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은 아테네의 귀족 청년이었다. 심하게 못 생겼던 소크라테스와는 반대로 --- 사람들은 늘 궁금해 했다고 한다. "아니, 어쩜 저렇게 추한 사람에게 저런 뛰어난 지혜가 깃들 수 있단 말인가?" --- 플라톤은 대단히 잘난 청년이었던 것 같다. 전하는 말로는 어깨가 넓어 체격이 좋았다 하고, 긍지 높은 귀족 청년답게 정치에 대한 야심도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문학적 감수성까지! 당시 귀족들이 가장 즐기던 예술은 비극이었는데, 문학 청년이었던 플라톤은 몇 편의 비극을 습작하기도 했다.
그런 플라톤이 소크라테스를 만났을 때, 그는 많은 젊은이들이 그랬듯이 소크라테스에게 홀랑 반해버렸다. 그래서 이 문학 청년은 자기의 습작 노트를 내다버리고 소크라테스와 어울려 다니기 시작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역시 플라톤 쪽이 멋지다.
소크라테스가 재판을 받을 때 플라톤은 그 자리에 있었다. 1차 선고에서 사형이 떨어지자 그는 지인들과 돈을 모아 소크라테스 대신 벌금을 내려고 한다. --- "여기 있는 나의 친구들, 곧 플라톤, 크리톤, 크리토불로스 및 아폴로도로스가 30무나를 제안하라고 나에게 권고하는군요."(『변론』) --- 눈치 없는 소크라테스가 '뉘우침이 없는' 태도를 보이는 바람에 결국 최종 선고에서도 사형이 굳어져 버렸지만.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실 때 플라톤은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그의 대화편에 따르면 그때 병에 걸려 있었다고 한다. ---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플라톤은 병중이었지요."(『파이돈』) --- 처음 이 대목을 읽을 때 나는 얼마나 아팠길래 소크라테스의 최후를 보지 못했을까 생각했는데, 혹시 그는 사랑하는 스승의 죽음을 차마 볼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소크라테스가 죽고 난 후 플라톤은 본격적인 철학의 길에 들어섰던 것 같다. 철학을 위해 문학을 버렸던, 그러나 그 자신의 천부적 재능까지 함께 버리지는 못했던 그는 빼어난 글솜씨로 철학적 대화편들을 써낸다. 무명의 아테네인을 (자기 자신일게다) 내세운 최후의 작품 『법률』을 제외하면, 대화편의 주인공은 언제나 소크라테스였다. 처음에는 소크라테스의 행적을 비교적 있는 그대로 그려낸 작품들을 썼다. 그러다 자신의 철학이 점점 원숙해져서 슬슬 자기 얘기를 하기 시작하면서도 그는 여전히 스승의 캐릭터를 빌었다. 오늘날 플라톤은 서양철학의 아버지로 모든 이들의 존경을 받는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플라톤의 이름으로가 아니라 스승 소크라테스의 이름으로 자기의 철학을 논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한 편의 글도 남기지 않은 채 399년에 독배를 마시고 죽었지만 제자인 플라톤이 이데아의 철학을 논할 때 소크라테스는 대화편 속에서 여전히 살아 있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도. |
첫댓글 위쪽이 소크라테스 아래쪽이 플라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