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암미와 루하마(호2:1)
“너희 형제에게는 암미라 하고 너희 자매에게는 루하마라 하라”
호세아의 가정에 일어났던 불행과 이스라엘이 겪었던 심판과 구원은 곧 하나님의 교회를 향한 구원의 약속이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제 이스라엘을 다시 암미(내 백성)이라고 부르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루하마(하나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음)라 부르는 백성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에 범죄한 이스라엘을 이스르엘, 로루하마, 그리고 로암미라고 부르셨습니다. 이는 범죄한 이스라엘에 대한 멸명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장차 하나님은 그들을 다시 이스르엘, 루하마, 그리고 암미라고 부르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신 후에 다시 그들을 용서하시고 새롭게 언약을 갱신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심으로 자신의 신실하심과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그날은 위대한 회복의 날이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심판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통해 당신의 자녀를 온전하게 회복하고자 하십니다.
스스로 포기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끝날 수 있지만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회복이 임할 것입니다.
신약의 히브리서에도 이와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히 12:5-6)"
우리들도 자녀들이 잘못된 길을 갈 때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징계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징계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며 하나님의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본심입니다.
한편 “너희 형제에게는 암미라 하고 너희 자매에게는 루하마라 하라”
이는 서로 이런 말로 위로하라는 뜻입니다. 우리 안에 확신이 없어질 때마다, 어려움 때문에 자신감이 없어지려고 할 때마다 서로 당신은 하나님의 택함 받은 형제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매라고 하면서 격려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이스라엘을 버리시고 겸손한 이방인들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로암미였다가 암미가 된 것을 생각하고 절대로 교만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우리 앞에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늘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리로 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계속 변해 가시기를 바랍니다.
이것만이 하나님을 실망시켜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서로의 관계를 개선하도록 노력하시기를 바랍니다. 서로 더 사랑하고 더 좋은 관계에서 사랑할 수 있도록 노력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하나님을 충만하게 나타내는 길입니다.
1.너희 형제에게는 암미라 하고(1)
회복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온 자를 암미라 불러 주십니다.
암미(עמי)의 뜻은 '너희는 내 백성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됨이라' 입니다.
늘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일깨워 주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는 약속 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주신 규례와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레26:3). 그 약속에는 더불어 우리에게 주어지는 열매들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철따라 비를 주리니, 땅은 그 산물을 내고 밭의 나무는 열매를 맺으리라. 너희의 타작은 포도 딸 때까지 미치며, 너희의 포도 따는 것은 파종할 때까지 미치리니, 너희가 음식을 배불리 먹고 너희의 땅에 안전하게 거주하리라 (레26:4-5).' 원수들이 쳐들어 와도 능히 물리치고 번성하게 되고 창대하게 되는, 창조 때 아담에게 주었던 복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암미(עמי)라는 이름에는 삼위일체의 문자가 다 들어가 있는 것도 흥미로운 점 입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그 분의 영광에 따라 그 분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 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암미(עמי)'라 불러 주십니다.
시편46편10-11절에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만히 있어’라는 말은 두려워하지 말고 요동치 말고 조용히 바라보고 확인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을 확인하는 데는 사람의 대단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가만히 보면 됩니다. ‘내가 하나님 됨을 알라’고 말씀하시는 그 분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모세의 하나님, 다윗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 신구약 성경을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사랑의 하나님께 무거운 짐을 내어놓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들의 작은 신음소리도, 미세한 음성도 하나님은 놓치지 않으십니다. 우리들을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지금 있는 자리에서 우리들을 기다리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날마다 부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무한하셔서 천지에 충만하시며(렘 23:24), 지혜와 능력, 긍휼과 은혜도 충만하십니다. 세상에 신이라고 부르는 자들이 많이 있지만, 참 하나님과 같은 신은 아무도 없습니다. 특히 그는 그의 능력이 크셔서 때때로 기사(奇事)와 능력의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하나님 되심과 그의 영광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열쇠가 되는 장소가 자주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금송아지가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속이는 이스라엘 열 왕들과 바알을 숭배하는 아합에게 속아서 우상 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회개시키기 위하여 선지자 엘리야를 갈멜산에 보내어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제단위에 불로 응답하는 대결을 하게 하셔서 마침내 백성들이 여호와가 참 하나님이 되심을 고백하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을 주로 아는 것과 하나님을 우리 주로 믿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을 몰라서 죄를 짖습니까 ? 하나님을 몰라서 지옥 갑니까 ?
하나님을 압니다라는 고백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습니다. 나의 아버지가 되심을 믿습니다. 나의 주가 되심을 믿습니다.
우리 조상의 이런 이런 하나님이심을 압니다가 아니라 조상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심을 믿습니다라는 믿음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부르신 이유는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세상에 보이시기 위함인데 백성이란 자들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다면 결국 그들은 백성으로서의 자격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일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풍요로운 삶을 도우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을 성도로 부르신 것은 우리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그
리고 그 일을 위해서 우리들에게 힘든 일이 있게 하십니다. 어떤 장애물을 앞에 두고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모습을 통해서 살아계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이 보여지기를 원하십니다. 자신을 바라보지 마시고 하나님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자기를 바라보면 낙심과 원망과 울음만이 남을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바라볼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압니다.
힘든 일이 있어도 그것을 고생이라 여기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나 자신을 바라보게 하고 나를 가르치는 하나님의 도구라 생각하고 자신을 낮추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어떤 힘든 일이라 해도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의 삶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고 그 앞에서 잠잠히 바라는 삶입니다.
2.너희 자매에게는 루하마라 하라
루하마(חמהר) 란 '긍휼을 받는 자' 또는 '사랑을 받는 자' 란 뜻 입니다.
사랑 때문에 자신의 목슴을 내어 주어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는 이름입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내어주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예수님께서 말씀 하셨습니다 (요15:13).
그리고 그 분은 우리를 친구라 불러 주며, 그렇게 자신의 목숨을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내어 주셨습니다. 루하마(חמהר) 란 히브리 글자에는 הר= 물기 , מ = 성령, 흐르다, ח= 은혜 를 뜻 합니다. 다시 말해 물 위에 흐르는 성령님의 은혜라고 글자의 모양에 따라 읽어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 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우리의 몸에 영으로 거하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의 몸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내린다 하였는데 (요7:38), 이 생수가 바로 성령님입니다. 루하마 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존재 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가 루하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서 보호가 됩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있을 때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그들을 지켜 주었듯이 하나님의 은혜가 그 백성들을 늘 지켜 주십니다.
사실 모든 것을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은 사막과 같습니다. 언제 어떤 일을 당할지 모릅니다. 많은 위험이나 고비들이 우리들이 모르는 사이에 넘어 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지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장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부분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가장 무서운 것이 마음의 분노와 절망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떠나시면 우리는 불안에 빠져서 한 순간도 견디지 못합니다. 지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시지 않는 그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자기 생각을 지켜야 합니다. 마음속의 생각이 가는 대로 계속 가면 어떻게 됩니까? 로루하마가 됩니다.
믿는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면 단순히 은혜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짐승이 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거두어 가시면서 다른 일반인들이 가지는 상식이나 판단력까지 다 거두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항상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 인생에는 로루하마가 아닌 루하마가 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자격 논쟁을 해서 루하마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으로 따지면 우리는 모두 실패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면 가능합니다. 활이 그렇게 만드는 것도 아니고 칼로도 그렇게 만들지 못합니다. 전쟁으로도 말과 마병을 가지고도 구원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루하마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습니다.
전쟁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활이고 칼일 것입니다. 빠른 말과 기병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들이 생명을 보장하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직 은혜만을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그들의 부르짖음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으로, 하나님의 긍휼로, 그 조상들과 맺으신 언약에 대한 그의 성실한 이행으로, 그의 주도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 개인과 가정과 교회와 국가와 세계의 복된 삶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 가운데 방황하는 허무한 인생들은 다 하나님께 나아와 구원을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시고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가운데 그분을 섬기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창조주 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다른 피조물이나 헛된 것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에 위배되는 행위를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이 세계를 창조하실 때 세우신 창조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입니다.
성도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여 의로운 길로 걸어 나가야 하나님의 긍휼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세상에 아주 버려두지 않습니다. 마태복음24장21-22절에 환난을 감해주지 않으면 육체를 가진 사람이 하나도 구원을 받지 못하겠기 때문에 환난을 감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환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어 건져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들에게는 어떤 방법으로 하든지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그리고 성도의 편이 되어주셔서 함께 싸워주십니다. 그래서 반드시 이기는 것입니다. 도와 주시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직접 싸워서, 간접적으로 도와서 이기게 하십니다.
3.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심
하나님께서 선지자 호세아의 자녀들을 통하여 어미의 음행에 대하여 심판을 선포하시고 범죄한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자라고 하였고. 내 백성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찾아오셔서 ‘너희는 내 백성이다’, ‘너희는 긍휼히 여김을 받은 자’라고, ‘사랑하는 자’라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아주 버리지 아니하시고 다시 찾아와 불러 주시고, 회개시켜서 구원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창녀는 애인을 앉아서 기다리지만(창38:14-19, 렘3:2) 이스라엘은 고의로 바알을 찾아가서 따라가고 하나님을 배신하는 행위를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호세아의 가정의 비극을 통하여 배신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비통한 심정을 호세아에게 깨우쳐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돌이키도록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이방인은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 「로암미」요, 「로루하마」였으나,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암미」(내 백성)요, 「루하마」(사랑하는자)가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의 주권적 섭리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대할 때 내 백성 아니면 징계하고, 그 징계로 말미암아 회개하였을 때 내 백성이라, 사랑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구약에서 자주 등장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질투하시는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시는 대상을 사단이나 우상 등에게 빼앗기지 않으시는 배타적인 사랑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질투하시는 사랑을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게 됩니다. 어떤 사랑은 포용적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랑은 배타적입니다. 하나님은 나도 사랑하시지만 다른 사람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면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하십니다. 그러나 동일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사탄이나 우상을 사랑할 때, 하나님은 질투하십니다. 그리고 그 질투하시는 사랑으로 나에게 어떠한 형태로든 징계를 하시며, 나를 다시 하나님을 향하게 하십니다.
성경 전체는 바로 이런 이야기의 연속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왕국 백성으로 선택하셨지만, 이스라엘은 이내 이웃 나라의 여러 신들에게 정신이 팔려서 그 신들에게 자신들을 내어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기에 그들을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두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물으시고, 그들을 심판하시고, 그들의 죄를 드러내시고, 그들의 죄에 합당한 형벌을 선언하시고, 진노하심으로 그 형벌을 실행하십니다.
때로는 그 형벌이 가문이나 홍수와 같은 자연 재해로, 때로는 전염병과 같은 질병으로, 때로는 이민족의 침입으로 인한 고난과 패망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 백성을 사랑하시기에 친히 그 백성을 이민족의 손에 내어 맡겨야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보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녀를 체벌한 경험이 있는 부모라면 어느 정도 하나님의 그 아픈 사랑을 가늠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은혜가 많으시고 긍휼의 넘치는 하나님은 그들을 그대로 버려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새로운 운명을 허락하시고 하나님과 새 관계에 들어가게 하시며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게 하십니다. 수가 늘어나는 것보다, 많은 열매를 맺는 것보다, 고향 땅으로 돌아오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은혜와 긍휼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호세아서의 가장 중심 주제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모든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소망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매춘부, 매음녀를 사랑하는 남편에 비유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을 사랑하신 하나님은 우리 나라를 사랑하시고, 우리 개인을 사랑하십니다.
호세아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였습니다. 예수는 우리의 범죄함을 인하여 내어주신바 되어 우리의 벌을 대신 받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의롭다함을 위하여 부활하셨습니다(롬 4:25).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와 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호세아의 뜻이요 이는 곧 구원, 예수라는 뜻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