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종이 작은 아버지 수양대군에게 왕의 자리를 빼앗기고 청령원에 유배되었다가 1457년 12월 24일 17세에 사약을 받고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후환이 두려워 시신을 거두지 못한 채 강물에 떠다녔는데, 호장 엄홍도가 을지산 현 위치에 암장하였다. 이로써 왕릉은 경국대전에 따라 한양으로부터 100리 이내에 안장되어야 한다는 규정에서 벗어나 장릉은 경국대전의 규정에서 제외된 유일한 왕릉이 되었다.
그후 59년이 지난 중종 11년 1516년 여러 사람의 증언으로 묘를 찾아내어 12월 15일 봉문을 갖추게 되었다. 그 후 선조 13년 1580년 상석, 표석, 장명등, 망주석을 세웠으며, 숙종 24년 1698년 단종의 신위를 종묘에 모심과 동시에 이곳의 능호를 장릉이라 했다.
+ 정순왕후 송씨는 동대문 밖 숭인동 청룡사 근처에 초암을 짓고 시녀들과 함께 살았다. 송씨는 시녀들이 동냥해온 것으로 끼니를 잇고 염색업을 하며 어렵게 살았는데, 이를 안 세조가 집과 식량 등을 내렸으나 끝내 받지 않았다. 한편, 그녀를 가엾게 여긴 동네 아녀자들이 조정의 눈을 피해 그녀의 집으로 먹을 것을 건네주고자 시장을 조직하는 일도 있었다.
+ 청계천에 있는 영도교는 귀양 가는 단종과 정순왕후가 마지막으로 헤어진 곳으로 전해지는데, 결국 두 사람은 이승에서는 만날 수 없었다. 단종이 끝내 유배지인 영월에서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부군의 죽음을 전해 들은 송씨는 매일 아침 저녁으로 큰 바위를 올라 영월을 향해 통곡을 하며 단종의 명복을 빌었다. 후일, 영조가 이곳을 '동망봉'이라 하여 비석을 내렸으나 일제 강점기에 근처가 채석장으로 사용되며 흔적이 남아있지 않고, 바위 또한 모두 떨어져 나갔다.
첫댓글 아........................................얼마나 한이 많으셨을까 ............................................ 마지막 일본개새끼네 ㅡㅡ
아 안타깝다 진짜... 경혜공주도 너무 불쌍하게 살았던데 그리고 마지막 일본 씨빨새끼들이네ㅡㅡ
삭제된 댓글 입니다.
어헝 왜그랬어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
에휴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ㅠㅠㅠㅠㅠ폐위된 왕의 아내로 산다는게 얼마나 서업고 한스런 인생이었을까...
아미친수양ㅋ....ㅡㅡ
어흑어흑어흑어흑어흑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아이고 슬프다 맨 밑줄
슬프다...진짜 기구한 인생이구나...한 나라의 왕비에서 일순간에 지아비 잃은 청상과부로 가난하게 살다 돌아가시고....수양 개객끼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할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아 근데 이거보니깐 또 공남이보고시퍼지네ㅠㅠ
엄마 어뜨케 눈에 눈물 고여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진짜 애절한 사랑이다...................하..............
너무 슬퍼...
브금..ㅠㅠ궁금해......
시발 일본이 여기에다가도......................ㅠㅠ이런 슬픈역사를 가진 곳에다가!!!!!!!!!!!!!!!!!!!!! 남아나는 게 없어 진짜...ㅠㅠ
너무 슬프다 ㅜㅜ
T-T어구.......
뭐만나오면 일제시대떄 다 때려부셨대...... 모든건 다 왈본때문임미다 여러분
ㅜㅜㅜㅜㅜㅜㅜㅠㅠㅠㅠㅠㅠㅠㅠㅠㅜ
아 눈물나 시발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