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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곡(上谷)·만주(滿洲)의 지명이동(地名移動)과 조선사(朝鮮史)
상곡(上谷)을 알면, 조선(朝鮮) 땅이 보인다.
○ 우리나라 학계(學界)의 역사인식(歷史認識) 수준(水準)을 보면 :
모든 것들이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위주(爲主)로 되어 있어, 이것을 이해(理解)하고, 논거(論據)를 찾으려 오버(over)하다 보니, 삼국시대(三國時代 : 高句驪·百濟·新羅) 그 이전(以前)의 한국(韓國)시대에 관한 것들은, 아예 손대지 않으려하고, 또 아는 것이 없다. 왜냐하면 말할 수 있는 자료(資料)들이 없으니까…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예를 들면 : 기원전(紀元前) 244년【진시황(秦始皇) 3년】연(燕)나라 장수(將帥) 진개(秦開)가, 「동호(東胡) 즉(卽) 조선(朝鮮)」에서 인질(人質 : 볼모)로 있었다. 진개(秦開)는 은밀(隱密)하게 동호(東胡)의 허실(虛實)을 살피고, 당시(當時)의 동호(東胡)왕을 구워삶아 신임(信任)을 얻어, ‘지(燕)’ 나라로 돌아가면서, 사전(事前)에 준비(準備)한 대로 군사(軍士)를 몰아 동호(東胡) 땅 일천(一千)리를 빼앗고, 이곳에 「상곡(上谷)·어양(漁陽)·우북평(右北平)·요서(遼西)·요동군(遼東郡)」등의 5군(郡)을 설치(設置)하였다는 역사(歷史)기록(記錄)이 있다.
이게 「연(燕)의 오군(五郡)」이라고 하는데, 중요(重要)한 것은, 그곳이 현재(現在)의 「어디냐」는 것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것이, 조선사(朝鮮史)의 지명(地名)연구(硏究)다. ‘식민사관(植民史觀)=반도사관(半島史觀)’의 역사통설(歷史通說)에서 말하는 것들은, 아래의 지도(地圖)와 크게 차이가 없다.
◇ 또 이것을 반박(反駁)하는 학자(學者) 또는 재야(在野)쪽의 주장(主張) 역시(亦是) ‘거기가 거기’요 하북성(河北省)이나 산서성(山西省)이나, ‘그곳이 그곳’이란 이야기다. 또 그 지세(地勢)나 지명(地名)의 유래(由來), 인접(隣接)한 산(山)이나 강(江)등의 자연환경(自然環境)은 무시(無視)하고, 시대적(時代的) 상황(狀況)만을 나열(羅列)하면서 천리(千里)다, 이천(二千)리다, ‘기다. 아니다’ 에 핏대를 올린다.
물론(勿論) 그런 것도 중요(重要)하겠지만 무엇보다 「그곳이 어디냐」는 것보다 중요(重要)한 것이 있을까.
◇〈연(燕)의 장수(將帥) 진개(秦開)가 조선(朝鮮) 땅을 빼앗고 5군(郡)을 두었다.〉는 곳에 대해서 ‘식민사관(植民史觀)=반도사관(半島史觀)’은「상곡(上谷)·어양(漁陽)·우북평(右北平)·요서(遼西)·요동군(遼東郡)」이라고 하면서 그린 놓은 연(燕)나라 5군(郡)도(圖).
지도출처 : 블로그
지도출처 : 네이버 지식in
㉮ 지도(地圖)설명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의 역사해설도(歷史解說圖)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의 역사해설(歷史解說)은, 한반도(韓半島)와 일제(日帝)식민지(植民地)역사(歷史)얘기일 뿐이다.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역사(歷史)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 지도(地圖)설명 : 위의 지도(地圖)는 :〈유언비어(流言蜚語)를 지도(地圖)라는 것을 빌려 그려 넣은 것에 불과(不過)하다. 왜냐하면 그 근거(根據), 고증(考證)등이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다.〉
위의 지도(地圖)에 그려진 것들이 사실(史實)이라고 한다면 : 사마천(司馬遷)이 궁형(宮刑 : 去勢形)까지 당하면서 기원전(紀元前) 90년에 완성(完城)했다는 사기(史記), 또한 많은 주석자(註釋者)들, 두우(杜佑)의 통전(通典), 또는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등 옛 역사서(歷史書)는, 유언비어(流言蜚語)를 적은 책으로 전락(轉落)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그럴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다.
왜냐하면 : 〈조선왕조(朝鮮王朝)는, 중원(中原) 대륙(大陸)의 요충지(要衝地)에서, 수천(數千)년 영욕(榮辱)의 세월(歲月)을 영위(營爲)했기 때문이다.〉
○「위의 지도(地圖)는 조작(造作)된 것이다.」라는 것을,「증명(證明) 또는 증거(證據), 또 고증(考證)하는 것이 오늘 글의 주제(主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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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河) 북안(北岸) 오원(五原) 북(北) 900 리 : 〈상곡(上谷)…조양(造陽)〉 : 정사(正史) 그대로 보는 ‘상곡(上谷)과 조양(造陽)’
➊ 자치통감(資治通鑑) 卷 六. 秦 紀.
◇《始皇.上.始皇帝.三年:始皇帝.三年,其後燕將秦開爲質於胡,胡甚信之. : 시황제(始皇帝) 3년,【기원전(紀元前) 244년】그 뒤(後)에, 연(燕)의 장수(將帥) 진개(秦開)는, 胡(동호 : 朝鮮)의 인질로 있었는데, 胡(동호 : 朝鮮) 왕(王)의 지극한 신임을 얻었다. ; 歸而襲破東胡,東胡卻千餘里.燕亦築長城,造陽至襄平,置上谷,漁陽,右北平,遼東郡以拒胡. (注1) : 진개(秦開)가, 동호(東胡 : 조선(朝鮮)에서 인질이 풀려 연(燕)으로 돌아가는 길에, 동호(東胡 : 조선(朝鮮)를 기습(奇襲), 격파(擊破)하고는, 그들을 천 여리(千 餘里) 밖으로 몰아냈다. 연(燕)나라에서는 조양(造陽)에서 양평(襄平)까지 장성(長城)을 쌓고, 상곡(上谷)·어양(漁陽)·우북평(右北平)·요동(遼東)군을 설치하고, 동호(東胡:조선(朝鮮)들의 침략에 대비하였다.》고 하였다.
(注1) : 韋 昭 曰 : 造 陽, 地 名, 上 谷. 余 按 漢 書 所 謂 上 谷 之 斗 造 陽 是 也. : 위소(韋昭)가 이르기를 : 조양(造陽)은 지명이며, 상곡(上谷)이다. 한서(漢書)에서 말하는 상곡(上谷)의 뾰죽하게 뛰어 나온 곳에 있는 것이 조양(造陽)이다.
杜 佑 曰 : 晉 泰 康 地 志 : 自 北 地 郡 北 行 九 百 里, 得 五 原 塞 ; 又 北 出 九 百 里 得 造 陽, 卽 麟 州 銀 城 縣.. : 두우(杜佑)가 이르기를 : 진(晉) 태강지지(泰康地志)에 : 북지군(北地郡)에서 북쪽으로 9백리를 가, 오원새(五原塞)를 얻었다 ; 또 북(北)쪽으로 9백리를 나가 조양(造陽)을 얻었는데, 곧 린주(麟州) 은성현(銀城縣)이다. 【북지군(北地郡)으로부터 1,800리에 조양(造陽)이 있었다는 뜻이다.】
史 記 : 燕 築 長 城, 自 造 陽 至 襄 平. : 사기(史記) : 연(燕)에서 장성(長城)을 쌓았는데 조양(造陽)에서 양평(襄平)에 이르렀다.
韋 昭 曰 : 造 陽 之 在 上 谷. 未 詳 孰 是. : 위소(韋昭)가 이르기를 : 조양(造陽)은 상곡(上谷)에 있다. 어느 것인지는 자세하게 알 수 없다.
史 記 正 義 曰 : 上 谷. 今 嬀 州. : 사기정의(史記正義)에서 이르기를 : 상곡(上谷)은, 규주(嬀州)이다.
王 隱 地 道 志 曰 : 郡 在 谷 之 頭, 故 以 上 谷 名 焉 . 班 志 : 襄 平 縣, 遼 東 郡 治 所. 漁 陽, 唐 薊 州, ( )州.. 北 平, 唐 平 州.. 遼 東, 其 地 在 大 遼 水 之 東, 唐 嘗 置 遼 州, 又 嘗 爲 安 東 都 護 府 治 所. : 왕은(王隱)의 지도지(地道志)에서 이르기를 : 군(郡)의 골짜기 머리를 예부터 상곡(上谷)이라고 하였다. 반지(班志) : 양평현(襄平縣)은 요동군(遼東郡)의 치소(治所)이다. 어양(漁陽)은 당(唐)의 계주(薊州)와 ( )이다. 북평(北平)은 당(唐)의 평주(平州)다. 요동(遼東)은, 그 땅이 대요수(大遼水)의 동(東)쪽에 있다. 당(唐)이 일찍이 요주(遼州)를 두어, 또 일찍부터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의 치소(治所)였다
◇ 위의 글, 사기(史記) 본문(本文) 및 주석(註釋)에서,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일차적(一次的)으로, 상곡(上谷)이 어디에 있었다고 하든, 〈북지군(北地郡)에서 북(北)쪽 900 리에 오원(五原)의 성채(城寨)가 있고, 이곳에서 다시 북(北)쪽으로 900 리를 가야 조양(造陽)에 닿는다.〉는 사실(事實)이다.
그렇다면 「상곡군(上谷郡)에 속해 있었다는 ‘조양(造陽)’」은 :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옛 장안(長安)】정북(正北) 내몽고(內蒙古) 황하(黃河)북안(北岸)의 옛 요새(要塞)이자, 도요영(度遼營)【도요장군(度遼將軍)의 주둔지(駐屯地)】이 설치(設置)되어 있던 오원(五原)에서, 다시 북(北)쪽으로 900 리를 가야, 그곳에 “조양(造陽)”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곳은 현재(現在)의 외몽고(外蒙古) 내륙(內陸) 땅이다.
전한(前漢)으로부터 오대(五代)까지의 도요장군(度遼將軍)과 도요(渡遼) 및 도요영(度遼營)등을 고려(考慮)한다면 : 이때의 ‘요수(遼水)=요하(遼河)’는 감숙성(甘肅省) 난주(蘭州)로부터 북(北)쪽【동북(東北方)】으로 흘러 영하성(寧夏省)을 남북(南北)으로 관통(貫通)하여 남하(南下)와 북하(北河)로 나누어져 흐르다가 합류(合流)하는「하(河)=황하(黃河)」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곳 주변에서 “도요(渡遼) 및 도요영(度遼營), 도요장군(度遼將軍)”의 활동영역(活動領域)이었기 때문이다. 「도요(渡遼)」란 말은 「요수를 건너다」라는 뜻이고, 장군(將軍)은 「요수(遼水)를 건너는 군사(軍事)들을 지휘(指揮)하는 총사령관(總司令官)」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필자(筆者)의 말이 아니라,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있는 말을 그대로 옮기고 있는 것이다.
➋ 상곡(上谷)이란 군(郡)의 이름이 처음으로 설치(設置)된 것으로, 이때가 시황제(始皇帝) 3년(기원전:紀元前 244년)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기원전(紀元前) 244년, 그 이전(以前)의 황하(黃河) 북안(北岸)의 땅은, 모두 동호(東胡) 곧 조선왕조(朝鮮王朝)의 땅이었다.〉는 얘기다. 동호(東胡)는 바로 당시(當時)의 조선왕조(朝鮮王朝)였다.
〈연(燕)은 이때 쇠약(衰弱)했으므로, 현자(賢者)라고 했던 진개(秦開)를 조선(朝鮮)에 인질(人質)을 보냈고, 진개(秦開)는 손바닥을 비비고 비벼서, 마침내 왕(王)의 신임(信任)을 얻고, 세작(細作)들과 내통(內通)하고, 군사(軍士)들을 비밀리(秘密裏)에 모처(某處)에 매복(埋伏)시켜 놓고, 은밀(隱密)하게 엿보고 있다가, 귀국(歸國)할 때, 조선(朝鮮)의 뒤통수를 쳐, 일천(一千)여리의 땅을 빼앗았다.〉는 것이 진개(秦開)와 조선(朝鮮)의 당시(當時) 역사(歷史)이야기다. 여기서 빼고 보태고 할 일도 없다. 이야기 그대로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당시(當時)의 연(燕)나라와 조선(朝鮮)은, 어디를 경계(境界)로 대치(對峙)하고 있었을까? 이게 중요(重要)한 것이지, 지지고 볶고 할 일도 없다.
상곡(上谷)이니 조양(造陽)이니 하는 지명(地名)과 사기(史記)나 통전(通典), 자치통감(資治通鑑)등의 소위(所謂) 정사(正史)라고 하는 역사서(歷史書)의 기록(記錄)에 따르면 :
〈연(燕)나라는 황하(黃河) 서(西)쪽 곧 영하성(寧夏省) 서(西)쪽의 아랍선좌기(阿拉善左旗) 및 우기(右旗)와 액제납기(額濟納旗)와 그 북방지대(北方地帶)와 ‘고비(gobi)사막(沙漠)’지대에 있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연(燕)의 진개(秦開)가 동호(東胡) 곧 조선(朝鮮)의 땅을 빼앗고 설치(設置)했다는 “상곡군(上谷郡)”의 땅이, 「북하(北河)…남하(南河)가 흐르는 내몽고(內蒙古) 황하(黃河) 북안(北岸)에 있는 오원(五原)에서, 북(北)쪽으로 9백리를 가야 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이곳은 오늘날의 외몽고(外蒙古) 내륙(內陸) 땅이다.
◇ 그렇다면 결국(結局), 「21세기 현재(現在)의 역사통설(歷史通說)은, 거짓 역사해설(歷史解說)이요, 조작(造作)된 역사해설(歷史解說)이란 것이 명명백백(明明白白)하게 밝혀지는 것이다.」 이게 현실(現實)이다.
… 혹자(或者)는 : 오원(五原) 북방 9 리를 900 리로 조작(造作)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9 리가 됐든 900 리가 됐든, 결과(結果)는 같다. 「그곳이 조선왕조(朝鮮王朝)의 땅이었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본시(本是) 900 리를 9 리로 살짝 왜곡(歪曲)한 것이다.】
➌ 통전(通典 : 杜佑) 린주(麟州)
◇《麟 州 理 新 秦 縣 。 隋 以 來 銀 勝 二 州 地 。 昔 漢 武 徙 貧 人 於 關 西 及 充 朔 方 以 南 新 秦 中 ,蓋 其 地 也 。 大 唐 天 寶 元 年 , 置 新 秦 郡 , 或 為 麟 州 。 領 縣 三 :린주(麟州)는 신진현(新秦縣)에서 다스렸다. 수(隋) 이래(以來)로 은주(殷州)와 승주(勝州) 두 주(州)의 땅이다. 먼 옛날 한 무제(漢武帝)가 관서(關西)의 곤궁한 사람들을 삭방(朔方)과 신진중(新秦中)에 이사를 시킨, 그 땅이다. 대당(大唐) 천보(天寶) 원년(元年)에, 신진군(新秦郡) 혹은 린주(麟州)을 두었다. 영현(領縣)이 셋(3)이다.
新 秦 . : 신진(新秦)
連 谷 漢 圁 陰 縣 地 。 貞 觀 八 年 置 。: 연곡(連谷)은 한(漢)의 은음현(圁陰縣)의 땅이다. 정관(貞觀) 8년에 두었다.
銀 城 漢 圁 陰 縣 地 。漢 棝 陽 塞 在 此 。漢 光 祿 卿 徐 自 為 出 五 原 塞 數 百 里 , 築 城 障 列 亭 , 至 盧 朐 山 , 即 今 縣 北 所 謂 光 祿 塞 。 後 魏 置 石 城 縣 , 後 改 之 。 : 은성(銀城)은 한(漢)의 은음현(圁陰縣)의 땅인데, 한(漢)의 고양새(棝陽塞) 그것에 있다. 한(漢)의 광록경(光祿卿) ‘서자위’가 오원새(五原塞) 수백(數百)리를 나와, 성장(城障)과 역참을 벌여 설치하여, 노구산(盧朐山)에 이르렀는데, 즉금(卽今)의 현(縣)의 북(北)쪽 광록새(光祿塞)라 부르는 곳이다.
注 : 晉 太 康 地 志 自 北 地 郡 北 行 九 百 里 得 五 原 塞 , 又 北 出 九 百 里 得 造 陽, 即 此 。: 진(晉) 태강지지(泰康地志)에 의하면 : 북지군(北地郡)으로부터 북(北)쪽으로 9백리(百里)를 가 오원새(五原塞)를 득하고, 또 북(北)쪽으로 9백리를 나가 조양(造陽)을 얻었는데, 곧 이곳이다. 史 記 云 : 燕 亦 築 長 城 , 自 造 陽 至 襄 平 ,置 上 谷 、漁 陽 、右 北 平 、遼 西 、遼 東 郡 以 備 胡. : 사기(史記)에서 이르기를 : 연(燕)나라에서 또한 장성을 쌓았는데, 조양(造陽)으로부터 양평(襄平)에 이르렀다. 이곳에 상곡(上谷), 어양(漁陽), 우북평(右北平), 요서(遼西), 요동군(遼東郡)을 두고, 오랑캐(胡)에 대비하였다.韋 昭 云 : 造 陽 地 在 上 谷. 未 詳 孰 是. : 위소가 이르기를, 조양(造陽) 땅은 상곡(上谷)에 있다. 어느 것이 옳은지는 자세하게 알 수 없다.
◇ 오원(五原)에서 북(北)쪽으로 900 리를 가 조양(造陽)을 얻었는데, 상곡(上谷)이다. 구-글 어스로 거리를 재보면 : 오원(五原)에서 북(北)으로 외몽고(內蒙古) 국경선(國境線)까지 겨우 180km이다. 그렇다면 외몽골 땅으로 200km정도는 더 가야 옛 조양(造陽)을 만날 수 있다. 또 그곳 조양(造陽)에서 동(東)쪽 또는 동남(東南)쪽으로 일천(一千)리라면 : 외몽고(外蒙古)와 내몽고(內蒙古) 국경선(國境線)에도 못 미치는 거리다.
그런데 이곳에 5군을 설치했는데, 「상곡(上谷), 어양(漁陽), 우북평(右北平), 요서(遼西), 요동군(遼東郡)」을 두었다니…기막힌 역사해설(歷史解說)이다.
진실(眞實)로 역사서(歷史書) 이야기대로라면, 연(燕)나라 장수(將帥) 진개(秦開)는 최소한(最小限) 4천리(千里)【외몽고(外蒙古) 땅 조양(造陽)에서 요동군의 끝인 압록강(鴨綠江)까지 직선거리는 : 약(約) 1,700km 가량이 된다.】를 넘게 동호(東胡 : 朝鮮)의 땅을 뺏었어야 5개 군(郡)을 둘 수 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는 곧 「연(燕)나라와 조선(朝鮮)은 다른 곳에 있었다.」는 이야기고, 조선(朝鮮)을 동(東)쪽으로 밀어내기 위해 조작(造作)한 것이다. 그것을 증거(證據)하는 이야기는 곧 〈상곡(上谷) 곧 규주(嬀州)다〉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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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산서성(山西省) 상건하(桑乾河) 지류(支流) 규수(嬀水)와 상곡군(上谷郡)
…요녕성 박물관에 전시된 연(燕) 강역도(疆域圖).〈지도출처 : 블로그 / 사슴목장〉
◇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북직례(北直隸)편을 보면 :《媯川在衛城東南.又西南流入保安州界,合於桑乾河.金人謂之合河.有合河鎮,在今保安境內. : 규천(嬀川)은 위(衛)의 성(城) 동남(東南)쪽에 있다. 또 서남(西南)으로 흘러 보안주(保安州) 경계로 들어가서, 상건하(桑乾河)와 합쳐진다. 금인(金人)들이 말하는 합하(合河)이며, 보안주(保安州) 경내(境內)에 합하진(合河鎭)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곧 “상건하(桑乾河)에 들어오는 조그만 지류(支流)”란 얘기다.
동서(同書) 북직례(北直隸) : 진(秦)나라 때의 상곡군(上谷郡)이다.
㉮ 상건하(桑乾河) : 두산백과 : [Sanggan, 桑乾河(상건하)] : 길이 506km, 유역면적 2만 9300㎢이다. 중국 허베이성 북서쪽, 산시성 북쪽에서 흐르는 강으로 하이허강[海河] 수계에 딸린 융딩강[永定河] 상류에 해당한다. 융딩강은 산시성 다퉁[大同] 남쪽에서 발원하여 허베이성으로 들어가 동쪽으로 흐르다 관팅[官廳]댐으로 흘러드는 구간을 가리킨다. 산시성 북쪽 관천산[管岑山]에서 발원하여 허베이성 화이라이현[懷來縣]에서 양허강[洋河]과 합류한 뒤 관팅[官廳] 저수지로 흘러든다. [네이버 지식백과] 쌍간강 [Sanggan, 桑乾河(상건하)] (두산백과)
㉯ 永定河(영정하) : 두산백과 : 길이 700km. 산시성[山西省] 북부의 닝우현[寧武縣]에서 흘러내리며 상류부는 쌍간강[桑乾河]이라고 한다. 물길은 다시 동류하여 허베이성[河北省] 화이라이[懷來]에서 양허강[洋河]과 합류하여 베이징[北京] 서쪽 교외를 관류하여 톈진[天津]에서 하이허강[海河]으로 흘러든다. 황토지대를 흘러 화북평야 북부에 다량의 황토를 퇴적하기 때문에 샤오황허강[小黃河]이라고도 한다. 이 강은 예로부터 하도(河道) 없이 흘렀기 때문에 우딩강[無定河]이라고 하였으며 삼국시대부터 치수공사가 행하여졌으나 때때로 범람해서 베이징을 위협하였다. 청(淸)의 강희제(康熙帝)는 융딩강으로 개명하고 개수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중공정권 성립 후 연안에 방호림(防護林)을 식림하고 화이라이에 길이 290 m, 높이 45 m의 관팅[官廳]댐을 건설하는 등 대규모의 치수공사를 하고, 다시 베이징 서부의 싼자뎬[三家店]에 수문을 설치하여 시내의 상수도 ·공업용수 ·발전용수를 끌어들이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융딩강 [永定河(영정하)] (두산백과)
위에서 알아본 바와 같이 규수(嬀水) 또는 규천(嬀川)은, 조그만 하천(河川)으로 상건하(桑乾河)에 흘러드는 조그만 지류(支流)일 뿐이다. 즉(卽) 「영정하(永定河)의 상류(上流)가 상건하(桑乾河)이고, 상건하(桑乾河)에 흘러드는 조그만 지류(支流)가 규수(嬀水)다.」산서성(山西省)을 벗어나지 못한다.
◇ 연(燕)의 진개(秦開)가 동호(東湖)를 몰아내고 두었다는 상곡군(上谷郡)의 조양(造陽)으로부터 북경(北京 : 河北省)까지는 동남(東南)쪽으로 1,000km이상 떨어져 있어, 1리를 4km기준해도 2,500리나 된다. 그런데 위의 글 사기(史記)에서는 겨우 1천리 땅을 빼앗았다고 하였으니, 웃기는 이야기가 아닌가?
◆ 사기(史記)나 자치통감(資治通鑑), 통전(通典)등의 원문(原文)에서 말하는 대로, 다섯 개 군(5郡)을 설치(設置)한 것이 요수(遼水)를 넘었다고 한다면, 당시 연(燕)의 진개(秦開)는, 최소(最小)한 4천리(千里)∼5천리(千里) 정도(程度)의 땅을 빼앗아야 옳다. 그래야만 오원(五原) 북방(北方) 900 리의 조양(造陽)으로부터 요수(遼水)의 동(東)쪽 요동군(遼東郡)까지를 설치(設置)할 수 있는 거다.
그런데 위의 지도(地圖)에서는 ‘산서성(山西省) 일부 경내(境內)와 하북성(河北省)서북부 땅 일부에 상곡군(上谷郡)을 두었다.’고 표시(標示)해 놓고 있다.
21세기 역사해설(歷史解說)【식민사관(植民史觀)=반도사관(半島史觀)】의 「상곡군(上谷郡)」은 : 조그만 지류(支流) 하천(河川)인 규수(嬀水 : 嬀川) 유역(流域)에 고을을 세우고, 이곳을 “상곡(上谷)”이라고 이름했다가, 당(唐)나라 때에, “규주(嬀州)”로 개명(改名)했다는 것이, 곧 상곡(上谷)의 지명(地名)유래(由來)다.
◇ 위에서 살펴 본대로 (1)+(2) 모두 후대인(後代人)들의 붓 끝에 의해 놀아난 것들이다. 이것을 “지명(地名)이동(移動)” 이라고 하며, 사가(史家)들이 주도적(主導的)으로 벌인 “역사왜곡(歷史歪曲)과 조작(造作)” 의 산물(産物)이다.
여기에 정치적(政治的)이라는 수사(修辭)는, 필수적(必須的)으로 가미(加味)되어, 오늘날의 비극(悲劇)을 만들어 놓았으니,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동물(動物)의 세계(世界)는, 비극(悲劇)과 희극(戲劇)을 구분(區分)하지 못한다.
◇ 그렇다면 본시(本是) 즉(卽) 본래(本來)의 「상곡(上谷), 어양(漁陽), 우북평(右北平), 요서(遼西), 요동군(遼東郡)」군은 어디에 자리 잡고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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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상곡(上谷)」 은 : ‘규수(嬀水)=아무다리아강(江)’ 유역일대(流域一帶)
… 지도(地圖)설명(說明) : 아랄해(海)로 흘러들어가는 「아무다리아강(江)이 곧 규수(嬀水)」다. 해국도지(海國圖志)에 의하면 : 아무다리아강(江) : 〈규수(嬀水)=오서하(烏墅河)=오호수(烏滸水)=오호하(烏滸河)=아무강(江)=마호하(馬滸河)=아모하(阿母河)=암포하(暗布河)=아매하(阿梅河)=아서하(阿書河)〉라고 하였으며, 〈함해(鹹海)=달리강아박(達裏岡阿泊)=아랄 해(海)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또한 우수(右水)는 : 시르다리아강(江)=납림하(納林河)이며, 좌수(左水)는 : 아무다리아강(江)=아모하(阿母河)라고 하였다.
➊ 〈규수(嬀水)는 곧 규천(嬀川)이다. 이 강(江) 유역(流域)을 상곡(上谷)이라고 했다.〉는 말이고, 당(唐) 때에는 규주(嬀州)로 이름을 바꿨다. 조양(造陽)은, 상곡군(上谷郡)의 속현(屬縣)이었다.
이러한 “규수(嬀水)”가 현(現) 하북성(河北省)에서, 일만(一萬)리도 넘게 떨어져 있는,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의「아무다리아강(江)」이라고 했다.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媯水在吐火羅北.源出蔥嶺,西南流,入於西海.其水深廣,長千餘里,遠近諸水匯入焉.亦名烏墅河. : 규수(嬀水)는 토화라(吐火羅) 북(北)쪽에 있다. 총령(葱嶺)이 근원(根源)으로, 서남(西南)으로 흘러, 서해(西海)로 들어가는데, 길이가 천여(千餘)리에, 가깝고 먼 곳의 여러 물들이 돌아 들어온다. 또한 이름이 오서하(烏墅河)이다.》라고 하였다.
「상곡(上谷)은 지명(地名)으로, 규수(嬀水)주변에 있었다.」고 하는데, “규수(嬀水)”는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를 흐르는 아무다리아강”이다. 아무다리아강【A m u, D a r y a, 러시아어: Амударья, 페르시아어:آمودریا, D a r y a (바다를 의미함)】은, 파미르【총령(蔥嶺)】고원에서 발원(發源)하여, 힌두쿠시산맥(山脈)을 빠져서, ‘투르크메니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의 국경(國境)지대의 북서(北西)쪽에서 흐르는 강(江)이다. 원래는 ‘아랄해(海)’로 흘러 들어갔지만, 현재(現在)는 사막(沙漠) 쪽에서 사라지고 있다. 연장 1450km 【원래는 2400 km】이며, "다리야"는 터키어로 "강"의 의미(意味)이므로 "아무강"이라고 표기(表記)하는 경우도 있다.
전한서(前漢書)의 서역(西域) / 안식(安息)편을 보면 : 〈安息, 地方數千里, 最大國也. 臨媯水. : 안식(安息)은, 지방은 수천(數千)리이며, 가장 큰 나라이다. 규수(嬀水)에 임하였다.〉라 하였다. 여기에 있는 「규수(嬀水)는, 곧 아무다리아강(江)」이다.
《「아무다리아강(江)」은, 물줄기를 따라 버드나무·갈매나무·수유나무가 주로 자라며 중류(中流)에 이르면 홍수(洪水) 침전(沈澱)물로 생긴 저습지에, 다양(多樣)한 종류의 “버드나무와 포플러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버드나무·수유나무·포플러나무가 멀리 떨어진 하류(下流)지역까지 계속 이어지면서 갈대로 뒤덮인 삼각주(三角洲)에 빽빽하게 우거져 있다. 철갑상어·잉어·돌 잉어·송어 등 여러 종류의 어류(魚類)가 발견(發見)되며 강변(江邊)에는 멧돼지·살쾡이·재칼·여우·산토끼가 서식한다. 조류도 약 200여 종이 있다. 중요한 것은, 「전혀 주목받지 못했던 이 강(江)은, “러시아의 표트르 1세 시대”에 이르러서야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했으며, 1734년 처음으로 비교적 믿을 만한 지도(地圖)가 만들어졌으며, 19세기말 비로소 체계적(體系的)으로 연구(硏究)되기 시작했다.」는 사실(事實)이다.》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➋ 위의 “아무다리아강(江) 설명(說明)에서, 그 원문(原文)을 모르니, 번역(飜譯) 또한 올바른 것인지 알 수 없다.” 즉(卽) 〈버드나무(柳)인지, 느릅나무(楡)인지를 알 수가 없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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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상곡(上谷)의 지명(地名) 이동사(移動史)
역사통설(歷史通說)【식민사관(植民史觀)=반도사관(半島史觀)】은, 조선사(朝鮮史)를 철저하게 파괴(破壞)시키고, 파멸(破滅)시킨 원흉이다. 특히 일제(日帝)의 앞잡이, 하수인(下手人)들이었던 자(者)들은 민족(民族)과 나라(國)를 배반(背叛)한 천고(千古)의 역적(逆賊)이요, 매국노(賣國奴)들이다. 아래의 예를 보자.
➊ 본시(本是) 상곡(上谷) : 본래(本來)의 상곡(上谷)은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의 아무다리아강(江) 주변일대(周邊一帶)였다.
연(燕)나라는 오늘날의 카자흐스탄(Kazakhstan) 「아랄해(海)와 발하슈호(湖)와 자이산호(湖)로 연결(連結)되는 사이의 땅이 중심(中心)」이다.
➋ 1차 이동(移動) : 섬서성 북방 황하 북안(北岸) 900리 조양의 외몽고(外蒙古) 내륙(內陸) 땅으로 이동(移動)시켰다가 여의치 않게 되니…
➌ 2 차 이동(以東) : 산서성(山西省)동변(東邊)과 하북성(河北省)지방으로 재(再) 이동(移動)시켰다.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북직례(北直隸)편에서 보았듯이, 영정하(永定河)의 상류(上流)인 상건하(桑乾河)의 조그만 지류(支流)를 규수(嬀水)라고 했는데, 그곳은 산서성(山西省) 경내(境內)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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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덧붙여 :「만주(滿洲 : Manchuria)」는,
서장(西藏)에서, 범어(梵語)인 ‘만주사리(曼珠師利, Man-chu-shih-li)’에서,
숙신(肅愼, Shu-chen)의 전음(轉音)인 주신(珠申, Chu-shen)에서,
건주여진(建州女眞族)의 귀족(貴族)이름이었던 ‘만주(滿住)’에서,
장백산(長白山) 동남(東南)【조선(朝鮮)의 함경도(咸鏡道) 땅】쪽의 노이합적(奴爾哈赤 : 누르하치)의 발상지(發祥地)를 만주(滿洲)라고 불렀다는 등의 여러 주장(主張)이 있다.
그러나 어떤 주장(主張)이든, 그곳은 중원(中原) 대륙(大陸)의 서북방(西北方)일 수밖에 없다. 즉(卽)
① 서장(西藏)에서 만주사리(曼珠師利)라고 했던 것은, 동북방(東北方) 일만(一萬)리 먼 곳과는 관계(關係)없는 이야기고,
② 숙신(肅愼)의 전음(轉音) 역시(亦是) 서(西)쪽과 북(北)쪽 사이에 숙신(肅愼)이 있었다고 했으니 동방(東北方) 1만 여리(餘里)와는 관계(關係)없는 말이고,
③ 건주여진(建州女眞) 역시(亦是) 장백산(長白山)의 북(北)쪽에 있어야 하니 관계(關係)없는 이야기고,
④ 노이합적(奴爾哈赤:누르하치)의 발상지(發祥地) 장백산(長白山) 동남(東南)쪽의 만주(滿洲) 땅은, 조선(朝鮮)의 땅이고, 그곳은 서북방(西北方)지대에 있었기 때문이다.
만주(滿洲)! 본래(本來)의 만주(滿洲) 땅은 : 카자흐스탄(Kazakhstan)의 북방(北方)과 동북방(東北方)의 현 러시아(Russia) 땅【우랄(Ural)산맥(山脈)과 예니세이(Yenisey)강 사이의 땅】이 바로 본시(本是)의 만주(滿洲) 땅이다. 만주(滿洲) 역시 상곡(上谷)과 마찬가지로
… 1차 이동(移動) : 중원(中原)북방(北方) 하(河)의 남(南)안, 북안(北岸) 땅으로 이동(移動)시켰으나, 이 역시 여의치 않았다. 그러다보니 또 이동(移動)하게 되었는데,
… 2 차 이동(移動) : 오늘날의 반도(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로 옮겨져, 21세기(世紀) 지금(只今)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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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燕)나라는 ‘총령(葱嶺)=파미르고원(高原)’ 동(東)쪽으로 진출(進出)한 적이 없는,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및 동구라파(東歐羅巴) 종족(種族)이요, 나라였다. 이러한 것들은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근거(根據)와 원전(原典)의 고증(考證)등을 통해 우리 카페의 게시판에 게재(揭載)되어 있다.
역사통설(歷史通說)【식민사관(植民史觀)=반도사관(半島史觀)】은 조선사(朝鮮史)를 철저하게 파괴(破壞)시키고, 파멸(破滅)시킨 원흉(元兇)이다.
조선사(朝鮮史)는, 세계사(世界史)의 주역(主役)이었으나, 이를 왜곡(歪曲), 조작(造作)하여, 극동(極東)의 조그만 땅 반도(半島)에 처넣고,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이라는 미사려구(美辭麗句)를 교묘하게 곁들여 놓았다.
그리고 다시는 부활(復活)할 수 없도록, 남(南)과 북(北)으로 갈라놓고, 같은 국민들끼리 이전투구(泥田鬪狗)하도록 만들어 놓았는데, 이게 반도(半島)와 그 부속도서(附屬島嶼)를 아우르는 오늘날의 남한(南韓)과 북한(北韓)이다.
이 자(者)들의 백년대계(百年大計)는 정확(正確)하게, 철저(徹底)하게, 계획(計畫)되되어, 지금(只今)도 우리들 끼리 열심히, 이전투구(泥田鬪狗)하고 있는 중이다. 아니 그런가?
2018년 01월 07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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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문무선생님 글 잘 읽었습니다~
그렇다면 사서에서 말하는 중국이란 나라들은
중앙아시아 쉽게 말해 탄으로 끝나는 7나라 인가요?
환국고려선생님의 글을 읽어보면 연나라가 카자흐스탄쪽 같거든요 ~
중앙아시아의 탄으로 끝나는 7나라가
꼭 전국칠웅의 조.연.위.제.초.진같은 느낌이 들어서요 ~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테리>님!
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가능성이 아주 많다고 봅니다. 연나라는 카즈흐스탄에 있었던 것이 맞습니다.
고전(古典)에서 중앙아시아에 어떤 나라들이 있었느냐 하는 것은 서역전에 기록되어 있는 나라들 명칭입니다만, 총령의 동쪽 곧 현재의 신강성으로부터 산동성까지의 대륙의 땅은, 조선왕조의 영역임이 확실하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님께서 말씀하신 소위 전국칠웅들은 대륙내의 조그만 제후국들이었는가? 아니면 중앙아세아지방의 나라들이었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중원대륙은 조선왕조의 영역이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봅니다. 감사드리며, 건강하시길 빕니다.
지금의 중국땅이라는 것도 영길이국들이 동으로 옮겨놓고 자금성도 허구로 만들어놓고 조작했군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