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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ewly-built Maracana stadium was full to bursting with 200,000 people on July 16, 1950 -- but an eerie silence reigned after Brazil lost their World Cup .... 마라카낭(Maracana)의비극 (tragedy)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12년이 지나서야 다시 열리게 된 FIFA 월드컵에서 개최권을 따 낸 브라질은 첫 우승에 대한 기대감을 갖고 있었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코파 아메리카에서 3연패(1945년~1947년)를 했을 정도로 대단히 강팀이었기 때문에 그런 아르헨티나가 기권했다는 것은 난적이 하나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우승을 노리는 브라질에게 있어서는 호재였다. 사실 아르헨티나는 1946 FIFA 월드컵의 개최국이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의 여파가 너무 심각했기 때문에, 세계 각국에서는 전후 복구에 전념하느라 아무도 월드컵에 나서질 않았다. 이 때문에 1946 FIFA 월드컵 개최는 전면 취소되었으며 그 다음 월드컵인 이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는 다시 개최를 희망했으나 브라질이 개최국으로 선정되면서 이에 불만을 품고 이 월드컵과 그 다음 월드컵인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까지 기권해 버렸다. 그렇게 아르헨티나가 빠진 상태에서 시작된 월드컵 본선은 좀 특이한 방식으로 치렀다. 브라질 월드컵 조직 위원회는 경기수익을 한 푼이라도 더 뽑아먹기 위해, 모든 경기를 조별 리그로 바꿨으며 그 조별 리그에는 총 4개 조 16개 팀이 참가하는 걸로 했다. 하지만 우루과이가 속한 조를 비롯한 두 개의 조에서 기권팀이 연거푸 발생하는 바람에 실제로는 13개 팀이 조별 리그를 치루었다. 이 4개 조에서 1위 팀만 올라가는데 그 올라간 4팀이 마지막으로 또 리그를 치뤄서 우승 팀을 가리는 방식이었다.
그 다음은 스위스, 마지막으로 유고슬라비아와 경기를 치르게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멕시코를 4:0으로 크게 꺾고 스위스와는 2:2로 비겼지만 유고슬라비아를 2:0으로 꺾으며 조 1위로 당당하게 최종 리그에 진출하였다.
이변이 일어났고 그 여파로 스페인에게도 털리며 최종 리그 진출권을 스페인에게 내줘야만 했으며, 3조에서는 디펜딩 챔피언 자격으로 참가한 이탈리아가 1949년에 있었던 수페르가의 비극으로 인해 국대 전력에 매우 크게 악영향을 미친 탓에 스웨덴에게 2:3으로 덜미를 잡혀 광탈해 버렸다. 단지 4조의 우루과이가 볼리비아를 8:0으로 개관광시키고 올라갔을 뿐이다. 물론 우루과이에게 조별 리그는 이게 다였다. 왜냐하면 스코틀랜드, 터키가 일찌감치 기권했고 바통을 넘겨받은 프랑스, 포르투갈까지 또다시 전부 기권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되자 브라질에선 우승에 대한 기대감이 더욱 고조되기 시작한다. 최종 리그 첫 경기는 스웨덴과 치르고 그 다음은 스페인, 마지막으로 우루과이와 경기를 치르게 되었다. 브라질은 스웨덴을 상대로 7:1 대승을 거두고 스페인을 상대로 역시 6:1 대승을 거둔다. 그러는 동안 우루과이는 스페인을 상대로 2:2로 무재배를 하더니 스웨덴을 상대로는 선제골을 얻어맞고 엄청나게 고전하다가 3:2로 겨우 역전승을 거둔다. 마지막 경기를 남겨 두고 이렇게 되자, 아예 브라질에서는 아직 경기도 치르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우승을 확신하는 분위기였다. 브라질과 우루과이의 경기가 사실상의 결승전이 된 모양새인데, 무만 재배해도 우승컵은 브라질의 손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게다가 스페인과 스웨덴을 상대로 고전했던 우루과이가 그 두 팀을 압살한 브라질을 이기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브라질 전역에선 모두가 브라질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는 분위기였고, 브라질 바깥의 축구 팬들 가운데서도 어느 누구 하나 농담으로라도 우루과이의 우승을 점치지 않았다. 그저 우루과이의 축구 팬들이 '기적이 일어나길 바란다'며 격려를 해 줄 뿐이었다. 이미 우승컵의 주인공은 브라질로 정해져 있고 우루과이는 들러리일 뿐이라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었다.
1950 FIFA 월드컵 우승국 브라질이라고 굵직하게 글귀를 새겨 넣기까지 했으며 브라질은 월드컵 우승에 대한 만반의 준비를 모두 완료했다. 미리 정해져 있다는 뉘앙스의 기사를 내보냈다. 숙소에서 이 신문을 본 우루과이 팀의 주장 옵둘리오 바렐라는 "우리가 그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 주자"며 팀 동료들과 함께 문제의 신문에 오줌을 누는 퍼포먼스를 했다.
킥오프 전부터 리우데자네이루의 마라카낭 경기장 관중석에는 조국 브라질이 우승하는 역사적 순간을 지켜보려는 브라질 관중들로 초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이러니 아직 킥오프도 안 했는데 우루과이 선수들이 분위기에 눌려 버리기는 당연지사. 게다가 결승전에 킥오프 직전 연설위원으로 초대된 당시 상파울루 시장이었던 안젤루 멘데스 지 모라이스조차 미리 브라질의 우승은 기정사실이라는 식의 연설을 했다. "브라질 선수들이 나는 토너먼트의 승자라고생각하고 챔피언이 되는데 몇 시간이 남지 않았다. 그들은 세계 어디에도 적수가 없으며 다른 누구보다도 뛰어나다. 나는 이 위대한 정복자들에게 미리 경의를 표한다.- 안젤루 멘데스 지 모라에스" 우루과이의 입장에선 꽤나 기분나쁜 연설이었지만 다들 브라질의 우승을 확신하는 분위기였는지라 이해했다. 게다가 FIFA 측도 브라질의 우승을 예상했는지 당시 우승 트로피로 사용했던 쥘 리메 컵을 미리 브라질 월드컵 조직 위원회 측에 넘겨줬을 정도. 브라질 선수단도 그걸 들고 우승 기념 사진부터 미리 찍어 두었을 텐데 브라질 전역에서는 이미 경기 시작 전부터 크고 작은 축제가 열리기 시작했다.
초반부터 당연히 압도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브라질도 우루과이도 골을 터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지지만 않는다면 우승은 떼어 놓은 당상이기 때문에 브라질의 우승을 굳게 믿는 분위기는 여전했다. 그리고 후반 2분, 드디어 올 것이 왔다. 브라질의 프리아카가 선제골을 터뜨린 것. 그 순간 마라카낭은 물론이고 브라질 전체가 광란의 도가니였고 축제 분위기도 한껏 달아올랐다. 이제 브라질의 우승이 확실해진 것처럼 보였다.
선제 골을 허용하고는 더 악착같이 맹공을 퍼붓더니 후반 21분 후안 스키아피노가 동점골을 성공시켜 1:1로 만든다. 순간 우루과이 벤치에서는 화색이 돌았고, 예상치 못한 상황에 브라질 선수들과 관중들의 얼굴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중계 방송으로 경기를 시청하고 있던 브라질 국민들도 "이거 정말로 역전골 먹어서 지면 어쩌지?" 하면서 순간적으로 초조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It was in this way that it gained its iconic, and mythical, status in Rio as a “sacred temple” of football. 브라질 선수들은 어떻게든 추가 실점을 막으려고 했지만 점점 막강해지는 우루과이 선수들의 화력을 견뎌내지 못하고 후반 34분 우루과이의 알시데스 기지아에게 역전골을 허용하고 만다. 이게 웬 날벼락인가? 어!하는 사이 역전을 당하면서 뜨거운 함성이 가득하던 마라카낭 관중석은 완전 침묵 속에 빠져들었으며 다급해진 브라질 선수들은 계속해서 우루과이의 골문을 두드렸지만 터지라는 만회골은 터지지 않고 시간만 하릴없이 흘러가며 속을 태웠다.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우루과이에게 지고 우승을 놓친다는 그 시나리오가 진짜로 펼쳐지려고 하고 있었다.
주심은 경기 종료를 알리는 휘슬을 불었다. 주심의 휘슬 소리가 마라카낭에 울려퍼지는 순간 브라질의 첫 우승 꿈도 잔인하게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오호 통재라. 본격적인 마라카낭의 비극을 알리는 신호음이었다. 우루과이는 이 우승으로 인하여 기록을 하나 세우게 되었는데 그것이 '최소한의 경기로 FIFA 월드컵 우승을 이룩한 팀'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 우루과이가 정확하게 60년 후에는 오히려 정 반대로 'FIFA 월드컵 한 대회 최다 경기팀'이라는 기록을 세우게 된다. 우루과이는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대륙간 플레이오프 코스타리카전과 3, 4위전 독일전까지 총 27경기를 뛰었다. 총전적 10승 9무 8패를 기록했다.
하지만 그 당시는 올 토너먼트였고 이 대회부터 본선에서도 조별 예선이 치러졌다. 우루과이는 이 대회에서 단 4경기만 치르고 3승 1무로 월드컵에서 우승했다. 스웨덴과 스페인의 마지막 경기는 스웨덴이 3:1로 승리하였다. 주심이 경기 종료를 선언하기 위해 휘슬을 분 순간, 헬게이트가 열렸다.
선제골을 넣고도 역전패했으니 그 충격이 어떠했을까? 관중석을 콩나물 시루처럼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채워서 응원 열기가 대단했던 마라카낭 스타디움은 순간적인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 브라질 관중들에 의해 경기 직후 갑자기 유령같은 적막이 흐르고 순간적으로 권총의 격발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이 때의 적막감을 당시 줄 리메 피파 회장의 입을 빌려 이야기하자면 "온 몸에 소름이 끼칠 정도의 적막감"이라고 표현했다. 어느 한 브라질 관중의 목격담에 의하면 "경기장 안에 파리 날라다니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 앞으로도 절대 깨질 수 없는 월드컵 불멸의 기록 중 하나이다. 다른 기록으로는 19만 8854명. 비공식으로는 20만 명도 훨씬 넘었을 거라고도 한다.
With a terrific Brazilian side that had demolished giants in the previous rounds, it was always going to be a formality before the Brazilians lift the trophy in front of the 200,000 home fans. Alcides Ghiggia had other plans when he put Uruguay 1-0 ahead in the dying minutes and won Uruguay the World Cup.
최대 추정치는 25만 명. 2명은 권총 자살 이에 우루과이 선수들은 성난 브라질 관중들에게 무슨 봉변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였기 때문에 우승 시상식도 하는둥 마는둥 하고 우루과이로 줄행랑을 쳐야만 했다. 한국으로 치면 도쿄 대첩에 맞먹는 승리였다. 당시 브라질의 우승이 거의 기정사실화 되었기 때문에 우승기념 메달은 브라질만 만들고 다른 나라의 메달은 만들지도 않은 상태였다. 당시 FIFA는 월드컵 우승 메달을 따로 만들지 않았다. 그러니 브라질이 아닌 다른 나라가 우승했으니 이 메달들은 당연히 폐기 처분. 게다가 줄 리메 회장도 포르투갈어로 된 우승 축사만 만들어 왔었다. "Brasil os vencedores"(Brazil The Victors)도 미리 만들어졌지만 브라질의 우승이 좌절되면서 그냥 묻혔다. 그 외에도 브라질의 우승 기념 행사가 줄줄이 취소되는 등 미리 터뜨려 놓은 샴페인이 한순간에 김칫국으로 변했다. 폭동을 일으키는가 하면, 전국적으로 자살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열받은 브라질 축구 협회는 그 당시 결승전에서 선수들이 입었던유니폼들을 죄다 수거해서 모조리 불태워버린 후, 유니폼의 색깔을 새로 정했다.1914년 브라질 축구 협회의 창립 이후 상/하의 모두 흰색 유니폼을 입어왔는데,이를 버리고 새로 디자인한 유니폼은 노란색 유니폼, 카나리냐이다.이 유니폼이 세계인들이 흔히 알고 있는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의현재 유니폼이며 앞으로 브라질 국가대표팀이 1950년 이전과 같은흰색의 유니폼을 착용하는 꼴을 볼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브라질의 축구 팬들은 아직도 그 당시 입었던 흰색 유니폼은항복과도 같은 상징이며 수치라고 생각한다.브라질 국적의 축구 팬들에게 이 경기 이야기를 하면표정이 싹 바뀌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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