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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동20,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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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이야기,정보 란 스크랩 레오나르도 다 빈치
유성신 추천 0 조회 45 07.11.11 08:58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1452~1918 

 

 

 

 

 

전성기 르네상스 최초의 대가라는 영예를 차지하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1452년 이탈리아 피렌체 근교의 빈치에서 출생하였다.

 

어릴 때부터 수학을 비롯한 여러 가지 학문을 배웠고, 음악에는 신동인양 재주가 뛰어났으며, 유달리 그림 그리기를 즐겨하여 그의 부친은 친구인 베로키오에게 사사토록 하였다. 이 곳에서 다 빈치는 인체의 해부학을 비롯하여 자연 현상의 예리한 관찰과 정확한 묘사를 습득하여 당시 사실주의의 교양과 기교를 갖추게 되었다.

 

우선 15세기의 사실주의를 완성하였고 더욱이 그것의 정신적인 깊이를 마련하여 가면서 주관적인 순화를 꾀하여 고전 예술에의 길을 택하였다. 그의 특색인 깊은 정신적 내용의 객관적 표현은 그의 놀라운 사실적 표현 기교의 구사에 의해서만 가능하였다.

 

사실상 15세기 초 이래의 르네상스 화가들이 한 걸음씩 더듬어 노력하여 온 사실 기법을 집대성하여 명암에 의한 입체감과 공간의 표현을 성공한 것이 다빈치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15세기의 사실주의를 지양하고 다음에 오는 전성기 르네상스의 고전 양식을 이미 15세기 말엽에 완성하였다.

 

점차 15세기적인 요소를 극복하고 이 주관과 객관의 조화의 고전적 예술의 단계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그의 활동 시기의 반이상이 15세기 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르네상스의 대표적 작가의 한 사람으로 본다.

 


 

 

 

<암굴의 성모 >,1508

 

 

루브르 미술관에 소장된 것과 같은 주제의 유사한 작품으로 두 그림에는 사연이 있다.
1483년 다 빈치는 산 프란체스코 성당의 제단화를 주문 받아 "암굴의 성모"를 그린다. 그러나 성당과의 불화로 인해 완성된 이 제단화는 받아 들여지지 않아 프랑스 왕실의 소장품이 되었고 오늘날 루브르에 걸려 있다.
그러다가 성당과 화해가 이루어져 같은 주제로 다시 그려지게 되어 내셔널갤러리의 "암굴의 성모"가 탄생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두 작품에는 차이가 있다. 루브르의 작품에는 천사 가브리엘이 아기 요한을 가리키고 있지만, 이 그림에는 그것이 생략되어 있다. 또한 이 작품에는 천사를 제외한 다른 이들에게는 후광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외적인 차이 외에 보다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이 작품이 다 빈치에 의해 완성된 점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가 밑그림을 그리고 한 제자가 대부분을 그렸음이 문헌자료에 의해 판명되었다.
이국적이고 신비스러운 동굴배경으로 인해 이 그림이 종교화라는 사실을 잊게 만드는 작품이다.
1880년 9천 파운드에 내셔널 갤러리가 사 들였다 한다.

 

 

 

 

<The Neck and Shoulder of a Man>,1509-1510

 

 

 

 

<Grotesque Portrait Study of Man>, 1500-1505

 

 

다 빈치는 기하학적 원근법이 표현하고 있는 견고성, 입체성이 오히려 화면 전체의 조화를 해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즉 선을 분명히 표시하는 것보다는 인물이나 기타 소제들의 윤곽선을 없애주거나 아주 연하게 해주었다.

 

이것이 '스푸마토'이다. 이는 화면의 원거리감이나 공간감과 더불어 화면 전체에 심오한 깊이를 더해주는 효과를 주며 회화의 소제들이 화면에서 튀는 것이 아닌 전체와 완전히 조화를 이루게 된다.


 

 

 

<Burlington House Cartoon (Mary, Christ, St. Anne and the Infant St. John)>, 1499

 

 

프란체스카나, 보티첼리 등은 어두운 부분에 대해서 밝은 색이 화면을 지배하도록 한다.

 

그러나 다 빈치는 반대로 어두운 부분이 증대되어 신체나 특히 윤곽선이 강조되어 인물을 회화의 분위기에 특히 몰입되도록하고 있으며, 역시 화면의 조화에 기여하도록 한다.

 

 

 


<The Proportions of the Human Figure (Vitruvian Man)>, 1490

 

 

다 빈치는 예술가일 뿐 아니라 위대한 과학자, 발명가였다. 위대한 상상력으로 자동차, 비행기, 헬리콥터, 비행선, 대포, 전차 등 현대인이 사용하는 각종 장비들을 그는 벌써 생각해내고 자세하게 스케치 해두었다.

 

또한 당시 종교적 이유로 사체에 손을 대는 것은 금기시되었는데도 그의 인체해부도는 사실적이고 아주 정교하다.

 

 

 

<Battle Cart with Mobile Scythes>, 1485

 

 

그는 물체와 물체 사이의 거리를 나타내는 투시 원근법의 연구에 힘썼고, 직접 사람의 시체를 해부하여 근육의 조직을 알아보는 해부학을 처음으로 미술에서 쓰기도 하였다.

 

또 유채 기법을 개량하여, 이것에 의하여 처음으로 밝고 어두움의 미묘한 변화를 표현하는데 성공하였다.

 

 

    

 

<성 요한>,1510~1516

 

배경이 검게 처리된 것은 무엇인지 어두운 풍경을 그려 넣으려 했던 것인지도 모르고, 레오나르도 자신의 명령에 따라 제자들이 검게 지워 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제작 연대는 1510년부터 1516년 사이로 이미 레오나르도가 화가로서의 일을 포기하고 해부학이나 지질학 등 과학적인 일에 몰두하였을 때이다. 성요한의 얼굴에는 어느 의미의, 성적의미를 내포한 미소를 담고 있다.

 

반은 남성이고 반은 여성이며, 신적도 아니고 동물적도 아닌 미소가 담겨있는 것은 교묘한 레오나르도 자신의 의도를 잘 나타내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 상이 천사상에서 유래하는 것은 그 성격이 잘 설명하고 있다. 즉 천사는 중성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최후의 만찬> ,1494~1498

 

 

불후의 명작 '최후의 만찬'

벽화 주문자는 로도비코 스포르차로 밀라노를 무적의 요새 도시로 복구하고 롬바르디아의 문화중심지로 일구어낸 슬기로운 군주였지만 한편 무지막지한 독재자였다.

1494년 공작위를 계승한 도미니크 수도회 소속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교회의 제단부 재건과 수사들의 식당 벽화 작업을 서두른다. 레오나르도는 1494년 주문과 동시에 작업에 착수한다.

 

 

 

 

<모나리자>,1503∼1505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모나리자의 초상'이다. 이것은 바로 '리자'라는 이름을 가진 피렌체의 한 부인의 초상화다. 레오나르도의 '모나리자'처럼 지나치게 유명해져 버리면 그런 명성은 하나의 미술 작품으로서 반드시 좋은 것이라고만 할 수 없다.

 

<모나리자>를 보면 육체의 정확한 묘사 위에 정신의 깊이나 생명의 신비가 나타나는데, 이것은 수수께끼의 미소 때문이 아니라, 그가 생각하여 낸 독특한 명암법 때문이다.

즉, 색칠을 할 때에 한쪽을 진하게 하고 다른 쪽으로 갈수록 차츰 엷고 흐리게 하여, 머리나 팔의 은은한 입체감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감탄스러운 것은 모나리자가 놀라울 만큼 살아 있는 것같이 보인다는 점이다. 그녀는 실제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으며 그녀 나름의 영혼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마치 살아 있는 존재처럼, 그녀는 우리들 눈 앞에서 변화하며 우리가 되돌아와 다시 그녀를 볼 때마다 매번 조금씩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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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7.11.12 22:53

    첫댓글 역시 회장님은 멋쟁이야.... 인생을 살면서 최소한 이정도는 가지고 가야지...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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