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921
10월22일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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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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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KM_ZYWKzH_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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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외칩니다. 폭력의 샛길을 멀리 하십시오!>
나라 안팎이 시끌시끌한 요즘 유난히 그리운 한분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평화의 사도 성(聖)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1920-2005, 재위 1978-2005)입니다. 그분은 발길 닿는 곳 마다 목소리를 높여,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평화! 평화!”를 외쳤습니다.
전쟁은 가장 무거운 죄임을 천명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나라들을 직접 찾아가 화해와 중재를 시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과거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자행된 전쟁에 대해 무릎을 꿇고 용서를 청했습니다. 평생토록 ‘전쟁과의 전쟁’을 주도하셨던 그분의 평화와 관련된 메시지를 요약해보니 오늘 우리 모두가 마음 깊이 새길 내용이더군요.
“나는 전쟁과 폭력을 직접 겪어본 사람으로서 선언합니다. 폭력은 악입니다. 폭력은 결코 건설의 도구가 아닙니다. 폭력만이 문제의 해결의 열쇠라는 외침을 절대 수용할 수 없습니다. 폭력은 인간의 품위에 맞지 않음을 선언합니다. 폭력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외칩니다. 무릎을 꿇고 호소합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애원합니다. 길을 바꾸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외칩니다. 폭력의 샛길을 멀리 하십시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당부 드립니다. 평화의 길로 돌아오십시오! 자비로우신 주님께 청합니다. 극단의 야만에까지 떨어진 우리 인류를 불쌍히 여기소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과 한국 교회의 인연은 각별합니다. 그분은 순교자들의 땅이자 분단국가, ‘전쟁 발생 고위험군’ 국가로 분류되는 한국을 각별히 마음에 두셨습니다. 당신도 어린 시절 나치 독일과 소련 치하에서 큰 고통을 겪으셨기에 분단된 한국의 아픔을 당신의 고통처럼 느끼셨던 것입니다. 얼마나 한국을 사랑하셨던지 교황 재위 시절 두 차례나 방한하셨습니다.
1984년 여의도광장에서 거행된 103위 순교자 시성식은 로마 밖에서 실시된 최초의 시성식이었습니다. 1989년에는 세계성체 대회 참석차 방한하셨는데, 당시 주제는 한반도 평화를 염두에 둔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였습니다. 분단으로 고통 받고 있는 우리 민족을 향한 연민으로 가득한 메시지를 잊을 수 없습니다.
“아직도 평화와 정의 속에 하나 되지 못하고 있는 이 나라의 비극적 분단을 가슴아파합니다. 분단된 대한민국의 고난은 분열된 이 세계의 상징입니다.”
2011년 5월 1일 바티칸 광장에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시복 미사를 주례하신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강론이 아직도 귀에 생생합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 어떤 분이신지 감동 깊게 묘사하셨습니다.
“저의 전임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1982년 신앙교리성 장관으로 저를 로마에 부르셨습니다. 저는 23년 동안 그분 바로 옆에서, 매일 그분을 뵈면서, 그분의 인격을 더욱 더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기도하는 모습은 언제나 저를 감동시켰고 든든히 세워주셨습니다. 그분은 복잡다단한 직무 가운데서도 하느님과의 만남 속으로 빨려들어 가셨습니다. 그리고 고통 속의 증거를 보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나하나 그분의 모든 것을 벗기셨지만, 그분은 언제나 그리스도께서 원하셨던 것처럼, 바위로 남아 계셨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26년 5개월이란 긴 교황 재위 기간 동안 총 104회, 129개국을 방문하셔서 역사상 가장 여행을 많이 하신 세계 지도자로 기록에 남아있습니다. 지구를 서른 바퀴 도는 것에 해당하는 엄청난 거리입니다.
그분께서 그토록 기록적인 순례를 거듭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갈라진 이 세상에 보다 많은 다리를 놓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다리는 다름 아닌 평화의 다리, 반전(反戰)의 다리, 사랑의 다리, 화해의 다리였습니다. 교황님께서는 겹겹이 둘러쳐져 있던 나라와 나라, 인종과 인종, 부자와 빈자 사리의 수많은 벽을 허물기 위해 평생토록 동분서주하셨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세상의 평화와 정의의 실천, 가난한 이웃들의 권익 증진을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여행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당신의 위로와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라면 ‘블랙리스트’에 오른 국가라 할지라도 상관하지 않으셨습니다. 여행 위험 지역이라며 측근들이 만류할 때조차도 사랑의 행진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한 평생은 평화로운 세상 건설을 위한 중단 없는 긴 순교자의 삶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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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sSJCPlIkmf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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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인간은 저절로 사탄이 되어가는가?>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어제 복음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성령의 불을 붙이시기 위해 십자가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말은 성령으로 죄가 씻겨지고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며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은 그 ‘성령의 불을 받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내용이어야 타당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구름이 서쪽에서 오면 비가 올 것을 알고 남풍이 불면 더워지겠다는 것을 압니다. 자연에도 법칙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시기’는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복음에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로 번역되었지만, 직역하면 “이 시기는 왜 분별하지 못하느냐?”입니다. 곧 당신께서 성령을 주시는 이때를 왜 깨닫지 못하느냐는 뜻입니다.
이 시기란 이제 우리를 고소한 자에게서 풀려나는 때입니다. 예수님은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라고 하시는데, 합의한다기보다는 수동태로 “풀리도록(to be released) 힘써라!”로 번역하는 게 옳습니다. 우리는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성령에 의해 풀려나는 것이지 내 힘으로 능동적으로 합의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런 인본주의적 생각이 그리스도의 피의 가치를 떨어뜨립니다. 죄는 내 노력이 아니라 용서로 풀리는 것입니다.
한 아이가 할머니 댁에 놀러 갔다가 새총으로 할머니께서 아끼는 오리를 죽였습니다. 장작 사이에 죽은 오리를 몰래 감추어놓았지만, 이것을 여동생이 보고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여동생은 오빠를 부려먹습니다. 자기가 해야 할 설거지나 심부름을 “오리를 기억해?”라고 하며 할머니께는 “오빠가 다 하겠대요!”라고 말합니다. 며칠 동안 동생의 노예가 되어 살다가 너무 힘들어 할머니께 다 고백합니다. 할머니는 말씀하십니다. “나도 다 알고 있었단다. 단지 네가 동생에게 어디까지 끌려다니나 보고 있었던 거란다.”
내 죄책감은 그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는 대상에게서 용서를 받아야 사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다고 알려주는 시스템이 ‘양심’입니다. 이 양심은 하느님이 넣어주셨고 그래서 용서하실 수 있는 유일한 심판관도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통해 우리의 모든 죗값을 치르셨습니다. 마치 에덴동산에서 가죽옷을 입혀주시는 것처럼 우리가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았다고 믿기만 하면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나게 되어있습니다.
하지만 양심의 가책을 무시하면 어떻게 될까요? 사탄이 됩니다. 양심은 나를 고소하는 알람과 같은 기관입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에서 나를 고소하기 위해 끌고 가는 사람이 바로 ‘양심’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재판관’에게 넘겨지는데 여기에서 재판관은 ‘자기 자신’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고 스스로 죄인으로 심판하여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그러면 ‘옥리’에게 넘겨지는데 옥리는 마귀이고 ‘사탄’입니다. 죄책감은 나를 사탄의 손아귀에 쥐여주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은 성령의 불이 우리를 양심의 고발로부터 자유롭게 해준다는 뜻입니다. 양심의 가책이 해결되지 않으면 결국엔 죄와 지옥의 고통으로 들어가는 것이 뻔한데 왜 아무 일도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양심이 없다거나 스스로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나를 지옥으로 몰아넣습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 ‘클랜’(2015)은 아르헨티나 군부독재를 믿다가 은퇴한 아버지 푸치오가 부자들을 납치해 일말의 양심도 없이 돈을 뜯어냈던 사건을 담았습니다.
아들 알렉스는 친구를 납치하는데, 아버지를 위해 작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돈을 받고는 아버지가 친구를 죽인 것을 알자 그 일에서 손을 떼려 합니다. 알렉스는 아버지를 떠날 용기가 없습니다. 그러다 경찰에 걸리고 맙니다. 알렉스와 아버지는 종신형을 받습니다. 아버지는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다 가정을 위해 했다고 줄기차게 자기합리화를 했기 때문입니다. 자기합리화를 하지 못한 알렉스는 어떻게 했을까요? 법정으로 가다가 5층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시도합니다. 하지만 죽지 않습니다. 감옥에서도 여러 차례 그런 시도를 했지만 죽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법학 학위를 받아 2008년 출소하여 변호사 일을 합니다. 소시오패스가 변호사가 된 것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나려 해도 주위의 영향 때문에 죄를 짓게 됩니다. 저런 가정에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으며 살 수 없는 것처럼, 이 세상도 원죄의 영향으로 죄에 물들지 않을 수 없는 환경입니다. 알렉스가 자살로 자기를 합리화하는 것이나 아버지가 가족을 위한다고 합리화하는 것이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다 양심의 가책을 자기 힘으로 무마하려는 자기합리화에 불과합니다. 양심이 없다면 자살을 시도하지 않습니다. 그냥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서 그럴 수밖에 없다고 자기합리화하면 됩니다. 물론 자기합리화가 지나치면 결국엔 소시오패스나 사이코패스가 됩니다.
양심의 문제를 내버려 두면 끊임없는 자기합리화로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가 되거나 자기합리화를 멈추면 그 죄책감의 무게를 견딜 수 없어서 자살하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죽인 유다인들은 사이코패스가 되었고 유다는 자살했습니다. 그렇게 반복되는 굴레에서 인간은 점점 더 사탄의 손아귀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곳이 지옥입니다. 물론 자살한다고 다 지옥에 간다는 말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용서를 청하고 받았습니다.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성령의 불을 통해서만 양심의 가책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 변하지 않는 굴레를 이해하고 빨리 성령을 받고 탈출하라는 말씀입니다.
양심은 하느님께서 넣어주신 알람이기에 모두에게 똑같이 작용하고 하느님만이 다시 바로잡아 주실 수 있으십니다. 그 방법은 ‘가죽옷’을 입혀주시는 것입니다. 가죽옷이 성령의 불입니다. 그런데 가죽옷을 입으면 그리스도로 살아야 합니다. 죄만 없애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인으로 들어오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자유로우려면 주님께서 용서해 주셨음을 믿고 그리스도로 사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부모가 주는 사랑을 받으면 부모에게 순종할 수밖에 없는 아이들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복음을 전하는 것은 모두 자신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살게 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이것이 아닌 이상 인간의 모든 행동은 양심의 가책으로 인해 자아와 사탄에게 넘겨져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가을이 지나면 겨울이 오는 것처럼 하나의 법칙입니다. 안타깝지만 그리스도로 사느냐, 인간으로 사느냐는 그리스도로 사느냐 사탄이 되어가느냐와 같은 말입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도움으로 고발자인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나느냐, 아니면 계속 끌려가 지옥으로 들어가느냐, 두 선택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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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12,54-59 : 법정으로 가는 길에서 화해하도록 힘써라
오랜 경험으로 사람들은 어떤 현상이 일어나면 그것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안다. 언제 비가 내리고 폭풍이 불지를 예측한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날씨를 미리 알고 폭풍을 예고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장차 일어날 중요한 일을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신다. 중요한 일이란 마지막 시대에 만인의 구원을 위해 당신을 희생으로 바치시는 것이다.
이 위대하고 값진 구원의 수난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이루어진다. 이제 그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문이 활짝 열리고 그들은 넘치는 행복을 누릴 것이다. 아가서에서 우리는 신부를 부르시는 그리스도를 만난다. “나의 애인이여,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주오. 자, 이제 겨울은 지나고 장마는 걷혔다오. 땅에는 꽃이 모습을 드러내고 노래의 계절이 다가 왔다오.”(아가 2,10-12) 여기서 신부는 교회이며 그분을 믿는 이들에게는 봄기운이 다가오고 있다.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해 준 징조들을 통해 이 시대의 본질을 알았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서도 또한 걸맞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재판관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 주님께서는 우리 목숨이 다하기 전에 죄와 형벌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늘 깨어있어야 한다고 하셨다. 우리는 모두 죄를 지은 자들이다. 아직 재판관에게 가기 전에, 즉 살아있을 때에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를 온갖 빚과 형벌에서 자유롭게 해 주고, 온갖 두려움과 번민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주님의 은총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의 더러움을 씻지 않으면, 결국 재판관 앞에 서서 판결을 받고, 아무도 피할 수 없는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해 합당한 벌을 받을 것이다. 재판관은 우리를 옥리에게 넘기고 옥리는 우리를 감옥에 가둔다. 내가 지은 죄에 대한 대가를 모두 치루기 전에는 결코 나올 수 없고, 옥리도 내보내지 않을 것이다. 이 형벌을 면해줄 수 있는 분은 오직 주님뿐이시다.
살아있는 동안에 죄를 벗어버리고 변화되지 않으면 우리의 죄가 오백 데나리온이건, 오십 데나리온이건 탕감 받을 자격이 없다. 그러므로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루카 7,48)는 말을 들을 자격이 없다. 우리는 감옥에 갇혀 징벌을 받는 것으로 빚을 갚아야 할 것이다. 거기서 ‘마지막 한 푼까지’ 갚지 않으면 결코 나오지 못할 것이다. 진정한 변화를 우리가 살아있을 때 이루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변화하지 않아 하느님께 죄를 짓게 되면 우리를 재판관에게 넘겨 재판관이 우리를 옥리에게 넘기게 하는 고발자는 누구일까? 우리는 빨리 그를 찾아 합의를 봐야한다. 그 고발자는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며 올바로 살 수 있을 때, 우리는 하느님께 죄를 즉 빚을 지지 않는다. 하느님의 말씀에 따르는 삶을 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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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토라)은 매우 중요하였습니다.
그것은 목숨과도 같았으며, 율법의 준수 여부가 행복이나 축복 또는 저주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은 곳곳에서 율법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드러냅니다.
오늘 화답송의 시편은 율법에 대한 신심을 담고 있는 대표적인 구절입니다. 시편 119(118)편은 전체 150편 시편 가운데 가장 긴 시편으로, 모두 176절로 되어 있습니다. 굉장히 길지요. 이를 이른바 ‘알파벳 시편’이라고 부릅니다. 히브리어에는 스물두개의 알파벳이 있는데, 시편 119 (118)편은 하나의 알파벳을 여덟 절마다 사용하여 총 176절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시편이 알파벳의 순서에 따라 구성된 것은 규칙과 질서를 강조하고자 함입니다. 동시에 시편 119(118)편은 율법을 ‘법령’, ‘계명’, ‘가르침’이라고 다르게 표현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길을 제시합니다. 율법에 성실하고, 율법을 충실하게 따르는 사람은 복을 받는다는 가르침을 주려는 것입니다. ‘율법’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떤 마음부터 생깁니까? 긍정적으로 따르고 싶은 마음인가요, 아니면 부정적인 거부감인가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하여 내리신 예수님의 ‘불행 선언’ 때문에, 어쩌면 율법에 대하여 그리 긍정적인 생각이 들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성실하게 지키는 것, 그것이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가르침을 “저의 즐거움”이라고 찬미하였듯이, 주님의 법령과 계명, 가르침과 규정이 우리에게도 기쁨이 될 수 있도록, 시편 저자의 의도를 헤아리며 시편 119(118)편을 다시 한번 읽고 되새겨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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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또 남풍이 불면 ‘더워지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루카 12,54-56)
이 말씀은, 자연현상을 풀이하는 일은 잘하면서
그 자연을 만드신 하느님의 뜻은 왜 모르느냐고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이 시대’는 ‘메시아 시대’와 ‘종말’을 뜻하고, 동시에 ‘회개해야 할 때’를 뜻합니다. 그래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라는 말씀은, “메시아 시대와 종말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과 지금 당장 회개해야 한다는 것을 왜 깨닫지 못하느냐?”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많은 것을 안다고 잘난 체 하면서 ‘정말로 알아야 할 것’은 외면하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알아야 할 것’은 ‘하느님의 뜻’이고, ‘정말로 실천해야 할 것’도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회개해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지혜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무지가 그 안에 들어찬 사람들은 본디 모두 아둔하여 눈에 보이는 좋은 것들을 보면서도 존재하시는 분을 보지 못하고 작품에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그것을 만든 장인을 알아보지 못하였다."(지혜 13,1) “그러나 그들이라고 용서받을 수는 없다. 세상을 연구할 수 있을 만큼 많은 것을 아는 힘이 있으면서 그들은 어찌하여 그것들의 주님을 더 일찍 찾아내지 못하였는가?"(지혜 13,8-9) 실제로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해도 ‘정말로 알아야 할 것’을 모르고 있다면, 그것은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 말씀은, 성서학과 신학을 잘 알고 있다고 잘난 체 하는 사람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성서학과 신학은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한 학문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생활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는 것으로 그치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으면, 많이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는 성서학과 신학 지식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아무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앞의 10장에 어떤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을 받는 방법을 묻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루카 10,25ㄴ-28) “그렇게 하여라.”라는 말씀은, “네가 알고 있는 그것을 그대로 실천하여라.”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라는 말씀은, ‘실천’을 통해서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성경과 율법과 신학과 이스라엘 역사 등을 아무리 많이 알고 있어도,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으면, 그 지식은 영원한 생명과는 아무 상관없는 ‘죽은 지식’이 될 뿐입니다.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그러지 않으면 그가 너를 재판관에게 끌고 가, 재판관은 너를 옥리에게 넘기고 옥리는 너를 감옥에 가둘 것이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루카 12,57-59)
여기서 ‘올바른 일’은 ‘회개’를 뜻하고, ‘판단’은 ‘실천’을 뜻합니다. 그래서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라는 말씀은,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스스로’라는 말은, 죄를 지은 사람 자신이 능동적으로 회개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고소한 자’는 하느님으로 해석됩니다. 죄는 하느님께 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재판관이신 분이시고, 동시에 죄인들을 기소하는 검사이신 분입니다.) ‘고소’에 관해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하리라고 생각하지는 마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어 온 모세이다.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라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 그가 나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하였기 때문이다."(요한 5,45-46) 이 말씀에서 ‘모세’는 모세가 기록한 ‘하느님의 말씀’을 뜻합니다. 따라서 앞의 ‘고소한 자’를 ‘하느님의 말씀’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또는 죄 지은 사람 자신의 ‘양심’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고소한 자와 ‘합의’를 본다는 말은 회개를 뜻합니다. ‘도중에’는 ‘하느님의 심판대에 서기 전에’입니다.
인생은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가는 여행입니다. 회개하고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는 이 여행은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하기 위해서 가는 여행입니다. 그러나 죄 속에서 살면서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고소당해서 재판관에게 끌려가는 여행이 될 것입니다. (당사자는 그것을 모르거나 의식하지도 않으면서 살겠지만......) 어떻든 회개는 이 여행이 끝나기 전에 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행이 언제 어떻게 끝날지 알 수 없으니, 지금 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죄인의 멸망을 바라시지 않고 회개해서 살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 “내 생명을 걸고 말한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나는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한다. 돌아서라. 너희 악한 길에서 돌아서라. 이스라엘 집안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으려 하느냐?"(에제 33,11) 그렇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회개해서 살 기회를 주십니다. 누구든지 회개하면 살 수 있습니다.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 멸망을 선택하는 사람입니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보속을 완전히 마칠 때까지 연옥에 있어야 한다는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연옥도 지옥 못지않게 고통스럽고 무서운 곳이지만 그래도 희망이 있는 곳입니다. 지옥은 모든 것이 끝난 곳, 보속을 할 수도 없는 곳, 희망이 전혀 없는 곳, 완전한 절망과 후회만 있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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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불가에서는 선을 수행하면서 깨달음에 방해가 되면 부처의 가르침일지라도 버릴 수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넜으면 배를 버리라고 이야기합니다. 폴 카퍼는 ‘열린사회와 적들’에서 인류의 철학적인 스승이라고 존경받는 ‘플라톤, 칼마르크스’를 비판하였습니다. 플라톤의 ‘국가’는 뛰어난 지도자가 통치하는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국가는 자칫 전체주의에 빠질 수 있고, 우생학을 근간으로 타 인종에 대한 억압을 행할 수 있는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폴 카퍼의 열린사회는 뛰어난 지도자의 통치를 받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지만 대화와 토론을 통해서 발전시키는 나라였습니다. 이런 국가는 발전은 느릴 수 있겠지만 국가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칼마르크스는 역사를 필연의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봉건사회, 자본주의 사회, 다음은 공산주의 사회가 될 것이라고 예측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역사 인식은 맞지도 않고, 있지도 않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역사는 필연의 과정이고, 인류는 그런 필연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고민하고 성찰하면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9월 21일 유엔총회에서 ‘기조연설’을 하였습니다. 코로나 시대를 지나면서 새로운 국제질서를 이야기하였습니다. 기존의 국제질서는 강대국들이 이끌어갔습니다. 그러나 그런 방법으로는 코로나와 같은 전염병을 막지도 못했고, 막을 수도 없었습니다. 앞으로의 세계 질서는 모든 나라가 연대하고, 협력하는 것입니다. 백신의 개발도, 치료약의 개발도, 방역도 연대와 협력이 없으면 하지 못하고, 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백신의 허브로 백신을 공급하고, 어려운 국가를 위한 지원을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기후위기에 공동으로 대응하기 위해서 탄소중립을 이루어가겠다고 하였습니다. 대화와 타협만이 진정한 평화를 이룰 수 있음을 경험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북한과의 판문점 선언이 있었고, 북한과 미국의 싱가포르 선언이 있었습니다. 아직도 정전중인 한반도에 종전선언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유엔의 지지와 협력을 부탁하였습니다. 한국의 방탄소년단도 대통령의 특사자격으로 유엔총회에서 연설하였습니다. 지난 2년은 잃어버린 시간이 아니었고, 앞으로 미래를 준비하는 시간이었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일상의 소중함을 알았고,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그렇습니다. 율법도, 계명도 하느님의 나라로 가기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 강을 건넜으면 배를 버리듯이,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법칙을 발견합니다. 내가 좋은 것을 하기를 바라는데도 악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코로나와 함께 했던 지난 2년은 잃어버린 시간이 아닙니다. 미사가 얼마나 소중한 성사인지 새삼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교황님께서 이야기한 것처럼 나눔이 더욱 절실한 시대임을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일지라도 그것이 하느님께 가는데 방해가 된다면 기꺼이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시대의 징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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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부산 분도명상의 집) 박재찬 안셀모 신부님]
<예수님께서 진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찬미 예수님!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또 왔습니다. 권 신부님께서 우리 쌍용동 성당 교우분들을 사랑하셔서 영적으로 더욱 성장하고 기도 안에서 주님과 일치를 이루는 삶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에 대해 이번에는 말씀을 나눌 예정입니다. 두근두근!!! 재미있겠죠?
예전에 트라피스트 수녀원에서 열흘간 피정 지도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 기도와 관상에 대한 강의 후, 수녀님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부님, 너~~~무 재미있습니다.” 우리 쌍용동 교우분들도 수준이 높기 때문에 오늘 기대됩니다. 개봉 박두!!!
제가 지난 10월에 사제서품 20주년을 맞았습니다. 저의 명상의 집에 미사 오시는 몇몇 분들이 저에게 작은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보답하는 마음으로 그분들께 감사의 선물을 드렸더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 신부님은 이렇게 저희에게 선물을 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신부님은 그 자체가 저희에게 선물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듣고 참 감동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선물을 많이 주고받아서 기쁘기 보다는 그 사람 자체로 기쁠 때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내 곁에서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기쁨이 되고 그래서 뭔가 더 해 주고 싶은 마음도 생겨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때는 그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 그 자체가 기쁨이 아니라 불편함이 됩니다. 그래서 사랑은 참된 기쁨을 누리는 기준이 되는 것 같습니다. 바라만 봐도 기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온갖 것을 다 해 주어도 오히려 부담이 되는 사람이 있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우리의 예수님을 향한 마음도 바라만 보아도 기쁘고 좋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을 두려워하기도 하고, 예수님을 바라보며 뭔가를 끊임없이 청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바라볼 때는 어떨까요?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바라만 보아도 참 좋아하시고 기뻐하실 것 같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시니까요? 그러나 우리가 죄를 짓고, 사랑하지 못하고, 미움과 질투, 시기와 욕심 가운데 있다면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 보고 계실 것 같아요.
자매 형제 여러분, 이제 우리는 성숙한 신앙인으로서 주님께서 나의 기쁨이 되어 주시기를 바라기 보다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주님을 더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는지를 먼저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기쁨을 드리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무엇을 싫어하시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어린 아이처럼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해 달라고 하느님께 떼를 쓰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분께서 무엇을 좋아하시는 지는 관심이 없는 거죠!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 필요한 것들은 잘도 풀이하면서 이 시대의 징조는 풀이할 줄 모르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쉽게 말해, 세상 일에는 그렇게 열심히 하면서 하느님의 일에는 관심을 갖지 않느냐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그것을 행할 때 우리는 변화됩니다. 예수님께서 내 안에 사시고 그분과 하나되어 살아갈 때 우리는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 됩니다. 그 판단은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분이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분과 하나되어 살아갈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는 화해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화해는 세 종류가 있습니다.
먼저 자기 자신과 화해해야 합니다. 지나온 시간 상처 주고 상처받았던 자기 자신, 죄 짓고, 아파하고, 가면을 쓰고 살았던 나와 화해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과거와 화해하는데 있어 “예수님의 눈으로 자기 자신의 과거 바라보기”는 참 도움이 됩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인가 잘못해서 벌하시기 보다는 그냥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뉘우치고 돌아가면 따뜻하게 안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나를 이미 받아 주셨는데 나는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자비를 무시하는 사람들입니다. 만약 스스로를 용서하기 힘든 사람이 있다면 사랑의 몫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베풂으로써 보속하고 자유로워지시길 바랍니다.
두 번째 우리가 화해해야 하는 것은 사람들과의 화해입니다. 미운 사람, 상처 받은 사람, 손해를 준 사람, 피해를 준 사람들과 화해하고 받아 들일 때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간직하게 됩니다. 사실 심각한 피해를 준 이들을 용서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내 힘으로 안됩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화해를 이룰 때 우리는 하늘 사랑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다른 사람과 화해 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아직 예수님의 마음을 간직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나와 다른 사람들을 하느님께 맡겨 드리는 것을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과 하나되었다는 표시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하느님과 화해해야 합니다. 아니 엄밀히 말해서 하느님의 화해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끊임없이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화해를 청하지만 우리는 그분께 제대로 응답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모든 것은 다 지나가고, 우리는 죽음 후에 아무 것도 가져 갈 수 없습니다. 가져가는 것이 있다면 다만 사랑했던 것과 선행을 베풀었던 것일 겁니다. 매일매일 우리의 죽음을 묵상하며 우리의 죄와 우리의 완고함과 집착들을 주님께 말씀드리고 용서를 청하며 그분과 하나되어 가는 쌍용동 본당 교우분들이 되시길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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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이재영 요셉 신부님]
<불러 주신 목적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날씨에 굉장히 민감한 반응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부가 그러합니다.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이들이기에 그 날 그 날의 기후 조건이 그들에게는 아주 중요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 날의 기후에 따라 목숨도 잃을 수 있기에 특별히 날씨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어부뿐만 아니라 농부도 마찬가지입니다. 비가 많이 오면 많이 온다고 걱정, 비가 내리지 않으면 농작물이 타 들어간다고 걱정, 태풍이 올라오면 잘 가꾸어진 논과 밭이 피해를 입을까 걱정합니다.
이렇게 농부와 어부들이 농사 또는 고기잡이에 관계가 있는 날씨에 관하여 관심이 깊다보니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니 곧 비가 오겠구나, 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오는 것을 보내 날씨가 몹시 덥겠구나, 아침 하늘이 붉고 흐린 게 오늘은 날씨가 궂겠구나” 할 정도로 환히 압니다.
이러한 사정은 우리나라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해당됩니다. 특히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 이런 사람들을 “하늘과 땅의 징조는 알면서도 시대의 뜻은 알지 못하는 위선자들”이라고 비난하십니다. 과연 이들은 그런 비난을 받아 마땅했던 것일까요?
예수님이 그들을 그렇게 비난한 까닭은 그들이 시대의 징표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살아가면서 엉뚱한 데 관심을 쏟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당장 먹고 목숨을 이어가야 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도사가 되어 있었지만 그들이 지금 어떤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지,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한 시대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향하여 가고 있는지 그리하여 오늘을 어떤 자세로 맞이하여 내일을 어떻게 희망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백지 상태에 가까웠고 또 알고자 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들은 역사 한 복판에 있으면서도 사실은 이미 역사를 외면 또는 이탈해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두고 오늘 예수님은 시대의 뜻을 잘 알라고 하십니다.
그럼 예수께서 사람들이 우선 알아야 할 시대의 뜻이란 어떤 것이겠습니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자세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공생활을 하시면서 줄곧 외치시고 가르치셨을 뿐만 아니라 기적까지도 행하신 것은 다름 아닌 하느님 나라 때문이었습니다. 그럼 예수님이 그토록 강조하신 하느님 나라는 도대체 어떤 나라이며, 하느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요?
먼저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 나라란 하느님께서 직접 다스리시는 나라를 말합니다. 하느님을 왕으로 모시고 하느님의 법에 따라 사는 나라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나라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 역사 속에서 구체화되었으며, 현세뿐만 아니라 죽음 이후의 세계까지도 통치영역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조건을 갖추어야 했습니다.
우선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을 믿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하느님의 법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법은 죄를 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늘 사람들이 죄 짓지 않고 설령 죄를 지었다하더라도 빨리 회개하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가난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산상설교 첫마디부터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가난한 마음이란 어떤 마음입니까?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미래를 향해 열려진 마음을 말합니다.
미래 개방성이란 이웃을 향해, 그리고 하느님을 향해 열려 있는 마음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보다 나은 미래를 향한 소망 가운데 사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을 위한 공간이 마련되지만, 오직 현재만을 위해 사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이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바로 이들 즉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려고 하지 않고 현실에만 매달려 사는 사람들이 시대의 뜻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요, 무엇이 옳은지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두고 오늘 예수님은 심한 질타와 더불어 안타까워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그 옛날 예수님으로부터 질타 당했던 사람들처럼 현실에만 매달려 허둥지둥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예수님이 시대의 뜻을 알아들으라는 것은 바로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으니 현실에만 매달리지 말고 하느님을 중심으로 그 나라의 백성답게 살아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현실 중심의 삶에서 돌아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라는 간절한 호소였던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도 우리가 지금 어떻게 살아가야할 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도의 말을 귀담아 들으면서 오늘 하루도 하느님 나라의 시민답게 잘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불러 주셨으니 그 불러 주신 목적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다하여 사랑으로 서로 너그럽게 대하십시오. 성령께서 평화의 줄로 여러분을 묶어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신 것을 그대로 보존하도록 노력하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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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민경덕 베드로 신부님]
찬미예수님,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오늘따라 가슴 깊이 저에게 박히는 듯 싶습니다.
신학교에서는 시험기간이 다가오면 학교 전체가 긴장감으로 휘감깁니다. 시험 시작 전 교수신부님께서 문제를 내주시기 전 긴장해 있는 저희를 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오랫동안 당신은 신학교에서 생활하셨고, 많은 신학생들을 보아왔노라고 하셨지요. 신부님께서는, 우리 신학생들은 분명 중간고사와 기말고사가 다가오면 어찌 될지 잘 알면서도 수업시간엔 절대 긴장하지 않는다고. 평소에 조금은 더 긴장하고 정신 차리면 이러한 분위기는 조금은 편한 분위기가 될텐데...
그리고나서 저희 모두에게 다시 말씀 하셨지요. “너희는 내가 어떤 문제를 낼 줄 아니?” 아무도 교수신부님께서 어떠한 시험문제를 내실지 알 수 없었기에 대답할 수 없었고, 공부한 것이 잊혀지지 않기를 희망하면서 빨리 시험을 보길 희망했습니다.
그때 그 신부님께서는 저희를 향해서 환한 미소를 지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학생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시험문제도 아니고, 시험결과는 더더욱 아니고, 바로 시험을 보기까지의 과정이야”라고 하셨습니다.
순간 저희 모든 반은 의심이 들었습니다. 학교에서 가장 힘든 과목중 하나인 이 시간에 시험이 없어지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희망과 알 수 없는 두려움들이 뒤섞였습니다. 그 순간 신부님께서는 “지혜로운 신학생들이 아직까지도 내 말을 듣고도 징표를 읽어내지 못함이 이스라엘 군중과 같네”라고 하셨고, 저희 모두는 큰 소리로 환호를 했고, 대학원 2학년 마지막 시험은 무사히 마쳤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에게 땅과 하늘의 징표를 풀이할 줄 알면서 시대의 징표를 풀이할 줄 모르는 것에 대해 조금은 답답해 하십니다.
용서와 화해. 그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의 또다른 이름들인 것이였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모두 성령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성령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리석은 실수를 많이 저지르고 맙니다. 중요한 일을 두고서는 용하다는 점장이를 찾고, 젊은 이들은 타로카드나 인터넷 점을 치기도 합니다.
본당에서 사제가 점장이나, 운세를 보지 말라고 하면, 신자분들은 말씀하십니다. “신부님께서는 중요한 일을 두고 아무것도 알 수 없고, 말씀해주시지도 않는다”고.
사제는 정말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거 하나만은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점장이와 운세보기가 가까워지면 분명 하느님과 거리가 멀어지고, 그러한 것은 곧 자신의 삶을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하는 이들의 자세가 아니라는 것과, 정작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그 일들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바람결에 흩날리는 재와도 같음”을 알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아합왕은 자신이 병이 나자, 하느님께 여쭙지 않고, 이방신의 제사장에게 가서 자신의 병을 문의합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에는 하느님도 없고, 하느님의 사람이 없어서 헛된 것에 자신의 명을 맡기고, 하느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가?”하고 말입니다.
점을 보는 것이 사제에게 미안한 것이라서 죄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점을 보는 것이 봉헌금 보다 많아서 죄라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을 바쳐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가슴에 날카롭고도, 푸르게 날이 선 비수를 꼽는 행위이기에 죄라고 부르는 것이며, 정작 중요한 것이 하늘의 것이 아닌 세상의 것이라고 하기에 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느님 사랑의 징표를 읽어내야 합니다. 우리를 미치도록 사랑하신 하느님 사랑의 징표를.
“주님 제 가슴은 지금 당신의 사랑열정으로 불타고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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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손태성 다미아노 신부님]
오늘은 제가 존경하는 한 분에 대해 말하면서 묵상을 시작하려 합니다. 여러분들도 다 잘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지율스님입니다. 저는 지율스님을 통해 너무나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
잘 알다시피 스님께서는 천성산 구간 고속철도 관통반대를 위해 목숨을 거셨던 분입니다. 저는 스님의 고행에 미력하나마 힘을 보태고자 그 분을 옆에서 조금 도왔던 경험이 있습니다.
스님께서 투쟁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 가녀린 비구니 한 분이 세상과 맞서 싸우며 온몸으로 받으시는 고통을 보았습니다. 실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충격이었습니다.
저는 그분을 통해서 세상의 악의 세력을 보았고 그 악의 세력에 짓밟히는 선하고 약한 존재들의 아우성을 들었습니다. 그분은 이 시대의 징표를 온몸으로 드러내 보여주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고 말한다. 과연 그렇다. 또 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오면 '날씨가 몹시 덥겠다.'고 말한다. 과연 그렇다. 이 위선자들아, 너희는 하늘과 땅의 징조는 알면서도 이 시대의 뜻은 왜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무엇이 옳은 일인지 왜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저의 삶을 반성해봅니다. 저는 사제로서 비가 오겠다, 날씨가 몹시 덥겠다 같은 말들은 많이 하지만 이 시대의 뜻을 잘 알지 못합니다. 구체적인 목표를 향한 목숨을 건 투신이 없다면 사이비 점쟁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인들은 시대의 문제에 민감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것은 당연한 도리입니다. 자기와 관련된 일들은 그토록 빌면서 왜 다른 이들의 아픔에는 그토록 둔한 것입니까?
오늘날 세계화라는 구호아래 경제적으로는 모든 이들이 더 연결되어있지만 정신적으로는 반대로 가고 있습니다. 환경문제는 갈수록 심각해지고 인간성은 더욱 황폐화되고 있습니다. 하루 하루를 버티기가 어려운 노동자들이 갈수록 늘어가고 있고, 농업과 농촌의 중요성에 대한 공감대 형성은 아쉬움을 더해갑니다.
사람이 자연을 훼손하고 자연이 사람에게 해를 입히는 사람과 자연 사이의 악순환은 가속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분열되어 있습니다. 가진 자들은 자기만 잘 살 수 있을 것처럼 착각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우주만물의 질서아래 같이 살지 않으면 살아남을 존재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힘있는 나라, 힘있는 사람들은 그런 창조질서를 무시하고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우리가 이 시대의 문제를 올바로 읽어내고 스스로 판단하고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는 우리 모두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종교는 시대의 징표를 읽어내고 스스로 판단하여 세상을 밝히고 짜게 만드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혹시 종교도 세상의 물결에 따라 흘러가고 세상의 논리에 젖어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 신앙인 각자는 올바른 판단을 하고 있습니까?
저는 종교인들이 지율스님을 욕하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스스로 판단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날씨가 덥고 바람이 부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왜 시대의 징표를 읽지 못하냐고요.
그런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은 위선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경제논리를 위해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들이 과연 행복해 질 수 있을까요?
다른 것들을 죽여가며 자기 배를 불리는 사람들의 행복이 과연 계속 유지될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더 좋고 고귀한 것을 모르기 때문에 덜 좋은 것을 선택합니다.
그 선택을 위해 더 귀한 것을 죽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래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잘 생각해보시는 하루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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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낙엽이 바람에 쓸려 다닙니다. 가을이 저물어 가는 “징조”입니다. 이처럼, 낙엽이 바람에 휩쓸리는 것을 보고 가을이 저물어 감을 알듯이, 몸이 으스스 떨리면 몸살이 옴을 알듯이, 오늘 <복음>은 “이 시대”의 징표를 풀이하고 대처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을 책망하여 말씀하십니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루카 12,56)
사실, 군중들은 자연의 징표나 자신 몸의 징표는 잘 읽고 대처하면서 ‘시대의 징표’는 “스스로” 판단하지 않고,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과 같은 거짓 지도자들의 판단에 의존하면서 책임을 피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하고, 그들의 회피와 위선을 질책하십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시대의 징표’를 복음으로 읽어내지 않고 세상의 눈으로 읽고, 그러한 눈으로 세상을 읽고 있는 언론에 의존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는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루카 12,58)
바르게 행동하라는 엄한 경고입니다. “징조”를 잘 읽고 행동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재판에 붙여지기 전에 화해라하는 말씀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도 역사의 징조를 읽으셨고, “때가 차자” 사람이 되시어 세상에 오시어 빛을 비추셨습니다. 또한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는 교회는 끊임없이 시대의 징조를 읽고 해석하고 응답해 왔습니다. 그것은 특별히 교종들의 <사회회칙>에서 잘 드러납니다.
예를 들면, 산업혁명시대의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에 대응하여 레오 13세 교종께서 1891년에 [새로운 사태]라는 회칙을 발표하셨고, 이에 대한 교회의 응답을 촉구하는 비오 11세께서는 1931년에 회칙 [40주년]을 발표하셨습니다. 또 요한 23세 교종께서는 [지상의 평화](1961)에서 냉전시대의 인권을, 바오로 6세께서는 [민족들의 발전](1967)에서 식민화와 빈부격차와 문화충돌을 대처하셨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노동하는 인간](1981)과 [백주년](1991)에서 [새로운 사태]의 90주년과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사회문제를 재해석하셨고, 베네딕도 16세께서는 [진리안의 사랑](2009)에서 자본주의 확산과 세계화의 문제점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리고 지난 2015년,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환경을 주제로 한 첫 번째의 회칙인 [찬미받으소서]에서, 인간이 초래한 생태 위기의 근원으로 기술만능주의와 왜곡된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면서 통합적이고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다양한 차원의 대화와 생태 교육을 촉구하셨습니다.
이처럼, 교회는 끊임없이 “시대의 징조”를 읽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오늘의 사회, 윤리적인 문제에 적용하여 해석하고 방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특히, 교종 프란치스코께서는 [복음의 기쁨]에서, “모든 공동체가 시대의 징표를 주의 깊게 살피도록 권고”(51항)하셨습니다. 그리고 돈이 우상화 된 신자본주의 시장경제와 물질만능의 물신주의의 병폐와 무관심의 세계화 등을 지적하시면서,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하는 교회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가난한 교회, 곧 함께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공빈(共貧)의 시대를 여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역시, “이 시대가 징표”를 읽고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라”는 예수님의 촉구에 응답하며, 이 시대의 빛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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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 할 줄 알면서,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루카 12,56)
주님!
거짓과 어둠이 판을 치는 이 시대에, 세상의 빛이 되게 하소서!
시대의 징조를 읽어내고,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고 대처하게 하소서.
힘없고 가난한 이들이 밀려나는 이 시대에, 가난을 함께 살게 하소서.
위선자가 되지 않게 하소서.
말과 혀가 아니라, 진리 안에서 행동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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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루카 12,56)
<이 시대?>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날씨의 변화에 대해서는 민감하면서도 이 시대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둔감한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위선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시대'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에 대해 둔감한 위선자들이 살아가고 있는 지금 우리의 시대인 21세기이자, 삶의 자리이며, 더 근본적으로는 카이로스(kairos), 곧 '예수님의 시간(시대)'을 의미합니다.
흐르는 물과 같은 시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유한한 존재로서 결코 피할 수 없는 죽음과 영원한 생명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예수님의 시간'은 너무나도 중요하고 소중한 시간으로 다가옵니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마태7,23)
예수님의 이 말씀은 불법을 일삼는 자들, 예수님의 말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들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만약, 마지막 때인 하느님의 얼굴을 마주보며 심판을 받아야 할 그 때에 내가 이런 말씀을 듣는다면 얼마나 서글퍼질까?
그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에' 갇혀 있고, '대장동에' 갇혀 있고, '대통령 선거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모두가 '부동산 전문가' 같고, 모두가 '정치 평론가' 같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복음의 기쁨'을 통해 정치와 선거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권고하셨지만, 그것은 '하느님의 나라 건설'과 '하느님의 정의 실현'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말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로마7,19)
우리를 죽음으로 이끄는 것에 너무 관심을 두지 말고, 우리를 생명으로 이끄는 것에 더 관심을 두면서 살아가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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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을 보라>
루카 12,54-59 (시대를 알아보아라, 늦기 전에 화해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또 남풍이 불면 ‘더워지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그러지 않으면 그가 너를 재판관에게 끌고 가, 재판관은 너를 옥리에게 넘기고 옥리는 너를 감옥에 가둘 것이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사람을 보라>
시대의 빛깔이
사람을 물들이니
사람을 보아야
시대를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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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UC 버클리 연구팀은 다음과 같은 실험을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1만 원을 나눠주고 익명의 낯선 이와 원하는 만큼 나눠 가지라고 한 것입니다. 그 결과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은 사람들이 부유한 사람들보다 오히려 더 인심을 후하게 쓰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미국의 소득 최하위권에 있는 사람들은 수입의 3%를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반면, 상위 20%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1%만을 기부했습니다(물론 이 1%가 전체 기부금의 70%를 상회합니다).
부유하지 않은 사람이 실제로 더 베푸는 경향이 많다는 실험이었습니다. 이들이 비록 돈은 적지만 사랑을 많이 실천한다는 것입니다. 부자보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한다는 예수님 말씀의 이유를 찾게 됩니다.
부자가 더 많은 액수를 나누기는 하지만 여유 있는 데서 조금 나누는 것으로, 진정한 사랑 실천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 실천을 많이 해야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왜 이렇게 판단력을 잃게 되었을까요?
사실 우리 삶의 방식을 잘 살펴보면 그럴 수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좋은 일이라도 하기 싫은 일이 있고, 반대로 나쁜 일이라도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이럴 때면 묘한 핑계를 붙여서 꼭 내 마음대로 하고 마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특히 세상의 관점으로 바라보면서, 이득이 더 많은 쪽을 선택하는 우리였습니다.
이런 점은 우리의 모습뿐만이 아니라 과거에도 있었던 모습이지요. 최초의 사람 아담도 선악과를 먹고서는 하와 핑계를 댔었고, 또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오셨어도 자신들이 생각하는 메시아 모습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부해서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올바른 판단은 세상의 기준이 아닌, 주님의 기준으로 주님의 뜻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면, 이 시대에 필요한 표징을 볼 수 있고 주님과 진정으로 함께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주실 분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예수님의 뜻인 사랑을 철저하게 지키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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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할 일이 왜 없는가?>
독일의 재무부 장관을 지낸 마티 바덴(Marty baden)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모든 일에 긍정적이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국가를 위해서도 큰 공헌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삶을 살게 된 하나의 계기는 어렵고 힘들었던 젊은 시절, 여행 중에 싸구려 여관에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생겼습니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났는데 자신의 낡은 신발이 없어진 것입니다. 화가 나서 하느님께 “하느님도 정말 너무 하십니다. 저같이 가난한 사람의 신발을 훔쳐 가게 하십니까?”라며 외쳤습니다. 마침 그날이 주일이라 여관집 주인이 헌 신발을 건네며 미사에 같이 참석하자고 권했습니다.
마지못해 끌려갔지만, 신발을 잃어버린 생각으로 미사에 집중할 수 없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옆에서 눈물을 흘리며 감사기도를 바치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두 다리가 없었습니다. 바덴은 생각했습니다. ‘저 사람은 신발을 잃어버린 정도가 아니라, 두 다리를 잃어버렸으니 신발이 있어도 신을 수가 없겠구나. 그런데 나는 겨우 신발이 없어졌다고 하느님께 원망까지 하고 있으니….’ 이 체험이 그를 긍정적이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게 했습니다.
우리도 스스로의 모습을 되돌아보았으면 합니다. 감사하며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이유가 너무 많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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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영적인 사정에 민감하라>
어르신들은 지혜가 많으신 분입니다. 많이 배우지 못해 지식은 풍부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분도 삶의 경험에서 나오는 지혜는 늘 차고 넘칩니다. 제비가 낮게 날고 있는 것을 보면서 비가 올 것을 예상했고, 개미의 움직임을 보면서 장마에 대비했습니다. 서쪽에서 밀려오는 구름을 보고, 비를 예상하고 남풍이 불면 더위를 맞을 준비를 했습니다. 이렇게 지혜 있는 사람들은 자연의 징조를 읽어냈고 거기에 맞는 대책을 마련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상의 지혜에 밝은 사람들도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무지했습니다.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기적들과 가르침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거기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아니 관심 부족이 아니라 외면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을 바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옛 생활 방식을 유지하고, 기득권을 누리고 싶었기 때문에 시대의 뜻을 올바로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시대의 징표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알면서도 이해하지 못하는 체하였습니다. 그래서 위선자라는 소리까지 들었습니다. 시대의 뜻은 겉모양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새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나 환경이 바뀌기를 기대하지 말고 먼저 내가 변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환경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세상의 어둠을 탓하기보다 하나의 촛불을 밝히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 첫 번째 할 일을 오늘 복음은 알려주고 있습니다.
재판관에게 가기에 앞서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루카 12,58).는 것입니다. 화해가 쉽지는 않지만 재판정에 서서 판결을 받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예수님께서는“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마태 5,24)고 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화나는 일이 있더라도 죄를 짓지 마십시오. 해질 때까지 화를 풀지 않으면 안 됩니다.”(에페 4,26) 하고 권고합니다. 더더욱 판결을 받아 감옥에 가게 되면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올 수 없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들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어떤 말씀이든 ‘나는 아니야’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어떤 말씀이나 강론을 들으면 “저 얘기는 아무개를 두고 하는 얘기야!”, “그 사람이 들어야 하는데” 하고 자기와는 상관없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대의 징표를 읽는 사람은 “모두가 나를 두고 하는 말씀이야!”하며 자신을 돌아보고 다시 시작합니다.
“이 시대는 하느님을 잊어가는 시대입니다.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정신이 아주 사소한 틈새까지 파고들어 우리를 정복하려고 들고 그에 따라서 우리는 더욱 영적인 사정에 둔감해지는 시대입니다.”(함께야)
이런 시대를 올바로 분별하려면 세상의 지혜를 찾지 말고, 주님의 뜻을 잘 헤아려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심판의 마지막 날이 언제 올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은 회개할 기회입니다. 진정한 변화를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입니다. 그러므로 한순간도 헛되이 하지 않기를 빕니다. 단풍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곧 나뭇잎을 떨어뜨리며 겨울을 맞이할 것입니다. 아름다움의 절정에는 내려놓아야 할 과정이 포함되어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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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과 내적일치의 삶>
-회개와 화해-
“주님, 당신의 계명을 제가 믿사오니, 올바른 지혜와 지식을 가르치소서.”(시편119,66)
오늘 제1독서 로마서는 내적분열의 갈등을 겪는 인간 실존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바오로 사도의 내적 체험이자 우리 모두의 내적 모순의 모습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나의 내적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습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다른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나 자신이 이성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섬기지만, 육으로는 죄의 법을 섬깁니다.”
그대로 내적분열의 모습입니다. 누구나 이런 내면의 모순된 모습에 절망할 때가 많을 것입니다. 답은 주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주님과의 일치와 더불어 진정한 내적일치이기 때문입니다. 내적지옥을 내적천국으로 변화시키는 주님과의 일치입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물음이라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답입니다. 자신의 어둡고 추한 내면에 좌절하거나 절망하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지요!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만이 내적분열에 대한 유일한 치유책임을 깨닫습니다. 부단한 회개와 화해를 통한 주님과의 일치요 내적일치입니다. 오늘 복음에 대한 답을 바로 오늘 로마서의 바오로가 줍니다. 시대의 표징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바로 무지의 소치입니다.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또 남풍이 불면 ‘더워지겠다.’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그대로 오늘 우리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시대의 표징을 알아 보지 못하는 무지에 눈먼, 내적분열의 모습입니다. 참으로 주님과의 일치를 회복할 때 영의 눈이 열려 시대의 표징을 읽을 수 있습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회개를 통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뿐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혜안으로 볼 때 비로소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또 시대의 징표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 바오로 사도의 고백이 우리가 최종적으로 도달해야 영적 삶의 지점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갈라2,20)
무아無我의 삶의 바로 진아眞我의 삶이라는 역설의 진리를 보여줍니다. 참으로 나를 비워 가는 무아의 삶일 때 참나의 진아인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점차 또렷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궁극으로 도달해야 할 참나는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임을 깨닫습니다.
새삼 우리 삶의 여정은 회개의 여정이자 주님과 일치의 여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끊임없는 회개를 통한 자아초월을 통해 주님과의 일치도 날로 깊어지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오늘 복음의 후반부 말씀은 지체없는 회개를 촉구합니다. 심판전에 빨리 회개하고 화해하라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거 갈 때, 도중에 그와 함께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해지고 잠자리 들기전 회개와 용서를 통해 모두를 말끔히 정리하라는 수요일 끝기도 때 말씀도 생각납니다. 영혼을 파괴하는 화병火病보다 고약한 병도 없기 때문입니다.
“죄를 짓지 마십시오. 해질 때까지 성난 채로 있어서는 안됩니다. 악마에게 발 붙힐 기회를 주지 마십시오.”(에페4,26-27)
그대로 삶의 지혜입니다. 시대의 징표를 읽지 못하는 자들에 대한 질책과 더불어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무지한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이런 신속한 회개와 화해의 지혜로운 처신은 주님과 일치의 은총임을 깨닫게 됩니다.
끊임없는 회개를 통한 주님과 일치의 은총이 ‘주님의 눈’으로 시대의 표징을 읽게 하고 ‘주님의 마음’으로 즉각적인 회개와 화해와 이르게 합니다. 참으로 내적분열의 무지한 인간에 대한 답은 부단한 회개를 통한 하느님의 지혜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뿐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날로 당신과의 일치를 깊이해 주십니다.
“주님, 당신 자비에 이르게 하소서. 제가 살리이다. 당신 가르침은 저의 즐거움이옵니다.”(시편119,7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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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 내면을 돌아보도록 이끄십니다.
"이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를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루카 12,57)
예수님의 한탄에 귀를 기울입니다. 자연과 세상 일에 대해서 짐짓 아는 체하면서 막상 지금 어느 "때"가 도래했는지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귀를 막은 이 세대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성령의 빛으로 자기네 역사를 통찰하면 예언자들이 남긴 하느님의 말씀이 완성에 이르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을 겁니다. 이방 민족들의 연이은 점령과 흥망성쇠, 유배와 귀환, 동방 박사와 세례자 요한의 출현 등등, 그리고 이 모든 사건을 거쳐 이제 이스라엘은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오셔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백성들을 생명의 나무 아래로 모으고 계심을 눈앞에서 보는 중입니다.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환경이나 능력 탓에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하는 무지는 죄가 되지 않지만, 스스로 진리를 거부하는 완고함은 다른 문제입니다. 그런 이들은 올바른 일을 판단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애써 외면하는 것이지요.
보지 않으려는 눈, 듣지 않으려는 귀, 열지 않으려는 마음은 그 앞에서 아무리 진리를 외친들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진리가 자기 영광과 이익에 털끝만큼이라도 손실이 될 것 같으면 모르쇠가 되어 버리기 일쑤지요. 예수님 당시 종교 기득권자들은 걸핏하면 예수님께 율법과 관습의 잣대를 들이대며 그분의 정당성을 폄훼시키려 애썼고, 예수님은 그들을 "위선자"라 부르셨습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인간 실존 안에 깊이 배어 있는 죄성을 들려 줍니다.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로마 7,18-19)
진지하게 영성 생활에 들어선 이들이라면 깊이 공감하는 내용일 겁니다. 예수님께서 사신 것처럼 살고자 용기를 내보지만 그보다 자신 안에 스멀대는 욕정과 탐욕, 자기애와 이기심, 자기 영광의 유혹과 타협하는 게 더 쉬울 때가 많지요.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로마 7,22)
하지만 원래 하느님의 모상인 우리의 영혼은 "하느님의 법"을 사랑하고 이끌리게 되어 있습니다. 다만 우리 영혼에 스며든 "죄의 법" 곧 "죽음의 법"이 더 손쉽고 가까우며 자극적이기까지 한 건 사실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거짓 속에서 진리를 향하려고 고개를 드는 용기는 더욱 가치있고 귀합니다. 어둠 속에서 빛을 향하는 것, 두려움 속에서 믿음을 붙잡는 것, 절망 속에서 희망하는 것, 우리 육 안에 자리한 죄와 죽음의 법에 절연을 선언하고 선과 생명의 손을 잡는 결단은 참으로 거룩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로마 7,25)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자연의 징조 못지 않게 주님의 "때"를 깨닫고 생명의 나무인 그분 십자가 아래로 모여든 이들입니다. 그분과의 사랑의 관계가 세상적 욕망을 채워주지 못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죄의 법이 아닌 주님의 법을 선택했기에 주님 곁자리를 떠나지 않는 충실한 벗들이지요.
나약한 죄인인 우리가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길은 지긋지긋하게 달라붙는 죄의 짐을 직시하고 벗어버리면서 지치지 않고 주님께 돌아서는 것뿐입니다. 인간으로 살아가는 이상, 욕정과 탐욕, 자기 영광의 죄성을 완전히 탈피할 수 없지만, 그보다 더 끈질기게 죄와 죽음에서 승리하신 예수님을 선택할 수는 있으니까요.
각자 자신의 영혼 안에서 거룩함의 영역을 넓혀 나가시길 기원합니다. 죄에 떨어지는 회수보다 한 번 더 주님을 선택하고 또 그게 거듭거듭 쌓이면 가능한 일입니다. 이 세상에 흐르는 주님의 섭리에 따라 영의 생명을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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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UjVO6azGXM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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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루카 12, 57)
스스로와
저절로
사이에서
가을단풍이 곱게
물들어가고 있다.
신앙의 기초는
올바른 일을
스스로
하는 데 있다.
올바른
일을 위해
그릇된 것을
우리가
버리는 것이다.
버릴 것은
버리고
지킬 것은
지키고
고칠 것은
고치는
실천이다.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은
마음을 고치는
데 있다.
마음을
고치는 것이
사람과
사람사이의
화해이다.
화해는
마음을 쓰는
가장 아름다운
관계의 법이다.
우리시대는
참으로
빠르게
바뀌고 있다.
바뀌지
않는 것은
우리 마음뿐이다.
삶이 더러운
것은 마음이
더러운 것이다.
복음은
마음의
회복이다.
삶이
어지러울수록
마음과 마음의
화해가 중요하다.
마음의
화해를 위해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본다.
바라보는
거기어
우리마음이
있다.
무엇을
보고 있는지를
다시 자신에게
묻는다.
올바를 일이란
나의 십자가를
지는 일이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우리 현실을
올바르게
바라보며
자기모순을
극복한다는
것이다.
진정
중요한 것은
변화하고
싶은 마음과
변화하려는
실천이다.
마음도
먹어야 산다.
마음은 결심을
먹고 산다.
순간순간
돌아가야 할
삶의 방향이
우리들 마음이다.
단풍은 우리
마음을
물들이듯
마지막 한 닢까지
허공과 어우러진다.
처음도
마지막도
마음이다.
힘 써야 할
올바른
마음이다.
올바른 일의
시작에는
올바른 마음이
있다.
올바른 마음은
매일매일
복음으로
아름답게
물들어 갈 것이다.
복음의 힘은
마음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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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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