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주에서 현덕은 난세에 뛰어든 이래 처음으로 편안한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목민관의 위치에 서지 않고 단지 식객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식객 생활이라면 원소 밑에서도, 조조 밑에서도 해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와는 형편이 달랐다. 원소는 조조에 대항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해야 했고, 조조 밑에서는 언제 목이 달아날지 모르는 긴장감 속에 놓여 있었다.
조조는 하북을 정리하느라 바쁘고 당분간은 남진을 할 여력이 없을 것이 분명했다. 형주의 정세는 상당히 안정적이어서 군사훈련 이외에는 특별한 일이 없었다.
현덕이 유표에게 의지한 때가 건안 5년(200년)이었다. 이때 현덕의 나이는 불혹(不惑)이라 불리는 마흔이었다. 그때까지 자신은 물론 자신을 따르는 장수들도 후계자를 두지 못하고 있었다. 유표의 후대로 생활에 걱정이 없어지자 미래를 생각할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두 아우도 모두 30대 후반에 접어들었다. 더 이상 늦기 전에 뒤를 이을 인재를 얻어야 했다. 서둘러 관우와 장비의 혼례를 치르게 했다.
장비는 고성에서 구한 하후가의 소녀와 결혼했다. 당시 장비는 산적에게 쫓기던 소녀를 구했는데 열네살의 이 소녀는 하후연의 조카딸이었다. 은인인 장비에게 시집을 오겠다고 하는 바람에 장비도 싫지 않은 기색이었다. 하후가는 한고조 시대로 올라가는 명문 집안이다. 장비가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관우가 장비보다 조금 늦게 결혼을 했다. 장비가 먼저 아이를 얻어 장포(張苞)라 이름지었다. 그 다음해 관우도 관흥(關興)이라는 아들을 얻었다. 양자로 얻은 관평이 관우보다 더 기뻐했다. 관우는 해마다 아이를 낳아 다음 해에는 딸을, 그 다음 해에는 관색(關索)을 얻었다. 그러나 장비는 어린 아내가 아기를 낳기 위해 큰 고생을 한 것 때문에 한동안 아이를 더 갖지 않았다.
이렇듯 두 동생이 후계자를 낳아 기르는 것과는 달리 현덕은 아들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미부인과 결혼한지는 오년, 감부인과 결혼한지도 삼년이나 되었다. 그만큼의 시간이 지났어도 후계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주위에서는 새로 후실을 들이라는 말까지 있었다. 그러나 현덕은 어려운 시절을 함께 견뎌온 부인들을 버리고 싶지 않다는 말로 그런 권유를 물리치고 있었다.
“자룡, 자네도 이번에 장가를 가지?”
현덕은 스물일곱이나 된 조운에게도 장가가기를 권했다. 하지만 조운이 머리를 가로저었다.
“주공께서 대업을 이루기 전까지는 가정을 이룰 생각이 없습니다.”
건안 9년(204년), 원담의 구원 요청을 거부한 이후 현덕은 끊임없이 북벌에 나설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조카들의 성장을 지켜보는 즐거움도 있었다.
어느날 유표와 더불어 한담을 나누고 있을 때 전령이 들어와 뜻밖의 보고를 했다.
“강하에 주둔하고 있던 장무(張武)와 진손(陳孫)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장무와 진손은 본래 반란을 일으킨 바 있었는데, 한번 용서하여 받아들인 장수였다. 유표가 현덕을 보며 말했다.
“이 놈들이 또 반란을 일으켰으니 재앙이 적지 않겠군.”
“형님께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비(備)에게 토벌군을 내려주시길 청합니다.”
유표는 현덕의 말에 크게 기뻐하며 3만 군을 내려주었다. 현덕은 즉시 강하로 내려갔다.
장무와 진손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현덕과 맞섰다. 현덕은 장무가 타고 있는 말을 보고 놀라서 말했다.
“저 말은 천리마구나.”
“소장이 주공께 바치겠습니다.”
조운이 뛰쳐나갔다. 장무가 조운의 상대를 하려고 했으나 어림도 없는 솜씨였다. 불과 삼합만에 조운의 창에 찔려 말에서 떨어졌다. 조운은 떨어지는 장무의 머리를 낚아챈 뒤에 장무의 말까지 몰고 현덕에게로 돌아왔다.
동료인 장무가 허무하게 끌려가는 것을 보고 눈이 뒤집힌 진손이 조운의 등 뒤를 노리고 달려나왔다. 그것을 본 장비가 버럭 벽력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진손이 주춤하는 사이에 장비의 장팔사모가 이미 그의 목을 꿰뚫고 있었다.
본래 장무와 진손을 진심으로 따르고 있던 것이 아니었던 병사들은 두 장수가 허무하게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고는 모두 항복했다. 강하의 반란은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현덕이 개선을 하자 유표가 반갑게 맞아들인 후 전공을 치하하는 연회를 베풀었다.
“아우의 빼어난 재능이 이와 같으니 형주는 걱정할 것이 없겠어. 다만 한중의 장로, 강동의 손권과 남월(南越)이 불시에 침범하는 것이 골치거리야.”
“아우에게 세 명의 뛰어난 장수가 있습니다. 장익덕에게 남월의 경계를 순시하게 하고, 관운장에게 고자성(固子城)에 보내 장로를 막게하고, 조자룡을 삼강(三江)에 주둔시켜 손권을 상대하게 하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유표가 현덕의 말에 따르겠다고 말하여 연회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아래 끝났다. 본래 형주의 군권을 지니고 있었던 것은 유표의 처남인 채모였다. 유표가 현덕을 아우로 대접하면서 점점 중용하는 것을 자신의 지위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채모는 더 이상 참지 못했다. 채모는 누나 채부인을 찾아가 하소연을 했다.
“유비 휘하의 세 장수를 밖에 내보내고 유비는 형주에서 인심을 얻으려고 한답니다. 그냥 내버려두면 뒷날 우환이 될 겁니다.”
채부인은 그날 밤 유표에게 현덕을 헐뜯었다.
“유비와 왕래하는 형주 사람들이 많답니다. 가만 두면 안 될 일이에요. 성 안에 두어야 좋지 않으니 어디 다른 곳으로 보내세요.”
“현덕은 어진 사람이야.”
유표는 한마디로 말을 잘랐다. 하지만 채부인은 물러서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당신 마음같지 않다는 걸 아셔야죠.”
이 말은 유표의 정곡을 찔렀다. 유표는 낮은 신음만 내뱉고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다음 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현덕을 만났다. 이때 현덕은 장무에게서 빼앗은 말을 타고 있었다. 유표도 그 말이 명마임을 알아보고 크게 칭찬했다. 현덕은 바로 말에서 내려 유표에게 선물했다. 유표는 매우 기뻐하고 말을 몰고 부중으로 돌아갔다.
괴월(蒯越)이 그 말을 보고 놀라서 말했다.
“돌아가신 제 형님 괴량은 말을 잘 보았습니다. 저도 조금 배워 아는데 이 말은 적로마(馰盧馬)입니다. 적로마는 이마에 흰점이 있고 누조(淚槽=눈 아래 움푹 파인 부분)가 있는데 이 말도 그것을 갖추고 있습니다. 적로마는 주인을 해치는 말입니다. 이 말의 주인인 장무가 죽은 것도 바로 그런 이유입니다.”
유표는 괴월의 말에 등골이 섬뜩해졌다. 채부인의 말이 다시 한번 가슴에 와 닿았다. 다음날 현덕을 연회에 부른 다음 말을 돌려주었다.
“어제 명마를 준 것에 감사하이. 하지만 아우는 불시에 원정을 떠나기도 하니 좋은 말이 필요하지 않겠나? 다시 가져가게.”
현덕은 일어나 감사를 표하고 말을 받았다. 유표가 계속 말했다.
“아우가 여기 계속 있으면 무술에 녹이 슬까 두렵군. 양양의 신야현은 재물과 군량이 풍부한 곳이니 거기에 주둔하는 것은 어떨까? 내가 군마를 내려줄 테니.”
현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낯빛 하나 변하지 않았지만 가슴이 아팠다. 유표도 결국 평범한 지도자에 불과했다. 자신을 신야로 보낸다는 것은 형주 방어를 위해 제안한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뜻이 된다. 다만 한 가지 좋은 점이 있었다면 신야는 북방으로 가는 길목이라는 점이었다. 지금 당장은 아무 일도 없는 한적한 곳이겠지만 전란은 머지않아 불어올 것이다. 조조가 조금만 더 북방으로 올라간다면, 전군을 이끌고 간 그가 회군하지 못할 그 시점에 허도를 치고 폐하를 구출하여 형주로 돌아온다. 그 일을 위해서는 북방에 포진하는 것이 더 좋았다. 현덕은 조금만 더 참아내기로 마음먹었다. 벌써 마흔 넷. 자꾸만 초조해지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현덕이 유표가 내려준 군마를 이끌고 성문을 나서는데 한 선비가 나와 현덕에게 인사를 올렸다. 현덕이 누군가하고 살펴보니 유표의 막빈으로 있는 이적(伊籍)이었다.
“기백(機伯=이적의 자) 공, 아니오? 무슨 일이오?”
“어제 이도(괴월)가 말하길 장군께서 타신 적로마는 주인을 해치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장군도 타지 않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충고에 진심으로 감사드리오. 하지만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천명에 달린 것이라 생각하오. 어찌 한낱 말이 나를 해치겠소?”
이적은 현덕의 당당한 말에 감탄했다. 이때부터 이적은 현덕을 마음으로부터 따르게 되었다.
신야에 도착한 현덕은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펼쳐 인망을 얻어 나갔다. 신야를 다스린지 3년만인 건안 12년(207년) 봄이 되어 드디어 기다리던 경사가 찾아왔다. 감부인이 아들 유선(劉禪)을 낳은 것이다. 현덕의 나이 마흔 일곱에 드디어 아들을 낳은 것이다.
감부인이 북두칠성을 입으로 삼키는 꿈을 태몽으로 꾸었기 때문에 아명을 아두(阿斗)라고 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비도 둘째를 낳았다. 장비의 둘째는 여자아이였기 때문에 현덕은 “장래 사돈을 맺으면 좋겠군”이라고 농을 건네기도 했다.
이무렵 조조는 오환정벌에 나서 있었다. 현덕은 지금이야말로 기다리던 기회라는 것을 알았다. 즉시 양양성으로 달려가 유표를 만났다.
“조조는 요서까지 진격했습니다. 허도는 지금 텅 비어있고, 조조가 회군해도 때는 이미 늦을 것입니다. 지금이야말로 대사를 이룰 때입니다.”
“나는 이미 형주를 지배하고 있네. 굳이 큰 일을 벌일 필요가 없어.”
그 말에 현덕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아직도 유표의 가슴에는 그에 대한 의심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가까이서 보는 유표마저 이렇게 생각한다면 세상의 얼마나 많은 입들이 자신을 형주로 노리는 늑대로 볼 것인지 아찔한 생각마저 들었다.
유표는 현덕을 후당으로 데려가 함께 술을 마셨다. 현덕은 술맛도 나지 않는 자리였으나 유표는 거푸 술을 마셨다. 한순간 유표는 술잔을 탁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형님은 무슨 일로 그렇게 장탄식을 하십니까?”
“아우에게 내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없는 것이 안타깝네.”
현덕이 다시 물어보았으나 유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병풍 뒤로 채부인의 모습이 보였다. 현덕은 유표의 마음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현덕은 더 이상 병마를 움직이자는 말도, 한숨을 내쉬는 이유도 묻지 않은 채 묵묵히 술잔을 기울이다가 신야로 돌아왔다.
조조가 허도로 돌아온 다음에 유표가 현덕을 불렀다.
“근자에 듣기로 조조가 허도로 돌아왔다고 하더군. 아직도 군세가 강성하다니 이번에는 형주를 노릴 것이 분명해. 내가 아우의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이 후회되네. 후회돼.”
“천하가 분열되어 날마다 전쟁이 벌어지니 기회는 또 올 것입니다. 한탄하지 마십시오.”
“아우 말이 맞아. 맞고말고.”
유표는 현덕이 자신의 실수를 너그럽게 넘기자 가슴이 가벼워져서 과하게 술을 마시고 말았다. 술에 취하자 절로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주체치 못했다. 현덕이 무슨 일로 괴로워하는지 물었다.
“나한테 괴로운 문제가 하나 있는데, 일전에도 아우와 상의하려다 못했지.”
“형님의 문제가 대체 무엇입니까? 이 아우가 죽는 한이 있어도 풀어드리겠습니다.”
“나한테는 아들이 둘이 있다는 건 알고 있지? 전처 진씨(陳氏) 소생인 큰 아들 기(琦)는 착하지만 우유부단해서 난세에 적합지 않아. 후처 채씨 소생인 종(琮)은 아직 어리지만 총명해.”
유표는 이미 예순 여섯의 나이였다. 큰 아들 유기는 스물 아홉이나 되었지만, 작은 아들 유종은 이제 열세 살밖에 되지 않았다. 유종이 후사를 잇는다는 것은 이런 난세에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유표의 뜻은 이미 유종에게 기울어 있었다.
“큰아들을 버리고 작은 아들을 후사로 삼으면 예법에 어긋날 것이고, 큰아들을 후사로 삼으면 채씨 문중에서 반발이 있을 것이야. 대체 어찌 하는 것이 좋을지 몰라 괴로울 따름이야.”
“옛부터 장자를 폐하고 작은 아들을 후사로 세우면 난리가 났었습니다. 채씨의 권세가 너무 강하다면 서서히 줄여나가면 됩니다. 작은 아들을 편애하여 후사로 세우시면 안 됩니다.”
유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현덕은 자신의 말이 유표의 심기를 거스른 것일까 걱정했다.
채부인은 평소 현덕을 못마땅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유표가 현덕을 만나면 병풍 뒤에서 엿듣곤 했다. 오늘도 병풍 뒤에 숨어 있다가 현덕이 유종을 세워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채부인은 현덕을 더욱 미워하게 되었다.
현덕은 유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자리가 불편해서 화장실에 가는 척 일어났다. 잠시 후 현덕이 돌아와 눈물을 흘리며 자리에 앉았다. 유표가 물었다.
“나갔다가 무슨 일이 있었나? 왜 눈물을 흘리나?”
“아우는 그동안 말안장에서 떠나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 덕분에 허벅지에 살이 붙어 있는 때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편안한 생활을 하다 보니 허벅지가 살이 붙었군요. 세월은 하염없이 흘러가는데 이룬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으니 슬픈 생각이 들어 추태를 보였습니다.”
비육지탄(髀肉之嘆)이라고 부르는 고사성어의 유래가 바로 이 말이다.
“조조가 아우를 가리켜 천하의 영웅은 아우와 자신뿐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조조마저 아우를 그렇게 높이 평가했는데 어찌 이룬 것이 없다 하겠는가?”
현덕은 조조와 매원에서 천하의 영웅에 대해서 이야기하던 그 때를 떠올렸다. 건안 3년(199년)의 일이니 벌써 십년이 다 되어 간다. 그때 거론되었던 원술, 원소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장수도 이제 조조의 한 팔이 되었다. 조조는 더욱 강대해졌다. 하지만 자신은 여전히 식객에 불과했다. 술기운을 타고 오기가 불쑥 솟아올랐다.
“비(備)에게 터전만 있다면야 천하의 보잘 것 없는 인물들이야 걱정할 게 없습니다!”
유표의 얼굴에 못마땅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유표에게는 채씨 문중의 군권만이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현덕이라는 잠룡의 무게도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이 말로 현덕의 흉중에는 천하를 위한 뜨거운 열망이 숨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약한 아들을 거느리고 있는 유표로서는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유표의 표정으로 자신이 큰 실수를 한 것을 안 현덕은 너무 취했다고 핑계를 대고 일어났다. 날이 늦어 신야로 돌아가지 못하고 역관에 가서 머물렀다.
현덕이 떠나자 채부인이 얼른 유표에게 달려가 말했다.
“유비가 말하는 것을 아까 들었는데, 그냥 버려두면 형주를 집어삼킬 것이 분명해요. 당신마저 우습게 보고 있더군요. 지금 제거해서 후환을 끊어야 해요.”
유표도 현덕의 말에 마음이 상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그를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음이 무거워져 아무 말없이 고개만 흔들었다. 채부인은 그 자리에서 물러나온 뒤 채모를 몰래 불러들였다. 그날 있었던 일을 죽 이야기해주자 채모가 말했다.
“역관에 가서 유비를 죽인 뒤에 주공께 고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허락을 받고 죽이기는 틀린 것이라 채부인도 채모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채모는 즉시 군사를 모았다. 이적은 군사들을 한밤중에 모으는 것을 보고 현덕에게 나쁜 일이 추진되고 있음을 눈치챘다. 즉시 부중을 빠져나와 현덕에게 달려갔다.
“채모가 장군을 죽이려고 병사들을 모으고 있습니다. 어서 몸을 피하십시오.”
“형님께 작별 인사도 못 올렸소. 성으로 들어가 인사를 올리겠소.”
“안 됩니다. 지금 들어갔다간 채모에게 해를 당하십니다.”
이적이 결사반대하는 바람에 현덕은 그길로 신야를 향해 떠나고 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채모의 군사들이 역관을 덮쳤다. 그러나 현덕은 이미 별빛을 길잡이 삼아 신야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채모는 시 한수를 현덕이 쓴 것처럼 벽면에 써놓고는 다음날 아침에 유표에게 보고했다.
“유현덕이 간다는 말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역관에 가보니 모반의 뜻이 분명한 시만 한 수 적혀 있었습니다.”
유표는 채모의 말을 믿지 못하고 역관으로 직접 나가보았다. 과연 벽에 시 한수가 적혀 있었다.
여러 해 곤궁함을 면치 못하고
헛되이 옛 산천만 마주했네
용이 어찌 연못 속에 살리오?
우레를 타고 하늘 위로 오르리라
그 뜻이 분명했다. 유표는 머리 끝까지 화가 나 칼을 뽑아들고 외쳤다.
“배은망덕한 놈! 이 놈을 죽여버리고 말겠다!”
그러나 유표는 본래 현명한 사람이었다. 역관을 나서다가 뭔가 수상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현덕과 알고 지낸지 오래이나 한번도 그가 시를 쓰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가 움직인다면 번개처럼 신속하게 군사를 몰고 나타날 인물이지, 문사처럼 시나 적어놓고 음미할 사람이 아니라는데 생각이 미쳤다.
유표는 다시 역관으로 들어가 칼로 시를 긁어냈다. 신경질이 뻗친 그는 칼도 집어던져 버리고 방을 나섰다. 채모가 영문도 모르는 주제에 현덕을 잡기 위해 군사를 출동시키겠다고 고했다.
“일이란 신중하게 처리해야 한다. 조급하게 굴지 마라.”
유표의 마음이 아직 움직이지 않은 것을 알고 채모는 돌아가 채부인과 상의했다. 다음날 채모가 유표에게 말했다.
“올해 풍년이 들어 문무백관을 양양성으로 불러 격려하고자 합니다. 주공께서도 참석해 주십시오.”
“좋은 일이구나. 신야에 있는 현덕도 꼭 부르도록 해라.”
유표가 말하지 않아도 현덕을 부를 참이었다. 채모는 이번 기회에야말로 현덕을 잡아죽이리라 다짐을 하며 신야로 사신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