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아버지가 잔치를 벌이다
루카 15, 22-24
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1) 가장 좋은 것을 주다
작은 아들은 한 평범한 농가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루카 사도는 아버지가 거대한 재물과 많은 하인들을 거느리고 있는
매우 부유한 사람이라고 묘사한다.
이러한 묘사에 맞게 렘브란트는 아버지와 그를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을 화려하게 입힌다.
그림의 뒷 배경에 있는 두 여성들은 농촌의 집이라기보다
저택의 한 부분같이 보이는 둥근 기둥에 기대어 서 있다.
아버지의 번쩍이는 복장과 주위의 부유한 배경은
그의 거의 보이지 않는 눈,
슬픔에 가득 찬 얼굴,
그리고 그의 구부정한 자세에서
너무나 선명하게 보이는 긴 고통과, 날카로운 대조를 보여준다.
자녀들에 대한 무한한 사랑으로 고통 받고 있는 하느님이
선함과 자비가 풍부하고
자녀들에게 그분 영광의 풍요로움을 간절히 드러내고자 하는 바로 그 하느님이다.
아버지는 아들이 사과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아버지는 아들의 애걸보다 자발적인 용서를 먼저 취하고
아들의 간청을 그의 돌아옴으로부터 나오는 기쁨의 빛 속에서는
전혀 상관없는 것으로 여기며 밀어놓는다.
그러나 이것뿐 만이 아니다.
아버지는 아무 질문도 하지 않고
용서하고 잃어버린 아들이 집에 온 것을 즐겁게 환영할 뿐만 아니라,
그에게 새로운 생명, 풍요로운 생명을 주고 싶어 견딜 수가 없다.
하느님은 너무나 강력하게 돌아온 아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고 싶어
거의 기다릴 수가 없는 것 같다.
아무 것도 충분히 좋지 않다.
가장 최고의 것을 그에게 주어야 한다.
아들은 하인으로 고용되어 살 준비를 하고 있는 반면,
아버지는 훌륭한 손님에게만 입히는 옷을 가져오라고 한다.
그리고 아들은 자기가 더 이상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고 느끼지만,
아버지는 그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고
그를 사랑하는 아들로 세워주고
상속자의 위치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발에 신발을 신겨준다.
나는 고등학교 졸업 후, 여름에 입었던 옷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하얀 바지, 넓은 벨트, 요란한 색의 셔츠, 그리고 반짝이는 신발 모두가
얼마나 내 자신을 자랑스럽게 느끼도록 했던가.
부모님은 나를 위해 새 옷을 사면서 매우 기뻐했고 그들의 아들을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그리고 나는 그분들의 아들이어서 고맙게 느꼈다.
특히 새 신발을 신는 것이 얼마나 기분 좋았는지 기억한다.
요즈음에 나는 여행하면서 사람들이 맨발로 다니는 것을 본다.
지금 나는 새 신발의 상징적인 중요성을 더 이해하고 있다.
벗은 발은 가난과 종살이를 나타내고 있다.
신발은 부유한 이들, 권력가들을 위한 것이다.
신발은 뱀으로부터 보호해준다. 신발은 안전과 힘을 준다.
신발은 잡히는 이들을 사냥꾼으로 바꾸어준다.
많은 사람들에게 신발을 신게 되는 것은 표준점을 통과하는 것이다.
한 나이든 아프리카계 미국인 영성가는 이것을 아름답게 표현한다:
“하느님의 모든 자녀들이 신발을 신는다.
천국에 가게 되면 난 신발을 신을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천국을 온통 걸어 다닐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유의 표징을,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자유를 입힌다.
아버지는 아들들 그 누구도 고용된 하인이나 종이 되길 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도 하느님의 희년이 시작되는 것을 알리는 개막식과 같다.
이러한 수여와 개막의 의미는 즈카르야 예언자의 네 번째 환시에 표현되고 있다:
그가 주님의 천사 앞에 서 있는 예수아 대사제를 나에게 보여 주었다. …
그때에 예수아는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었다.
천사가 자기 앞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저 사람에게서 더러운 옷을 벗겨라” 하고서는
예수아에게 말하였다.
“보아라, 나는 너에게서 네 허물을 치워 버렸다. 나는 너에게 예복을 입혀 주겠다.”
그리고 “너희는 그의 머리에 깨끗한 터번을 씌워라” 하고 말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그의 머리에 깨끗한 터번을 씌우고 그에게 예복을 입혔다.
주님의 천사가 예수아에게 선언하였다:
“만군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내 길을 따라 걷고 내 명령을 지키면,
너는 내 집을 다스리고 내 뜰을 지키리라.
나는 네가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사이를 드나들게 하리라.
예수아 대사제야! 너와 네 앞에 앉아 있는 너의 동료들은 들어라 …
나는 이 땅의 허물을 단 하루에 치워 버리리라.
그 날에 … 너희는 서로 이웃들을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 나무 아래로 초대하리라.”
(즈카르야 3, 1-10).
즈카르야의 이 환시를 듣고 돌아온 아들의 이야기를 읽을 때에,
아버지가 아들에게 입힐 옷, 반지,
그리고 신발을 가져오라고 하인들에게 지시하면서 했던 말,
“어서”는 인간적인 성급함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표현한다.
그것은 시간이 시작될 때부터 준비해 온 새로운 나라를 열려는
하느님의 거룩한 열성을 보여주는 말이다.
아버지가 풍요로운 잔치를 원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특별한 때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는 것은
아버지가 모든 금지 사항들을 해제하고
아들에게 그전에 결코 없었던 잔치를 열어주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강렬한지 보여준다.
아버지의 기쁨은 그 풍성함이 확연하다.
모든 것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내린 후 아버지는 외친다: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는 잃었으나 찾았다.”
그리고 그들은 즉시 잔치를 시작한다.
음식이 넘치고,
음악과 춤이 있다.
행복한 잔치 소리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들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