것이니까요.
얼마 전에 유럽에서 이슬람 극단주의자가 어느 교사를 살해했다는 뉴스가 있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일부 극단적 이슬람의 역기능인데, 꾸란의 메시지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들의 이러한 ‘몰이해’에 관하여 깊이 고민한 인물이 무함마드 이후 400여 년 만에 나왔던 ‘가잘리’였습니다. 마치 기독교의 어거스틴과 같은 위치에 서는 인물인데, 이 가잘리가 체험한 하나님에 대한 사랑, 이러한 영적인 사랑을 당시 이슬람의 다수파였던 순니파가 받아들이면서 상당히 온건화 되었지요. 그래서 율법적이던 이슬람이 하나님과의 사랑을 추구하는 내면적인 수련과정을 간직한 이슬람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앞으로의 천년의 시대에 기독교와 이슬람과 유대교는, 단계별로 우선순위가 있겠지만, 기독교가 우선이고 그 다음이 유대교이고 그 다음이 이슬람이겠지요. 왜? 이슬람의 심상은 아직 많이 거칩니다. 많은 민족들로 구성되어 있다 보니 특색도 다양하고, 또한 일부다처제를 은밀하게 허용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그들과 하나 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평화롭게 지낼 필요는 있습니다. 아브라함권의 화해, 천하를 삼분하되, 평화롭게 지내면서 점진적으로 선교를 해 나가는 것이지요. 명확한 ‘필터링 작업’을 통해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에 관한 이해가 깊어야, 본질적인 아브라함권의 화해를 이루어낼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화해’가 곧 ‘통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힌두문화권의 영성
“또한 한자문화권과 힌두문화권이 보존해 온 동양의 영성을 깊이 파악해야 합니다.” 중국을 비롯한 한자문화권의 진수는 사실 중국보다는 우리 한국에 있습니다. 일본도 있지만, 일본은 무武의 전통이 강하고 문文의 전통이 약하기 때문에, 공자와 맹자와 제자백가의 사상을 보다 더 본질적으로 보존하고 있는 것은 한국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도 무시할 수는 없어요. 거기가 본토이니까. 그리고 인도에는 지금까지도 성행하고 있는 힌두교를 비롯한 동양의 영성이 있습니다. 요가랄지, 명상이랄지, 이러한 그들의 깊이와 한계를 명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아브라함과 모세와 무함마드가 서 있던 자성영성의 대지, 자기성찰, 자기수양, 자성영성의 대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동양의 영성’과 ‘아브라함권의 영성’이라는 엄청난 세계를 오늘 다 설명 드릴 수는 없고, 이 가운데 힌두교의 ‘신에 대한 사랑’과 구약성서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붓다로 인해서 시작된 초기불교가 대략 BC.200년 무렵까지 인도에서 나름대로 번창했습니다. 거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이 아소카 왕이지요. 기독교의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비견되는 인물인데, 자기 영토에 불교를 권장하고 사람들에게 권면했습니다. 그 아소카의 시대가 마감되고 나서, 불교는 인도 땅에서 점차 새로운 모색을 꾀하다 AD.5세기 무렵에 최고 융성기를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힌두교의 전략적인 도전을 받으면서 눈에 띄게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스리랑카와 인도 일부 지역에 소수 종파로 남게 되고, 본토에서 축출되다시피 하여 중국을 거쳐 한국과 일본 지역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지요.
붓다의 초기불교는 기본적으로 인도 땅에서 기원전 1000년 무렵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 ‘우파니샤드’라는 명상체계에 기반을 둔 철학적 종교였습니다. “우주의 궁극적 진리와 내가 일체가 된다”고 하는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이 우파니샤드의 기본 정신인데, 우파니샤드와 초기불교의 본질적인 공통점은 열반涅槃, 곧 ‘니르바나’라는 적멸寂滅 상태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가부좌를 틀고 참선하는 가운데, 그대로 육체도 죽고 영도 안개처럼 흩어져, ‘나’라는 존재는 지상에서도 영계에서도 우주 어느 구석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말 그대로의 무無로 돌아가는 것이 열반입니다. 그것이 붓다의 초기불교와 우파니샤드 학파의 공통점입니다. 결국 쉬운 말로 하자면, “우리 모두 죽자!”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초기불교가 인도, 그 지극히 기복적이고 현세적인 인도 대륙에 먹혀 들어갈 리가 없었습니다. 아소카 왕은 붓다가 가르치던 이러한 본질은 살짝 덮어두고, 붓다가 실천했던 ‘중생에 대한 자비’를 포인트로 삼아 불교를 퍼트린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백성들의 마음을 좀 더 온순하게 하고, 어리석은 인신공희랄지, 인도 땅에도 있던 힌두교의 부정적인 면들을 청소하고 싶었던 거예요. 그러나 불교를 깊이 들어가면, 아소카 시대까지만 해도 초기불교였기 때문에, 공부를 하다 보면, 결국 “죽자”는 이야기입니다. “없어지자”는 거예요. 이 우주 어느 구석에서도 사라져 버리고, 그렇게 사라짐으로써 절대자유를 얻자는 것이지요. 그 ‘자유의 세계’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극락의 세계’가 아니라, 그 극락도 없고 나도 없고 어떤 존재하는 것도 없는 영원한 적멸, 고요, 그 세계로 가자고 하는 것이 우파니샤드와 석가모니 가르침의 종지입니다. 그것이 인도 사람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질 리가 없지요.
신과 나의 사랑
힌두교의 본질은 ‘신과 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신들’이 지저분하고 혼탁하고 자기감정이 강하고, 또한 너무 많아서 헷갈리고, 이것도 신이고 저것도 신이어서 혼탁하지만, 힌두교에도 기본적으로 역사성이 있고 브라만 제사장들도 생각할 줄 아는 인물들이기 때문에, 그냥 그렇게 혼탁한 것만으로는 힌두교가 유지될 수 없으니까, 고대로부터 내려오던 그 혼탁한 힌두교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우파니샤드의 장점들을 흡수하여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힌두교의 신들에게는 자비도 있고 잔인한 것도 있고, 혼탁한 것과 정결한 것이 섞여 있는 것입니다. 혼탁한 옛것을 버리지 않고 새로운 것들을 계속 섞어 나가는 종교가 힌두교입니다.
마치 혼탁한 연못 같은 것이 바로 힌두교에요. 그러나 연못 속에는 개구리가 살고 붕어도 살고 연꽃도 피어나잖아요? 그들이 살아갈 수 있는 요소가 또 있으니까요. 그 연못의 물과 같은 것이 ‘신의 사랑’이라는 요소로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것인데, 그 사랑을 생명시하며 살아가는 것이 힌두교입니다. 이처럼 힌두교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그것을 믿음의 사랑이라 해서 바크티, 곧 신애信愛라고 하는데, 결국 ‘신과 나의 사랑’이에요.
이러한 ‘신과 나의 사랑’이라는 관점에서는 힌두교와 유대교가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알종교와 유대교 역시 공통점이 있었지요? 인도 버전의 바알과 아세라 종교가 바로 힌두교입니다. 시바와 칼리를 인도의 바알과 아세라로 숭배하는 형태인 것이지요. 그만큼 구약시대의 바알과 아세라 종교 역시 나름대로 매력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됩니다. 섹슈얼하고 문란한 108가지 이상의 남녀 체위가 묘사된 조각들이 힌두교에는 팽배하잖아요?
이러한 힌두교인들에게 “다 같이 발걸음을 멈추고, 행동을 멈추고, 생각을 멈추고, 사랑을 멈추고, 자녀에 대한 애착을 멈추고, 자비심 그것마저도 멈추고, 모든 인식마저도 멈추고, 자, 우리 눈을 감고 죽어 갑시다~!”하는 초기불교의 가르침이 수긍되었겠습니까? 그러다 보니, 힌두교의 ‘신의 사랑’이라는 요소를 간추려서 ‘대자대비’라는 문구 속에 집어넣고, “내가 지금 붓다처럼 적멸의 문을 열고 안개처럼 흩어져 갈 수 있지만, 남아 있는 중생들에 대한 책임을 모른 척 할 수 없기에, 온 삼라만상의 중생이 윤회의 사슬을 벗어나 열반에 이르러 적멸 세계의 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까지는, 나는 열반에 들지 않겠다~!”하고 서원한 인물들이 ‘보살菩薩’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서원과 더불어 시작된 것이 AD.1세기 무렵의 대승불교인 것이지요.
그런데 힌두교인들이 보기에는, 그 보살들도 결국은 자기들의 ‘신의 사랑’을 가져다 만든 인간적인 ‘신’이잖아요? 그러니까, 그 인간적인 신이 본질적인 신은 아니니까, 매력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힌두교인들은 이른바 ‘신의 맛’을 알거든요. 그 신들이 우리가 볼 때는 ‘어둠의 영’이거나 ‘우상’이라 할지라도, 비록 혼탁하지만, “신은 신이고 인간은 인간이다”라고 개념적으로 규정짓고 있던 사람들이니까요. 그래서 대승불교 역시 인도인의 마음을 힌두교로부터 본질적으로 빼앗아 사로잡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대승불교는 신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신의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잘 모르던 중국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진 것이지요. 그래서 거기에서 대승불교가 꽃핀 거예요. 그런데 이들이 공부를 하다 보니, “어? 아니네~! 대승불교의 원천은 바로 초기불교이네~!” 하면서, 대승불교가 비판하던 소승불교가 보다 근원적인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초기불교의 본질을 추구하는 ‘선禪 불교’가 달마대사 이후로 다시 문을 연 것입니다.
우주적 죽음
그런데 그러한 선불교마저도 대승불교 요소를 다 버린 것은 아닙니다. ‘보살사상’이 상품가치가 있다 보니까, 선불교에서도 석가모니의 원초적인 가르침을 그대로 가르치지는 않아요. 대승불교의 부족한 면들을 선불교로 보완해서 AD.1세기 이후의 불교를 가르치는 것이지, 석가모니의 원초적인 가르침을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석가모니 본래의 ‘우주적 죽음’에 대해서 권유하고 가르치며, “우리 모두 지금 모든 생각을 멈추고 죽읍시다”라고 가르치는 스님은 없습니다. 다만 대승불교 보살의 ‘대자대비’만을 상품으로 드러내지요. 그것이 마치 불교의 핵심인 것처럼.
그러나 그 뒤에는 ‘우주적 죽음’이 놓여 있습니다. 결국 그들이 언제 이 우주적 죽음에 관하여 가르치는가 하면, 스님이 죽음을 앞두었을 때, “나는 이제 적멸의 세계로 가노라” 하면서 가르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들을 때, 그것이 무척 아름다워 보여요. “아, 저렇게 사람이 죽을 때는 열반의 세계에 들어야 하는구나” 하는 것이지요. 죽는 사람이 “나 죽겠다”고 하는데, 그게 나빠 보이지 않잖아요? 그래서 불교가 나름대로 아름다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초기불교와 우파니샤드 학파의 본질을 파악하고 있던 인도 사람들에게는, 우파니샤드 학파가 무엇인지 석가모니의 출발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불교가 그다지 멋있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인도 사람들은 그것을 잘 알아요. 한국의 불교인들은 그 뿌리를 가르치지 않고, AD.1세기 이후의 선교적 버전의 가르침만을 가르칩니다. 그 ‘우주적 죽음’을 설명하기도 어렵고, 그 단계에 들어가기도 어렵고, 그러한 세계를 근본적으로 알고서 들어갈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왜? 그게 사실은 ‘우주적 우울증’이거든요. 그러나 우파니샤드 배경에서 성장했던 석가모니는 그것을 진리라고 순수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인도인의 심성 속에는 기본적으로 ‘신에 대한 사랑’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신들이 너무나 혼탁하고 지저분하고 다층적입니다. 또한 신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힌두교인들의 심상은 너무나 많은 것들이 다 ‘선善’이예요. 상황에 따라 거짓말을 해서 상대를 속여도, 배낭여행 하는 사람을 등쳐먹어도, 자기가 섬기는 신들 가운데에는 그러한 모략을 펼치는 신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그들에게는 신적인 선의로 용인되는 거예요. 이처럼 객관화된 하나의 진리체계가 힌두교에는 없습니다. 이것도 진리이고 저것도 진리이고, 나의 이러한 성격도 선이고 저러한 성격도 선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인도는 청소가 필요한 세계입니다. 한국의 부흥사들이 가서 부흥집회를 하면서 마구 흔들어서, “독사의 자식들아, 회개하라” 하면서 엄청 회개를 시켜야 하는 땅이 인도 대륙입니다.
자성영성의 토양
우리가 앞으로 새 천년의 주축이 되는 종교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아브라함과 모세와 예수님의 향기에 관한 명상과 더불어, 무함마드의 이슬람과 한자문화권의 유교와 힌두문화권의 힌두교와 우파니샤드 학파의 명상문화에 대한 이해도 깊어질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모세와 무함마드가 서 있던 구약시대의 자성영성의 대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시대까지 인류를 이끌어 오셨던 고대인들의 수양세계에 대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지요.
아브라함 이전 고대인들, 물론 샤먼적 형태였겠지만, 그들을 통하여 전달된 ‘자기성찰’이라는 것이 혹은 유교로, 혹은 불교로, 혹은 자이나교로, 혹은 조로아스터교로, 혹은 피타고라스와 소크라테스의 그리스 철학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한 자성영성의 토양이 수백 년 무르익은 터전 위에서 예수님의 복음이 선포된 것이지요. 그리고 그 위에 2000년 기독교문화가 있는 것인데, 이러한 토양 위의 2000년 기독교문화를 깊이 이해해야, 우리가 앞으로 무엇을 하고 무엇을 이루어 갈 것인가 하는 것이 보다 명확히 보이고 이해될 것입니다. (Hong, 2011)
첫댓글 어머니가 불교신자인데, 이 글을 보니 지금 제 신앙의 형태도 그 영향을 상당히 받고 있는 것 같네요.
제 성격이 그러해서 저랑 맞는 것만 잘 흡수해버린 건지도 모르겠지만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