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오피니언
[사설]발표 직전 전기·가스료 인상 보류… ‘정략’에 묻힌 ‘수십조 적자’
입력 2023-04-03 00:00업데이트 2023-04-03 05:55
정부와 여당이 2분기 전기·가스요금 발표를 보류하고 물가에 미칠 영향, 에너지 가격 추이 등을 재검토해 추후 인상 시기와 폭을 정하기로 했다. 원가의 60∼70%밖에 안 되는 전기, 도시가스 가격 때문에 에너지 공기업의 적자가 폭증하고 있는데도 여론 악화를 의식해 인상도, 동결도 아닌 미봉책을 선택한 것이다.
당정이 4월부터 적용되는 공공요금 인상 결정을 하루 전인 지난달 31일 저녁 보류키로 한 데는 국정 지지율 하락이 크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여당 관계자는 “강제징용 해법, 근로시간 개편안 논란으로 지지율이 하락하는 국면에서 섣불리 요금을 올리면 민심 이반이 가속화할 수 있다”고 했다. 지난주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대통령 직무수행 긍정평가는 30%로 4개월 만에 최저였고, 여당 지지율은 33%로 6%포인트 급락했다. “공공요금 인상 폭과 속도를 조절하겠다”는 보름 전 대통령 발언도 반영됐을 것이다.
관련 공기업들은 곤혹스럽다는 반응이다. 전기를 팔아 원가의 70%밖에 회수하지 못하는 한전은 작년 32조6000억 원의 적자를 냈고, 올해는 상반기에만 10조 원 넘는 적자가 예상된다. 원가 회수율이 62%인 가스공사도 요금 인상 없인 누적 적자가 연말에 13조 원까지 불어난다. 이러다간 국내 에너지 산업 생태계 자체가 붕괴할 것이란 우려까지 나오고 있다. 발전사에서 전기 사들일 돈이 부족한 한전이 막대한 회사채를 발행해 시중 자금을 빨아들일 경우 다른 기업의 자금 조달에도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4%대 후반의 고물가, 공공요금 폭등으로 인한 가계와 자영업자·소상공인의 고통을 생각하면 정부 여당이 요금 인상을 놓고 고심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10년, 20년 뒤를 봐가며 계획을 세워야 할 에너지 가격 결정을 하루 전 뒤집는 건 심각한 문제다. 인상을 계속 미루다간 에너지 소비 구조 왜곡은 심해지고, 결국 국민의 세금으로 막는 수밖에 없다.
정부 여당은 전기요금을 제때 올리지 않은 지난 정부의 무책임한 태도, 현실을 무시한 탈원전 정책이 에너지 사태를 불렀다고 비판해 왔다. 그러더니 현 여권도 1년 뒤 총선을 벌써부터 의식한 듯 근본적 해결책을 외면하고 있다. 이제까지 비판해온 지난 정부의 포퓰리즘 행태와 무엇이 다른지 스스로 자문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