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팽우덕(彭友德)/ 팽신고(彭信古)(1876 ~ 1923)】
"정유재란 명나라 부총병 팽우덕(彭友德) , 유격장 팽신고(彭信古)
팽우덕은 명나라 절강성(浙江省) 항주부(杭州府) 오강현(吳江縣) 사람이다. 본관은 절강(浙江)이고 자는 수경(秀卿)·삼로(三老), 호는 만정(晩亭)이다. 정유 재란 때 중군 부총병(中軍副總兵) 도독첨사(都督僉使)로서 경리표하관(經理票下官)이 되어 명나라 원군을 이끌고 와서 천안 부근 청산(靑山)에서 왜군을 무찌르는 등의 공을 세웠다.
팽우덕(彭友德) 장군의 묘는 원래 부산 만덕산에 있었으나 1797년(정조 21)에 고절산(高節山)으로 이장(移葬)하였다. 팽우덕 장군의 시호는 문충(文忠)이고, 후손들이 창원시 외동에 팽우덕과 팽신고를 추념하는 제단을 설치하였다. 아들은 팽신고(彭信古). 팽우덕의 손자이자 팽신고(彭信古)의 아들인 팽부산(彭釜山)이 조선에 귀화하였는데, 우리나라 절강팽씨(浙江彭氏)는 이에서 비롯된다.
정유재란이 한창이던 1598년 5월26일, 선조가 명나라 파견군 장수인 팽신고를 위해 술자리를 베풀었다. 주흥이 한껏 달아오르자 팽신고가 선조 임금에게 고했다.
“전하. 제가 ‘색다른 신병’을 소개하겠습니다.”
“그래요. 어느 지방 사람이오이까.”
“예. 호광(湖廣)의 남쪽 끝에 있는 파랑국(波浪國) 사람입니다. 바다를 세 번 건너야 호광에 이르는데 조선과의 거리는 15만 여 리 됩니다. 그 사람은 조총을 잘 쏘고, 여러가지 무예를 지녔습니다.”
속천동과 해군 사관 학교 사이로 뻗은 이 산은 속칭 관출산, 고출산, 곶출산이라 하고 있으나 바른 이름은 고절산이다. 이 산에는 팽도독 부자의 무덤이 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지원군 가운데 육군 대도독으로 팽우덕 장군과 그의 아들 신고가 있었다. 팽도독은 1593년 1월에 평양 탈환전에 이어 이여송과 같이 참전하였고 그의 아들은 4월에 왕명으로 하사받은 쌀 10만 석을 군량미로 보급하기도 하였다. 1595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항복서를 위작한 이른바 ‘간빠꾸항서’를 가지고 명나라와 강화 교섭이 진행될 때는 일시 귀국하기도 했다. 정유년에 왜군이 재침을 하자 팽도독은 지원군 6천 2백 명을 거느리고 다시 참전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아들 신고도 ‘어사중승격참장’으로 전공을 세운 바 있었다.
노란 눈동자에 얼굴빛은 검고 사지와 온몸도 모두 검다. 턱수염과 머리카락은 곱슬이고 검은 양모(羊毛)처럼 짧게 꼬부라졌다. 이마는 대머리가 벗겨졌는데 한 필이나 되는 누른 비단을 반도(磻桃)의 형상처럼 서려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누가봐도 영락없는 흑인의 모습이다. 팽신고의 자랑이 하늘을 찌른다.
“이 흑인은 바다 밑에 잠수하여 적선(賊船)을 공격할 수 있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며칠동안 물 속에 머물면서 수중생물(水族)을 잡아 먹을 줄 압니다.”
그러자 선조 임금이 화답한다.
“우리 같은 작은 나라에서 어찌 이런 신병을 보았겠소이까. 대인의 덕택에 보게 되었으니 황은(皇恩)이 아닐 수 없소이다. 이제 흉적(왜적)을 섬멸하는 날이 시간문제가 아니겠소이까.”
이 흑인은 명나라군에 합류한 용병이었다. 팽신고의 말에 따르자면 이 흑인용병은 바다 밑에 잠수하여 적선을 공격하는, 지금으로 치면 UDT 요원? 파랑국 혹은 불랑국(佛浪國)은 1557년 이미 마카오 반도를 조차(통치권을 획득)한 포르투갈의 한문표기이다. 그러니까 이 흑인용병은 포르투갈 사람인 것이다.
팽신고의 말이 맞다면 그야말로 대단한 특수부대 용병이 아닐 수 없다. 며칠동안 물 속에 머물며 온갖 수중생물을 먹고 버틸 수 있다니…. 해귀는 한 사람 뿐이 아니었다. 팽신고는 이틀만인 5월28일 포르투갈 용병 3명을 선조 임금 앞에서 소개한다. 선조는 그들의 칼솜씨를 구경한 뒤 상급으로 은자(銀子) 한 냥을 선사했다.(<선조실록>)
이 포르투갈 용병을 둘러싼 당대의 관심은 대단했던 것 같다. 문헌 곳곳에서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해귀의 기사가 보인다. 보는 사람마다 그 신기한 ‘종족’의 인상착의를 앞다퉈 기록한 것이다.
“명나라 군이 4만7000여 명이었다. 해귀(海鬼) 4명이 있었는데 살찌고 검고 눈이 붉고 머리카락이 솜털 같았다.”(<난중잡록> 3)
“해귀(海鬼)라는 자가 있었다. 남번(南番) 출신으로 낯빛이 칠처럼 까맣고, 바다 밑에 숨어 다니기도 하며 그 모양이 귀신같다 하여 해귀라고 했단다. 키가 큰 사람이 있었는데, 몸이 아주 커서 거의 두 길이나 되었다. 말을 타지 못하고 수레를 타고 다녔다.”(<서애집>)
“군중에 해귀(海鬼)가 넷인데 까만 눈에 붉은 머리털이 가는 털과 같았다.”(<일월록>)
“해귀가 등장했다”는 뉴스는 적진을 공포의 도가니로 빠뜨린 것 같다. 그 해 9월5일 전라 관찰사 황신의 보고를 보자.
“적진을 왕래하는 자의 보고입니다. 왜적이 중국군의 병력수를 묻기에 수·육군을 합해 모두 40만명이라 했답니다. 해귀(海鬼)와 달자(달子·몽골군)도 수없이 출전했고 엄청나게 불려 말했더니 왜적들이 (두려워하여) 모두 얼굴색이 변하면서 짐바리와 잡물(雜物)을 죄다 배에 실었답니다.”
왜 아니 그랬겠는가. 지금의 UDT의 임무를 펼치는 ‘용감무쌍한’ 해귀가 출전했다는 소식에 왜병들도 부들부들 떨면서 철수준비를 했던 것이다.
41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포르투갈 용병의 생생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바로 1599년 2년 철수를 앞둔 명나라 군을 위한 연회의 모습을 담은 ‘천조장사전별도(天朝將士餞別圖)’에서 확연히 나온다.(박정혜의 <세전서화첩>) 한국국학진흥원이 소장한 그림의 맨 마지막 장면 왼쪽 하단에 수레를 탄 ‘해귀’ 4명을 그렸다. 그림을 설명한 표제에는 ‘불랑국(佛浪國)의 해귀 4명은 살결이 검고 누르스름한 머리가 방석둘레처럼 펼쳐졌어도 적선을 잘 뚫었다’고 했다. 몸집에 하도 커서 ‘말을 타지 못하고 수레를 탔다’는 <서애집>의 기록과 정확하게 부합된다.
그렇다면 이 용감한 용병은 선조 임금의 기대만큼 혁혁한 공을 세웠을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명나라 장군 유정이 수 십 종류의 해귀(海鬼)를 이끌고 나왔다고 한다. ~얼굴이 새까만 것이 귀신처럼 생겼고 바다 밑으로 헤엄을 잘 쳤으며, 그 중에 키가 거의 두 길 정도나 되는 거인(巨人)이 수레를 타고 오기도 했다. ~유정은 경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한 치의 공도 세우지 못했다. 왜 해귀(海鬼)를 시켜 물속으로 들어가 왜선의 밑을 뚫어 침몰하도록 하지 않았을까.”(<성호사설> 23권 ‘경사문·유정동정’)
그러니까 명나라군은 해귀, 즉 포르투갈 용병의 재주를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패했다는 것이다. <성호사설>의 저자 이익은 바로 그 점을 꼬집으며 안타까워 한 것이다.
흑인 용병들은 잔뜩 기대를 모았다가 실망만 안겨준채 쓸쓸히 귀국해야 하는 ‘톼출용병’의 신세가 된 것이다.
동양의 역사 속에서 흑인은 곤륜노(崑崙奴), 혹은 흑귀노(黑鬼奴) 등으로 표현됐다. 1713년 나온 시문선집인 <동문선>의 주서문병서(呪鼠文幷書·쥐를 저주하는 글)를 보자.
“사람의 집에는~각각 맡은 바가 있노라. 음식을 만드는 일은 적각(赤脚·계집종)이고, 나무하고 마소를 치는 것은 곤륜(崑崙)이 한다. 아래로 육축(가축)에 이르기까지 각기 구분이 있으니…,”
여기서 말하는 곤륜은 흑인 노예를 가리킨다. 이유원(1814~1888)의 연작시를 모은 <임하필기> ‘이역죽지사(異域竹枝詞)’에도 ‘양흑귀노’를 설명하는 대목이 있다.
“흑귀노는 바로 당나라 시대의 곤륜노.(黑奴唐代崑崙奴). 명사에도 하란이 부리던 오귀가 있네.(明史荷蘭役鬼烏) 구유에 음식을 담아서 말처럼 먹이고(饋以一槽如馬食), 손에 단봉을 들고 다니며 부려 먹네.(手提短棒自相呼)”
무슨 말이냐면, 서양의 흑귀노는 바로 당시 ‘곤륜노’로 통했다는 것. <명사(明史)>에도 “하란(荷蘭), 즉 네덜란드 사람이 부리던 노예를 ‘오귀(烏鬼)’라 했는데 바로 그 흑귀노”라는 것이다. 그런데 주인은 남은 음식을 말구유통 같은 그릇 하나에 쏟아서 흑귀노를 먹이고 항상 목봉(木棒)을 가지고 다니며 부린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임진왜란 때 참전한 포르투갈 흑인용병도 바로 포르투갈인들이 부리던 노예가 아니었나 싶다.
어떻든 조선인들은 이렇게 흑인 만을 다른 동물로 취급하면서 신기해하고 폄훼했을까. 그렇지 않다.
1797년 8월27일 새벽, 동래 구봉 봉수대(동구 초량동)을 지키던 군사가 아연실색했다. 엄청난 규모의 이양선 한 척이 용당포로 근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해괴한 이양선을 본 조선인들은 이른바 ‘멘붕’에 빠졌다. 지휘계통을 통해 배에 타고 있던 선원들의 인상착의가 보고됐다.(<증정교린지(增訂交隣志)>)
“코가 높고 눈이 푸른 것으로 보아 서양사람인듯 합니다. 붓을 내밀어 글을 쓰게 했더니 마치 산과 구름을 그려놓은 듯이 도무지 알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쓴 영어 알파벳을 보고 조선사람들은 ‘산과 구름을 그려놓은 듯 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정동유(1744~1808)가 쓴 <주영편(晝永篇)>에 묘사된 선원들의 인상착의는 아주 구체적이다.
“몸집이 거대했다. 우리보다 두 어 자(60㎝) 컸다. 콧대가 높고 곧아서 위로 이마를 관통했다. 뺨에는 광대가 없었다. 코에서 귀를 향해 평평하게 낮아졌다. 마치 살구씨 모서리를 깎아 놓은 것 같았다. 상의와 바지는 몹시 좁아서 겨우 팔다리를 꿸 수 있을 뿐 무릎을 굽힐 수 없었다. 그들이 쓴 글자는 산 같기도 하고, 구름 같기도 해서 통역관도 알지 못했다.”
조정에서도 이양선 출몰은 엄청난 화제를 뿌렸다. 다음은 10월4일 정조 임금이 대신들과 나눈 대화내용이다.(<정조실록>)
“동래에 온 배는 아란타(阿蘭타)·네덜란드) 사람들인 듯 하다. 아란타는 어느 나라 오랑캐인가?”(정조)
비변사 당상 이서구가 한 치의 주저함이 없이 쾌도난마식으로 브리핑했다.
“예. 아란타는 곧 서남지방 번이(蕃夷)의 무리로서 중국의 판도에 속한 지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명사(明史)>에서는 ‘하란(賀蘭)’이라 했는데 요즘의 대만(臺灣)이 바로 그것입니다.”
정조와 신하들은 이서구의 해박한 지식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특히 우의정 이병모는 이서구를 칭찬하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과연! (이서구가) 저토록 해박하다니…. 역시 재상은 독서한 사람을 뽑아 써야 한다니까요.”
사후에 이 부자를 부산의 만덕산에 안장하였던 것을 정조 21년 2월에 충훈부에서 팽도독의 전공을 높이 찬양하여 안곡동의 임야를 하사하여 팽도독 부자의 무덤을 이장하게 하고 산 이름을 고절산이라고 내렸던 것이다.
이후에 명(明)나라가 청에 망하자 팽우덕의 손자 팽부산(彭釜山)이 조선에 망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