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사단 29연대 1대대장 류재문 중령은 1973년 1월 28일 아침 파월 한국군의 마지막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 전날 조인된 베트남평화협정이 발효되기 직전이었다. 그에 앞서 68년부터 시작된 평화협정이 체결됨에 따라 주월사령부는 이미 하달된 철군계획을 1월 27일 12시부로 시행하게 했다.
대부분의 철군 준비는 차질 없이 수행됐다. 그러나 28연대의 뚜이호아 지역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연대가 공항으로 이동하기 위해 필요한 1번 도로상의 호아선교가 27일 23시쯤 베트콩에 의해 폭파되고 교량을 경계하던 남베트남군 소대진지가 피탈된 것이다.
베트콩의 공격은 “휴전 발효 당시의 지배지역을 휴전 후에도 인정한다”는 협정조항에 따라 지배지역에 해방전선(NLF)의 깃발을 게양하기 위한 것이었다. 지역 책임을 담당하고 있던 류중령은 날이 밝자 3중대에서 차출한 1개 분대(11명)를 자신이 직접 인솔, 현장으로 향했다. 평화협정 발효가 불과 1시간밖에 남지 않은 오전 7시쯤, 현장에 도착한 류중령은 교량에 꽂혀 있는 해방전선의 기를 발견했다.
“깃발을 뽑아오라”는 대대장의 지시에 따라 교량에 접근한 심재철 중사가 그 중 1개를 뽑아 왔다. 그때 교량 부근에는 베트콩이 매복해 있었다. 베트콩의 매복을 알지 못했던 대대장은 교량 주변 수색을 명령했다. 수색대가 교량을 향해 나가던 7시 40분쯤, 은거하고 있던 베트콩들은 수색대를 향해 기습사격을 퍼부었다.
무방비상태에 있던 지휘부는 대대장을 포함 6명이 전사했다. 수색대의 요청에 따라 포병이 집중포격을 가했으나 동굴 속에서 응사하고 있는 베트콩을 제압하지 못했다. 전사자의 유해 2구도 회수하지 못했다.
그러나 8시부로 평화협정이 발효됨에 따라 “포격을 멈추고 더 이상의 전투도 금지하라”는 상급부대 명령이 접수됐다. 결국 연대장이 나서 장갑차에 설치된 확성기를 이용 베트콩에게 협상안을 제시했다. “아군의 유해가 회수되면 전투를 종료하고 즉각 본국으로 철군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방송과 협상은 2일 동안 계속됐다. 그 결과 29일 오후 백색기를 든 베트콩이 도로 위에 아군의 유해를 가져다 놓고 돌아간 다음 유해를 회수함으로써 상황은 끝났다.
유해가 회수된 후인 2월 1일 남베트남군이 29연대의 지원 하에 수색작전을 계속해 베트콩에 점령된 소대진지를 탈환하고 교량을 복구했다. 그 후 한국군의 철군은 차질 없이 진행됐다. 본대가 3월 14까지, 후발대가 23일 철수를 완료함으로써 8년 6개월간에 걸친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이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파월 마지막 전투에서 전사한 고 류재문 대령은 자타가 인정하는 유능한 장교였다. 그는 중대장시절 재구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각종 교육훈련에서도 두각을 나타냈고 대침투작전 유공으로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파월 후에는 주월사령관 수석보좌관을 역임한 후 대대장으로 보직됐으며 인헌·화랑·을지무공훈장을 잇달아 수상할 정도로 많은 공적은 쌓았다. 그러나 마지막 전투의 실패는 아쉬움이 없지 않았다. 그 같은 평가에 따라 정부는 그를 대령으로 추서했으나 훈장은 수여하지 않았다.
<최용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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