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창작과 비평 2014년 겨울호에 " 진보 교육감 시대, 무엇을 해야 하나?"라는 제목으로 실린 글의 교정전의 원문으로, 저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합니다. 이기정은 현재 미양고 국어 교사로 재직하면서, 현장에 발을 굳게 디딘 교육개혁 담론을 펼치고 있습니다. 주요 저서로는 [학교개조론](2007), [내신을 바꿔야 학교가 산다](2008), [국어공부 패러다임을 바꿔라](2010), [교육을 잡는 자가 대권을 잡는다](2011), [교육 대통령을 위한 직언직설](2012) 등이 있다.
1.
시대정신을 말하는 것은 너무 거창할 수 있겠다. 교육감선거라고 해봤자 지방자치선거의 한 부분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6·4 교육감선거의 시대정신을 묻는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아이들의 행복은 현 교육감들이 선거에서 내세웠던 제일 중요한 가치의 하나였다. 교육감들이 선거관리위원회에 제출했던 선거공보와 선거공약서에는 행복이란 말이 빠짐없이 등장했다.
행복한 학교 특별한 교육 (부산 김석준 교육감)
이청연을 뽑으면 모두가 행복한 교육이 시작됩니다. 이청연을 뽑으면 가고 싶은 학교로 바뀝니다. (인천 이청연 교육감)
경쟁보다 아이들의 행복이 먼저입니다. (광주 장휘국 교육감)
아이들의 행복, 책임지겠습니다. 아이도 선생님도 부모도 모두 행복해지는 미래 세종교육 프로젝트. (세종시 최교진 교육감)
오늘 행복한 아이가 내일 성공합니다. (경기 이재정 교육감)
뿌리 깊은 나무처럼 행복교육도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강원 민병희 교육감)
아이들이 행복해지면 세상이 행복해집니다. 더 낳은 삶을 가꾸는 김병우의 행복교육. 아이들이 불행한 교육은 이제 끝내야 합니다. 모두 함께 행복한 학교를 만들겠습니다. (충북 김병우 교육감)
아이들의 미래를 키워주고 행복을 지켜주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입니까? 지금 우리의 충남엔 아이들에게 희망과 행복과 미래를 물려줄 수 있는 새교육이 필요합니다. (충남 김지철 교육감)
소중한 아이들, 더 행복해집니다. 아침이 행복한 학교 저녁이 자유로운 학교. 행복한 학교생활을 위한 김승환의 약속. (전북 김승환 교육감)
행복한 학교 만들기. 행복한 학생, 열정 있는 교사, 즐거운 학교. (전남 장만채 교육감)
1등도 꼴찌도 행복한 창의적인 학교. (경남 박종훈 교육감)
최고의 교육가치는 아이들의 행복입니다. 이석문의 희망 그리고 약속1 행복. (제주 이석문 교육감)
우동기의 5대 행복공약. 대구 교육, 행복 꽃 피다. (대구 우동기 교육감)
깨끗하고 품격 높은 행복교육 도시 울산. (울산 김복만 교육감)
학생에게 행복을 주는 교육감 이영우. 안전하고 행복한 학교를 만들겠습니다. (경북 이영우 교육감)
이것은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나타난 현상이었다.
물론 서울의 조희연 교육감은 선거공보(선거공약서)에서 행복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용적으로 보면 조희연 교육감은 오히려 누구보다 더 강하게 아이들의 행복을 말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우선 조희연 교육감이 선거공보에서 표현한 “우리 아이들에게 삶을 되돌려 주고 싶습니다.”라는 말은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단 말과 다른 말이 아니다. 그리고 조희연 교육감은 선거 기간 내내 “모두가 행복한 혁신미래교육”이란 말을 하고 다녔다. 그 말은 현재 서울시교육청의 교육비전으로 공식화된 말이다. 결국 서울시교육청과 산하 기관의 각종 공식문서에 ‘행복’이란 말이 문용린 교육감 시절 때와 마찬가지로 계속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조희연 교육감이 선거공보에서 행복이란 말을 직접 사용하지 않은 것은 대결 상대이자 당시에 현직 교육감이었던 문용린 후보가 ‘행복’(행복교육)이란 말을 오래전부터 사용해왔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랬던 면이 크다.
대전 설동호 교육감은 조희연 교육감과는 반대로 내용적 측면에서 보았을 때 행복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은 경우다. 물론 그도 선거공보에서 행복이란 단어를 사용하긴 했지만 학창시절의 아이들의 행복이란 의미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교육을 통해 인생에서 성공했을 때의 미래의 행복이란 의미로 사용했다. 교육복지의 실현을 공약하며 가볍게 언급한 행복지수란 말도 맥락상 큰 의미를 두기 어렵다.
행복이 6·4 교육감선거를 지배한 중요한 가치가 된 데에는 세월호사건의 영향이 컸다. 세월호의 비극이 없었다면 교육감들은 아이들의 행복에 대해 그렇게 많은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행복이란 가치가 세월호사건으로 인해 느닷없이 부각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미 2012년 대통령선거에서도 중요한 교육가치였다.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2012년 7월 17일 발표한 <기다려온 변화, 박근혜가 바꿉니다>란 제목의 대선교육공약 맨 앞에 나오는 말이 무엇이었던가? “꿈과 끼를 끌어내는 행복 교육을 만들겠습니다”였다.
당시에 ‘행복 교육’이란 말은 상당히 파격적인 말이었다. 당위적 차원에서야 흠잡을 데 없이 좋은 말이긴 하지만 우리 교육이 처한 현실과 너무 유리되어 위선적인 느낌을 줄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후보는 그것을 교육공약의 핵심가치로 제시했다. 그리고 그 말은 대통령선거와 동시에 진행된 서울시교육감 보궐선거에서 보수진영의 문용린 후보에 의해 그대로 사용됐다.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에서 교육공약의 핵심가치로 행복을 내세운 것은 높이 평가할만한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 국민이 교육에서 가진 가장 큰 욕망을 입시에서의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상황에서 그것과 완전히 대립되는 듯싶은 말을 공약의 전면에 내세우는 데에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물론 진실성을 의심할 수는 있다. 당시 박근혜 후보와 그의 교육 참모들은 득표에 도움이 될 것이란 생각에 그 말을 사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말의 진실성 여부가 아닐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행복이란 말을 득표에 도움이 될 말이라 생각했다는 사실 그 자체이다. 그들은 국민의 마음속에서 일어난 욕망의 미묘한 변화, 즉 국민의 마음속에서 아이들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이 점점 커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날카롭게 포착했던 것이다.
이렇게 행복이란 가치는 2012년 대선에서 이미 중요한 가치로 부각되었다가 6·4 교육감선거를 맞이하여 확고하게 자리 잡은 교육가치이다. 6·4 교육감선거의 시대정신은 단연코 아이들의 행복이었다.
2
13명의 진보교육감 당선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진보도 놀라고 보수도 놀랐다. 보수진영의 놀라움이 더 컸겠지만 진보진영이라고 당연하게 여긴 것은 아니었다. 사실 교육감선거는 보수의 프레임이 유리하게 작동하는 선거이다. 그것은 오랫동안 우리국민의 가장 강렬한 욕망이 입시에서의 성공이란 데서 비롯되는 자연스런 현상이다.
대다수 국민은 자신의 자녀가, 자기 지역의 학생들이, 자신이 다닌 모교의 후배들이 입시경쟁에서 승리하기를 강하게 원한다. 이러한 욕망의 실현을 가지고 다툴 때 대다수 국민은 보수진영의 손을 들어줄 가능성이 크다. 그 욕망에 관한한 국민들은 보수진영이 더 충실한 모습을 보일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입시에 대한 욕망이 다른 욕망을 압도하는 한 교육감선거는 보수에게 유리한 선거일 수밖에 없다. 이것은 어쩌면 보수진영이 더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교육감선거 때마다 진보진영은 단일화를 잘 이루는데 보수진영은 왜 그렇게 못했는가? 굳이 단결하지 않아도 승리할 것 같은 선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상황은 조금씩 변했다. 국민들의 마음속에 또 다른 욕망, 즉 아이들의 행복을 바라는 욕망이 서서히 커져왔다. 그리고 그 욕망은 세월호의 비극을 통해 현저히 더 커졌다. 아직 그 절대적인 크기에서는 입시경쟁에서 승리하고자 하는 욕망에 미치지 못하지만 과거에 비해서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아이들의 행복에 대해서 진보와 보수 어느 쪽이 더 충실할 것으로 보이는가? 국민은 대개 진보진영이라 생각하고 있다. 아이들의 행복과 관련한 진보의 이미지는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상당한 진실을 담고 있다. 물론 박근혜 후보가 선구자적으로 행복을 얘기했고, 보수진영의 문용린 교육감이 그 말을 그대로 받아 사용했지만, 그 몇 개의 행위로 수십 년에 걸쳐 축적된 진보진영의 자산이 단번에 보수의 자산으로 바뀔 수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13명의 진보교육감 탄생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아이들의 행복을 6·4교육감선거의 시대정신이라 생각하면 진보교육감 시대의 도래는 필연이었다.
3.
진보교육감들의 1차적 소명은 아이들의 행복 증진이다. 그것은 국민이 6·4교육감선거를 통해 국민이 진보교육감에게 부여한 시대적 사명이다. 그런데 그것은 아주 어렵고 힘든 일이다. 학생들의 행복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인가? 대학입시경쟁의 완화일 것이다. 서울의 조희연 교육감이 선거공보에서 사용한 말을 빌려 얘기하면 ‘무모한 경쟁교육을 중단’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학입시경쟁의 완화는 사회가 바뀌어야 가능한 일이다. 입시경쟁의 치열함이 대부분 사회문제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왜곡된 사회제도와 인센티브시스템, 지나친 학력숭배문화, 과도한 중앙집권주의, 강고한 대학서열 등의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는 상황에서 경쟁의 치열함을 완화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하지만 사회를 변화시키는 일은 정부의 힘을 총동원해도 어려운 일이다. 입시제도의 개선을 통해 경쟁의 완화를 꾀하는 것은 어떤가? 오랫동안 지켜본 바대로 입시제도의 변화를 통해 경쟁의 강도를 약화시키는 것은 성공하기 어렵다. 그것은 이쪽의 경쟁을 저쪽의 경쟁으로 옮겨가게 만들 뿐 경쟁 자체를 완화시키지 못한다.
입시제도의 변경은 매우 손쉬운 일이라 이를 통해 무엇인가를 얻고자 하는 것은 거부하기 어려운 유혹이다. 그것은 역대 정부가 하나 같이 빠져들었던 유혹이다. 서울의 조희연 교육감 또한 대입제도의 개선을 중요한 공약으로 내걸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대입제도의 개선으로 경쟁의 완화를 이룰 수는 없다. 예컨대 수시는 학생부, 정시는 수능 중심으로 단순화하겠다는 공약부터가 그렇다. 논술시험의 폐지를 염두에 두는 것 같은데 논술시험이 사라진다고 해서 입시경쟁이 완화되는 것은 아니다. 설사 진짜 속마음이 수능시험까지 없애거나 수능시험을 자격고사로 전환하는데 있다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논술과 수능에서의 경쟁이 내신경쟁으로 그대로 옮겨가 학교성적을 둘러싼 경쟁이 한결 더 격화될 뿐이다.
물론 입시제도의 변경은 경쟁의 형식과 내용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온다. 하지만 그것이 아이들의 행복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가능성은 많지 않다. 진보진영이 애착을 갖고 시도하려는 정책은 오히려 아이들의 행복에 부정적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예컨대 대학입시를 완전히 내신 위주로 바꾸면 어떻게 될까? 의도하도 것과는 다르게 학생들의 고통이 더 심해질 수 있다. 물론 내신 위주의 입시가 갖는 장점은 적지 않다. 논술고사나 수능시험 위주의 입시에 비해 부(富)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덜 받아 교육에서의 불평등을 완화할 수 있다. 특히 지역적 불평등의 완화에 공헌할 수 있다. 특목고나 자사고에 비해 일반고에게 유리한 입시기도 하다. 하지만 내신 위주의 입시는 입시경쟁의 질을 더 비인간적으로 만들 수 있다. 내신경쟁에서는 주된 경쟁자가 같은 학교를 다니고 한 교실에서 공부하는 친구들이다. 반면에 수능시험이나 논술고사에서의 경쟁자는 주로 얼굴을 모르는 다른 학교 학생들이다. 어떤 경쟁이 학생들에게 더 큰 고통을 주겠는가? 어떤 경쟁이 학생들의 인성에 더 부정적 영향을 끼치겠는가? 내신 위주의 입시가 갖는 긍정성은 아무런 대가 없이 공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경쟁의 성격을 더 비인간적으로 만들고 나서야 얻어지는 것이다. 성적이 아닌 학생들의 생활이나 인성을 입시에 반영하여 입시경쟁의 성격을 바꾸는 것은 어떨까? 추상적 차원에서 얘기할 때는 매우 바람직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실행되면 그 결과가 성적경쟁보다 더 나쁠 수 있다. 상황을 단순화하여 예컨대 대학들이 착한 학생을 선발하려 한다고 가정해보자. 과연 진짜 착한 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하게 될까? 그렇지 않다. 의도한 것과 달리 실제로 그 대학에 입학하는 학생은 착한 학생 보다 위선적인 학생이 더 많을 가능성이 크다.
입학사정관제는 나름의 장점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전체 대학입시에서 입학사정관제가 차지하는 비중이 아직 작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입학사정관제(현재의 학생부 종합)는 전체 입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아직 그다지 크지 않고, 또 그 안에서도 성적 외적인 요소가 차지하는 비중이 아직 절대적이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도 입학사정관제가 보이는 부정적 모습은 염려할 수준이다. 폐지까지는 아니더라도 비중 축소가 필요한 상황이다. 만약 입학사정관제가 입시의 주류로 등장하고 입학사정관제 안에서도 성적 외의 부분이 차지하는 비중이 지금보다 더 커진다면 상황은 크게 악화될 수 있다. 그로 인한 문제점은 성적 위주의 입시가 보였던 문제점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질 만큼 심각할 수 있다.
사회의 흐름에 따라, 교육적 필요에 따라 입시제도의 변경은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입시제도의 변경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환상은 버려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학입시 제도를 변경하는 것은 교육감의 권능을 크게 벗어난 일이다. 그것은 대부분 교육부가 독점한 권능이다. 교육감으로서는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일인 것이다. 결국 대학입시를 통해 진보교육감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교육감의 권능을 벗어난 일이기도 하지만 설사 교육감에게 권능이 주어진다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교육부로서도 안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측면이 더 크다. 사회적 논의를 활성화시켜 교육부를 압박한다고 될 일이 아닌 것이다.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절망스럽기만 하다. 대학입시와 관련해서는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듯하다. 그것은 진보교육감들도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국민들도 체념해야 할 일일지 모른다. 적어도 우리 사회에 어떤 큰 변화가 오기 전까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 행복이란 말은 허무맹랑한 말이기만 한가?
4.
‘행복’이란 말을 거창한 의미로서가 아니라 조금이나마 아이들을 덜 고통스럽게, 덜 힘들게, 스트레스를 덜 받게 만들겠다는 정도의 소박한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허무맹랑할 이유는 없다. 그 조차도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그 정도의 목표라면 도전해 볼만하다.
첫째, 고교 평준화의 강화를 통한 교교 진학 단계에서의 입시경쟁 완화 및 폐지.
고교입시는 초·중 학생의 삶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물론 학생들의 최종 목표가 대학진학에 있기에 대학입시가 더 결정적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고교입시 또한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고교입시를 폐지하거나 최소화하면 초·중 학생의 고통을 완화할 수 있다. 따라서 자사고와 특목고는 가급적 일반고로 전환하거나 선발과정에서 성적의 영향을 최소화해야 한다. 그리고 고교 비평준화 지역은 가급적 평준화 지역으로 전환해야 한다.
물론 교육감의 권능으로 고교평준화를 온전히 실현할 수는 없다. 상당부분 교육부가 그 권능을 교육감과 나누어 갖고 있다. 결국은 권능의 부족으로 실패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실패하더라도 어떤 모습으로 실패하느냐는 중요하다. 실패를 하더라도 국민들의 마음속에 고교 진학 단계에서의 입시는 폐지하는 것이 교육적으로나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서나 더 바람직하다는 인식을 심어주면서 실패해야 한다.
고교진학 단계에서의 입시경쟁을 폐지하거나 완화하는 문제에 대해선 다소 맹목적이라 보일 정도로 공세적 자세를 취해도 된다. 구체적 전술은 유연하고 다양해야 하지만 전반적인 태도는 거침없이 대범해야 한다. 비판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다수 국민의 지지가 그것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현재 고교평준화와 관련해서 가장 쟁점이 되고 있는 것은 서울의 자사고를 일반고로 전환하는 문제다. 역시 저항은 만만찮다. 수많은 반대논리가 동원되고 있다. 정확한 논리적 대응이 필요하다. 자사고의 절반가량이 집중된 서울의 경우, 일반고에 자사고가 끼친 부정적 영향은 특목고가 끼친 부정적 영향 보다 훨씬 크다. 무엇보다 자사고의 등장 이후 서울지역 일반고의 성적분포도가 심각하게 왜곡되었다. 특목고는 중학교의 최상위권 학생을 주로 선발해가지만 자사고는 일반고에서 수업의 중심축이던 중상위권 학생을 집중적으로 선발해 간다. 자사고의 등장이후 서울 일반고의 성적분포도는 중상위권 학생층은 현저히 얇아지고, 하위권 학생층은 그만큼 두꺼워졌다. 학교마다 사정은 많이 다르지만 그것이 서울 일반고의 대략적인 상태다.
하지만 자사고의 폐지는 비단 일반고 살리기에만 국한하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교육의 더 큰 차원에서도 중요한 문제이다. 이 문제는 입시에 의한 진학을 어느 단계부터 도입하는 것이 바람직한가라는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입시에 의한 진학은 언제부터가 바람직한가? 초등학교 입학 단계, 중학교 진학 단계, 고교진학 단계, 대학진학 단계 중 어느 것이 가장 바람직한가? 완전하지는 않지만 이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존재한다. 그것은 대학진학 단계부터이다. 1960년대까지는 중학교 진학 단계에서도 입시가 존재했었지만 이제는 중학교 진학 단계에서 입시가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고교 입시를 주장하는 사람은 아직 많지만 아주 많지는 않다. 1970년대에 시행된 고교평준화제도에 대한 사회적 지지는 확고한 편이다. 대다수 사람은 고교진학 단계까지는 입시가 없는 것을 더 바람직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하며, 교육적으로 바람직하고, 아이들의 행복에 기여한다. 그리고 입시 없는 고교진학은 교육선진국의 보편적 현상이기도 하다.
진보교육감은 국민과 박근혜 정부를 향해 커다란 질문을 던져야 한다. “특목고와 자사고의 등장으로 인해 고교평준화제도는 사실상 해체되었다. 이것이 과연 바람직한 일인가? 고교진학 단계에서 입시가 존재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인가?” 대다수 국민의 답은 분명하다. 고교진학 단계에서의 입시경쟁은 바람직하지 않다.
둘째. 학생에 대한 대폭적인 자율성의 부여.
정규교육과정은 학생들에게 상당한 정도로 강제적일 수밖에 없다. 학생들의 소질과 적성을 살리기 위해 학생에게 교과 선택권 등을 대폭 부여한다 할지라도 학생들이 어떤 선택인가를 반드시 해야 한다는 측면에서는 상당히 강제적일 수밖에 없다. 정규교육과정 상의 강제성은 불가피할 뿐만 아니라 교육적으로도 정당하다.
하지만 정규교육과정 이외의 학교활동에서는 학생들의 자율성을 보장해야 한다. 예컨대 보충수업(방과후학교)과 야간자율학습 등에서는 참가여부를 온전히 학생의 자유의지에 맡겨야 한다. 학부모의 정서를 고려하여 과도기적 과정을 거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분명한 원칙이어야 한다. ‘내신 대비반’과 같은 성격의 보충수업은 설사 참가여부에 대한 결정권을 학생에게 준다할지라도 허용해선 안 된다. 대개의 경우 학교에서는 보충수업을 하는 교사가 보충수업에 참가한 학생들이 보는 정규시험의 출제자이다. 내신대비 보충수업은 학교시험의 출제자가 자신이 출제하는 정규시험의 성적을 올려주려 주기 위해 학생을 모아 대가를 받고 진행하는 방과후 과외 수업인 것이다. 이러한 수업은 그 비교육적인 정도가 통상의 비교육적인 정도를 넘어서는 범죄에 가까운 행위이다.
학생들에게 큰 고통을 주는 비교육적 행위들이 입시를 빌미로 합리화되는 일은 진보교육감시대를 끝으로 사라져야 한다. 사실 그러한 행위들은 입시를 명분으로 자행되고 있지만 사실은 입시에도 별다른 도움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입시 경쟁은 어차피 제로섬게임이기 때문에 모든 학생이 강제보충수업이나 강제자습을 하는 순간 그 변별적 효과가 사라진다는 차원에서 하는 말만은 아니다. 강제보충수업이나 강제자습이 학생의 입시경쟁력을 강화하기는커녕 오히려 약화시킬 수도 있다는 측면에서 하는 얘기다. 물론 어떤 학생에게는 그것이 이로울 수 있다. 그렇다면 간단하다. 그것을 희망하는 학생들에게만 시행하면 되는 것이다.
셋째. 학교규율체계의 합리적 재구성.
상당히 개선되었다고는 하지만 우리나라 학교 규율체제는 아직 상당히 엉터리다. 작은 일에 대해 엄격한데 큰 잘못에 대해선 상대적으로 관대하다. 학교규율은 엄한 것이 바람직한가, 아니면 관대한 것이 바람직한가는 본질적 질문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행위에 대해 관대해지고 어떤 행위에 대해 더 엄격해질 것이냐 하는 것이다. 타인과 자신에게 아무런 해가 되지 않는 일에 대해서는 규율을 현저히 완화하거나 아예 규율을 적용하지 않아야 하고, 타인에게 큰 피해를 주는 일에 대해서는 규율을 엄하게 해야 한다.
타인과 자신에게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는 행동을 규제하느라 학교의 에너지를 낭비하고 학생을 괴롭히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학생들의 머리카락이 길다고 남들이 조금도 피해를 받는 일은 없다. 머리카락이 긴 학생 자신에게도 아무런 손해가 없다. 이런 것들은 학생들의 자유의지에 완전히 맡겨 두어도 되는 부분이다. 학생의 취향에 해당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가급적 규율을 아예 적용하지 않아야 한다. 교복의 경우에도 교복을 줄여 입건 늘여 입건 상관하지 말아야 한다.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된 후로 상황이 현저히 개선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 진보교육감의 시대에는 더 현저한 개선이 있어야 한다.
타인에게 심각한 피해를 주는 일은 얘기가 다르다. 예컨대 학교폭력 행위에 대해서는 지금보다도 더 엄한 규율을 적용해도 된다. 수업의 질서를 심각하게 문란하게 만드는 행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학생인권조례의 시행 등을 통해 자신과 타인에게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는 행위들에 대해 학생들에게 더 많은 자유를 주는 것은 역대 진보교육감들이 잘해 온 일이다. 하지만 타인에게 심각한 피해를 주는 일에 대해 안이하게 대응한 것은 진보교육감들이 잘못해온 일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학교폭력이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부각되었을 때 진보교육감들이 이명박 정부와 대립하는 모습을 보인 것은 바람직하지 않았다. 당시 이명박 정부의 학교폭력 대응 방안은 학교규율체계의 전체적 균형이란 측면에서 보면 큰 문제는 없었다. 그것은 강화해야 할 부분의 규율을 강화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바람직했다. 학교폭력 가해학생에 대한 징벌 내용을 학생부에 기록(했다가 일정한 기간이 지나서 삭제)하도록 한 방안조차도 학교규율체계 전체를 고려하여 살펴보면 그다지 심한 처벌이 아니다. 학생들이 늦잠을 자서 지각을 하면 그 학생의 행위는 무단지각이란 이름으로 학생부에 기록되는데 그것은 평생 지워지지 않는다. 늦잠을 자거나 게으름을 피워서 지각하는 행위는 잘못된 행위이기는 하지만 학교폭력 가해 행위에 비하면 아무런 나쁜 행위도 아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학생부는 이런 행위를 ‘무단’지각이란 이름으로 평생을 기록하는 것이다. 학교에 지각하는 학생은 대개의 경우 부모의 보살핌을 제대로 못 받는 아이들이 많은데 학생부는 이 학생들에게 평생 좋지 않은 낙인을 찍어온 것이다. 이에 비하면 학교폭력 가해로 인한 처벌 내용을 일정기간 기록하는 것은 오히려 온건한 처벌이라 할 수도 있다.
타인에게 큰 고통을 주는 행위에 대해서까지 너무 관대해지면 선량한 다수의 학생들이 고통을 겪을 수 있다. 실제로 대다수 학생들은 그러한 행위에 대해서는 제법 엄한 규율을 원하고 있다. 교사의 타당한 지도에 대해 막무가내인 일부 학생들의 행태에 대해서도 많은 학생들이 엄격한 규율을 요구한다. 그래야 학교의 평화가 유지되고 자신들이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심각한 일탈행위를 막기 위한 학교규율의 강화에는 진보교육감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퇴학과 같은 엄한 처벌도 과감히 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퇴학을 비교육적인 행위로만 볼 것이 아니다. 타인에게 큰 피해를 주는 잘못된 행위를 하면 엄한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학생들이 깨닫게 하는 것까지도 학교의 정상적 교육으로 생각해야 한다.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한마디 하면 나는 학생에 대한 퇴학조치를 무작정 강화하자고 주장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나는 흡연 학생에 대한 퇴학 처분 등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입장이다. 우리나라 고등학교는 많은 경우 흡연 횟수 3회 ~ 5회하면 퇴학이란 규칙을 갖고 있다. 그런데 퇴학이란 처벌은 현재에도 학교폭력 행위 중 아주 악질적인 경우에만 내려지는 처분이다. 이러한 학교규칙은 자신보다 약한 학생을 지속적으로 괴롭히는 행위가 담배 핀 행위에 비해 그 나쁜 정도가 훨씬 덜한 행위라는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 예전에 비해 많아 나아진 면이 있지만 아직도 전반적인 학교규율체제는 학생들에게 교육적으로 잘못된 신호를 주고 있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교육청 차원에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개별 학교 차원에서 어쩔 수 없이 퇴학이란 처벌을 하더라도 다른 차원에서 이 학생들을 지속적으로 교육하고 감싸 안아주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교육청이 나서서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는 지점이 바로 이런 부분이다.
넷째. 다섯째. 여섯째.
교육에서도 관료주의의 폐해는 심각하다. 어쩌면 그 어느 분야보다도 심각할지 모른다. 우리나라 교사들은 학교에서 교육자답게 생활하지 못하고 거대한 교육관료 체제의 말단 관료처럼 생활하고 있다. 교육청이 학교 위에 군림하고 있으며, 학교의 조직체계가 아예 행정업무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교사들은 교사로서의 본질을 잃고 각자의 업무부서에서 업무담당자의 한 사람으로서 살아가고 있다. 교사로 하여금 교육자로서의 본질을 잃게 만드는 이러한 학교 제도와 문화는 오랫동안 우리교육을 망쳐왔다. 교사가 학생들에게 더 많은 사랑과 관심을 주는 것을 막아 왔다. 물론 이 문제를 교육감의 권능으로 온전히 해결할 수는 없다. 하지만 교육감이 펼치는 정책들이 학교문화에 작은 변화를 줄 수는 있다. 그리고 교육감의 태도와 자세가 교사들에게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혁신학교의 성공을 위해서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 혁신학교는 그에 대한 다양한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이 느끼는 만족감은 대체적으로 큰 편이다. 혁신학교의 성공은 교육의 발전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물론 섣부른 욕심은 금물이다. 혁신학교의 실패는 진보교육감의 실패로 귀결될 수 있는 만큼 혼신의 힘을 기울여야 하지만 양적 확산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지금의 학교제도와 문화에서 혁신학교의 질적 성공을 다수의 학교에서 성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경기도교육청에서 9시 등교를 시행하고 있다. 꼭 9시가 아니더라도 등교시간을 얼마만이라도 늦추는 것은 바람직하다. 학생들이 등교를 조금 늦게 하면 성적이 떨어질까? 외국의 경우엔 등교시간을 늦췄더니 오히려 성적이 올랐다는 사례가 많다. 우리나라 언론에도 꽤 많이 보도됐던 내용이다. 등교시간을 늦추면 하교시간이 그만큼 늦춰지기 때문에 조삼모사에 불과한 정책이란 비판은 적절한 비판이 아니다. 동일한 시간이라도 아침의 1시간과 오후의 1시간이 아이들에게 주는 영향은 현저히 다르다. 그리고 아침시간에 전체학생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강제적 자습시간을 없애면 늦추어진 등교시간 만큼 하교시간을 늦추지 않아도 될 수 있다. 일찍 등교를 원하는 학생은 어떻게 하냐고? 간단하다 그 학생들은 일찍 등교해 원하는 일을 하면 된다. 학생들의 전체적인 행복지수는 분명히 올라간다.
진보교육감이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 할 일은 그 밖에도 많다. 그 중에는 국민들이 알 수 있는 커다란 일도 있지만 대개는 국민이 알기 어려운 아주 작은 일들이다. 커다란 것을 성공시키는 것은 물론 중요하지만 작은 일들을 여러 개 잘 성공시키는 것 또한 중요하다. 대학입시가 존재하더라도 학생들은 지금보다 행복해질 수 있다. 행복해질 수는 없다하더라도 덜 불행해질 수는 있다. 어른들이 조금만 더 지혜롭게 생각하고 행동하면 입시경쟁에 별다른 손해를 주지 않으면서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다.
학생들의 고통 중 상당부분은 분명 치열한 입시경쟁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지만 다른 일부는 교육계와 우리사회가 가진 시대착오적 낡은 생각, 고루한 인습, 입시공부에 대한 무지 등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경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행복을 희생해야 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진실의 전부가 아니다. 끝없이 불행하기만 한 학생들은 도중에 지쳐서 입시경쟁이란 마라톤을 완주하지 못할 수 있다. 학생들을 적절히 행복하게 하는 것은 입시경쟁력의 향상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다. 학생의 행복지수를 높이는 (또는 학생의 불행지수를 낮추는) 길은 입시가 존재하는 상황에서도 존재한다. 진보교육감은 그 길을 흔들림 없이 걸어가야 한다.
5.
진보교육감들이 아이들의 행복에 얼마나 많은 기여를 할 수 있을까? 교육감직선제가 갖는 ‘어떤’ 위험성을 생각하면 이러한 질문은 아주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교육감직선제의 중요한 단점은 교육감직선제가 학생들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점차 커져가고 있긴 하지만 아이들의 행복을 향한 국민의 욕망은 아직 강고한 욕망이 아니다. 아직 입시경쟁에서의 성공이란 욕망에 미치지 못한다. 그런데 아무리 진보교육감이라 해도 입시를 향한 지역주민들의 욕망을 무시하는 것은 어렵다. 진보교육감조차 입시에 대한 주민의 욕망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은 그들의 선거공보에도 잘 드러나 있다.
2013년 수능성적 표준점수 평균 전국 1위. 상위권 표준점수 1-4등급 비율 전국1위. 최하위인 표준점수 8-9등급 비율 전국 최하위. (장휘국 광주교육감 선거공보)
대입 수능성적 전국 상위권. 2013학년도 수능성적 분석결과 8개 도 단위 1위, 16 개 시·도 중 4위. (김승환 전북교육감 선거공보)
2012, 2014 학년도 수능시험 원점수 만점자 배출. (장만채 전남교육감 선거공보)
선거공보에 나타난 이러한 표현들은 김복만 울산교육감의 선거공보에 나온 “서울대 합격자 : 2012년 83명 → 2013년 92명” “수도권 주요대학 합격자 : 2012년 314명 → 2013년 576명” 등의 표현보다는 덜 노골적이긴 하다. 하지만 진보교육감조차도 입시경쟁에서 자유롭지 못한 현실을 보여주는 데에는 충분한 표현들이다. 입시에 대한 지역주민의 욕망에 더 강하게 부응한 쪽은 영남의 보수교육감들임이 분명하지만 호남의 진보교육감들도 지역의 입시성과에 상당히 얽매이는 모습을 보인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나라 현실에서 입시경쟁은 그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다. ‘아이들의 행복’에 대한 욕망이 ‘입시경쟁에서의 승리’라는 욕망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서 입시에서의 성공을 향한 학부모의 욕망과 교육감직선제가 잘못 만나면 가뜩이나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 학생들을 더 고통스럽게 할 수 있다. 입시경쟁은 제로섬 게임이다. 어느 한쪽의 승리는 반드시 다른 쪽의 패배를 불러온다. 어느 한 교육청의 승리는 반드시 다른 교육청의 패배를 불러온다. 이런 경쟁에서 교육감들이 학생을 다그친다고 생각해보라. 개인 간의 입시경쟁과 학교 간의 입시경쟁만으로도 버거운데 여기에 교육청 간의 입시경쟁이 더해진다고 생각해보라. 우리 현실에서 교육감 직선제는 이런 가능성을 상당하게 내포하고 있다.
다행히 이런 위험성은 아직 현실화되지 않고 오히려 전체적으론 그 반대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교육감직선제의 필연적 귀결이 아니다. 그것은 교육감직선제 초기부터 진보교육감이 소수 나마 존재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진보교육감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교육감직선제가 지금처럼 아이들의 고통을 줄이는 방향으로 작동하리란 보장은 없다.
직선제의 초기부터 진보교육감들은 입시경쟁 프레임에 강력한 제동을 걸어왔다. 학생인권조례를 제정하는 등 아이들의 행복에 기여할 정책들을 펼쳐 나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교육의 상식으로 조금씩 자리 잡아 가고 있다.
2012대선에서 박근혜 후보가 ‘복지’ ‘경제민주화’ 등 진보 친화적 의제를 자신의 것으로 삼았던 것처럼 다음 교육감 선거에서 보수 교육감후보들이 진보 친화적인 교육의제를 자신의 것으로 삼아 당선될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것은 전혀 안타까워 할 일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학생들의 행복이 증가하고 우리 교육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한 발 더 나아가는 그 자체이지 그것이 누구의 손에 의해 이루어지느냐가 아니다. 그 일이 진보의 손에 의해 이루어지면 어떻고 보수의 손에 이루어지면 어떻단 말인가? 보수가 집권을 위해 진보의 가치를 받아들여 그것을 실현하려 한다면 그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진보의 승리일 수 있다.
진보교육감시대에 아이들은 더 행복해져야 하고, 아이들의 행복을 추구하는 진보교육감의 가치와 정책들이 사회적 상식으로 굳건하게 자리 잡아야 한다. 교육청 사이의 경쟁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입시를 둘러싼 경쟁이 아니라 아이들의 행복을 위한 경쟁이 되어야 한다. 진보교육감은 그것이 가능한 문화와 환경을 조성해 나가야 한다.
6.
이 글은 진보교육감시대의 시대정신을 아이들의 ‘행복’이라 말하며 진보교육감의 사명을 아이들의 행복에서 찾았다. 하지만 행복의 증대를 교육감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은 것은 뭔가 부족하고 이상하다. 교육이 아이들을 불행하게 만들어서는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교육의 존재이유가 아이들의 행복에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학교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학생들이 우리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식과 지혜와 인성을 갖추도록 교육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아이들이 싫어하는 일들도 할 수밖에 없다.
6.4 지방선거에서 탄생한 교육감은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교육감이 해야 할 진짜 중요한 일은 따로 있다.
무엇보다 학교와 교실이 점차로 무너지고 있다. 수업의 기본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점차로 어려워지고 있다. 입시 위주의 수업을 넘어서느냐 마느냐를 따지는 것이 사치스러울 정도다. 지역과 학교에 따라 편차가 크지만 중•고등학교의 경우는 그 경향성이 뚜렷하다. 멀쩡한 학교도 적지 않겠지만 그것은 대체로 선발효과에 의한 것으로 모순을 다른 곳으로 전가함으로써 얻어진 경우가 많다.
무엇 때문에 교실이 붕괴하는가? 흔히들 얘기하듯 입시 때문만은 아니다. 사교육의 번성 때문만도 아니다. 둘과의 연관성은 크지만 흔히들 생각하는 것만큼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상당부분 공교육의 무능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다. 교육과정의 획일성, 학교제도의 불합리성, 학교운영의 비효율성, 교육부와 교육청의 경직된 관료시스템, 교원승진제도의 불합리성 등 공교육의 수많은 모순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4년 후 교육감 선거에서는 시대정신이 바뀔 것이다. 아니 바뀌어야 마땅하다. 4년 후의 시대정신은 무너지는 학교와 교실을 되살리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교육감의 권능과 노력만으로 이루어질 일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교육감이 짊어져야 할 피할 수 없는 의무이다.
진보교육감, 아니 모든 교육감들의 건승을 빈다.-끝-
<각주>
1)물론 서울의 조희연 교육감은 선거공보(선거공약서)에서 행복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용적으로 보면 조희연 교육감은 오히려 누구보다 더 강하게 아이들의 행복을 말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우선 조희연 교육감이 선거공보에서 표현한 “우리 아이들에게 삶을 되돌려 주고 싶습니다.”라는 말은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단 말과 다른 말이 아니다. 그리고 조희연 교육감은 선거 기간 내내 “모두가 행복한 혁신미래교육”이란 말을 하고 다녔다. 그 말은 현재 서울시교육청의 교육비전으로 공식화된 말이다. 결국 서울시교육청과 산하 기관의 각종 공식문서에 ‘행복’이란 말이 문용린 교육감 시절 때와 마찬가지로 계속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조희연 교육감이 선거공보에서 행복이란 말을 직접 사용하지 않은 것은 대결 상대이자 당시에 현직 교육감이었던 문용린 후보가 ‘행복’(행복교육)이란 말을 오래전부터 사용해왔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랬던 면이 크다. 대전 설동호 교육감은 조희연 교육감과는 반대로 내용적 측면에서 보았을 때 행복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은 경우다. 물론 그도 선거공보에서 행복이란 단어를 사용하긴 했지만 학창시절의 아이들의 행복이란 의미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교육을 통해 인생에서 성공했을 때의 미래의 행복이란 의미로 사용했다. 교육복지의 실현을 공약하며 가볍게 언급한 행복지수란 말도 맥락상 큰 의미를 두기 어렵다.
2) 성적이 아닌 학생들의 생활이나 인성을 입시에 반영하여 입시경쟁의 성격을 바꾸는 것은 어떨까? 추상적 차원에서 얘기할 때는 매우 바람직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실행되면 그 결과가 성적경쟁보다 더 나쁠 수 있다. 상황을 단순화하여 예컨대 대학들이 착한 학생을 선발하려 한다고 가정해보자. 과연 진짜 착한 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하게 될까? 그렇지 않다. 의도한 것과 달리 실제로 그 대학에 입학하는 학생은 착한 학생 보다 위선적인 학생이 더 많을 가능성이 크다. 입학사정관제는 나름의 장점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전체 대학입시에서 입학사정관제가 차지하는 비중이 아직 작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입학사정관제(현재의 학생부 종합)는 전체 입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아직 그다지 크지 않고, 또 그 안에서도 성적 외적인 요소가 차지하는 비중이 아직 절대적이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도 입학사정관제가 보이는 부정적 모습은 염려할 수준이다. 폐지까지는 아니더라도 비중 축소가 필요한 상황이다. 만약 입학사정관제가 입시의 주류로 등장하고 입학사정관제 안에서도 성적 외의 부분이 차지하는 비중이 지금보다 더 커진다면 상황은 크게 악화될 수 있다. 그로 인한 문제점은 성적 위주의 입시가 보였던 문제점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질 만큼 심각할 수 있다.
3) 현재 고교평준화와 관련해서 가장 쟁점이 되고 있는 것은 서울의 자사고를 일반고로 전환하는 문제다. 역시 저항은 만만찮다. 수많은 반대논리가 동원되고 있다. 정확한 논리적 대응이 필요하다. 자사고의 절반가량이 집중된 서울의 경우, 일반고에 자사고가 끼친 부정적 영향은 특목고가 끼친 부정적 영향 보다 훨씬 크다. 무엇보다 자사고의 등장 이후 서울지역 일반고의 성적분포도가 심각하게 왜곡되었다. 특목고는 중학교의 최상위권 학생을 주로 선발해가지만 자사고는 일반고에서 수업의 중심축이던 중상위권 학생을 집중적으로 선발해 간다. 자사고의 등장이후 서울 일반고의 성적분포도는 중상위권 학생층은 현저히 얇아지고, 하위권 학생층은 그만큼 두꺼워졌다. 학교마다 사정은 많이 다르지만 그것이 서울 일반고의 대략적인 상태다. 하지만 자사고의 폐지는 비단 일반고 살리기에만 국한하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교육의 더 큰 차원에서도 중요한 문제이다. 이 문제는 입시에 의한 진학을 어느 단계부터 도입하는 것이 바람직한가라는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입시에 의한 진학은 언제부터가 바람직한가? 초등학교 입학 단계, 중학교 진학 단계, 고교진학 단계, 대학진학 단계 중 어느 것이 가장 바람직한가? 완전하지는 않지만 이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존재한다. 그것은 대학진학 단계부터이다. 1960년대까지는 중학교 진학 단계에서도 입시가 존재했었지만 이제는 중학교 진학 단계에서 입시가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고교 입시를 주장하는 사람은 아직 많지만 아주 많지는 않다. 1970년대에 시행된 고교평준화제도에 대한 사회적 지지는 확고한 편이다. 대다수 사람은 고교진학 단계까지는 입시가 없는 것을 더 바람직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하며, 교육적으로 바람직하고, 아이들의 행복에 기여한다. 그리고 입시 없는 고교진학은 교육선진국의 보편적 현상이기도 하다. 진보교육감은 국민과 박근혜 정부를 향해 커다란 질문을 던져야 한다. “특목고와 자사고의 등장으로 인해 고교평준화제도는 사실상 해체되었다. 이것이 과연 바람직한 일인가? 고교진학 단계에서 입시가 존재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인가?” 대다수 국민의 답은 분명하다. 고교진학 단계에서의 입시경쟁은 바람직하지 않다.
4) 이런 점에서 보면 학교폭력이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부각되었을 때 진보교육감들이 이명박 정부와 대립하는 모습을 보인 것은 바람직하지 않았다. 당시 이명박 정부의 학교폭력 대응 방안은 학교규율체계의 전체적 균형이란 측면에서 보면 큰 문제는 없었다. 그것은 강화해야 할 부분의 규율을 강화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바람직했다. 학교폭력 가해학생에 대한 징벌 내용을 학생부에 기록(했다가 일정한 기간이 지나서 삭제)하도록 한 방안조차도 학교규율체계 전체를 고려하여 살펴보면 그다지 심한 처벌이 아니다. 학생들이 늦잠을 자서 지각을 하면 그 학생의 행위는 무단지각이란 이름으로 학생부에 기록되는데 그것은 평생 지워지지 않는다. 늦잠을 자거나 게으름을 피워서 지각하는 행위는 잘못된 행위이기는 하지만 학교폭력 가해 행위에 비하면 아무런 나쁜 행위도 아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학생부는 이런 행위를 ‘무단’지각이란 이름으로 평생을 기록하는 것이다. 학교에 지각하는 학생은 대개의 경우 부모의 보살핌을 제대로 못 받는 아이들이 많은데 학생부는 이 학생들에게 평생 좋지 않은 낙인을 찍어온 것이다. 이에 비하면 학교폭력 가해로 인한 처벌 내용을 일정기간 기록하는 것은 오히려 온건한 처벌이라 할 수도 있다.
5)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한마디 하면 나는 학생에 대한 퇴학조치를 무작정 강화하자고 주장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나는 흡연 학생에 대한 퇴학 처분 등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입장이다. 우리나라 고등학교는 많은 경우 흡연 횟수 3회 ~ 5회하면 퇴학이란 규칙을 갖고 있다. 그런데 퇴학이란 처벌은 현재에도 학교폭력 행위 중 아주 악질적인 경우에만 내려지는 처분이다. 이러한 학교규칙은 자신보다 약한 학생을 지속적으로 괴롭히는 행위가 담배 핀 행위에 비해 그 나쁜 정도가 훨씬 덜한 행위라는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 예전에 비해 많아 나아진 면이 있지만 아직도 전반적인 학교규율체제는 학생들에게 교육적으로 잘못된 신호를 주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