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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제 : 실천하는 참된 종교인이라야 온 인류의 바른 길잡이가 된다. |
대산종사님께서 정전대의 제일 앞에 “실천하는 참된 종교인이라야 온 인류의 바른 길잡이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원불교를 딱 한마디로 말하라면 실천입니다
삼학으로 보자면, 불교에서는 계정혜(戒定慧)라고 순서를 정해요. 하지만 원불교는 정혜계(定戒慧)를 순서로 합니다. ‘계(戒)’가 가장 마지막이지요, 즉 취사(取捨)가 가장 중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원불교는 공부의 귀결을 우리는 실천에 두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내 개인의 계행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정의를 위한 사은사요(四恩四要)로까지 풀어 주셨습니다.
여기서 ‘실천’이라는 단어가 참 쉽게 쓰이는 말이지만, 제일 어려운 것인 것 같습니다. 그동안의 종교들을 보면 굉장히 관념적이고, 신비적이고, 장엄적, 타력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대종사님께서는 실천하는 종교를 내어 놓으셨습니다. 종교는 실천이기 때문에, 앞으로는 국가지도자를 종교인 중에서 뽑을 것이라는 말씀도 하셨지요.
‘생활 따로 종교 따로’, ‘생활이 따로 있고, 종교적 해석이 따로 있다’는 종교도 있습니다. 생활과 연결되지 않는 종교는 앞으로는 유지되기 힘들 것입니다. 영육쌍전법(靈肉雙全)에는 생활과 수도가 둘이 아닌 종교가 미래의 종교라고 표현해 주셨습니다. 우리 교리표의 최종 끝은 ‘불법시 생활, 생활시 불법’입니다. 그래서 원불교를 ‘생활종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생활이란 말은 다른 말로 ‘복과 혜’입니다. 사람이 종교를 찾아오는 목적은 복과 혜를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내 생활에 도움을 받기 위해서이지요. 그렇죠? 여러분들 또한 복과 혜를 구하기 위해 이 자리에 온 것이지요. 종교의 목적을 성불제중 제생의세, 무아봉공, 자리이타, 홍익인간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종교의 목적을 더 직접적으로 표현하자면 ‘생활을 잘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생활은 바로 복(福)과 혜(慧)입니다.
정전을 공부하는 것은 대종사님의 생활종교로 내어놓으신 이 법을 배워서 실천을 통해서 내 삶에 그리고 이 세상과 사회에 복과 혜를 넘쳐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대종사님께서는 이론적인 것을 싫어하셨습니다. 당대에 교도가 대종사님 앞에서 강연을 하면서 철학적인 내용, 사변적인 내용을 이야기하면, 대종사님께서 그만하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앞으로의 종교는 사실 그대로를, 실제적인 팩트 중심의 종교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종교적 관념이 있는 사람은 원불교에 와서 이렇게 이야기해요. “원불교에는 도인이 없는 것 같다”, “원불교 경전은 수준의 깊이가 없는 것 같다”라고요. 이런 사람들은 ‘종교라는 것은 무언가 좀 어려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렇지만 생각해보세요. 정전을 대종사님께서 내어놓으시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때 당시에 혁신이었죠. 왜냐하면 당시에 완전히 한자문화권에서 한글 경전을 펴놓으신 것이잖아요. 그 후 정산종사께서 다시 조금 더 쉽게 교전을 완간하셨고요.
또 봅시다.
1. 정전(正典): 근원을 두루 밝힌 원경(元經)이요, |
정전(正典)은 가장 근원을 밝힌 으뜸된 경전입니다. 예를 들어서, 교회를 가든 절을 가든 기도를 열심히 하는데, 그때 하는 기도는 작은 부분을 잡고 하는 기도입니다. 하지만 원경을 공부하면 무궁무진합니다.
정전은 근원을 밝힌 것이라 하셨는데, 근원을 다른 말로 진리, 일원상, 사리(事理)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사리에서 사(事, 일)는 시비이해입니다. 사리에서 리(理, 이치)는 대소유무입니다.이 세상은 대소유무의 이치로 건설되고 시비이해의 일로써 운전해나가는 것입니다. 세상에 많은 경전, 법문이 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경전과 법문 내용의 핵심은 ‘일과 이치’입니다.
사람들은 이(利, 이익)를 좋아하고 해(害, 손해)를 싫어합니다. 그런데 이(利, 이익)는 시(是, 옳음)에서 옵니다. 해(害, 손해)는 비(非, 그름)에서 옵니다. 이것은 인과가 되기도 합니다. 시는 이가 되고 비는 해가 됩니다.
그러면 모두 자기가 옳다고 하는데 시비의 기준은 무엇을 할 것이냐라고 물으면, 시비의 기준은 바로 대소유무인 것입니다.
정전은 대소유무의 원판입니다. 특히, 일원상 법문은 전부 대소유무로 되어 있습니다. 대소유무 이외에는 내용이 없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일원상의 진리는 대소유무인 것이지요. 정전에서, 대(大)를 표현한 것이 일원상의 종지요, 소(小)를 표현한 것이 사은의 내역이요, 유무(有無)를 표현한 것이 인과의 이치 등 각종 법입니다.
대소유무를 모른다는 것은 진리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대소유무는 내 마음에서도 찾을 수 있고 밖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몸에서도, 마음에서도, 세상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대소유무로 세상 모든 것을 다 판가름 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볼게요. 머리카락을 보세요. 머리카락이 산의 나무와 같습니다. 피부의 안에 피가 흐르는데, 강과 같습니다. 마음과 몸 또는 이 세상을 대소유무로 보자면, 막히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물론 시비가 첨예하게 다투어지는 세부적인 내용까지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겠지만, 대소유무의 이치를 알면 대체적인 부분은 파악해낼 수 있는 것입니다.
정전을 처음 보면 재미도 없고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너무 쉽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떤 사람이 정전이 너무 쉽다고 말하니까, 대종사께서 그 분께 물었습니다. 그대로 실천할 수 있겠냐고요. 그 사람이 말을 못했죠.
이 말은, 대종사님께서 종교의 판을 엎은 것입니다. 미래의 종교는 아는 것이 중점이 아니라 아는 것을 어떻게 실행하느냐입니다. 옛날에는 깨달음만 외쳤습니다. 성자는 깨달은 사람이라고 이야기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성자는 이제는 깨달음을 넘어서 실천하는 사람이 성자입니다. 대산종사법문에 10이라는 에너지만 있어도 깨달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깨달음을 실천하는 데는 990의 에너지가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깨달음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대종사님께서 앞으로 견성(見性)은 집에서 다 하고 온다고 말씀하셔하셨습니다.
깨달음은 그렇게 간단합니다. 그런데 그 깨달음을 실천으로 옮겨지게 하려고 하면 정말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 세상에는 깨달은 사람도 필요하지만 이 깨달음을 실천할 수 있도록 적공하여, 힘을 가진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런 사람이 비로소 자기 삶에서 복과 혜를 마음껏 주무를 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다음 보겠습니다.
2. 대종경(大宗經): 두루 통달한 통경(通經)이다. |
“대종경은 두루 통달한 통경”이라 하셨습니다.
대종사님께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거나, 여러 제자들에게 질문을 받고 대답을 한 내용을 엮은 경전이지요. 대소유무는 감각감상이 되고, 시비이해는 심신작용이 되는 것입니다.
부처와 중생의 차이는 심신작용의 처리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대소유무의 이치를 가지고 시비이해에 적용해서 일 잘하는 것이 진짜 도인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제가 정전을 여기서 아무리 잘 설명해도, 제가 심신작용 처리를 잘 못하면 저는 도인이 아닌 것입니다. 심신작용의 처리를 잘 하기 위해서는 대소유무의 이치를 깨달아서 수많은 시비이해 속에서 어떻게 잘 처리해나갈 것인가 집중해야 합니다.
그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래서 과거 도인들은 세상의 일이 복잡하니까 담 쌓고 산으로 가서 대소유무의 이치만 연마하셨죠. 그렇게 살면 감각감상은 많을 수도 있겠죠. 그러나 진짜 도인은 일하고 돈 벌면서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원불교에서는 진리를 대소유무로 쪼개어서 시비이해의 일에다 적용하는 사람을 진짜 도인으로 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들 누가 자신에게 뺨을 때렸을 때 어떻게 하실래요? 뺨을 맞아서 손해를 봤습니다. 내가 뺨을 맞았다는 것은 나에게 무언가 잘못이 있었겠지요? 이것을 인과의 이치를 잘 생각해서 풀어나가는 사람은 진리를 아는 사람입니다. 인과의 이치를 생각하지 않고 손해만 생각해서 복수를 하면, ‘가는 몽둥이, 오는 홍두깨’가 되겠지요. 결과를 보고 거꾸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음에 대해서 대소유무의 이치가 있습니다. 마음에 텅 빈 대(大)가 있고, 거기에 근간하여 소(小)로 수많은 마음이 있고, 그 수많은 마음이 계속 유무(有無)로 변화합니다. 저에게 “제가 나중에 교당 한 채 희사하겠습니다”라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 마음 변하는 마음입니다.
마음에는 이 변하지 않는 대의 마음이 있고, 변화하는 유무의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변화하는 마음을 절대 불변하는 마음으로 착각하면, 상처를 입고 배신에 아파하고 잠을 못 자죠. 사람들 마음이 얼마나 변하면, 결혼할 때 반지를 끼워주면서 변하지 말자고 약속을 하겠습니까. 그래놓고도 이혼하는 사람이 30%입니다. 마음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거거든요.
다음 읽어보겠습니다.
<의의> 복과 혜를 구하며 성불제중을 하고 제생의세를 하는데 바르고 빠른 길을 밝혀 주신 전무후무한 대경전이다. |
‘성불제중’이라는 말도 나오고 ‘제생의세’라는 말도 나오는데요. 성불제중(成佛濟衆)은 불교의 표현입니다. 원불교에서 자주 쓰는 표현은 ‘제생의세’이지요. ‘성불제중’이라고 말하면 ‘성불’에 집중하는 것으로 오해할 것 같아서 ‘제생의세’라는 표현을 씁니다. 제생의세(濟生醫世)는 일체 생령을 건지고 이 세상의 병을 고친다는 뜻입니다.
대종경이 바르고 빠른 길을 밝혀 주신 ‘전무후무’한 대경전이라 하셨습니다. ‘전무(前無)’일 뿐만 아니라 ‘후무(後無)’라는 말씀은 왜 하셨을까요? ‘후무(後無)’라는 말은 앞으로 어떤 법이 나오든 이 법을 넘어서진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 이상 나올 수가 없다는 뜻이지요. 이 세상의 모든 일을 원불교 법으로 풀 수 있습니다. 구체적 과학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풀지 못하겠지만, 인권문제, 환경문제, 생명문제, 여성문제와 같은 것은 원불교 법으로 거의 모든 일을 다 풀 수 있습니다.
금강경에서 칠보(七寶)보다 더 큰 보배가 있다고 나옵니다. 반야심경에서도 반야심경이 얼마나 훌륭한 경전인지 설명하는 내용이 나오지요. 대종사님이 내어놓으신 정전과 대종경에 대해 여러분께서 확실한 신(信)이 있어야 합니다. 잠깐하다 흔들립니다. 유명한 대학 나온 분이 사서삼경, 고경을 종횡무진으로 해설하면 입이 벌어지죠. 그러고 나서 원불교 정전을 보니 다 알 것 같고 쉬어보이지요. 막상 뜻을 물어보면 모르고 실천하라고 하면 더 못하면서요.
관련 법문 읽고 가겠습니다.
정산 종사 말씀하시기를 [정전은 교리의 원강을 밝혀주신 "원(元)"의 경전이요 대종경은 그 교리로 만법을 두루 통달케 하여주신 "통(通)"의 경전이라, 이 양대 경전이 우리 회상 만대의 본경(本經)이니라.] 시자 이 공전 사뢰기를 [예전 등 기타 교서의 주지(主旨)는 무엇이오니까.] 말씀하시기를 [예전은 경(敬), 성가(聖歌)는 화(和), 세전(世典)은 정(正)이 각각 그 주지가 되나니라.] - 정산종사 경륜편 1장 - |
대산종법사 말씀하시기를 「정전(正典)은 근원(根源)을 밝힌 원경(元經)으로 복혜 (福慧)가 샘솟듯, 비오듯 제조되는 원료이고 대종경(大宗經)은 두루 통달(通達)한 통경(通經)으로 복혜(福慧)를 물 마시 듯, 숨을 쉬 듯 활용(活用)하게 한 경(經)으로 각 종교의 교리와 제도와 교단의 성격, 성현들의 능력과 인격 등을 알 수 있게 하였다.」 - 대산 종사 3집 - |
원불교 경전이 없었으면, 저는 교무를 안했을 것입니다. 제가 원불교전서를 출가하기 전, 군대에서 여섯 번 읽었습니다. 성가까지 다 읽었어요. 첫 읽어 본 소감은 ‘좋은 말 많이 써졌네’ 였습니다. 그런데 3번, 4번, 5번 읽으니까 얼마나 재밌던지요. 옆에 더 재밌다는 책 가져다 놓아도 마음이 안 뺏기더라고요.
오늘 공부방에서 교법을 공부할 때에도, 교법에 대해 기본적으로 이해를 하신 분들은 이해가 더 잘 되실 것입니다. 처음 듣는 사람은 어려울 수 있어요. 그래서 제가 예습해오시라고 꼭 부탁하고 싶습니다. 수요마음공부방에서 ‘개교의 동기’를 다룬다고 치면, 공부방에 오기 전에 ‘개교의 동기’를 10번 읽어보세요. 그리고 ‘내가 교무로서 개교의 동기를 설법해야한다’고 생각하고 다시 읽어 보세요. 시험공부 잘하는 사람은 시험 출제자의 심경으로 공부하거든요. 정전을 공부하시면서 ‘교무의 심경’을 느껴보시고, ‘대종사님의 심경’을 느껴보시면서 공부해보세요. 일심으로 예습하고 와주세요. 예습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않을 거예요.
정전에 대해 강조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대종경이 정전보다 재밌으신가요, 정전이 대종경보다 재밌으신가요? 정전이 대종경보다 백배는 더 재미있어야 합니다.
다른 질문을 해볼게요. ‘나는 이 전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봤다’는 분 손 들어보세요. ‘전서를 전부 타이핑하거나 손으로 써봤다’는 사람 손 들어보세요. ‘나는 다섯 번 이상 읽어보았다’ 손 들어보세요. 여러분이 궁금한 것들에 대한 해답이 대체로 전서 안에 다 들어있습니다. 옛날 분들도 여러분이 궁금해하는 내용을 똑같이 궁금해하면서 스승님께 물어봤거든요. 혜안이 열린 스승님들께서 질문에 대한 해답을 다 주셨습니다. 전서를 읽어보면, 나중에 실생활에 연결이 됩니다. 어떤 경계가 왔는데 법회 때 들었던 내용이나 교전을 읽으면서 봤던 법문이 솟아 올라왔던 경험 다들 있으실 겁니다. 이런 식으로 법이 실생활에 연결되니까, 복과 혜가 쏟아지게 되지요.
그런데 법문이 떠오르지 않고, 공부방에서 배운 내용을 실생활에 써먹지 않은 채, 공부방에 갔었다는 기억만 남아있다면, 공부방에 온 것이 쓸모가 없죠. 그래서 이왕 교전 공부하는 김에, 좀더 신경써서 공부해보시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2부>>
<판서> | ||||
| 원(圓) | 불(佛) | 교(敎) | |
외(外) | 우주만유의 본원 | 우주의 원리원칙을 각(覺) | > 변, 불변 | 우주 대자연의 진리를 현실화 |
내(內) | 일체중생의 본성 | 자기의 심성원리를 각(覺) | 심신의 자유를 얻게 하는 방법 |
원불교가 무엇입니까?
원불교의 ①원은 먼저 진리를 상징합니다. ②불은 깨달음을 상징합니다. 불 즉 각이요, 심 즉 불이라 그럽니다. ③교는 가르친다는 뜻입니다.
①원은 밖으로는 ‘우주 만유의 본원’이라 말할 수 있고, 안으로는 ‘일체중생의 본성’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안/밖을 설명을 위해 구분했지만, 사실은, 본성을 그대로 들어가면 본원이 하나로 맞통합니다. ②불은 밖으로는 ‘우주의 원리 원칙을 깨닫는 것’, 안으로는 ‘자신의 심성원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불은 깨닫는 것이죠. 원불교는 신앙하는 종교만이 아니라 깨달음을 실천하는 종교입니다. 진리를 깨달아서 그것을 실천하고 가르쳐서 교화하는 종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③교(가르치는 것)는 밖으로는 ‘우주 대자연의 진리를 현실화해서 가르치는 것’이라 말할 수 있고, 안으로는 ‘자기의 심신 자유를 얻게 하는 방법을 배우고 가르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제가 불(佛)에 변, 불변이라 적었습니다. 일원상서원문에서 변은 변하는 것, 항상 하지 않는 것, 무상(無常)을 의미합니다. 불변은 변하지 않는 것, 항상 하는 것, 유상(有常)을 의미합니다. 부처는 불변의 마음이 체가 되어서, 변의 마음을 다양하게 응용해서 은혜를 생산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불변의 자리를 모르는 사람이 과연 부처가 될 수 있을까요? 깨닫지 못한 사람이 부처가 될 수 있을까요? 부처가 될 수 없습니다. 반면, 중생은 변(變)이 체(體)가 됩니다. 이 생각, 저 생각, 온갖 생각들이 변하죠. 또 형상 있는 것은 온갖 변하죠. 변하는 것을 오온으로도 말할 수 있고, 육근으로도 말할 수 있습니다. 오온(五蘊, 색수상행식)은 심신입니다. 오온은 마음(수상행식, 受想行識)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한 개념이지요. 그 마음마저도 다 변합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에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이라 나오는 것이지요. 육근(六根, 안이비설신의)까지 모두 변입니다.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 눈귀코입몸)은 곧 썩어 없어질 것이고, 의(意, 뜻)까지도 마찬가지로 변입니다. 범부는 바로 오온(五蘊), 육근이 체가 되어서 사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몸이나 재산을 향해서 달려가는 사람이죠. 그것을 응용해서 쓰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의 주인집은 놔두고 남의 집에 사는 셈입니다. 수(受)는 감정이고, 상은 생각입니다. 생각도 불변에서 나온 마음이죠, 생각도 변합니다. 행(行),식(識) 모두 다 알고 보면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온이 개공(皆空)인 것입니다.
변/불변의 이치, 유상/무상의 이치를 깨달으셔야 합니다. 이것을 배우고 가르치는 종교가 바로 원불교입니다. 원불교를 다니는 사람이 불변의 자리를 깨닫지 못하고 변의 자리를 응용하지 못하면, 안 됩니다.
<교전을 읽는 목적>
유인물 2쪽 보겠습니다.
교전을 읽는 목적입니다.
◇ 교전 읽는 목적 1. 공부의 방향로를 알기 위해서 2. 실생활에 쓰기 위해서 |
간단하죠? 제가 ‘교전’ 읽는 목적이라 적긴 했지만, ‘전서’ 읽는 목적 또는 ‘교서’ 읽는 목적이라 생각하셔도 됩니다.
1. 공부의 방향로를 알기 위해서
교전은 일과 이치로 구성되어 있죠? 그런데 이것을 어떻게 내가 마음공부할 것인지 방향을 정해주셨습니다. 차로 말하자면 네비게이션입니다. ‘이럴 때면 이렇게 해라, 저럴 때면 저렇게 해라’라고 딱 방향이 나와있습니다. 불경, 성경, 사서삼경 읽어보세요. 얼마나 복잡한지요. 원불교 정전의 경우, 교리도를 보면 정전 순서가 튀어 나옵니다. 이걸 보면 대종사님께서 얼마나 합리적이고 과학적인가 볼 수 있습니다.
2. 실생활에 쓰기 위해서
이 교전을 읽는 것은 바로 실생활에 써먹기 위함입니다. 실생활에 적용하지 않으면 아무 쓸모없습니다.
<독경하는 방법>
그 다음 독경 방법입니다. 경전을 읽을 때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죠? 그런데 제가 요약해서 적어놓았습니다.
◇ 독경(讀經) 방법 1. 그냥 읽거나 타이핑하거나 쓴다. 2. 그 뜻을 새긴다. 정독(正讀) 3. 내 마음에 대조한다. 문독(問讀) 4. 대조한 것을 연습하고 외운다. 5. 실행한다. |
그냥 읽거나 타이핑하거나 쓴다.
먼저 눈이나 손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대종경 읽으려 하다가 서품만 읽다가 그만 둔 사람 많죠? 처음에는 정전부터 단어 사전 찾지 말고 그냥 읽으세요. 먼저 그냥 읽어야 합니다. 왜 뜻도 모르고 읽으라고 제가 말할까요? 전체를 보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읽어가다 보면 뒤에서 앞의 내용을 설명해주기도 합니다.
조금 더 공부해보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원불교 홈페이지에서 타이핑하면 됩니다. 우리 교당은 사경노트로 사경하셔도 좋습니다. 우리 교당의 비전이 헌배와 사경입니다. 사실은 하루에 약 30분 정도 보면 원불교 전서를 한달이면 다 읽을 수 있습니다. 1년이면 약 10번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군대에 있을 때, 군장에 소교전을 가지고 다녔어요. 저는 그때 교전을 ‘매일 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매일 교전을 본다는 것은 목표를 잡고 마음을 챙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전을 읽는 것은 대종사님을 만나는 것이고 나의 참 마음 자리를 보는 것이고, 스승과 맥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또, 신기하게도, 내가 오늘 대종경에서 무슨 품을 봤다고 하면, 지나가다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과 그 내용과 연결됩니다. 대종경 인도품 18장에 증애에 끌리지 않는 방법에 관한 법문이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사람을 죽이려다가 사람을 살린 사람이 있었어요. 인도네시아에서 사업을 하는데, 그때 자기에게 사기 친 사람이 있었대요. 같이 배를 타고 가다가 바다에 떨어뜨려 죽일 생각이었대요. 그런데, 바다에 배 타고 함께 가서 상대를 떨어뜨리려는 때 전날 읽었던 대종경 인도품 제18장 법문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그래서 죽이려는 생각을 그만두게 되었지요.
제 이야기를 조금더 자세하게 해볼게요. 내일 훈련이 있으면 오늘 교전을 더 읽었습니다. 그 다음날에는 훈련으로 바쁘니까 한 줄만 읽고요. 어제 일이 생겨서 교전을 못 봤으면, 어제 못봤던 부분까지 못봤으면 오늘 읽었습니다. 그렇게 하신다면 10번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법회를 보실 때도 훨씬 재미있을 것입니다. 제가 교전을 6번을 읽고 총부에서 법문을 듣는데 정말 법열을 느꼈습니다. 가슴에서 폭포수 같은 눈물이 났습니다. 여러분들도 독경을 하시고 법문을 들을 때 희열을 느낄 때 있죠? 이 경전을 보고 법문을 들으면 와 닿고 훨씬 재밌고 좋을 것입니다. 법열의 재미, 하나씩 알아가는 재미, 하나씩 뚫리는 재미는 누가 뺏어가려해도 뺏어갈 수 없고 남에게 줄 수도 없는 재미입니다. 나 혼자 느끼는 정말 말할 수 없는 법열이고 법락입니다.
2. 그 뜻을 새긴다. 정독(正讀)
경전을 읽는 두 번째 읽을 때 경전을 읽는 방법은 정독입니다. 한 번 두 번 보고나면 차분히 정독을 해보는 것이죠. 전체 흐름을 알았으니까 정독이 되죠. 아까 눈으로 보고 손으로 썼다면, 이번에는 머리로 보라는 것입니다. 이때는 모르는 단어도 사전 찾아보세요.
3. 내 마음에 대조한다. 문독(問讀)
세 번째로 읽을 때의 방법은 문독입니다. 문독은 내 마음에 대조해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에 과실을 말하지 말며’라는 법문을 읽을 때 ‘내가 다른 사람의 과실을 하루에 몇 번 말하지?’ 하고 내 마음에 대조해보는 것이죠. 대종사님의 법문을 이해하고 확인하는 수준을 넘어서 대종사님의 법문이 내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4. 대조한 것을 연습하고 외운다.
네 번째 방법은 연습하고 외우는 것입니다. 이는 대조한 것을 경계 속에서 연습하고 단련하는 것입니다. 야구선수가 저녁에 타격 연습을 하는 것처럼 법문을 공부삼아 하나씩 연습하는 것이죠. 그리고 경전을 외웁니다. 동양의 공부방법으로 ‘외우기’가 있지요. 물론, 저도 썩 좋아하는 공부방법은 아닙니다. 제일 좋은 것은 ‘외워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외우려다보면 내가 관심이 없거나 소홀히 한 것은 잘 안 외워지고 지나쳐버리게 됩니다..
5. 실행한다.
마지막 단계는 ‘실행하는 것’입니다. 실행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오롯이 차분하게 하다보면 마음이 맑아지고 다 생각이 납니다. 그런데 주의할 점은 경전을 먼저 봤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경전을 미리 봐뒀어야지, 기도를 할 때 답이 스스로 올라오기도 하는 것입니다.
<청법의 도>
이제 ‘청법의 도’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 청법(聽法)의 도 1. 빈 마음으로 - 현애상(懸崖相), 관문상(觀聞相), 분별성(分別性), 주착심(住着心) 2.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신심), 갈망하는 마음으로 3. 무량한 법문을 배우겠다는 서원으로 - 지묵경전 < 현실경전 < 무형경전 4. 내가 활용할 마음으로 * 참고 : 수행품 25장, 권도편 1장, 2장, 35장 |
그리고 청법의 도는 ‘법문을 들을 때 어떻게 듣느냐’에 대한 내용입니다.
1. 빈 마음으로 ㅡ 현애상, 관문상, 분별성, 주착심
첫째, ‘빈 마음으로’ 법문을 들어야 합니다. 빈 마음으로 법문을 듣는다는 말은 ‘현애상(懸崖相), 관문상(觀聞相), 분별성(分別心), 주착심(住着心)’ 등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현애상(懸崖相)에서 ‘애’는 ‘언덕 애(崖)’입니다. “아이고, 어렵다 모르겠다”, “나는 이 생에 성불을 못하겠다”, “성불은 교무님이 하시고, 나는 이생에 그냥 교도로 살겠다”라는 생각이 현애상입니다. 현애상이 있으면 “교무님은 왜 어렵게 한문으로 써?” 그런 핑계를 대시지요. 현애상에 걸리게 되면 만사가 싫어집니다. 사투리 쓰는 것부터 핑계대기 시작합니다.
다음은 관문상(觀聞相)입니다. 이 중에도 정전을 몇 번 들은 사람이 있어요. 이런 사람들은 관문상에 잘 걸립니다. 전에 들었고 봤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래서 재수생이 점수가 안 오르는 것입니다. 재수생이 이미 봤다고 생각하고 수업시간에 집중을 안 하니까 머리 속에 안들어오는 것입니다. 한번 실천하는 입장에서 들어보세요. 그러면 더 공부가 잘 됩니다. 실천하지 않는 지적 호기심으로 교법에 관문상에 들어가게 되어 있어요.
분별성 개념은 정전 ‘정신수양’에 나오는 말입니다. 분별성은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이 잠깐 올라 온 것입니다. 오늘 수요공부방을 들으실 때에도 정신이 분별을 합니다. ‘제원 교무님이구나’라고 분별을 합니다. 이때 ‘왜 저렇게 얼굴이 크지?’ 생각하는 것도 분별성입니다. ‘오늘 제원 교무님이 참 좋다’ 생각하는 것은 분별성입니다. 그런데 ‘무조건 좋다’, ‘무조건 싫다’는 마음이 바로 주착심입니다. 살짝 좋고 싫다는 것은 분별성입니다. 분별성이 반복되면 주착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놓고 그대로 들어야 합니다. 선생님이 싫어서 수업에 집중하지 않는 학생들 있죠. 자기 손해입니다. 아무리 못난 선생님도 자신보다 낫습니다. 그래서 빈 마음으로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2.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신심), 갈망하는 마음으로
그 다음은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신심으로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정산종사님께서 권도편에 갈망이라는 단어를 쓰셨습니다. 여기서 ‘갈(渴)’은 갈증을 말합니다. 사막에서 물을 찾듯 그런 마음으로 법문을 들으라 하셨습니다. ‘극진이 공경하는 마음’, ‘갈망하는 마음’으로 들으라고 하셨어요. ‘말이라는 것이 그냥 말일 뿐이지’라고 생각한다면 잘못입니다. 스승이 진리를 말로써 표현하는 것입니다. 경전이 가치가 있듯이 경전, 진리에 바탕한 말의 가치가 엄청난 것이죠. 법문 듣는 것을 엄청나게 좋아하셔야 합니다. ‘그냥 말일 뿐이야’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손실이 클 것입니다.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강의실에 와도 앞에 앉죠. 물론, 직장 때문에 늦은 사람은 어쩔 수 없겠지만요. 제가 싫은 사람이 앞에 앉을 일이 없습니다. 제가 출가시킨 예비 교무님들에게 당부하는 말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학교 수업 들을 때 뒤에 앉지마라”는 당부입니다. 기운이 멀어져요. 뒤에 앉는 사람들은 마음이 작은 사람들이 많아요.
한편, 어떤 사람에게는 교전을 100독하라고 권하기도 합니다. 지키기 쉽지 않죠. 그러나 대종사님의 법문이 이 세상 어떤 것보다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여 신심이 확실하면 그 말을 잘 따를 수 있죠. 현애상에 걸리거나, 관문상에 걸리면 교전 읽는 것이 소홀해지지요. 내 마음과 내 생활에 대조해보면 교전을 읽으셔야 합니다. ‘내용을 아는가, 모르는가’의 관점으로 교전을 읽으면, 소홀히 하고 그냥 넘어가게 됩니다.
극진한 공경과 무조건 봉대하는 심경으로 들으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법문을 들으면서 문답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물으세요. 자문자답하기도 하세요. 잘 묻는 사람에게는 대종사님이 성적을 주기도 했습니다. 질문한다는 것은 까닭이 있어야 하고 공부심이 있어야 하고 나름대로 용기도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은 빨리 진급할 사람입니다. 질문을 통해서 자신에게도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이 됩니다.
청법은 누가 가능할까요? 법문을 들을 수 있는 생명은 누구이죠?, 물속의 상어가 법문 들을 수 있나요? 허공에 있는 잠자리가 법문을 들을 수 있을까요? 닭장 속 닭이 법문을 들을 수 있을까요? 몸을 못 받은 영가가 어떻게 쉽게 들을 수 있을까요? 바로 ‘인연이 있는 사람’이 법문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인연이 있는 사람’이 법문을 듣고 ‘각혼이 있는 사람’이 깨달을 수 있습니다. 각(覺)은 각혼이 있는 사람만 가능한 일입니다. 대종사님께서 이 빗자루도 마음만 있으면 깨닫게 해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법문을 듣는 것, 법문에 대한 가치에 대해서 높이 생각을 해주셔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설교는 고지식한 것’이라고 생각하죠. 부부싸움할 때 “설교하지마라”라고 말하긴 하지요. 그러나 설교는 고지식한 것, 안 좋은 것이 아닙니다. 강연해보셨죠? 강연 하나할 때 열배, 수십 배를 노력합니다.
대종사님이 돌아가시기 전 이 정전을 펴실 때, 아드님 박창기 선생님이 새벽에 대종사님 방 청소를 하러 가면 지우개똥이 한 주먹씩 나왔다고 합니다. 대종사님이 썼다 고쳤다 계속 하신 것이지요. 대종사님께서 깨친 분인데, 정전을 쓰시면서 왜 그렇게 퇴고를 많이 하셨을까요? 대종사께서 못 깨쳐서 고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세상의 이것을 보는 사람들이 이 법을 잘 이해하고 원만하게 잘 알아들을 수 있을까’ 고민하시느라, 고치고 고치면서, 한 자, 한 자 고심해서 손을 보셨습니다. 일제 강점기 돌아가시기 전에 가장 신경 쓰신 부분이 정전 편찬입니다. 서울 인쇄소에서 정전이 나온 것을 보고 너무 기뻐하셨대요. 오죽했으면 정전으로 해놓고 또 그것을 다시 교리도로 해놓고, 교리도를 표어로 해놓고, 표어를 일원상을 해놓으셨을까요? 얼마나 준비를 철저히 하셨습니까?
“진리는, 성현이 나시기 전에는 천지에 있고, 성현이 나시면 성현에 있고, 성현이 돌아가신 뒤에는 경전에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대종사님께서 직접 쓰셔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고 알려주신 경전이 바로 정전인 것입니다. 제도할 수 있고 법문을 들을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사람이고, 사람 중에서도 ‘인연이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인연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 인연이 깨달음으로 들어가야 ‘법연’이 됩니다. 그저 인연만 있으면 ‘불연’입니다. 깨달음이 있어야 비로소 법연이 됩니다. 인연만 있다는 것 자체로는 다 필요 없습니다. 아버지가 교무니, 삼촌이 교무니라고 해봤자 아무 소용 없습니다. 자신이 깨달아야 합니다.
3. 무량한 법문을 배우겠다는 서원으로 – 지묵경전 < 현실경전 < 무형경전
세 번째, 무량한 법문을 배우겠다는 서원으로 법문을 들어서야 합니다. 좌산님께서는 ‘법문을 듣고 듣고 또 들어서 안 들어도 들릴 때까지 들으라’고 표현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한 번에 글을 쓰고 소설을 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반복’을 통해서 그 속에서 조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수많은 반복’을 통해서 창의와 조화가 일어나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무량한 법문을 반드시 배우겠다는 서원이 있어야 합니다.
경전의 출발은 지묵으로 된 경전입니다. 그러나 지묵으로 된 경전을 읽는 것은 현실에 응용할 수 있는 눈을 갖기 위해서입니다. 더 들어가서는 그 경전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무형의 자성 경전을 가져야 합니다.
4. 내가 활용할 마음으로
그리고 마지막은 내가 활용할 마음으로입니다. 제가 잘 쓰는 예화가 있습니다. 원남교당 발령을 받아서 부교무로서 사회만 보다가 설교를 하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설교가 끝나고 법회가 마쳤을 때, 어느 한 교도님이 “교무님, 설교가 너무 좋았어요, 홈런 쳐버렸네”라고 말씀하셨어요. 제가 그 말씀 듣고 기쁘지 않고 씁쓸했어요. 왜 일까요? 저는 종법사님이나 일원상을 대신해서 풀어서 설교를 했는데 그걸 빛을 쏜 것이라 비유하자면, 앉아 계신 교무님이 거울로 저에게 반사를 해버린 것이에요. 빛을 자신이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한데, 나한테 반사해버리거나 밖으로 반사해버린 거 에요. “설교가 너무 좋았어요”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당신 오늘 설교 잘했다’라고 저를 평가한 것이지요. 저는 평가 받으려고 단상에 오르지 않았습니다. ‘내 소리 하지 말고 대종사님의 법을 전해라’하고 법락(法絡)을 받아 입고 설교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고 좋다, 저 법문 우리 며느리가 들으면 좋겠네”라고 생각하거나, “오늘 교무님 설교 준비 많이 하셨네요”라고 생각하며 법문을 듣는다면, 서로에게 은혜가 안 되지요. 교당 내왕 시 주의사항 마지막에 ‘소득 유무를 반조한 후에 실생활에 활용하라’고 하셨죠. 소득 유무 반조는 그 날 법회 때 얻은 소득, 청법을 통해 얻은 소득을 유무념(有無念)으로 만들어서 한 주간 적용해라고 하신 것입니다. 교당에 온 것이 생활과 연결이 되게 하라고 대종사님께서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앉아서 ‘교무님 말 잘하네’, ‘설교 좋네’라고 생각한다면, 제 마음이 조금 씁쓸하겠죠.
◇ 8대 교서(敎書) 1. 원불교 교전 2. 불조요경 3. 예전 4. 정산종사 법어 5. 원불교 교사 6. 원불교 성가 7. 원불교 교헌 8. 대산종사 법어 |
8대 교서입니다. 원불교 원래 7대 교서였는데 대산종사법어가 생기면서 8대 교서가 되었습니다. 원불교 교전부터 원불교 성가까지는 ‘원불교 전서’에 순서대로 나와있습니다. 원불교 교전은 정전과 대종경으로 나눠집니다. 불조요경은 총 8개입니다. 내용은 두 파트로 나눌 수 있습니다. 금강경부터 업보차별경까지는 반야사상과 인과에 대한 내용입니다. 수심결부터는 선(禪)에 대한 내용입니다. 다음에 예전은 경전 중 ‘경(經)’에 해당합니다. 총서편, 예문편이 있죠. 사실은 한국사회 의례혁신법도 원불교 예전의 내용을 가지고 국가에서 만든 것입니다. 정산종사법어는 이것은 원기 53년도에 나왔습니다. 법어는 세전과 법어로 나눠져 있습니다. 다섯 번째가 원불교 교사입니다. 현재의 교사는 반백주년 기념대회까지의 내용만 나와있습니다. 현재 백주년 교사가 새로 편집 중입니다. 그 다음에 성가. 성가는 지금 200장까지 있습니다. 교헌. 원불교는 공화제도여서, 교헌이 있습니다. 교헌을 보면 일원상의 사이즈 등 세밀한 내용이 전부 나와있습니다. 그리고 추가된 대산종사 법어까지 해서, 8대 교서입니다.
이제 오늘 수업 마칠 텐데요, 제가 부탁을 하나 드릴게요. 오늘 수업에서 누가 제일 고생했나요? 각자가 다 고생하셨겠지만, 이 중에 제일 고생한 사람은 나일 것입니다. 저는 수요공부방 안 빠지고 잘 할테니까요, 여러분들도 이왕이면 새해 새로 먹은 마음을 앞으로도 잘 챙겨서 계속 공부방 나와주세요. 신(信)은 마음을 움직이는 정하는 원동력이라고 했습니다. 정하지 않으면 항상 요란한 것입니다. 신(信)으로 ‘나는 공부방을 가겠다’고 결정을 하면, ‘나는 어떻게 갈 것인가’, ‘일을 먼저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고민합니다. ‘나는 공부방 가겠다’고 미리 결정을 안 해두면, ‘갈까 말까’ 고민하게 되지요. 그래놓고 ‘갈까 말까’ 고민하는 것을 마음공부한다고 말해요. 정해버리면 ‘그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지요. 정하지 않으면 그 때마다 ‘갈까, 말까’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마음은 일어나게 마련이니까요. 저도 수요공부방 하기 싫을 때 있어요(웃음). 한다고 하니 하는 것입니다. 할까 말까 하는 것은 결정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으로 마음대조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信)이 서버려서 마음을 정하면 번뇌의 70%는 사라집니다. 신을 안 세워 놓고 그 번뇌를 가지고 마음 대조하는 공부는 매우 비효율적인 공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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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밑줄, 색깔이 적절히 있으니까, 읽기 훨씬 좋네요!! ㅎㅎ
정말 읽기 좋게, 공부 잘되게 적어 주셨네요 수고해주신 모든 분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너무 읽기 좋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