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준경전도사님 순교기
제언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서울신대 74, 65학번 동기들이 순교지 탐방 차 목포 신안비치 호텔에서 6월 22일 하루 밤 쉬면서 문준경전도사 순교영성에 대해서 강의를 부탁하여 작성한 강의 내용이다.
강의를 하려고 자료를 찾다 보니 구전으로 들었던 것과 상의한 점이 많아 고전을 찾아 다시 정리하여 보았다. 기념사업이 진행될 시점에서 역사 바로잡기 표준화 작업이 필요함을 실감하고 우선 문전도사님과 관련된 교역자, 장석초, 김응조, 이성봉목사님의 사적을 살펴보았다. 완벽할 수는 없으나 나름 년대에 맞추어 찾아보았다. 좋은 자료를 제보해 주시면 더 명확한 사료가 되리라 본다. / 목사 : 박문석(서울신학대학원 신학 박사)
필자와의 관계
신안군은 1969년 무안군에서 분할하여 2개읍 12개면이며 1,004개 섬으로만 이루어진 군이다.(1969. 1. 1. 법률 제2059호에 의하여 무안군에서 신안군으로 분군) 당시에 문준경전도사의 순교지는 무안군 지도면 증동리였다.(신안군 14개의 읍·면 단위 큰 섬 중 지도읍, 압해읍, 증도면은 육지와 다리로 연결됨)
필자는 문전도사의 순교 기념교회로 1951년 세워진 병풍리교회 출신이며 주일학교 다닐 때 전도사 초상화가 사택에 걸려 있어서 늘 보았으며 직접 뵙지는 못했으나 그분에 대한 이야기를 전설처럼 많이 들으며 성장했다.
문준경전도사는 1891년 무안군 암태면 수곡리에서 출생하시어 1950년 10월 5일 새벽 2시~3시경에 60세의 일기로 공산주의자들의 손에 순교하신 분이셨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가 죄명(INRI)이 듯이 문전도사님도 ‘새끼를 많이 깐 씨암탉’(섬마을의 순교자 p12)이라는 죄명으로 순교하셨다.
예수 영접 전 삶
문준경은 1891년 2월 2일 전남 무안군(현, 신안군) 암태면 수곡리 문재경씨의 3남 4녀 중 셋째 딸로 출생하여(순교자 문준경 p58) 유복하게 성장하여 1908년 3월 17세에 지도면 등선리 정운삼씨 삼남 정근택씨와 결혼하였다.(순교자문준경 p63)
20년간 시부모 배려로 국문도 배우게 되고 시부모님을 잘 모신다 하여 정씨가문의 효부로 인정받으시며 사시다가(순교자 문준경 p70) 시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고 시어머니마저 큰 시숙이 모셔 가셨다. 홀로 남은 그는 시댁을 떠나 큰 오라버니가 있는 목포로 방 한 칸 얻어 이사하여 삯바느질을 시작하게 되었다.(순교자 문준경 p80-81)
성결의 사람 장석초전도사와 만남(1925년 5월~1929년 7월 15일)
그러던 어느 날 목포교회(현, 북교동교회) 장석초전도사가 시무하는 목포교회 한 성도의 설득력 있는 전도로 1927년 3월 5일에 입교하게 되었고 그해 11월에 구원의 확신을 받고 1928년 6월에 세례를 받았다. 세례받은 1년 후 집사 직분도 받았다.(섬마을의 순교자 p51-52, 순교자 문준경 p22-23)
어둡고 절망스러움에 지쳐 있었던 상황에서 주님을 영접한 그에게 주님의 그 크신 사랑의 체험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요 소망이요 감사였다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지만, 내가 받은 예수의 이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해야겠다”고 결심을 하고 1928년 6월부터 목포에서 가까운 압해도 지역에 다니며 축호(집집마다) 전도와 목포교회(현, 북교동교회) 일부 지역을 맡아 전도에 힘썼다. 그는 특히 친척들의 영혼 구령에도 관심을 두고 전도에 나섰던 것으로 본다.(섬마을의 순교자 p51)
그 후에도 친정을 위해 많은 기도가 있었으리라 본다. 그 시점에 북교동 교회에서 1928년 11월 강사 장원초 대전교회 담임(이명직 성결교회 약사 p171) 전도사의 부흥성회가 있었다. 이때 보고에 중생인 3인 성결인 1인 결신자 32인으로 숫자를 헤아려 보고되어 있다.(활천1929, 1호 p63)
당시 장전도사가 1928년 초에 압해도 대천리 최씨와 초가를 매입하고 기도처소로 시작하여 사람이 많아지자 아담한 예배당을 장전도사 사비로 건축하고(성결교약사 1929년간 p123) 1929년 7월 15일 자로 장전도사는 압해도 교회로 파송 받아간다.(성결교회 약사 p138)
능력의 종 신학자 김응조목사를 만나다
그 후 1929년 7월 15일 김응조목사 부임으로 교회와 문집사에게도 활력이 생기는 일이 있었다. 김응조목사는 중병이 들어 수양 차 목포교회로 부임 했으나 1930년 9월 30일 유달산 바위에 앉아 기도 중 바위가 갈라져 생수가 솟는 체험을 한 후 모든 병에서 고침을 받았다. 그 은혜를 체험한 후 100일 연속 자체 내 성회로 신유의 역사가 일어나 새 신자가 120명으로 급증하여 호남 지방에 소문났다.
이런 영향을 받은 문준경집사는 온전한 헌신을 위해 성서학원 입학할 것을 결심하고 2년간 기도로 응답을 받았고 또 한편 문집사의 친정 마을에도 김흥기란 성도의 열성적인 전도에 의해 복음이 들어가 1931년 5월 도창리 교회가 세워지는 기적 같은 역사도 일어났다. 당시 상황은 결혼한 여자가 신학을 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은 때 이였으나 사명감을 느끼고 기도 중에 있었다.
한국의 대 부흥사 이성봉목사를 만나다
1931년 3월 25일 이성봉목사가 새로 부임하여 오셨다. 신학을 하고자 기도하고 있던 차에 이목사의 추천을 받아 성서학원에 1931년 5월에 청강생으로 입학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청강생으로 만족하지 않고 원장을 찾아가 정식 수양 생이 되게 해 달라고 매달려 결국은 이성봉목사가 신원 보증을 서 주셨다. 학교를 찾아가 “원장님, 제가 책임지겠으니 우리 문집사를 원입생으로 받아 주세요.”라면서 “문집사 남편은 죽어도 문집사를 찾지 않을 그런 사람입니다”라고 말했다. “기념관 모금 집에는 남편이 있으나 없는 것과 다름이 없고 꼭 전도사가 될 사람입니다.”라고 보증을 서줘서 정식 원입생으로 받아 졌다.
당시 3년제였으나 문전도사의 경우 학원에서 5년 교육을 받으셨고, 1년에 학원에서 6개월 동안 공부시키고 6개월 전도하거나 개척교회를 하게 하는 때이기에 문준경은 방학 때 내려와 실습으로 임자도에 와서 전도하였고 1932년 7월 임자진리 교회를(성서학원 청강생 2년째) 개척하여 1934년 6월 12일 8 간의 초가 건물을 지어 이성봉목사 주례로 헌당하게 되었다.
문전도사님은 1932년 9월 2학기 초에 수양 생으로 등록하게 되었다. 임자교회는 이성봉목사가 치리목사로 파송되어 있다. 1933년 9월에 증동리교회를 개척하여 1935년 2월 설립하였고(성서학원 2년째) 1955년 2월 20주년 행사는 이성봉목사가 집례를 맡았다. 문전도사가 졸업 후에 더욱 많은 마을과 친족들을 찾아가 전도하고 각 섬을 대상으로 수시로 방문하셨던 것으로 보인다. 증동리교회를 돌보시면서 1936년에는 대초리교회를 개척 1939년 설립하였으며 증동리 바로 옆 마을 방축리에도 기도처로 모였다.
졸업장의 내용과 같이 여학생은 1936년 6월 26일에 졸업 일이 정하여져 있다. 졸업 후 시간의 여유가 생기고 지역마다 성도가 생겨나고 교회도 안정되고 협조하는 일군들이 있어 더욱 활발하게 전도의 지역이 넓혀져 우전리, 사옥도 등 발길이 닿는 곳이면 각 처소에 예배소를 정하고 갯벌 길로 여러 섬과 이웃 마을 다니면서 1년에 아홉 켤레 고무신이 닳도록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셨다. 문전도사는 “아골 골짝 빈들에도 어디든지 가오리다”라는 사명감을 가지신 분이셨다. 순교하신 후 그를 기념하기 위해 기념교회로 병풍리 교회를 세우시게 된다.
죽음의 기로에도 혼신을 다하셨던 분
증언자들에 의하면 전염병 장티푸스가 만연하여 사람들이 죽어 가는데 가족들조차 두려워서 환자를 내다 버리는 때에도 문전도사님은 ‘난 어차피 홀몸이니 죽어도 괜찮다’며 환자를 돌보고 죽은 사람의 장례를 치러주었다”(섬마을의 순교자 p125)고 한다.
예수님의 servant leadership을 본받은 자 이였고 1950년 10월 5일까지 일생이 섬김의 목회자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헌신하신 분이시다.
일제 강점기에 신사 참배를 불응하므로 많은 고난 받으셨다. 우리 교단은 1943년 12월 일제 탄압으로 강제해산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더불어 교회 문을 열게 되었으나 문전도사님은 증동리교회 건물을 경방단(일제강점기 일제의 후방 치안담당기관)에 강매(1,600원) 당했는데 해방 후에도 마을 사람들이 돌려주지 않고 오히려 핍박을 일삼자 김창근목사는 당시 강매 시가보다 100배를 더 주겠다는 데도 더욱 박해함으로 마을을 상대로 소송을 재기하여 승소하는 담대함도 있었다. 그리하여 교회를 찾게 되었다(순교자 문준경 p131-137)
※ 참고 : 일제 강점기 말기에, 치안을 강화하기 위하여 방호단(防護團)겮拈姸?消防組)겮峙域?水防團) 등을 통합하여 경방단을 조직하였다.
당시 섬마을은 무속 신앙이 강하게 뿌리내린 곳이요 어려운 환경에서 문전도사님의 전도 방법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사랑의 나눔, 둘째는 아름다운 찬양이었다.
문전도사님은 해질녘 동네 어귀 언덕에 올라서서 구성진 목소리로 찬양을 잘 부르셨다(순교자 문준경 p31) 라디오도 없던 그 시절, 사람들이 그의 노래를 듣기 위해 모여들면. ‘천당 가’ ‘캄캄한 죄악 길에 목자 없는 양같이’ ‘예수 사랑하심은’ 같은 찬송을 들려준 뒤 노랫말을 풀어 설명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순교지 성도들의 마음속에 사랑의 어머니로
1964년 10월 6일에 증동리 교인들이 세운 비문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문전도사님을 빈 한자의 위로 되고 병든 자의 의사, 아해(아이) 낳은 집에 산파, 문명퇴치 미신타파의 선봉자, 압해, 지도, 임자, 자은, 암태 안좌 등지에 복음 전도, 진리, 증동리, 대초리교회 설립, 모든 것을 섬사람을 위하였고, 자기를 위하여는 아무것도 취한 것이 없었다.
그대의 이름에 하나님의 은총이 영원히 깃들기를! 우리들의 어머니 문준경전도사를 위하여 감사에 충만한 지도 증동리교회라 적혀 있다.(천국의 섬 p70) 우리들의 어머니” 그는 마을과 마을을 다니시며 잔칫집에서 음식을 얻어 굶주린 자들에게 나눠주고,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주고, 병든 사람을 만나면 가슴 아파하며 기도해 주었다. 학교도 없는 섬마을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땅바닥에 나무로 글씨를 써가면서 한글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그분의 영향을 받은 일부 인사들
지금 증도면의 2,000여 명 주민의 90%가 예수를 믿게 된 것도 그의 영향이요, 증동리교회 출신 기성 총회장 이만신(전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 기성 교단의 위상을 세운 이봉성 총무, 이만성 총회장, 김정 지역총회장, 우전리교회 지역총회장 안승갑, 장로교단 김준곤 CCC총재, 한신대 정태기교수와 법관, 기업가 그리고 100여 명에 가까운 목회자가 배출된 것도 그분의 영향이다. 필자와 전주 박훈용목사 성결신문 기자 조재석 편집국장도 순교 기념교회 출신이다. 한 교회 출신이 호남 지역총회장을 8회와 9회에 이어서 나란히 하게 되는 영광도 있었다.
또 필자는 42년간 신안 섬에서만 살면서 주님의 은혜로 우리 교단의 제28대 부흥사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 모두가 문전도사님의 순교 피 값의 후광임을, 그분의 사랑에 힘입었음을 감사하고 있다.
양을 위해 목숨 바친 참 목자
6·25 전쟁으로 쳐들어온 인민군 공산주의자들이 문전도사님을 체포하여 즉결처분하지 않고 목포 보안서로 이송 수감 시켰다. 그러나 그때 이미 목포에는 국군의 상륙으로 인하여 인민군이 철수하는 상태였다. 문전도사님은 그곳에서 풀려나 얼마든지 피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발악하는 인민군들이 교인들을 해할 것을 생각하여 나는 “우리 성도들을 지키러 가야 한다”며 나섰다. 이때 이목사님께서 잠시 위험한 곳을 피할 것을 권유하시면서 이사야 26:20 내 백성아, 네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아라.
하나님의 진노가 풀릴 때까지 잠시 숨어 있어라.(섬마을의 순교자 p155) 말씀을 주셨다고 문준경전도사님이 증동리에 오셔서 성도들에게 전해주신 말씀이시다 이 말씀은 이목사님께서 인민군에 잡혀가 구타 당하신 후 은신해 있을 때 문전도사님과 이판일장로님이 기도 받으시려 찾아오셨을 때 기도해 주셨던 것이다(6·25시 상봉 자서전 1993년간 p109) 그러나 그는 수양딸 백정희 양과 증도리 신자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당시 풍선(돛단배)을 타시고 목양지의 죽음의 길을 택하신 것이다.
그때 그곳에는 미처 철수를 못 하고 있는 인민군들이 혈안이 되어 있는 때였다. 며칠만 뒤로 들어가셨으면 죽음을 피할 수 있었음에도 성도들을 살려야 한다는 사명감에 들어가셔서 1950년 10월 5일 새벽 2시경 체포되어 인민군들에게 양딸 백정희 양(후에 전도사)과 성도들은 살려 달라 부탁하면서 새끼줄에 묶여 끌려가서 발로 차이고 창에 찔리고 총대로 후려 치임을 받으시다 증동리교회 앞 솔무등 터진목의 하얀 모래밭에서 “오!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 죄 많은 이 영혼을 받으소서.” (섬마을의 순교자 p13)라는 기도를 끝으로 총에 맞아 순교하셨다.(참고, 양도천씨도 아들임)
아버지의 뜻을 따라 골고다를 택하셨던 주님처럼 그 사랑을 이어받아 피할 수 있었던 길을 피하지 않으시고 성도를 아끼고 사랑하는 영적 어미의 마음으로 순교에 임하셨기에 문전도사님의 순교는 더욱 값지고 숭고한 길이었다. 그 깊은 마음을 알고 있기에 아직까지 그 당시를 함께 한 증동리교회 어르신들은 지금도 문전도사님을 '존경하는 선생님’ '그리움의 어머님'으로 그녀의 모습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고 있다.
열매 보고 나무를 안다더니
인민군들이 붙여준 씨암탉의 병아리 격인 임자교회의 기둥이셨던 1932년에 입교한,(생명의 불꽂 p115) 이 판일장로님의 일가족 13인과 교인 35인 합 48인도 같은 날 새벽에 어미 닭 문준경전도사님과 같은 새벽에 순교의 길을 택하였다. 장로님은 묶여 가시면서도 노모를 등에 업고 5살의 어린아이와 끌려가서 창에 찔리고 구덩이를 파고 생매장을 당하면서도 당당하게 가족들의 영혼을 주님께 부탁하셨다. 이때 폭도가 '죽을 놈이 웬 기도냐?' 비난을 할 때 장로님은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 기도하면서 주님이 가신 그 길, 영적 어머니를 뒤따라 고결한 순교의 길을 가셨다 (생명의 불꽂 p140-141)
현재 이 장한 순교자 48인의 기념비가 임자도 진리교회 앞마당에 우뚝 세워져 있다. 이 순결하고 감동적인 3대에 걸친 순교의 현장도 새로운 역사의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 순교자들 역시 훌륭한 지도자 아래서 성장한 훌륭한 그의 열매들이었다.
고 문준경전도사 신앙의 기틀을 세운 장석초전도사
소학교 근무 2년만 더하면 당신은 15년 근무 은급을 평생 받을 터인데 그것이 아쉽지 않은가? 그래서 합격증을 보류 중이라 했다. 그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저는 이미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세상 모든 것을 분토와 같이 버렸습니다. 라고 말하니 쾌히 합격시켜 주었다.(성결교회 인물전 2집 p34)
그는 집으로 돌아와 학교에 사표를 낸 후 그 길로 올라가 1922년 9월 성서학원에 47세에 입학하였다(활천 창간호 1922. 12 소식: 필기운, 장석초, 오근목, 형제와 주은에, 김덕이 자매는 성서 수양생으로 입학 되었더라) 늦은 나이에 입학한 장석초전도사는 3년 동안 철저한 교육을 마치고 1925년 초순 나이 50세에 성서학원을 졸업하고 목포교회 설립을 위해 파송되었다(성결 약사 p167)
직장과 전토를 버리다
그 후 장석초는 졸업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와 부모로부터 받은 7000석 지기 재산을 정리하여 성서의 말씀대로 가난한 자와 고아와 과부들에게 나눠주고, 오백만 원을 가지고(성결교회 인물전 제2집. p.35) 성결교회가 없었던 목포 지역에 파송을 받아 1925년 목포교회를 개척하게 되었다(현재 북교동교회). 목포에 성결교회가 52번째로 설립되고 호남에서는 2번째 교회로 세워지게 된다.(성결교회 약사 1927년간 p123 장석초전도사 관련기사 참조)
장석초전도사님은 1929년까지 목포교회에서 시무하면서 1928년부터 대천교회(옛 대천리, 제일교회)를 지교회로 세워 돌보던 중 치리 상 불편함으로 1929년에 대천교회로 장석초전도사를 파송하여 치리하도록 하였다 (이명직 성결교 약사 p138) 같은 무렵에 동서리 교회(현 중앙교회)도 개척하게 되었다. 특기할 일은 목포교회, 대천교회, 중앙교회 모두 재산 오백만 원을 가지고 교회 대지를 구입해서 교회당과 사택을 건축하여 예배드렸다는 것이다. 성결교단에 자랑스러운 헌신의 모범이 되신 분이셨다 (성결교회 인물전 2집 p41)
장전도사와 문집사의 만남
장전도사님의 이러한 헌신의 모습과 구령의 열정을 보면서 우리 교단의 자랑이신 순교자 (故)문준경전도사님은 1927년 3월 5일 등록일부터(재임 기간 1925년 5월~1929년 7월까지) 2년 4개월 간 그분의 지도로 신앙의 기초를 다졌고 세례와 집사 직분도 그분에게서 받았고 압해도와 목포 일원에 축호전도와 헌신의 자세도 배워가며 성장하셨다(섬마을의 순교자 p52 순교자 문준경 p22-23) 그리고 모든 것 다 버리고 온전히 헌신하시는 청빙한 모습을 보고 그 역시 신앙이 아름답게 성장한 것이다. 이런 장전도사님을 신앙의 멘토(Mentor)로 모시고 배웠기에 문전도사님의 목양 일념도 일생을 오직 희생적 삶이었다.(천국의 섬 p70, 순교지 비문 참조)
초지일관 성결인의 모습
그는 섬 교회에 오시여서 초인적인 일을 하시다가 1933년에는 미력리 교회로 부임하고, 이후 함열교회에서 시무하였다. 1943년 성결교회 해산의 해에는 67세에 신사참배 거부로 구속 수감되었다 참배한다는 시말서만 쓰면 된다는 회유에도 불구하고 지조를 지켰고, 오히려 독방 신세와 모진 고난과 폭언을 견디어 내었다. 이러한 모습을 본 형사들이 오히려 장목사를 걱정할 만큼 굴욕을 당하면서도 굴하지 않은 참된 성결인의 목사였다.(성결교인물전 2집 p39-40)
결국 수족을 쓸 수 없이 허약한 상태에 출옥하여 1945년 해방과 더불어 교회를 재건하고 전쟁 중인 1950년 75세의 나이에 목회에서 은퇴하셨다. 성역에 헌신 후 31년 동안 순교의 정신으로 열정을 다 바쳐 오직 복음만을 위해 헌신한 장하고 아름다운 목회자의 일생이었다. 목사님은 1959년 3월 19일 84세를 일기로 소천하셨다.(북교동 교회 80년사 p82)
문집사에게 신유와 재림을 체험케 한 영암①
부친 따라 시작된 신앙
영암 김응조목사는 1896년 12월 3일에 경북 영덕군 지품면 낙평리 383번지에서 아버지 김원섭씨와 어머니 함영국씨 사이에 차남으로 출생했다.(은총 90년 약력 편에 기록)* [명칭] 낙평(洛坪)리 ........ 중략..... 낙평리 동명의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영덕군 북면(北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신리동... 서당선생 아들 최봉희씨가 기독교를 믿으면 서양 사람의 힘을 빌려서 일본을 몰아 낼 수 있다 하여 동리가 합심하여 교회를 나가게 되었는데 이때가 1909년 3월이었다. 이때 김응조는 13세 되던 해 5인의 가족이 아버지를 따라 한날한시에 마을에 있는 장로교회에 나가게 되었다(은총 90년 p19)
그는 7세 무렵에 향리의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13세 되던 해, 선생님에게 “신앙이 무엇이냐” 질문을 했더니 선생의 대답은 지붕에서 아버지를 믿고 뛰어내리는 아들의 이야기를 듣고 믿음은 자식이 아버지를 믿는 것과 같이 빈틈없이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알게 되었다.(김응조 나는 기도해서 얻었다. p6-7 잘못 계산 됨 13세임)
세례시 중생의 체험
14세가 되기까지 7년간 향리에서 한학을 공부한 후 선친의 남다른 교육열에 힘입어 신학문을 공부하게 된다.(김응조 나는 기도해서 얻었다 p11) 영암의 신학문 수업은 그에게 신앙의 성숙과 전환점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그는 일찍이 중생의 은혜를 체험하고 구원의 확신을 가졌다. 1911년 15세 되던 해 4월 15일 세례를 받았다. 그에게 세례를 베푼 사람은 "피득 목사"라고 영암이 기억하는 유태계 선교사였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영암은 수세(受洗)의 순간에 중생(重生)의 체험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은총 90년 김응조 자서전 p23)
모세 같은 지도자 되길 소원
그때 그의 신앙은 지극히 단순하여 어느 날 주일학교에서 모세의 이야기를 듣고는 "나는 공부해서 모세가 되겠다."고 결심하였다.(은총 90년 p22) 어린 시절의 그 결심은 영암에게 일평생 영향을 미쳐 생전에 기회 있을 때마다 "나는 새끼 모세"라는 표현을 즐길 정도였다.(김응조 나는 기도해서 얻었다 p12) 2년간의 경산(慶山)에 있는 계동학교(啓東學校) 유학시절은 그에게 있어 처음으로 기도에 눈 뜬 시대이기도 하다.(은총 90년 p21) 계동학교에서 공부하고 영덕 영해읍 보통학교 4학년 졸업반에 편입하여 1년간 일본어를 집중적으로 공부한다.(은총 90년 p21) 그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1913년, 영암의 나이 17세 되던 해 대구 계성고등학교에 입학하여 학비를 조달하기 위하여 땅파기, 지게꾼일, 농사일기, 벽돌 운반하기, 다른 잡노동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만 했다. 그러면서도 학업 성적이 평균 90점에 미치지 못하면 밥을 먹지 않겠다는 의지로 열심히 공부하여 모범생이 되었다.(은총 90년 p24)
문집사에게 신유와 재림을 체험케 한 영암②
그 후 그는 법률가도 되고 싶었으나 뜻대로 안 되었고 교사 양성원을 마치고 교사도 하였다.(은총 90년 p26) 영암은 이러한 결과들에 대해 그 원동력은 하나님의 도와주심이었고 부모의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자신의 의지와 체질적으로 타고난 건강에 있었다고 회고한다.(은총 90년 p25)
신학 시절 재림 환상과 구국 열정
1916년 4월 15일, 성서학원(당시 무교동) 원장 토마스 선교사를 찾아가 영암은 주의 종으로 공부하기 위한 결단을 하게 되었다. 즉시 성서학원의 입학을 희망했으나 입학 나이가 한 살 미달이었다.
당시 서울 신학교는 학칙상 만 21세 이상 만 받아주었다. 안타까운 일이었으나 하나님이 주시는 인내와 연단의 기간으로 알고 고향에 내려가 1년을 기도로 준비하고(은총 90년 p28) 1917년 21세에 성서학원에 입학한 후 일본 동양선교회 대표 D. 카우만의 초청으로 영암은 7인의 신학생들과 함께 1년간 일본전도 여행을 떠나게 되었는데, 영암에게 있어 일본 전도여행이 무엇보다 의미 있었던 것은 그가 이방지역에서 재림의 환상과 성결의 체험을 했다는 사실이다(은총 90년 p33)
그는 훗날 서울신학 교수로 재직할 때 재림론(김응조, “말세와 예수의 재림” 1954년 성결교 출판부 간)을 써서 후학들에 많은 영향을 끼쳤고 54년~55년에 2년간 매월 활천에 연재하셨다.(활천 20권 1954년-21권 1955년 매월 재림론은 20여 회에 걸쳐 연제 되었고 많은 설교도 수록되어있다.) 영암은 자신의 재림에 대한 환상을 1917년 9월 10일 체험한 사실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나는 기도해서 얻었다. p20-21) 1년간의 일본 전도를 마치고 1918년 4월 귀국하여 공부하던 중 1919년 3월 기미 독립운동에 영암은 학생대표로 참가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영암은 4년 구형에 2년 실형 언도(선고)를 받고,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은총 90년 p40) 영암은 3년 동안의 신학 과정 가운데 1년을 일본전도로, 1년 6개월을 독립을 외치다 치른 옥고로 보내었으니 강의실에서 공부한 기간은 불과 1년에 지나지 않는 셈이다.
1920년 10월 10일(은총 90년 p43) 25세에 전도자로 인생을 새로 출발한 영암은 존 웨슬리가 "세계는 나의 교구다"라고 외쳤듯이 "조선은 나의 교구다"(나는 기도해서 얻었다 p39)라는 뜻을 세우고 붉은 글자를 한국 지도위에 그려놓고 민족 복음화를 위해 헌신하기로 서원하였다는 말을 그분에게 필자는 친히 들었다 그 후 철원교회, 경기도 광주교회, 안성교회, 아현교회에서 시무 중 1926년 3월(성결 약사 p194) 30세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문집사에게 신유와 재림을 체험케 한 영암
성령의 능력을 받은 신학자
안수와 함께 그는 전국 5개 지방 가운데 제일 큰 지역인 북부지방 감리목사로 파송 받아 5년 동안 한반도 북부지방 교회를 순회 감독하며 사역하였다. 당시 감리목사로 재임 중 몸이 허약하여 휴양 중이었는데 휴양하면서 목회할 수 있는 따뜻한 남쪽 목포교회로 지원하여 총회본부로부터 임명받아 1929년 7월 14일 목포교회(현, 북교동교회)로 부임하게 된다.
기력이 소진되어 정상운교수 인용한 부분을 보면 “영암은 나에게 무서운 것이 없었다. 폐병자와 동거하고 열병자와도 한방에 뒹굴고 사귀(귀신)병자와도 한방에 철야기도 해보고 몇백 리 길도 도보로 가기도 했으며 교회 사건이 있을 때에는 진두에 서서 지휘도 하였고 순회하는 교회마다 집회로서 그들의 영적 부흥을 도모해 주기도 하고… 이렇게 행동하는 동안 유한한 나의 육체는 외(外) 강(强) 내(內) 허(虛)의 위험한 지경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되었다.(정상운 성결교 인물전 제3집 p39) 당시 그는 신경쇠약, 소화불량, 폐렴 피부병 신경통 치질 등이 들어내 몸을 집중 사격한다(나는 기도해서 얻었다 p68)고 했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드리기를 은혜를 주시든지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주시든지 양단을 택일해 달라 기도를 했는데 “때는 1930년 9월 30일이다. 내가 기도를 시작한 지 만 한 달만이다. 하나님은 내 기도를 들으셨다. 죽음을 주시지 않고 은혜를 주셨다. 나에게 이상을 보여 주셨다. 내가 앉아서 기도하던 반석이 갈라지면서 밑창에서 생수가 솟아오른다. 넘치는 생수에 내 몸이 동동 떠 있는 환상이 지나간 후 정신을 차리니 내 마음에 기쁨과 소망과 평화가 샘처럼 솟는다.
그리고 마음이 뜨거워지고 온몸에 불이 붙는다. 그때 내가 내 몸을 보니 유리알처럼 맑아지며 마음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몸은 날아갈듯 가벼워진다. 그때 내 입에서 나온 말은 “나는 살았다 받았다.” 그리고 나는 그 자리에서 분연히 일어나 “목마른 자들아 다 이리 오라 이곳에 좋은 샘 흐르도다 찬송가(합동 239장)를 몇십 번 불렀는지 알 수 없다.”(김응조 나는 기도해서 얻었다. p69) 이 체험으로 본인의 이야기로는 7가지 질병을 고침을 받았다 그리고 앉아서 기도하던 바위를 영암이라 부르고 자신의 호를 영암이라 사용하셨다.(김응조, 은총 90년 p50)
그는 그때 영적인 힘을 얻어 자신의 간증을 중심으로 목포교회에서 새벽기도회, 낮, 사경회 밤에는 부흥성회를 하는 중 새 신자가 120명이 증가하는 역사가 호남지방에 소문이 났다.(은총 90년 p50, 북교동 80년사 p95)
문준경집사와의 만남(1929. 7-1931. 3. 25)
문준경성도는 1928년 6월에 세례를 받고 그해 11월 28일-12월 2일 성회에 큰 은혜 받고(활천 1929, 1월호 p63) 1929초에 북교동교회 집사 임명을 받았다.(순교자 문준경 p34, 섬마을의 순교자 p52)
이때 더욱 사명감을 가지고 압해 지역을 비롯하여 전도에 열중하고 있는 시점에서 김응조목사의(1929년 7월) 부임 그다음 해인 1930년 9월 30일에 유달산 체험으로 교회는 또다시 뜨거운 부흥의 불길이 일어나 성도의 증가는 물론 신유의 놀라운 사건과 그 가운데 성령의 역사를 통해 성도들이 성령을 통한 여러 가지의 나타나는 현상들을 보면서 신앙의 활력이 붙어 전도 활동은 초신자들까지도 활발해 졌다.(은총 90년 p50)
이때 문집사는 북교동교회 집사로 축호전도와 심방은 물론이고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안면이 있는 분들이나 친족들을 찾아다니며 가정 방문과 복음 전도에 힘썼다. 그리고 이때 더욱 사명감도 생겨나고 부흥성회로 인해 받은 성령의 체험은 더욱 그를 사명자의 길을 가게 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증언자에 의하면 그 당시 친정 마을에 전도하려 가서 아버지의 반대에도 설득을 시키려다가 아버지로 하여금 구정(똥)물을 뒤집어씌우는 일도 있었다 한다.(섬마을의 순교자 p55) 유교적 사상과 서양에서 들어온 야소교로 여겨 극구 거부하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집까지 찾아가 기도하고 전도하는 행위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담력을 가졌던 것이다.
이렇게 때를 가리지 않고 전도의 열정을 다하는 그를 본 성도들이 그를 전도의 왕이라 이때 별명을 붙여 준 것으로 보인다.(순교자 문준경 p30)
영암은 자서전에 암태도창 마을에 김흥기라는 청년이 받은 불은 도서교회의 복음의 불씨가 되었다고 회고한다.(은총 90년 p52) 이 성도의 전도를 통해 결국 1931년 5월 암태도에 교회가 세워지게 된다.(활천 1931, 6호 p56) 이때 목포교회에는 성령의 불길이 훨훨 타 올랐다(나는 기도해서 얻었다. p71)
문집사는 장석초전도사의 진리 중심의 목회, 한학자가 지녀야 할 품위와 중생과 성결한 삶의 정신과 헌신적 자세의 모습을 그대로 답습했다. 이런 영향에 이어서 2대 담임 김응조목사를 만나 또 다른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이분은 신학자요 성령의 능력을 통한 신유의 역사와 큰 꿈의 사람이었고 구국의 열정과 재림에 대한 환상을 가지셨던 분이다. 김응조목사님의 재임(약 2년) 기간은 문집사님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의 역사를 현실 속에서 체험하는 현장의 학습이요 교육이었다.
1931년 9월 30일 유달산의 기적은 새 세계에 대한 눈이 열리는 계기가 된 것이다. 영암 김응조목사님을 통해 신유와 재림을 배우는 학습장이 된 것이다. 문집사님은 1대, 2대 교역자님들을 통해 성결교단의 사중 복음인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교육을 실제적인 체험을 통해서 신학적 사중 복음의 교리가 확증되는 학습장이 되었던 것이다.
문집사님에게는 두 분 목회자의 영향으로 그의 진로 계획서가 세워지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는 이제 주의 일을 위해 생명을 내놓을만한 가치를 발견한 것이다 그리하여 어렵고 힘든 길일지라도 복음의 사역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두 목회자를 통해 받은 체험적 신 의식적 사고는 훗날에 그가 순교의 자리에도 두려움 없는 확신으로 죽음 앞에서 스데반처럼 당당하게 설 수 있었던 기반이 된 것이다.
문준경집사가 사명자적 길을 위해 방향이 잡혀 있을 때 1931년 3월 건강을 되찾은 김응조목사는 호남지방회 감리사와 대전교회 담임목사로 임명을 받아 가시고(활천 1931, 5월호 p60, 3월 22일 자 임명기) 후임으로 이성봉목사가 파송된다.(활천 1931, 5월호 p61) 그 후 김응조목사는 대전에서 1936년 중부지방 감리목사로 파송 받아 활동하면서 1937년에는 서대문 독립문교회 당회장을 겸임한다.
문준경집사, 한국의 무디 이성봉목사 만나다①
소년시절
이성봉목사는 너무 잘 알려지신 분이시기에 간략하게 소개하고 결론을 맺을까 한다. 이목사는 1900년 7월 4일 평남 강동군 간리에서 아버지 이인실, 어머니 김진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당시 그의 부모는 신앙을 갖고 있지 않았으나 그가 6세가 되던 해에 어머니가 신앙생활을 시작함으로써 복음을 접하게 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어렸을 때 중화 읍에서 거주할 때 중화 경의학교를 다니면서 신학문을 접하게 되고 그 후 어머니는 신천의 경신 소학교 교원으로 청빙 받아 오므로 경신 학교를 14세에 졸업하였다(자서전, “나의 소년시대” p23)
신앙의 방황기
가정 형편으로 인해 소학교만을 마치고 중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던 이성봉목사는 이를 비탄하여 자살을 결심하기도 한다.(자서전 p25) 그의 신앙도 방황을 거듭하여 사춘기 시절에는 이성에 대한 흥미로 교회에 출석하는 정도였고 그나마 청년 시절에는 생업에만 급급하여 교회를 멀리하고 타락의 길을 걷기도 했다. 면학의 꿈이 사라진 후 공허한 삶에 대해 회의를 느껴 돈을 벌어야겠다는 각오로 살아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중에도 그에게 부흥사로서 기질은 이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당시의 그로서는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었지만 이미 그는 교인들의 칭찬을 받으며 강단에 서기도 하고 찬송을 부르는 등 남을 설득시키는데 남다른 면모를 보였다.(자서전 p26-27)
전격적 변화와 종의 길
그러던 이성봉목사가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은 사도 바울이 겪은 것과 같은 사고를 겪고 난 이후이다. 1920년 6월 24일 주일에 과수원에서 과일을 싣고 평양으로 가서 과일 팔아 못된 친구들과 진탕 술을 먹고 가던 중 가자 묘 앞길에서 원인도 모르는 오른쪽 넓적다리에 참을 수 없는 통증으로 쓰러진 것이다. 그는 3년 동안의 투병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철저히 회개하였다.(자서전 “나의 청년시대“ p30-32) 이렇게 새 출발 한 이성봉목사는 드디어 1925년 26세의 나이로 경성 성서학원(현, 서울신학)에 입학하여 뜨거운 영적 신앙 훈련과 사명의 무장을 이루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자서전 p38)
그는 1928년 신학을 졸업(성결약사 p173)하고 경기도 수원으로 파송 받았다. 수원 신풍리에 일본 사람의 셋집을 얻어 29세 8월 12일 교회를 개척을 시작(성결약사 p173, 자서전 p46) 하였다. 이것이 바로 오늘의 수원성결교회의 역사의 시작이다.
문준경집사, 한국의 무디 이성봉목사 만나다②
문전도사와 이성봉목사(1931. 3. 25-1936. 3)
1931년 3월 25일에 이성봉목사는 목포교회에 제3대 교역자로 부임하게 되었다.(활천 1931. 5월호 p61 총회 임명기 참조)
이때 문준경은 장석초전도사 시대를 지나 김응조목사의 지도로(자서전 p51) 약 4년간의 교육을 받아 복음을 위해 헌신하기로 기도의 응답을 받고 성서학원에 입학하기를 위해 준비하고 있는 때이었다.(섬마을의 순교자 p62-63) 문집사가 목포교회 입교한 때는 1927년 3월5 일이다.(섬마을 의 순교자 p49)
이때 이성봉목사는 아직 신학 2학년 시절이었다.(자서전 p42) 이성봉목사가 목포교회 파송 받아 부임한 1931년 3월 25일과 문집사가 성서학원에 1931년 5월 5일(섬마을 의 순교자 p62) 청강생으로 입학한 기간은 불과 한 달 십일 정도밖에 안 되는 짧은 기간이었다. 문집사는 이목사의 부임 전에 이미 성서학원에 가기로 결심하고 기도해오던 중 두 분의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성서학원 입학 시 조언과 추천은 이목사님께서 하여 주셨다. 성도와 목회자로서의 만남은 짧았다.(섬마을의 순교자 p62 1931. 5에 성서학원 입학) 그러나 목회의 길에서 그의 영향은 지대하다.
이목사의 많은 도움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학교입학 시부터 청강생에서 1932년 9월 초 수양생으로 받아준 것도(활천 1932. 10월호 p55) 도움을 주셨던 분도 이목사 이셨다. 문전도사 목회 초년 시에 임자교회 치리목사를 이목사님이 맡으셨고(활천 1934. 3월호 p56) 그의 지도 아래 임자교회도 세워졌고 당시 헌당식 집례도 맡아 주셨다.(활천 1934년 8~9월 합본 p100, 1934년 6월 12일 수양생 2년째) 문전도사가 증동리교회 시무할 때에도 치리 목사이셨다.(활천 1936. 3월호 p55) 결정적인 어떤 시점에서 역할과 도움을 주셨던 것으로 보인다.
이목사의 목포교회 6년간의 시무 기간에 많은 것을 배우셨고 목회적 관점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던 기간으로 볼 수 있다. 문전도사의 고무신 아홉 켤레를 떨쳐가면서 전하는 그 열정도 한국의 무디요 왕성한 활동가이셨던 이목사님의 영향이 크다 할 것이다.
문준경집사 한국의 무디 이성봉목사 만나다③
그리고 6·25때 수감 되었다 풀려나 마지막 기도 받고 순교를 결심할 때도 이목사님과 상의 하였다. 그때 이목사님께서(이사야 26:20 내 백성아, 네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아라. 하나님의 진노가 풀릴 때까지 잠시 숨어 있어라.) 이 말씀을 주셨다고 문전도사님 자신이 증동리 오셔서 하신 말씀이셨다.(비문 참조) 이때는 이목사님이 목포에 시무하지 않은 때였다.
6·25사변으로 내려오셔서 임성 성도들과 8월 2일 수요일 가정에서 예배드리다 잡혀가 몽둥이로 맞고 풀려나와 최 마리아 성도 사랑방에서 은밀히 모임을 갖다가 노출될 것 같아 인민군을 피해 1950년 9월 20일 경 소달구지에 실려와 목포에 들어와 잠시 은신하고 있는데 수일 후에 문전도사님과 이판일장로가 기도 받으러 은신처를 찾아갔다. 이때 두 분에게 기도해 주시고 가지 말라고 했으나 그래도 교회를 생각하고 가더니 종내 그들에게 학살당하고 말았다.(이성봉 자서전 1993년간 p109) 이사야서의 말씀은 은신하고 계신 곳에 가셔서 들으셨던 것이다.
생사의 기로(갈림길)에서 그를 찾아 기도 받고 조언을 구하는 일은 그를 그만큼 신뢰하고 존경의 대상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문전도사님의 사역 스타일은 이성봉목사님과 너무 흡사하다 문전도사님의 구성진 찬송소리에 사로잡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모여들면 설교를 했다 한다.(순교자 문준경 p85)
이성봉목사님의 부흥성회는 찬송을 은혜롭게 부르면서 집회를 인도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분만의 특유의 은사셨다. 그는 찬송으로 뭇사람들의 마음을 열게 하는 감동이 있었다. 이미 신학생 시절부터 어린이 부흥회를 인도하며 가는 곳마다 은혜로운 역사를 경험한 그는 신학교 졸업반 시절 3일간의 금식 기도 중에 예레미야서를 읽다가 큰 소명을 깨닫게 되었다.(자서전 p41) 문전도사님의 집회 방법도 구성진 찬송과 가사를 풀어주며 감동을 주는 특징이 있었다.
이성봉목사님은 목회보다도 부흥회에 더 많은 시간과 정력을 쏟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39년 교단 총회에서 교단 소속 부흥강사로 임명받고 본격적인 부흥강사로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다.(자서전 “나의 부흥시대 p69-79)
문준경집사 한국의 무디 이성봉목사 만나다④
그는 국내는 물론 1939년부터는 일본 선교에도 힘썼고 1941년에는 만주 지방에까지 전도 여행을 다녔는데 이목사의 회갑 당시에는 그가 인도한 집회가 이미 천 교회를 훨씬 넘을 정도였다. 해방 이후에는 폐허가 된 한국성결교회의 재건에 앞장서고, 한국 전쟁 이후 1954년 5월부터는 “임마누엘 특공대”라는 교단 희년기념 전도 단을 이끌고 1년간 70여 지역을 전도하는 등 잠시도 쉬지 않고 전도 활동을 펼쳤던 이성봉목사는 1961년부터는 복음의 전파와 분열된 교단의 합동을 위하여 성결교단의 모든 교회를 순방하였다.(자서전 "임마누엘 특공대” p123-참조)
그가 1963년 2월 27일까지 480개 교회를 순방 집회한 후 1965년 7월 23일, 마침내 분열된 두 개의 성결교단은 역사적인 합동 총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합동 총회에서 "주를 사랑하자"는 설교를 한 것을 마지막으로 이성봉목사는 합동 총회를 마친 후 10일 만인 1965년 8월 2일, 66세를 일기로 40년간의 부흥강사의 생애를 마치셨다.
문준경전도사와 목포교회 : 제1대 장석초전도사, 제2대 김응조목사, 제3대 이성봉목사와의 관계를 생각해 보았다. 제1대 장석초전도사님이 목포교회를 개척하시고 압해도 섬으로 가시고, 제2대 영암 김응조목사님이 영적인 부흥을 이루시고 대전에 감리사로 가시고(활천 1931넌 5월호 p60) 그 후임으로 이성봉목사님은 1931년 3월 25일에 목포교회 제3대 목회자로 부임하셨다.(1931. 5월호 p61)
이때 문준경집사는 사명자가 되고자 준비 중에 있던 차에 뜨겁고 열정적인 부흥사 한국의 무디(moody)를 만난 것이다. 여기에서 또 새로운 구령의 열정과 그의 부흥사의 담력과 활동성을 배우게 된 것이다 문전도사님의 순교기를 다시 정리하면서 느낀 점은 주께서 세우신 택한 그릇이구나 생각한다.
정체성과 성결성이 퇴색해 가는 이때 우리에게 경각심을 주시고 순교의 영성을 일깨우고 져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계시구나! 생각이 든다. 바울이 훌륭한 율법사 밑에서 배우듯이 지금까지 문전도사님과 관련된 3대의 목포교회(현, 북교동교회) 목사님들을 살펴볼 때 우리 성결교회 역사 속에 어느 한 분 뒤지지 않는 훌륭한 목회자들을 섬기시며 배우셨다는 생각이 든다.
이분들은 다 각각 특색이 있으셨고 큰 그릇들로 헌신과 구령의 열정과 영성이 뛰어나셨던 분들과 관련시켜 놓으심을 볼 수 있다.
문준경전도사와 이성봉목사 만남 시기, 기존이론 틀려
6·25 때 1950년은 목포교회에 시무하실 때가 아니다. 문전도사와 이목사는 목포교회를 떠나신 후에도 가까운 곳에 성회를 오실 때마다 찾아뵈었을 것이다. 당시 성회는 한 교회만의 행사가 아니었다. 그리고 6·25는 1950년인데 목포교회(현, 북교동교회) 2차 시무는 1948년-1949년까지였다. 2차 시무는 사실상 정승일목사가 맡으시고 이목사님은 성회를 주력하셨던 것으로 본다.
신앙의 기초를 세워 주신 분은 제1대로 당대에 부잣집 외아들로서 한학을 겸비한 목회자요 인생의 참삶에 대한 의미를 깨닫고 회개를 통한 중생과 성결, 복음의 은혜를 체험하고 과거를 확실히 청산하고 자기의 전 재산을 바쳐 주의 일을 위해 헌신한 장석초 당시 전도사님을 만나서 인생 삶의 의미와 철저한 헌신의 정신과 예수 그리스도의 참사랑을 깨닫고 초기부터 바른 신앙 기초를 다져 나가게 된다. 그분이 사임하신 후 제2대로 부임하신 김응조목사님 역시 어려서부터 큰 꿈을 가지고 사명자의 길을 택하신 분이셨다. 어려서 모세의 이야기를 듣고 모세처럼 훌륭한 지도자가 되겠다는 각오로 신학을 하셨다. 그는 “한국은 나의 교구다”라는 꿈을 가지셨던 분이다.
김목사님이 목포교회 올 당시 함경남도 지방회 감리사로 재임하시는 동안 너무 과로하여 몸에 병이 들어 총회로부터 휴양 차 목포로 파송하셨다 이분 역시 한국 교계에 큰 별이셨던 영암 김응조목사님이시다 이분은 신학자요 영성이 깊은 부흥사이셨다. 김목사님을 통해 문전도사님은 사중 복음의 기조가 되는 확실히 살아서 역사하시는 신유의 복음과 재림의 복음 사상을 전수받았다. 이러한 환경에서 신앙을 전수받은 문전도사는 복음의 사역자가 되기 전 이미 사중 복음의 실제를 깨닫고 있었다. 이때 제3대째 목포교회의 부임하게 되는 한국의 무디라 일컫는 이성봉목사님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 모두가 문준경을 들어 계획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뜻이 있었다. 이 자랑스러운 신앙의 선배 사역의 선배님들 헌신과 순교적 영성을 이어 나아가자. 끝 / 2010. 1. 21 / 박문석목사(서울신학대학원 신학 박사)
출처 : 기독교 성결신문
증도 성지순례 안내 증동리교회 김상원목사 010-2646-0852번입니다.
고 문준경전도사님 순교기 증도(시루섬)사랑 모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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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기독교 방송에서 영화를 통해 보고 정말 존경스러움을
감추지 못햇답니다. 종종 들려 증도 마을 하나님 능력의 말씀 듣고
믿음이 더욱 임하기를 원하기에 복음전파하는 그릇이
되기위해 열심히 배워 보렵니다. 잘 보고 갑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증도지역 및 중동리 교회에 충만하리라 믿습니다. 할렐루야!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새해 선생님의 가정에 큰 축복이 임하시길 기도드립니다... ^^
오타 알려드립니다. 중이아니고 증동리교회입니다.
아멘 할렐루야~!!
증도 성지순례 안내 및 관광안내는 이종화(전남 신안군 소속 문화관광해설가)
증동리교회 안수집사 010-3818-8882번으로 연락주십시오. 감사합니다. ^^
증동리교회 사역자이신 문준경전도사님께서는 남편 정근택씨가 살았던 임자도에 진리교회를 세우시고 이듬해 증동리교회를 개척하여
교회 설립시부터 순교시까지 사역(16년)하시는 동안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치면서 갖은 고초를 겪으셨으며, 교회와 교인들을 끝까지
지키시다 순교하신 증동리교회 입구에는 이를 기억하기 위한 순교비가 세워져 있고 빼앗긴 옛 교회가 보존되어 있으며, 그 당시 실제 사용하셨던 종
그리고 교회 주변에 순교지(솔무등 터진목)와 기념관, 기도 동산(상정봉), 복음의 노두길(증도대교 주변) 등이 있으므로 증동리교회를 방문하시면
문준경전도사님 관련 많은 흔적을 느끼실 수 있습니다.
증도에 순교기념사업회가 결성되기 이전에는 1년여 솔무등에 가매장 형태로 모셨던 전도사님의 시신을 증동리교회 교인들이 거두고,
순교지에 증동리교회에서 비를 세우고, 백사장에 시멘트로 지어부어 십자가 표석을 하고, 약 50여 년 동안 추모예배를 드려 온 것이 오늘에 이르게 되었으며,
증도 최초로 증동리교회를 개척하여 설립 후 16년 동안 순교시까지 실제 담임으로 사역하신 주 사역교회인 증동리교회는 일제강점기 때
빼앗겨 아직도 국가가 소유하게 된 옛 교회와 문준경전도사님의 수많은 흔적과 역사가 있고, 전도사님의 숨결이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문준경전도사님께서는 복음의 불모지인 증도에 증동리교회를 세웠으나 일제강점기를 맞아 교회를 빼앗긴 후 1945년 해방이 되어
빼앗긴 교회를 되찾아 교회에서 예배드리기 위해 재판까지 거쳐 승소하였으나, 계속해서 예배를 방해하는 경방단 조직 때문에 몸은
병들고 쇠약해져 약 5년 동안 갖은 노력을 기울이시다 6.25를 맞아 문준경전도사님께서는 교회 앞 솔무등 터진목에서 순교하셨습니다.
증동리교회는 증도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담임으로 사역하신 사역교회인 문준경전도사님의 교회입니다.
빼앗긴 옛 교회와 많은 흔적과 사역 역사를 접하실려면 김상원 목사(증동리교회 담임) 010-2646-0852번으로 연락주십시오. 꾸벅~
증동리교회 사역자셨던 문준경전도사님의 흔적과 역사는 실제 담임으로 사역하신 사역교회인 증동리교회에서 바로 접할 수 있으며,
성지순례차 증도를 방문하고자 하시는 여러분! 이러한 역사를 바로 알지 못하는 성지순례 과연 은혜가 될까요?
증도에는 약 40~50억 순교기념관이 지어졌지만, 안타깝게도 순교자교회와는 무관하게 운영된다는 사실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가페 지기님 윗 글 쓴이가 박문섭이 아니고 박문석목사 입니다 정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수정하였습니다. 꾸벅~
문준경 전도사님은 1927년 3월 5일 북교동교회(당시 초가집의 목포교회, 전라도의 두 번째 성결교회)에서 첫 신앙생활(37세)을 시작하여 1928년 4월 능승구 목사님으로 부터 세례를 받았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