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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계시록의 구조를 보여주는 놀라운 계시!
요한계시록 해석은 왜 어렵거나 심지어 불가능하게 느껴질까요? 계시록의 최대 난점은 복음서나 서신서들은 읽으면 때로는 어려운 구절들이 있어도 대략 내용을 알 수 있는데, 계시록은 전체적으로 오리무중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치면 이 단락이 머리, 가슴, 팔, 다리 어느 부분인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전체 구조가 파악이 안 되기 때문에 해석이 뒤죽박죽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한계는 각종 계시록 주석이나 강해집들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계시록을 바르게 해석하려면, 바로 각 장이나 단락의 세부해석으로 들어가면 안 됩니다. 먼저, 다니엘 70이레의 예언을 통해 계시록 해석의 실마리를 얻어야 하고 또, 휴거가 환난 전, 환난 중, 환난 후 중 어느 때 일어나는지를 분별함으로 바른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그 작업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계시록의 전체적인 뼈대와 구조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장님이 코끼리를 더듬는 격이 됩니다. 바른 해석이 요원해집니다.
에스겔이 본 환상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에스겔이 본 환상에서 뼈들이 제멋대로 붙은 것이 아닙니다. 모두 제자리에 붙었습니다. 그래서 살이 덮이기 전에 '이게 사람이구나!', '여기가 머리고, 이건 가슴이고, 이건 팔이고, 이런 다리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마치 이처럼 계시록의 구조를 또렷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문제는, 계시록의 뼈대 즉 구조를 어떻게 파악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저도 오래도록 방법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계시록을 해석할 엄두를 낼 수 없었고 포기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던 중 갑자기 계시록에 대한 계시들이 저에게 쏟아부어졌고 거짓말처럼 계시록의 구조를 볼 수 있께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나저나, 계시록을 공부하면서 '계시'가 무엇인지 모르면 안 되겠지요. 그래서 먼저 계시에 대해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대부분의 목사님들이 '계시'라는 단어를 잘 사용하지 않습니다. '계시'라는 단어를 사용하면 알레르기 반응을 보입니다.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계시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교적인 신학자나 이단 사냥꾼들에게 속아서 그와 같은 어리석은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조직신학자 웨인 그루뎀을 위시해서 번 포이트레스, D.A. 카슨, 우리나라 총신대의 이한수 교수님과 개신대 나용화 총장님이 잘 지적한 대로, 그리고 『안식일교회 대논쟁』이라는 책에서 최삼경조차 인정했듯이 계시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미 종결된 성경저자들에게만 임했던 특별계시가 있는가 하면, 케네스 해긴과 조용기 목사님이 말했듯이 성령의 은사 중 계시적인 은사를 통해서 오늘날도 임하는 계시가 있습니다. 누가 전자와 같은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면 그는 이단입니다. 그러나 후자와 같은 계시를 받았다면 성경적인 경험이므로 정통입니다. 제가 계시를 받았다고 할 때 그 의미는 항상 후자입니다. 그러므로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은 그 자체가 계시입니다(1:1). 감추어져 있던 것을 드러내고 보여주기 위한 책입니다. 그런데 이런 계시록을 해석하기 위해 또 다른 계시가 필요할까요? 이것은 충분히 있을 법한 의문입니다. 이번에 저는 계시록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한다는 것을 거듭 확인했습니다. 성경 안에 모든 답이 다 있었습니다. 계시록이라고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을 해석하기 위해 요한이 받았던 것과 같은 종류의 계시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즉 꿈이나 환상, 예언이나 천사의 방문, 입신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계시가 필요 없습니까? 아닙니다. 그와는 다른 계시가 필요합니다.
첫 시간부터 공개적으로 말했듯이, 하나님은 제게 계시를 통해 계시록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저는 계시록을 해석하면서 전부는 아니지만 상당 부분을 계시를 통해서 깨달았습니다.
그럼 그 계시들이 저에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임했을까요? 궁금하시죠! 요한계시록을 연구할 때 저에게 임한 계시는 '생각'이라는 형태로 임했습니다. 모르는 분들은 '에이 생각이 무슨 계시야?'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이 중 "생각나게 하리라"라는 표현에 주목하십시오. 자기가 하는 생각이 있고 하나님이 생각나게 해주시는 생각이 있습니다. 앞의 것은 그냥 생각이지만 뒤의 것은 계시입니다.
요한복음 13: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이것은 유다 개인의 생각이 아닙니다. 마귀의 뜻입니다!
마가복음 14:72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생각하고 울었더라."
이것은 베드로의 생각으로 볼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하나님도 마귀도 생각을 통해 역사합니다. 생각이 주의 음성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을 더 또렷하게 보여주는 것이 다음 구절입니다.
마태복음 10:19-20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성령님은 우리 속에 계십니다. 그래서 주로 "속에서" 말씀하십니다. 속에 계시기 때문에 굳이 외부에서 들리는 소리로 말씀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님은 대부분 육(혹은 육의 귀)을 통하지 않고 영에 직접 말씀하십니다. 모리스 세룰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묵상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속사람에게 말씀하신다. 그 속사람이란 우리의 영혼이며 우리 안의 참 사람이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과 영혼 대 영혼의 교류를 갖는 것이다. ... 하나님은 당신 속에 있는 참 사람, 즉 내적 인간에게 말을 걸어오신다. 그분은 고요한 가운데 때로는 즉시 깨달음을 주는 낮은 음성으로 당신의 영혼과 교통하신다."
그렇다면 성령님은 우리의 속사람에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말씀하실까요? 환상을 보여주실까요? 음성을 들려주실까요? 그럴 때도 있지만 대부분 생각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잘 이해하실 수 있도록 몇 가지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먼저, 데이브와 린다 올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 알기 위해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의사소통 수단을 알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음성은 종종 무의식적인 생각이나 느낌 혹은 인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또, 플로이드 맥클랑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과 생각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구하면 주님께서는 우리 마음 가운데 여러 가지 생각을 심어주실 것입니다."
기도시간은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시간일 뿐 아니라 듣는 시간입니다. 기도 중 잡념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이와 달리 분명히 기도에 집중하고 있고 딴 생각을 한 것이 아닌데, 무의식중에 어떤 깊은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그때 말씀이 선명하게 깨달아지기도 하고, 무슨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선명하게 정리가 되곤 하는데, 이것은 단지 생각이 아니라 주님의 음성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가장 대표적인 방식입니다.
또, 인도의 성자 썬다 싱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영혼에 말씀하시면, 우리는 즉싱 그 의미를 이해하게 됩니다. ... 우리가 침묵의 시간을 가지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영혼에 말씀하시는데,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직접 우리의 마음속에 그의 생각을 넣어주십니다. 때때로 그것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생각이기도 합니다."
썬다 싱은 환상 중에 주님을 자주 뵙고 입신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 그가 생각으로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고백하고 있음에 주목하십시오. 또 케네스 해긴 목사님동 영적인 많은 경험을 하셨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받을 수 있는가?』라는 탁월한 책에서 상대가 선지자라 할지라도 주님은 대부분 영의 증거나 내적 증거를 통해서 말씀하신다고 쓰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소개해드리고 싶은 것은, 위대한 복음 전도자 찰스 피니가 한 말입니다.
"언어나 다른 지각 전달 수단을 의지할 필요가 없는 경우, 누군가가 가르침을 다른 방식으로 전달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즉 생각 그 자체가 우리 마음에 직접 전달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생각에 대한 표신이 아니다. 이것은 성령이 행하시는 사역이다. 성령이 이 사역을 어떻게 행하시는 지는 아무도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다. 성령이 언어를 통하지 않고서 직접 우리 마음속에 생각 그 자체를 새긴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 인간의 마음에 직접 역사하시는 성령은 외적인 표시를 통하여 살아있는 생각을 전달한다. 성령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연구와 노력으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성경구절들을 끊임없이 계시한다."
이것은 가르침 즉 성경구절들에 대한 깨달음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연구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말씀의 은사입니다. 이것은 바로 피니가 경험했고 저도 자주 경험한 일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경험하실 수 있습니다.
이제, 성령님이 생각을 통해 주로 말씀하고 계시한다는 것을 충분히 아시겠지요. 그런데, 성경은 이런 계시적인 생각을 달리 '지혜'라고 부릅니다. 너무나 많은 이들이 지혜를 혼적인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지혜는 똑똑하거나 명철한 것 이상입니다. 그것은 영적인 것으로 일종의 계시입니다.
누가복음 21:14-15 "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궁리하지 않도록 명심하라.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이 '지혜'가 다른 곳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0:19-20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누가복음 12:11-12 "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이처럼 지혜가 곧 성령님이 말씀하시고, 할 말을 주시고, 우리를 가르치시는 방식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계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지혜'를 통해성 즉 '생각'을 통해서 계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제가 알기로는, 이런 지혜가 바로 "지혜의 말씀"의 은사입니다(고전12:8). 이 은사는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스데반에게도 나타났지만 특히 솔로몬과 예수님 그리고 사도 바울에게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솔로몬이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전무후무한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는 지혜로 잠언, 전도서, 아가 세 권의 성경을 썼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지혜가 특별계시의 통로가 된 것을 봅니다.
마태복음 13:54 "고향으로 돌아가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그들이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의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
이것은 예수님의 설교에 나타난 지혜인데, 예수님은 나의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내 아버지의 말씀이라고 하셨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들은 후에 복음서에 기록이 되어 성경이 되었습니다.
베드로후서 3:15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사도 바울은 책을 쓴 적이 없고 편지만 썼습니다. 여러분은 편지를 쓸 때 어떻게 씁니까? 지혜로 쓰지요! 바울도 편지를 쓸 때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썼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지혜가 특별계시의 통로가 되었음을 다시 한 번 봅니다. 그러므로 지혜는 계시의 대표적인 통로입니다.
지혜는 지금도 활짝 열려 있는 계시의 통로입니다. 특별계시는 끝났고 더 이상 특별계시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계시를 받을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을 기록하는 계시는 받을 수 없지만 해석하는 계시는 받을 수 있습니다. 그 계시들은 주로 '지혜'와 '생각'이라는 방식으로 임합니다. 제가 계시록을 해석하면서 받은 계시들은 모두 이런 계시였습니다.
이것이 생소할지 몰라도, '성경을 계시로 깨닫는다'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라 성경적인 경험입니다.
시편 119:18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이 구절에 나오는 "열어서"의 히브리어는 '갈라'입니다. "덮개를 벗기다", "폭로하다"라는 뜻입니다. 사무엘상 3장 7절에 보면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라는 말씀이 있는데, "나타나지"의 원어도 '갈라'입니다. 그런데 '나타내다'는 신약성경에서 대부분 '계시'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갈라'도 계시를 뜻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의 의미는 계시를 통해 성경의 놀라운 것들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바울은 성령을 "지혜와 계시의 영"이라고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존 웨슬리가 말한 대로 성령은 지혜와 계시를 주시는 영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바울은 이런 성령을 자신뿐 아니라 "너희에게 주셨다"고 했습니다. "너희"는 성도들을 뜻합니다. 고린도전서 14장에 보면 실제로 성도들이 계시를 받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4:26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고린도전서 14:30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이처럼 바울과 다른 목회자뿐 아니라 성도들도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목사가 성령의 계시로 성경을 깨닫게 되었다는데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런 경험은 정상적인 것이고, 오히려 그런 경험이 없는 것이 비정상입니다. 그런 경험은 이상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람직한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제가 계시로 말씀을 깨닫게 되었다고 할 때, 그 의미는 계시로 성경의 의미를 확정지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저는 언제든 계시적인 생각이 오면, 그냥 받아들이지 않고 관련 성구들을 찾아봅니다. 가룟 유다에게 그랬듯이 마귀가 계시처럼 느껴지는 생각을 슬그머니 집어넣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찾아 읽으면서 그 계시적인 생각이 성경적인 것인지 아닌지 충분히 검토합니다. 성경적이면 받아들이고 성경적이지 않으면 과감하게 버립니다. 릭 조이너가 자주 말한 대로, 교리는 계시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경에 근거해서 결정해야 합니다. 저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래서 절대 계시에 근거해서 교리를 세우지 않습니다. 오직 성경에 근거해서 교리를 세웁니다. 이것이 제가 성경을 연구하고 깨닫는 방법입니다. 곧 제가 성령께서 계시로 알려주셨다고 말할 때 그 말의 진짜 의미입니다.
오늘날 계시록을 해석할 때, 대부분 성경을 집중적으로 묵상을 하거나 유명 학자들과 설교자들의 계시록 책을 수십 권 사서 일일이 대조해보고 '어떤 것이 맞나?' 선택합니다. 그렇게 해서 쓰여진 것이 대부분의 주석들이고 강해집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저도 몇 번 시도해보았는데, 그런 방법으로는 정확한 답을 얻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계시록 해석을 시작한 날부터 제게는 이상한 일들이 반복되었습니다. 잠 자려고 누웠는데, 혹은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하는데, 혹은 차를 타고 이동하는데, 혹은 1부 설교하고 소파에 쉬려고 누웠는데 계시록의 특정 구절이 또렷하게 떠올랐습니다. '어! 혹시 이거 아니야?'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확인하기 위해 그 구절을 찾아서 읽으면 진짜로 그런 의미였고, 술술 해석이 되었습니다. 평소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난해한 구절들이 너무 쉽게 깨달아졌습니다. 그래서 제가 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계시적인 경험이 시작될 때마다, 매번 그것이 옳은가 알아보기 위해 관련 구절을 찾아 문맥을 살펴보았습니다. 또, 관계된 다른 구절들을 찾아봄으로 중복확인을 했습니다. 그 후 '혹시 허점이 있지 않을까?' 하여 세계적인 학자들이 쓴 계시록의 대표적인 책들을 수십 권 사서 관련 부분들을 일일이 찾아보았습니다. 그렇게 확인해가며 연구했습니다. 제가 그런 과정을 통해 깨달은 것들은 놀랍게도 성경적이었고, 먼저 깨달은 것과 후에 깨달은 것이 서로 충돌하거나 모순이 되지 않았습니다. 완전히 조화되고 하나가 되었습니다. 뼈가 들어맞는 것처럼 착착 들어맞았고, 마치 에스겔의 환상에서 모든 뼈가 제자리에 붙었을 때 사람의 형태가 나타난 것처럼 요한계시록의 전체적인 구조가 환히 보였습니다.
어떤 분들은 "놀랍네요. 그래도 목사님께서 계시로 알게 된 요한계시록의 구조가 바른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라고 묻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감사하게도 확인하실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3:15-16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도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베드로는 바울서신 중에 더러 알기 어려운 내용들이 있는데, 그것을 억지로 풀다가 멸망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바울서신 중 "더러"에 해당되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종말론입니다.
베드로후서 3:8-16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라.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느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는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진짜로 "더러"에 해당되는 것이 종말론이지요! 성경은 모두 억지로 풀면 안 되지만, 특히 종말론은 절대 억지로 풀면 안 됩니다. 왜나하면 여호와의 증인이나 신천지처럼 이단 사설에 빠져서 멸망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는 "억지로"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올바른 해석과 잘못된 해석을 나누는 시금석이기 때문입니다. 잘못 해석을 하는 사람은 억지를 부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공명이 안 됩니다. '어!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여러 번 경험했는데, 잘못된 해석을 들으면 억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반면에 올바른 해석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이해가 되고, 공명이 됩니다. 마음에 걸리거나 부대끼는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시금석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계시록 설교를 들을 때 '해석이 억지스러운가? 아니면 공명이 되고 자연스러운가?'를 통해서 분별하시면 됩니다.
저는 계시록을 해석하면서, 다시 한 번 진짜 해석과 가짜 해석의 차이가 무엇인지 절감했습니다. 가짜 해석은 발상이 기발하고 설명이 그럴듯해도, 그 해석의 세부적인 부분 중 한두 가지가 성경 본문과 불일치합니다. 그것이 억지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진짜 해석은 단지 그럴듯한 것이 아니라 성경의 세부적인 모든 묘사들과 완벽하게 들어맞습니다. 마치 톱니바퀴가 맞듯이 맞아떨어집니다. 무릎을 치며 받아들이게 됩니다. 우리는 성경을 해석할 때 이런 해석에 도달할 때까지 만족하지 말아야 합니다. 계속 씨름해야 합니다. 그래야 바른 해석이 나옵니다.
끝으로, 이 얘기를 해드리고 싶습니다. 성령신학원 원장 이동기 목사님은 계시록의 권위자로 알려져 있는 유명한 교수님 밑에서 요한계시록 박사 과정을 한 분입니다. 그런데 솔직하게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전에 요한계시록에 대해 공부하면서도 '주님! 이것이 맞습니까?'라고 물어왔습니다. 그리고 결국 정확한 것을 몰라서 선반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최고의 권위자로 알려진 교수님의 지도하에 요한계시록 박사 과정까지 했는데 왜 이런 것일까요? 그것은 목사님의 성품이 올곧고, 정확한 해석만이 듣는 사람들에게 공명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바른 해석은 설명이 논리적이고 타당할 뿐 아니라, 성경과 비교해보면 '실제로 그러하기' 때문에 진리라는 확신이 생깁니다. 따라서 최고의 학자들에게서 배웠는데도 공명이 안 되어 선반 위에 올려놓게 되었다는 말 자체가 그 해석들이 바르지 않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런 이동기 목사님이 주님이 저에게 가르쳐주신 요한계시록 구조에 대한 여러 가지 계시를 듣고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처음에는 자신이 배운 것과 너무 다르고 처음 듣는 것이라서 어리둥절해 했습니다. 잘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설명을 다 듣고 난 후에는 흥분하기 시작했습니다. 감동을 받았고 가슴이 뛴다고 흥분하며 고백했습니다. 저는 여러분도 제가 받은 계시록의 구조를 보여주는 계시들을 들을 때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새롭지만 동시에 확실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대하는 마음으로 매시간 경청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