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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9 노숙하는 이들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할까요?
노숙하는 이들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할까요?
노숙하는 이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요?
일자리를 마련해 드리면 될까요? 방을 마련해드리면 될까요? 돈을 모을 수 있도록 예금통장을 만들어 드리면 될까요?
사람은 의식주가 해결되지 않으면 생존의 위협을 느껴 본능적으로 살기위해 온 힘을 쏟기 마련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미래를 생각할 겨를도 없습니다. 그저 목숨을 이어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혼자서 잘 살아보려고 온갖 힘을 다 쏟았습니다. 일등을 하고 돈을 많이 벌려고 목숨걸고 치열하게 살았습니다. 가족도 친척도 친구보다도 내가 살아야 하는 것이 먼저였습니다. 그러다가.... 경쟁에서 그만 탈락했습니다.
가정도 깨지고 일자리도 잃어버리고 신용도 없어져서 신용불량자가 되어버리고 건강도 잃어버리고 친구도 없어지고 친척도 등을 돌리고 돈도 한 푼 없고, 돈 나올 길이라곤 어디에도 없는 빈털털이가 되고, 몸 하나 누일 자리도 없고, 찾아갈 곳도 없고... 그저 몸뚱아리 하나뿐인 사면초가의 막막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노숙하는 사람의 처지입니다.
막막한 처지가 되어 혼자 있는 사람. 배는 고픕니다. 구걸하기는 죽기보다 싫습니다. 그렇게 며칠을 굶습니다. 공중화장실을 찾아가서 얼굴을 씻기도 하지만 갈아입을 옷이 없으니 옷은 점점 구질구질해지고 냄새도 납니다. 얼굴이나 손은 씻을 수 있는데 발을 씻기가 참 어렵습니다. 발냄새를 자기가 맡아도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고약합니다. 배가 고파서 움직일 힘조차 없습니다.
전철역 근처에서 쪼그리고 멍하니 앉아있으면 가장 먼저 친절한 사람이 다가옵니다. 도와주겠다고 합니다. 음식을 사주겠다고 합니다. 취직을 시켜주겠다고 합니다. 돈도 주겠다고 합니다. 세상에 이렇게 천사같은 사람이 있을까 감동을 먹습니다. 그래서 사 주는 밥을 고맙게 허겁지겁 먹습니다. 천사같은 사람이 하는 말을 그대로 따릅니다. 주민등록증을 내어주고 인감도 떼어줍니다. 도장도 줍니다. 이젠 고생길을 벗어났다고 철석같이 믿습니다. 그렇게 마지막 살 수 있는 힘마저 다 털리고 나서야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고 절망합니다.
주민등록과 인감과 도장을 내어주면, 천사같은 사람들은 주택을 담보로 대출을 받습니다. 차를 할부로 구합니다. 대포통장을 만들고, 대포폰을 만들고 대포차를 만들어 버립니다. 소개료를 듬뿍 받고 해태공장, 배 등등에 팔아넘깁니다.
그렇게 어쩔 수 없어 노숙을 합니다. 살 길 조차 없습니다.
살 희망조차 잃어버린 노숙하는 사람을 어떻게 도와주는 것이 좋을까요?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생각합니다.
나만큼 귀한 남도 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 아니 나보다 더 귀해서 나를 희생해서라도 살리고픈 남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 그래서 이웃을 만나고 사랑하는 남을 만나고 공동체를 만나서 오손도손 형제처럼 사는 것. 그렇게 지상에서 천국을 만들어 사는 것이 참 삶의 길이라는 것을 몸과 맘으로 느끼고 체험하고 희망을 갖는 것이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닐까요? 이것이 일자리보다 방보다 돈보다 먼저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5/20 이슬 한 병
명옥 씨는 나이가 예순 둘입니다. 아들은 서른 다섯이고 딸은 서른 하나입니다. 셋이서 허름한 집에 삽니다. 기름보일러인데 기름값이 너무 비싸서 난방을 해 본 기억이 없답니다. 겨울에는 방 안 보다 방 바깥이 더 따뜻하다고 합니다. 아들과 딸 모두 지적 장애가 있어서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명옥 씨도 비슷합니다. 거리에서 고물을 줍습니다. 폐지도 줍습니다. 하루 몇 백 원을 겨우 겨우 법니다. 명옥 씨 명의로 언니가 집을 사서 명옥 씨 가족이 살 수 있게 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언니가 생명의 은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집 명의를 언니에게 돌려주고 기초생활 수급자 신청을 하면 좋을 것이라고 알려주어도 마이동풍입니다.
세 가족이 함께 민들레국수집에 식사하러 왔습니다. 오자마자 명옥 씨가 품에서 참이슬 한 병을 꺼내어 저에게 내밉니다.
명옥 씨 집에 쌀이 떨어졌다는 신호입니다. 가족이 식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한 달 먹을 쌀을 선물로 드립니다. 세 가족인데 한 달에 쌀 20킬로 두 포는 있어야 합니다. 아들이 밥을 많이 먹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군것질 할 것이 없으니 밥을 많이 먹게된다고 합니다.
명옥 씨가 오늘은 한탄을 합니다. 아들과 딸이 벌써 서른이 넘었는데 결혼시킬 길이 없다고 합니다.
오늘 새벽에 전화가 왔습니다. 상담을 좀 하고 싶다고 합니다. 국수집에 오전 여덟 시 반에 도착하니까 그 때 만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국수집에 도착해서 서둘어 아침 준비를 해 놓고 커피 한 잔 타 드리고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제 밤에 포항에서 올라왔다고 합니다. 나이는 마흔 여덟이라고 합니다. 혼자 살고 있는데 지적장애 3급이고 기초생활수급자라고 합니다. 매달 20일에 통장에 돈이 들어오면 집세를 내고나면 밥 해 먹는 것이 참 어렵다고 합니다. 사는 것이 재미가 없다고 합니다. 얼마 전에 텔레비전을 봤다고 합니다. 민들레국수집에서 방도 얻어주는 것을 보고 무작정 인천으로 올라왔다고 합니다.
민들레국수집 근처에 방을 하나 얻어달라고 합니다. 밥은 국수집에 와서 먹겠다고 합니다.
아침을 먹고 다시 포항으로 돌아가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배는 고프지 않다고 합니다. 방을 얻어주면 좋겠다고 합니다.
5/21 민들레국수집 필리핀 스콜라쉽
기분이 참 좋습니다.
오늘 민들레국수집 자원봉사자로 오신 벨라뎃다 자매님께서 봉투를 주셨습니다. 필리핀 아이들을 위해 써 달라고 하십니다. 어느새 통장에 필리핀 아이들을 위한 성금이 1,680,000원이나 쌓였습니다.
농협 356-0592-0475-13 서영남
민들레국수집 첫손님으로 1920년생이신 할아버지를 모셨습니다. 화수시장을 둘러보고 민들레 가게를 열고 오는데 길가에 할아버지가 앉아 계십니다. 아침도 못 드셨습니다. 식사하러 오셨는지 물어봤습니다. 다리가 아파서 조금 일찍 와서 열 시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십니다. 모시고 국수집에 와서 아침을 드시게 했습니다.
연세가 아흔 셋이신데 정정하십니다. 25년전에 할머니가 돌아가셨고, 아들이 넷이나 있었는데 아무 하고도 연락조차 안된다고 합니다. 어디로 사라졌는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십 몇 년 전에 며느리가 죽고, 아들은 손자를 처가집에 맡겨놓고 사라져버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손자를 데려다가 지금껏 손자 밥해주면서 살고 계시답니다. 쌀을 좀 드릴까요 했더니 할아버지께서는 쌀은 동에서 나오고, 손자가 라면을 좋아하는데 라면 살 돈이 없다고 하십니다. 라면 한 상자를 드렸더니 끈을 매어 달라고 하십니다. 40개들이 라면 한 상자를 거뜬하게 들고 가십니다. 우리 어머니 연세와 같으십니다. 마음이 짠합니다.
거의 한 시간째 우리 손님들이 빈자리가 나기를 기다리는 상태입니다. 닭백숙 반마리씩 드렸으니 식사시간이 길어집니다. 얼마나 정성스레 드시는지 감동적입니다. 더 드시라고 해도 다음 사람도 먹어야 한다면서 한 그릇으로 만족하십니다.
오늘은 김치, 열무 풋김치, 멸치조림, 양파 장아찌, 동그랑 땡, 닭백숙 그리고 상추와 쌈장입니다. 며칠째 상추를 내어드립니다. 상추쌈을 손님들이 참 좋아하십니다.
민들레 게스트 하우스 옆에 조그만 자투리 동네 공원이 있습니다. 장미도 심어졌었는데 사람들이 다 파가고 잡초만 무성했습니다. 그리고 쓰레기가 잔뜩 쌓여있었습니다. 그래서 민들레 식구들과 꽃밭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주민센터에서 쓰레기는 치워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꽃 모종도 조금 얻었습니다. 잡초를 치우는데 세상에! 땅 밑이 온통 쓰레기 천지입니다. 쓰레기를 파묻어 놓았습니다. 쓰레기가 엄청 나왔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주민센터에서 그 쓰레기도 처리해 준다고 합니다. 예쁜 민들레 꽃동산을 만들어야겠습니다. 동네 할아버지께서도 지켜주신다고 합니다. 내일은 꽃을 사러 화원에 다녀올 예정입니다.
새로운 민들레국수집 홈 페이지가 6월 초에는 개통될 것 같습니다. 거의 완성되어 갑니다. 아주 산뜻하게 꾸며졌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는 아빠
모니카는 그를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는 아빠"라고 불렀다. "매일 민들레 국수집에서 VIP손님들을 대접하고 섬기고 배려하고 사랑을 나누며 함께 살아가시는 아빠의 모습을 보면서, 정의롭게 산다는 생각이 들어 자랑스럽고 기쁘다"고 말했다. 모니카는 '스승이자 친구'인 아빠를 만나 '하루하루를 행복하고 보람있게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그 아빠가 '민들레 수사' 서영남 씨다. 그 딸인 모니카는 민들레 국수집 5주년인 2008년에 세워진 어린이를 위한 '민들레공부방'과 2010년 2월에 오픈한 어린이를 위한 무료식당 '민들레 꿈 어린이 밥집'에서 일하며, 한 달에 두 차례 목요일과 금요일에는 엄마 베로니카와 아빠와 함께 전국 교도소의 형제들을 만나러 간다.
그 아빠가 쓴 글이 모여져 <민들레 국수집의 홀씨 하나>(도서출판 휴)란 책이 출판되었다.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대접하는 서영남 전직 수사 이야기다. 이 책을 추천하면서 박기호 신부(예수살이공동체 대표)는 "이 책을 손에 든 독자는 행운입니다. 가난하지만 사랑으로 사는 한 성자(聖者)를 만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염으로 찌든 우리시대에 향기롭고 빛나는 영혼의 사람을, 손만 뻗으면 가까이 손잡을 수 있는 이웃으로 소개받는다는 것은 정말 멋진 행운 아닙니까?"하고 묻는다.
하느님의 동업자, 서영남
여기서 박기호 신부는 '민들레 국수집은 하느님나라의 과방(果房)'이며, 서영남 씨는 '하느님과 내통하는 하느님의 동업자'라고 소개한다. 왜냐하면 서영남 씨와 민들레 국수집은 "세상 가운데 하느님 사랑의 불꽃이 꺼질 수 없음을 믿게 해주는 집이기 때문"이기 때문이다.
서영남 씨가 순교복자성직수도회의 수사였을 때부터 알고 지내던 건축가 이일훈 씨. 그가 '민들레 희망지원센터'와 '민들레 꿈 어린이 밥집'을 설계했는데, 서영남 씨를 통해 '건축보다 사람이 먼저'임을 배웠다. 그는 최근에 부는 서영남 바람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생색 없이 내는 밥 한 그릇이 이리 시절을 흔든단 말인가. 일 년 내내 거짓이 참으로 행세하는 세상, 부끄럽다."
서영남 씨는 1954년 부산 범내골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서병률(요한)과 어머니 라봉매(요안나)는 본래 평안도 신의주에서 살다가 한국전쟁 때 월남해서 서울, 부산, 영천, 안동, 포항으로 떠돌았다. 7남매중 다섯째였던 서영남 씨는 갓 초등학교를 마치고 대구 선목 소신학교에 입학했으나 중퇴하고 때로는 점원으로 때로는 주유소에서 일했다. 그의 동생 서영필 신부는 성바오로회에 입회하여 사제품을 받았다. 그러나 서영남 씨는 22살이 되어서야 꿈을 버리지 못해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에 입회했다.
그가 수도회에 들어간 1976년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영향으로 많은 수도회들이 성소감소와 퇴회로 곤욕을 치르던 때였다. 그는 1985년에 종신서원을 하고 가톨릭교리신학원을 졸업했다. 그에게 영향을 준 사람은 단연 수도회 창립자인 방유룡 신부다. 방유룡 신부는 점성에서 침묵, 대월, 면형무아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주었다.
▲ 서영남 씨(사진/김용길) |
'나'를 버림으로써 '나'를 뛰어넘어 하느님께로
점성(點性)은 모든 순간을 알뜰하고, 빈틈없이, 규모있게, 정성스럽게 임하는 것이다. 작은 일에서도 하느님의 섭리를 발견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침묵이란 말없는 내적 고요뿐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에 사욕(邪慾)을 없애고 오로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협조하는 것이다. 대월(對越)은 늘 하느님을 대면하며 살면서 모든 것을 뛰어넘어 치열한 사랑으로 하느님께 몰입하는 것이다. 면형무아(麵形無我)는 마침내 나는 없어지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게 되어 면형(성체)이 된 무아라는 뜻이다. 이는 방유룡 신부가 제시한 영성생활의 극치로, 자기중심적인 일체의 이기심과 소유욕, 집착을 끊어버리고 하느님과 일치하여 무(無)가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방유룡 신부의 영성은 서영남 수사의 수도생활 중에, 그리고 민들레 국수집을 하면서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일상를 섬세하게 돌볼 줄 알았으며, 제 소유와 욕심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하느님의 일에 협조한다는 마음으로 일을 했으며, 만나는 이들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맞이했다. 그렇게 '나'를 버림으로써 '나'를 뛰어넘어 하느님께로 가는 길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는 방유룡 신부와 살고 임종을 지켜드릴 수 있었음을 큰 축복으로 여기고 있다.
한편 서영남 수사는 수도생활 중에 스스로 '시시한 존재'로 여기고 있었는데, 용기를 주고 자존감을 회복하는데 도움을 준 사람이 한국순교복자수녀회의 맹민영 글라라 수녀였다고 말한다. 한때 서영남 수사가 서귀포 수도원에 있을 때 맹 글라라 수녀가 복자성당에 있으면서 그를 교리교사로 초대했다. 당시 제주교구에서 교리경시대회가 있었는데, 서귀포 시골에서 올라온 복자성당 주일학교 어린이들이 상을 싹쓸이하면서 무척 놀랐다고 한다. 그렇게 맹 글라라 수녀는 서영남 수사에게 기회를 주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수도회 살림을 도맡아 하고..
제주 수도원 분원장을 거쳐 필리핀에서 '라디오 베리타스'에서 파견근무를 하고 돌아와, 그는 5년 여 동안 수도회 본원에서 총장 신부를 대리해서 많은 일을 맡아서 했다. 이운형 총장 신부가 그를 전적으로 믿고 만사를 맡겼기 때문이다. 서영남 수사는 수도회의 재단 사무국장, 총비서, 재정담당자로 일했다. 그 과정에서 가재리수도원과 나루터공동체도 짓고, 복자사랑 피정의 집도 리모델링 했다.
그 과정에서 건축가 이일훈 씨도 만났는데, 그때의 감동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서영남 수사는 누구에게나 배울 줄 아는 사람이었는데, 이일훈 씨를 보고 '아, 진짜 사람이구나' 라고 느꼈다고 한다. "여러 건축가를 만나보면서, 건축가는 다 도둑놈만 있는 줄 알았다"면서 자발적 불편을 강조하는 이일훈의 건축철학에 감동했다고 한다. 자발적 불편은 곧 자발적 가난이었던 것이다.
서영남 수사는 가재리 수도원을 지을 때 건축비가 없어서 다행이었다고 말한다. 수도원에 돈이 많았으면 가재리 수도원을 지금처럼 짓도록 수도회에서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돈이 없으니 적은 돈으로 최대한 불편하게 지어도 군말이 없었던 것이다.
▲ 지체장애를 안고 있는 서영남 씨는 손으로 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앞장선다.(사진/김용길) |
4급 지체장애자 서영남, 재소자에게로
그런데 1995년 수도회 총장이 바뀌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모든 소임이 거부되고, 딱히 일을 주지 않았다. 그동안 수도회 운영에 대한 전권을 쥐고 있었던 게 화근이었을까.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를 다른 곳으로 안배했다. 그는 다투지 않고 가장 낮은 곳으로 갈 '절호의 기회'를 얻은 것이다. 평소 관심을 갖고 있던 재소자들에게 가고 싶었다. 겨우 수도회의 허락을 얻었지만 재정지원은 없고 꼬박꼬박 보고는 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그 당시 수사들은 용돈으로 한 달에 5만원 씩 받았다. 그 5만원으로 의정부교도소 등을 다녀야 했는데, 차비를 아끼기 위해 처음으로 <장애인수첩>도 이때 만들었다.
서영남 수사는 '지체장애 4급' 판정을 받았다. 엄지를 뺀 오른쪽 네 손가락이 휘어져 펼 수가 없다. 척골신경마비라고 한다. 그가 소신학교를 중퇴하고 주유소에서 일할 때 자동차 유리파편에 찔려 불구가 되었다.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서영남 수사는 바느질도 하고 밥도 지었다. "보상심리가 작용한 것 같다"는 그는 지금도 손으로 하는 일이라면 마다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가 지체장애를 겪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그는 인천 간석동에 있는 수도원에 머물며 사회교정사목에 열심이었는데, 2000년에는 서울대교구 교정사목위원회 위원이 되면서 전국의 교도소를 다니며 재소자들을 만났으며, 한동안 출소자들을 위한 '평화의 집'에서 그들과 함께 살기도 했다. 그가 재소자들과 출소자들에게 관심을 가졌던 것은 교리신학원에 다닐 때 부터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103위 성인이 모두 교도소 출신이다. 그것도 사형수 등 최고수들이었다. 그러니 순교복자수도회라면 당연히 그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했다. 순교자들의 전기를 읽으면, 그분들이 교도소 안에서도 멋지게 살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잡범들도 도와주고, 자기자신을 위해선 걱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후 서영남 수사에게 어려움이 닥쳤다. 수도회에서 이제 다른 소임을 맡기겠다는 것이다. 다른 수도원 분원장을 하라고도 하고, 한창 재소자들을 위해 투신하고 있던 상황에서 갈등하던 서영남 수사는 급기야 25년 동안 입었던 수도복을 벗기로 결심했다. 그는 "우리는 예수를 따라 살기 위해 수도생활을 하는 것이다. 수도생활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수도생활을 목적으로 삼으라고 하면 그건 슬픈 일이다"라고 말한다.
25년 수도생활을 청산하며.. 민들레 국수집에서 새로 시작
수도회를 나온 수도자는 천더기였다. 예전처럼 보호막이 버티어주지 못했다. 나와서 예전부터 친분을 나누고 있던 인천 만석동 기찻길옆 공부방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출소한 친구 밥해주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겠다 생각하고 그들과 같이 살았다"는 서영남 씨는 두칸짜리 월세방을 얻어 살며 출소자들을 위한 '겨자씨의 집'을 꾸려갔다. 그 와중에도 아무도 찾아주는 이 없는 청송감호소에 면회가는 것은 잊지 않았다.
그런데 출소자들이 나중엔 10여 명까지 늘어나자 고민이 생겼다. 주로 잡역부로 일하는 출소자들 중에 쓰러지는 사람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출소자들끼리 모여 일해 보자고 사무실을 얻어 '집수리' 간판을 달았다. 그 간판이 지금 민들레 국수집 간판이다. 글자만 뜯어내고 다시 붙였다. IMF로 실업자와 노숙자가 넘쳐나는 시절이라, 일도 없었지만, 무료급식소에서 노숙인들을 대하는 태도가 못마땅해 제대로 된 '무료식당'을 열기로 해서 시작한 게 2003년 만우절에 문을 연 '민들레 국수집'이다. 그동안 노숙인들이 잠시 쉴 수 있는 '민들레 쉼터'를 만들고, 이를 발전시켜 노숙인의 문화센터인 '민들레희망지원센터'를 2009년에 만들었다. 2008년부터는 '민들레 꿈 공부방'도 열고, 2010년에는 어린이를 위한 무료식당도 시작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대사, VIP입니다
이 일을 하면서 도로시 데이의 '환대의 집'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 도로시 데이 평전인 <잣대는 사랑>(분도출판사), 한상봉의 <연민>(울림출판사)과 한현 씨가 발행하던 <참사람되어>를 탐독했다. 그러면서 마더 데레사의 방식보다는 도로시 데이의 방식이 옳다고 느꼈다. 도로시 데이가 창립한 가톨릭일꾼운동처럼 자비와 정의가 함께 가야 하는 것이었다. "자비만 강조하면 나쁜 놈들의 밥이 되기 쉽다"고 말하는 서영남 씨는 명동성당 앞에서 데모에 참여해 보기도 했지만, 손을 들어 구호를 외치는 게 영 어색해서,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 어려운 이들에게 밥을 지어 먹이는 일을 한다는 것이다.
▲ 민들레 국수집이 지난 4월 1일 7주년이 되었다.(사진/김용길) |
민들레 국수집 홈페이지(http://mindlele.com)에는 친절한 말을 노숙인들에게 남기고 있다.
민들레 국수집은 배고픈 사람에게 동정을 베푸는 곳이 아니라 섬기는 곳입니다
열 사람이 앉으면 꽉 차버리는 작은 식당이지만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곱 시간 동안에는 찾아오신 분들이
맛있게 식사를 하실 수 있는 곳 입니다.
매주 토,일,월,화,수 닷새 동안 문을 열고 목, 금요일에는 쉽니다.
매일 150-300여명분의 식사를 대접하고 있습니다.
두세 번 오셔서 식사할 수도 있습니다.
간단한 뷔페식입니다.
비록 민들레 국수집에 십자가가 벽에 걸려 있지만
찾아 오신 분이 마음에도 없는 기도는 하지 않아도 좋고, 잘 살아라,
일 해라는 잔소리를 하지 않는 곳입니다.
가난하고 배고픈 이들의 작은 쉼터!
민들레 국수집은 재소자들과 노숙인들을 모두 '하느님의 대사'라고 부른다. 그리스도가 그들의 모습으로 오셨으니, 그분을 대접하듯이 모셔야 한다는 정신이다. 도로시 데이에게 영감을 주었던 피터 모린의 <쉬운 에세이> 한 토막을 더불어 올려 놓았다.
첫댓글 알아
나 삼성장학생인데 이분 초청강연 안가면 장학생 박탈이였어서 강연 들으러 갔었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