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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억 전쟁과 역사 글쓰기 윤리—20 세기 중반 중국의 역사전쟁
탕샤오빙(화둥사범대학)
원문 중국어, 번역: 홍용일
망각의 반대어는 기억이 아니고 정의이다. ——한국 학자 백영서
키워드: 기억 전쟁, 전쟁 기억, 이성, 감정, 아이덴티티
20세기 전반기의 중국에서 전쟁과 혁명은 가장 중요한 주제였다. 전쟁과 혁명에 대한 역사 기술과 역사 기억은 단지 학문적인 주제일 뿐만 아니라,중국 사회가 과거의 역사와 어떻게 대면하는가에 관련된 문제이다. 나아가 이 문제는 기억의 영역에서 분쟁과 충돌을 유발할 가능성조차 내재한다. 어떠한 역사적 표현이든 모두 현실 정치와 사회 문화에 대한 이해와 접근방식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역사 기억의 고유한 프레임을 벗어나려 했던 시도는 곧 대중과 정부 차원의 강력한 반응이나 반발을 일으키곤 했다. 군인 작가 장정룽(张正隆)의 『설백혈홍』(雪白血红)은 1980년대 말에 출판되어 역사의 먼지 속에 사라졌지만, 룽잉타이(龙应台)의 작품 『대강대해: 1949』(大江大海:一九四九)로 인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룽잉타이는 작가 특유의 예리함과 문화인으로서의 호소력을 발휘해 반세기 이전의 동북에서 벌어졌던 비극사건을 다시 한 번 현대 중화권의 감각 세계(感觉世界)로 끌어들인 것이다. 그 후 룽잉타이는 일련의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이여,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왜 창춘포위전(长春围城) 은 난징 대학살과 같이 수많은 학술 보고서, 널리 퍼진 구술사, 해마다 이어지는 기념 보도, 크고 작은 기념비, 거대하고 웅장한 기념관, 다양한 정치 지도자들의 헌화, 초등학생들의 대열 경례, 시민들의 묵념, 기념 종소리 등 방식으로 기념되지 않을까? 왜 창춘은 레닌그라드처럼 국제적으로 유명한 역사 도시가 되지도 못하고, 소설에서 다뤄지지도 않고 드라마로 각색되거나 할리우드에서 영화로 만들어지지도 않을까? 또 어느 독립영화 감독이 다큐멘터리를 찍어서 각 나라 공중파 채널에서 방영해 뉴욕, 모스크바, 멜버른의 어린이들 조차 알 수 있는 지명과 역사를 갖춘 창춘이 되지 못하는 걸까? 삼십만 명이 전쟁의 이름으로 굶어 죽었음에도, 창춘은 외부에서는 레닌그라드와 같은 명성을 얻지 못하고, 내부에서는 난징처럼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1 이러한 질문은 ‘대강대해'라는 작품의 자잘한 에피소드의 일부를 반영하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작품은 문헌 분석,역사적 유적 탐색,구술 인터뷰 등 다양한 접근 방법을 통해 그 누군가의 의도적인 힘에 의해 망각됐던 난세 속의 국민당군 장교들(원정군
1 龙应台:《大江大海:一九四九》,香港:天地图书有限公司,2009年版,p.200.
포함)의 운명을 복원하고 재구성한다.
룽잉타이는 ‘패자’의 후손(아버지 룽화이썽[龙槐生]은 국민당 장병) 이었다.
그는 역사 서술에 의해 지워진 사람들에게 기억하고 기념 받아야 할 위치를 되돌려주고 싶었다. “만약 누군가 그들이 전쟁의 ‘패자'라고 말한다면, 시대에 짓밟히고 모욕을 당하고 상처를 입었던 모든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실패’는 우리에게 무엇이 진정으로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 알아 볼 수 있는 혜안을 주었다. 내 눈을 바라보고 솔직하게 말해달라. 전쟁에 과연 ‘승자'가 있었던 걸까? 나는 ‘패자'의 후대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2 룽잉타이는 인도주의적 입장과 평화주의적 입장에서 모든 전쟁의 패자와 피해자에 대해 성토하고 있지만, 그가 ‘진정으로 추구한 가치’가 무엇이었는지는 불명하다. 그것이 현대 문명(가령 자유, 민주, 평등, 인권)을 기반으로 한 보편적 가치인지, 아니면 민족국가의 독립과 부강을 추구하는 존엄을 내건 특수가치인지 구체적인 설명은 없었다. 게다가, 룽잉타이는 내전 시기 국공 간의 분쟁으로 인한 희생과 고통(이러한 내전은 전쟁의 정의와 비정의를 가르는 명확한 경계 설정이 어렵다)과 항일 전쟁 도중에 발생한 난징 대학살, 반파시스트 전쟁의 일환이었던 레닌그라드 방어전을 함께 논의하고 있다. 대중적이고 국가 차원에서의 대규모 역사 기억에 의해 조명된 후자를 통해 ‘망각’된 전자를 끄집어내고자 했던 것이다. 결국 이런 시도는 서로 다른 유형의 전쟁이 지닌 개별성을 지우는 것과 같다. 이런 방식으로 ‘영광스러운 패자’를 기리는 것은 겉으로는 ‘약자’와 ‘비천한 자’에 대한 인도주의 동정을 통해 일약 도덕적 고지를 점하는 데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실제로는 가족, 혈연, 단체에 대한 귀속의식을 드러냄으로써 인정 계보(承认的谱系)를 구축하는 것이었다.이 과정에는 또 입증되지 않은 하나의 전제가 내재되어 있는데, 곧 ‘패자는 본연적으로 정의를 대표한다’는 암묵성이었다.
역사 기억은 부모 세대가 다시 찾아야 할 공정한 역사를 향해 이정표를 제시하며, 또 세대 간의 기억 전승과 한 민족의 정신 구조를 형성하는 데 깊이 관여한다. 20세기 중반 중국의 역사 기억 구축을 위해 국공 양측은 각자의 기억 궁전 건설에 주력해왔다. 특히 창춘 포위전의 경우, 국공 양측의 기억은 완전히 다른 양상을 제시한다. 국민당에게는 수치스러운 경험이었지만, 공산당에게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이긴 전쟁’ 이었다. 하지만 이 승리에는 ‘어두운 피자국’이 섞여 있어, 역사의 진실을 파헤치기 어렵다. 기억과 대조적인 것은 망각이지만, 베이징 대학 역사학과 교수 뤄신(罗新)의 말대로, 망각은 단순히 ‘소극적인’ 정신 활동이 아니다. 망각 연구가 역사학에 가져온 중요한 시사점 중 하나가 바로 새로운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볼 수 있다는 점인데, 원래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역사적 사실은 결국은 다양한 힘의 관계에 의해 선별된, 살아남은 조각일 뿐이다. 그래서 엄청난 양의 사실들은 기억 저장소에서 차단되고 배제되었다. 그리고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 중 상당 부분은 선조들이 후손들이 이해할 필요가 없거나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들이었다. 우리가 모르는 과거는 분명히 기억상실(失忆, amnesia), 또는 역사 기록의 공백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억상실과 공백은 어느 정도 망각(遗忘, forgetting)작용에 의한 것인데, 이는 선조들의 적극적인 행동의 결과임과 동시에 그들의 예상했던 바였다.3 창춘 포위전은 물론이고 더 넓은 시각에서 20세기 중반 중국 내전사에 대해, 우리는 ‘기억’과 ‘망각’이라는 이중 시각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때로는 ‘기억’과 ‘망각’이 상호 대립하여, 한쪽이 망각을
2 龙应台:《大江大海:一九四九》,香港:天地图书有限公司,2009年版,속표지. 3 罗新:《遗忘的竞争》,《东方早报·上海书评》,2015.3.8.
강제하면 또 다른 쪽은 기억을 강화하려고 한다. 또 때로는 기억과 망각이 상생하는 과정에 ‘전쟁 폭력이라는 불의성’은 망각한 채, 승자의 기억만을 강조한다. 그리고 승자와 패자 양쪽 모두 공공 영역에서 일부 역사적 흔적을 의도적으로 지우려는 시도도 한다. 민중들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잊게 하거나’ 일부 역사 지역의 진실을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물론, 민중과 지식인들은 꼭두각시가 아니다. 그들은 때때로 이 역사적 기억과 망각이 교직한 ‘존재의 그물’에서 벗어나 역사적 진실에 대한 감지능력을 복원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룽잉타이의 『대강대해(大江大海): 1949』에 대해 중국의 두 명의 역사학자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이미 작고한 역사학자 가오화(高华)는 이 책에 대한 장문의 논평,“60년 동안의 가족과 국가,누가 그 속에 깃든 모든 마음을 말할 수 있는가 -『大江大海: 1949』를 읽고”를 발표했다. 고도의 분석능력과 재능 넘치는 필치로 쓰여진 이 논평은 정치경제적 대환경이라는 넓은 시점과 역사적 개인 인물이라는 미세한 시각 사이를 넘나들며 1949년 전후 양안 관계의 대변동을 그려내고 있다. 가오화는 이 글에서 룽잉타이가 묘사했던 “비정(悲情) 1949”년의 역사적 함의와 그 여파에 대해 충실하게 끄집어 낸다.이 책에 대한 가오화의 평가는 매우 높다.그는 이 책의 기본적인 특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1949 년 바다를 건너 대만으로 건너온 200만 명의 본토인,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러시아 전장과 남태평양 전장, ‘백색테러’ 속의 ‘외성인'(外省人)에 대한 잔인한 박해, ‘조국 군대'에 대한 ‘본성인’(本省人)의 기대와 실망, ‘아시아 고아’로 전락한 비애에 이르기까지 『대강대해: 1949』가 그리는 형상은 매우 복잡하고 장면 또한 웅장하다. 책 전체에 가족과 국가가 녹아 있으며 개인과 가족의 변화를 통하여 시대와 국가의 역사적 흐름이 개인의 운명에 미친 거대한 영향을 묘사하고 있다. 또 작가의 인문적이고 인도적인 역사관이 거대 담론에 잠식된 역사 속에서 한 줄기 한 줄기의 생명을 복원하여 그 의미와 가치를 부여했다”.4가오화는 이어서 “대강대해”의 목적은 “1949 년 국민당 정부의 대패가 촉발한 중국 인구의 대이동과 이주를 보편적 가치로 성찰하고, 시대에 의해 짓밟히고 더럽혀지고 상처받은 모든 이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에 있다고 지적한다. 룽잉타이는 이 책에서 거대한 이데올로기와 담론에 가려져 있던 역사적 장면을 묘사하는 데 초점을 맞추면서 1949년과 관련된 일련의 주요 역사적 사건과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그녀는 또 전쟁의 공과를 따지지 않는다. 오로지 내전으로 희생된 사람들과 대만에 이주한 사람들에 초점을 맞추고 그들에 대한 깊은 동정과 존경심을 드러낸다.5 “가오화가 포착하고 있는 룽잉타이의 핵심가치는 ‘세상의 보편적 가치’이다. 그리고 룽의 “인문적이고 인도적인”역사관이, 소시민의 삶과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서, 이러한 시도가 정치적이고 지배적인 이념적 서사를 해체하는 데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점을 충분히 인정한다.
가오화가 보기에 룽잉타이는 ‘내전의 공과'에 대한 가치 판단을 보류한 채 인도주의 시각에서 역사를 서술하고 있으며 전쟁의 희생자와 생존자 모두 역사적 기억의 저울에 동등하게 올려놓는다. 하지만 룽잉타이 자신이 ‘패자의 후대'임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또 무엇을 의미할까? 룽잉타이가 패자의 가치, 생각, 행동을 수용하고 있다는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전쟁의 패자이기 때문에
4 高华:《六十年来家国,万千心事谁诉——读龙应台《大江大海一九四九》札记》,《领导者》总第34 期,2010.6.
5 高华:《六十年来家国,万千心事谁诉——读龙应台《大江大海一九四九》札记》,《领导者》总第34 期,2010.6.
동정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는 것일까? 룽의 말대로 전쟁에 승패가 없다면, 왜 그녀는 패자의 후대를 그렇게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일까? 한편으로 『대강대해』는 소시민에 초점을 맞춘 인도주의적이고 동정적인 서사 속에서 역사적 화해를 시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가족과 국가의 틈새, 그리고 국공 양측 사이에서 결연히 양자택일의 의지를 보인다. 결국 룽잉타이가 돌을 들어 자신의 발을 부수는 격이 아닌가 라는 지적에 대해 가오화는 핵심을 찌르는 훌륭한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정작 룽잉타이 본인이 동의할지는 모르겠지만). “국민당 정부는 국민의 지지를 잃고 신기루처럼 취약해지며 결국 몰락의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1949 년초에 장제스의 총통 바통을 이어받은 천청펑(陈诚奉)은 뼈아픈 경험을 교훈 삼아 ‘인민이 우선이고 민생이 우선이다'를 대만 통치 철학으로 선언했다. 그는 ‘삼칠오 감세’(三七五减租)를 시작으로 사회 기반을 다져가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시도는 대만의 성패와 직결된 것들이었다. 룽잉타이는 1949년 망명이 아닌, 패배를 딛고 일어나 새로운 가치를 다져 나간 대만인들에 자부심을 느꼈을 것이다”.6
가오화가 『대강대해』를 극찬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중국 인민대학교 청사연구소(清史所)의 양녠췬(杨念群) 교수는 룽잉타이의 역사관을 ‘총알받이 역사관’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1949 년 중국 국공내전을 포함한 모든 전쟁에 대해 단순한 인도주의적 훈계로는 이해할 수 없다. 환갑의 나이에 근접한, 견식이 풍부한 ‘빨간 모자’(小红帽, 독일의 그림 형제의 동화에 나오는 주인공 소녀-역자 주)룽잉타이가 역사의 정글에 발을 들여 놓은 후 자신의 관점과 일치하지 않는 많은 늑대 할머니를 만났을 것은 불 보듯 뻔하다. 하지만 ‘빨간 모자'는 너무 강인했고, 매번 날카로운 언변으로 늑대 할머니를 성공적으로 쓰러 뜨릴 수 있었다. 따라서 말레이시아 산다칸 수용소에서 국민당 포로를 학대하고 죽인 대만 감독관, 피비린내 나는 화이하이 전투에서 배를 곯아야 했던 최전선의 국민당 군대, 죽음을 무릅쓰고 포탄을 뚫고 나간 인민해방군 병사들, 이들은 모두 전쟁의 먼지 속에서 표류하는 슬픈 줄인형처럼 각종 역사적 사건에 조종된다. 국적, 국경, 해협을 초월한 이 장엄한 서사가 드러낸 것은 시대의 ‘억눌린 상처’였다. 그들의 흥건한 피가 흩뿌러져 이 시대의 메말라버린 사람들의 마음에 스며들고 있는 것이다”. 짓밟히고 굴욕 당하고 부상을 입은 패자들의 이야기, 결국 전쟁에서 승자란 존재하지 않는다. 전쟁의 폭력성이 경중(轻重)과 경계(界线)에 관계없이 비난받을 때 전쟁의 의미는 완전히 해체되며, ‘총알받이론’은 순식간에 사람들의 눈물을 자극할 것이다. 그리고 그 눈물에 가려 ‘정의론'은 승자와 패자에 대한 논의 속에서 초점을 잃게 된다.7양녠췬이 볼 때 소시민의 희로애락을 다룬 이러한 종류의 역사 서사는 본질적으로 그 어떤 차이도 없는 슬픈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으며 전쟁의 의미를 완전히 해체해 버린다. 즉 전쟁에 참여하거나 헌신 한 병사들의 삶의 주체성을 완전히 용해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전쟁 참가자들은 철저히 무시받고 이용당하는 ‘총알받이’로 전락되었다. 전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당사자들은 역사 기억의 영역에서 다시 살아난다. 하지만 이 부활은 ‘생명의 의미와 가치’라는 잣대 속에서 또 한 번 내려진 사형선고의 다른 이름이었다. 더욱이 양녠췬은 룽잉타이의 사료 수집과 역시 기술 방식에 의문을 제기한다. ‘인도주의적 입장’에 모순되는 증거를 제거해버렸기 때문에 그녀가 진정으로 역사속으로 스며들어갈 가능성을 차단했다는
6 高华:《六十年来家国,万千心事谁诉——读龙应台《大江大海一九四九》札记》,《领导者》总第34 期,2010.6.
7 杨念群:《龙应台炮灰史观的煽情与阙失》,共识网,2013.12.15.
것이다.
이는 20 세기 중반 중국 역사가 직면한 핵심적인 질문과 관련된 문제이기도 하다.
개인 차원의 의견 불일치 경험을 기록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역사적 화해를 촉진하는가, 아니면 방해하는가? 위대한 역사적 화해는 어떻게 가능할까? 전쟁의 상처는 어떻게 치유될 수 있을까? 전쟁에 참여했던 개인들의 구체적인 감정과 상황 이해를 바탕으로, 개인과 시대의 만남에 대한 논의가 가능할까? 동정적인 이해는 곧 비판과 성찰의 강도 약화를 의미하는 걸까?대인 관계,세대 간,정당 간 대화와 화해에서 역사적 기억과 역사 쓰기는 어떤 역할을 해야하는가? 2월 28일 사건을 다룬 글에서 우나이더(吴乃德)는 역사적 기억의 진정성과 모호성 사이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민족적인 상상력과 열망에 공명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기억을 잘라내야 한다. 따라서 ‘기억'과 ‘역사'는 종종 완전히 중첩되는 것은 아니다. 집단 기억은 비역사적(ahistorical)이고, 심지어 반역사적(anti- historical)이기기도 하다.어떤 사건에 대해 역사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곧 그 복잡성을 이해한다는 의미이다. 또 한 걸음 떨어져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고, 도덕적 모호성을 받아들이는 것이어야 한다. 집단 기억은 역사의 모호성을 단순화하거나 심지어 제거하기도 한다. 그러나 단순화되고 심지어 거짓으로 얼룩진 역사적 기억이 도덕적 교훈과 계시로 가득 차 있더라도 사회적 이성과 진실 추구에는 위배된다. 또 역사 학자, 미래 세대, 무엇보다도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끊임없이 도전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모호한 역사적 기억은 일부 사람들의 열정에 불을 붙일 수 있지만, 다른 일부 사람들에게는 필연적으로 그 호소력을 잃게 된다. 서로 다른 에스닉 집단(族群)과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단체는 제각각 서로 다른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호한 역사는 공통의 역사적 기억을 만드는 데 장애를 초래할 것이다. 공유된 역사적 기억이 국가 형성의 핵심 조건 중 하나라는 것은 의심할나위 없다. 어쩌면 일부 역사학자들이 강조했듯이 ‘역사적 기억이 학문적 기준에 근거하지 않는 한, 역사에 대한 우리의 책임은 공허한 껍데기에 불과하다'고 할 수도 있다”.8
룽잉타이 자신도 역사 습작의 국한성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같다. 그녀는 자신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스고 있다“어떤 사건의 전모(全貌)를 다 알려줄 수 없다… 그 누구도 그 전모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큰 국토에서 그렇게 복잡한 역사, 그렇게 서로 갈라진 해석들, 또 그렇게 모호하고 복잡하게 뒤엉킨 진실들과 순식간에 사라져버려 복원이 불가능한 기억들, 그래서 나는 ‘전모’에 대해 회의적이다. 설사 그 전모를 알고 있다한들, 어떤 문자와 표현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단편적인 것들로 그 전모를 제시하는 역사이미지를 구축하려고 했다. 내가 알고 있는 것들, 기억하고 발견하고 느낀 것들은 모두 지극히 개인적인 감수와 전달에 불과하다.9
우나이더가 주목했던 것은 ‘모호한 역사기억’과 ‘도덕적 모호성’이었다. 전자는 절단, 압제, 의도적인 인도, 망각 과정을 겪은 후에 만들어진 ‘두시뭉실한 이미지’(笼统印象)이다. 후자는 특정한 역사적 변화 속에서 어떠한 행동에 대해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가는 ‘전지전능'하지 않으므로 도덕, 가치, 이해관계에 대한 자신의 편견과 그러한 편견이 역사 인식과
8 吴乃德:《历史记忆中的模糊与未知》,台北:《思想》,第21期,2012.5.
9 龙应台:《大江大海:一九四九》,香港:天地图书有限公司,2009年版,p.174.
해석에 미칠 수 있는 오해의 소지를 냉정하게 성찰해야 한다는것이다.10 슈워츠(Benjamin Isadore Schwartz)는 "인간의 실존적 복잡성"에서 역사 연구의 끝없는 딜레마를 찾아낸다. 룽잉타이는 ‘다른 시각'에서 역사를 재조명하려는 시도를 했지만, 극도로 개인적인 접근법을 통해 ‘일부를 통해 전체를 드러내려는 역사적 시각'을 전달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깨달았다. 그러나 ‘패자'를 위해 펜을 들고자 하는 열망이 그의 아버지 세대에 대한 서술을 너무나 급진적으로 치우치게 만든다. 역사를 재현하려는 그의 초기 의지는 복잡한 역사와 인간성의 복잡함을 덮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복잡성에 대한 이해와 기억이 충만할수록 독자들은 쉽게 감정적으로 얽매이지 않게 된다. 대부분의 독자가 역사에서 포착하려는 기억은 종종 자신의 자아가 투영 된 정체성과 감정이며, 역사라는 강물 속에서 건져 올리고 싶은 것은 종종 뒤집혀진 자신의 모습인 것이다.이것이 곧 역사와 기억 사이의 영원한 긴장관계이다.
우나이더가 얘기했던 것처럼 “단순화되고 심지어 거짓으로 얼룩진 역사적 기억이 도덕적 교훈과 계시로 가득 차 있더라도 사회적 이성과 진실 추구에는 위배된다. 또 역사 학자, 미래 세대, 무엇보다도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끊임없이 도전을 받게 될 것이다”. 대만 본토 주민들에게 패자 국민당군은 막강한 힘을 가진 외부 침입자였다. 약자 밑에 또 약자가 존재한다는 것은 종종 정의와 윤리의 경계를 모호하게 한다. 앞서 인용한 쉬줘윈(许倬云)이 긍정적으로 평가했던 본토 상류층 엘리트의 대만 유입에 대해, 일부 본토 엘리트들은 지역 정치 및 경제계 엘리트의 정치 참여를 강력하게 억압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인식한다.
중국 본토의 20세기 중반 ‘이전의 30년’과 ‘이후의 30년’사이의 ‘역사적 화해' 이슈를 논의할 때, 저자는 “사회 공동체의 자기 재생과 문화 전수를 위해 기억을 현대화하는 것은 필수적이지만 매우 복잡한 과정"이라고 지적한적이 있다. 기억은 절대적으로 증오를 부추기는 목적으로 사용되어서는 안되며, 역사 기록도 마찬가지이다. 기억은 민족의 자기 치유 과정에 가까우며, 그것을 표현하는 행위 자체가 사회의 집단적 상처를 지속적으로 치유하는 특별한 형태가 된다”11.이 주제는 대만 해협 양안의 지식인, 정치인, 그리고 국민들이 볼 때 똑같이 중요성과 시급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 주제의 가치를 보다 폭넓고 깊게 탐구하고, 적절한 방법을 모색하며 성찰해야 한다.
지식인과 대중에게 지속적으로 좋은 반향을 일으켰던 또 다른 작품 세트는 2009 년에 대만(중국어 간체판으로는 2013 년 베이징 산롄출판사에서 출판)에서 출판된 미국계 중국인 작가 왕딩쥔(王鼎钧)의 4 부작 회고록이다. 이 중 특히 1945년에서 1949년 사이의 내전 역사를 국민당 헌병과 인민해방군 포로의 시점에서 다룬 『관산탈로』(关山夺路)는 가오화, 왕치성과 같은 역사학자들로부터 높은 찬사를 받았다. 왕치성은 왕딩쥔의 접근 방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왕딩쥔은 늘 ‘작은인물’의 회고록을 집필하고 있다고 강조해왔다. 그는 개인의 명성과 이익보다는 세상의 변화에 더 주목한다. 또 격변하는 역사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거스를 수 없었던 평범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그려내려고 시도한다. 그는 전문적인 관찰력으로 난세의 다양한 인간관계와 일상 생활을 세밀하게 묘사했으며,
10 이에 Timothy Brook 교수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가 있다."역사학자는 도덕적 기준을 설정하거나 도덕적 지식을 제작하는 역할이 아니다. 역사학자의 목표는 과거의 이야기나 현재의 독자를 비판하기 위해 잘못된 입장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시점과 위치에서 도덕적 가치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어떤 조건들이 관련되었는지 연구하는 것에 있다.” 상세한 내용은 티모시의 저서 《秩序的沦陷:抗战初期的江南五城》,潘敏译,商务印书馆,2015 년,p.281 참고.
11 唐小兵:《让历史记忆照亮未来》,《读书》,2014年第2期。
십여 년의 경험과 인식을 바탕으로, 고요하고 담백하게, 선정적이지 않으면서도 거창하지도 않은 필치로 영혼을 달랜다.12 회고록 성격을 띤 『관산탈로』는 역사적 서사에 대한 중층적인 긴장감을 제시하며, 이러한 긴장과 서술적 딜레마는 작가의 서술 층위를 더욱 풍성하게 한다. 이는 독자가 인식하는 일반적인 역사인지와 틀에 대한 도전하는 것이기도 했다. 국공 양당의 실패의 원인과 결과를 탐구하는 측면에서 왕딩쥔은 패배한 국민당과 그 군대에 대해 동정심이 없는 듯하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강자와 약자사이의 역학관계 전환을 모색하는데 소비하고 있다. 패자 일본과 국민당, 소련군에 대해, 특히 승전국으로서의 소련에 대해서도 그 어떠한 공감인식을 보이지 않는다. 대신 패자의 ‘존엄성'에 대해 더 많이 기록하는 것을 선택한다. 그런 의미에서 왕딩쥔의 역사 기억의 가치 기반은 단순한 인도주의적 논리가 아니며(물론 책 전체에서 그는 항상 약자와 패자에게 동정심을 보인다), 승자는 왕이고 패자는 적이라는 패권주의적 논리도 아니다. 의미심장한 그의 문제제기는 또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이어진다. 20 세기 중반 전쟁의 기억에 대한 우리의 근거를 어디에 두어야 할까? 전쟁에서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를 엄격하게 구분할 수 있을까? 이처럼 전쟁의 도덕적 모호함과 감정적 강렬함이 독특하게 뒤섞여 우리의 이성의 댐을 무너뜨리고 있다. 가령, 책의 제1부에서 다뤘던 전쟁 승리 후 ‘일본 포로와 일본 교민’에 대해, 왕딩쥔은 패자 일본군이 체면과 존엄을 지키기 위해, 정돈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으며 그들에게 그 어떤 비애의 표정이나 아첨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고 묘사한다. 작가의 말을 빌면 “어쨌든 일본 군인은 우수한 자질을 갖고 있었고 일본 정부는 그들을 낭비했다”. 13 이와 대조적으로 왕딩쥔은 국민당 군대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전장에서 군관은 지고지상의 권위를 갖고 있었다. 그들은 적과 내통한다는 핑계로 혹은 전투력이 엉성하다는 이유를 내세워 수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고급 장교들은 이렇게 수 천명 병사의 생명을 담보로 진급과 투항에 이용해왔다. 그들의 부하들은 재편을 거친 후에도 이 전장에서 죽지 않으면 또 다른 전장에서 죽음을 면치 못했다. 그래서 어떤 이유를 불문하고 나는 군인 사이의 이러한 우월론에 반감을 갖고 있다.” 14똑같이 전장의 패자 가족이었지만, 일본 여성들은 물건을 팔고 음식을 행상하며 생계를 유지하며 일본으로 돌아갈 여비를 벌려고 애썼다. 또 중개인의 횡포에 못 이겨 중국 장교에게 몸을 팔아 일본 남성의 품위를 지켰다.
왕딩쥔의 역사적 기억은 역사 앞에서 인간의 감정과 윤리의 복잡성을 잘 보여준다. 침략과 반침략 전쟁이라는 측면에서 중국의 저항은 당연히 정의로운 것이었지만, 이 정의가 중국 군인과 민간인의 행동이 정의롭거나 윤리적이라는 것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패전국으로서 일본군과 그 가족들은 전쟁의 기억 속에서 동정받는 약자가 아니라 마치 승전국으로부터 존중받아야 할 것처럼 혹은 ‘약자의 존엄성'을 획득한 것처럼 묘사된다. 승리가 곧 정의를 상징하는 것은 아니며 패배 또한 반드시 굴욕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왕딩쥔은 우리에게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사람에 대한 이해와 태도, 감정이 국민국가의 틀을 초월할 수 있을까? 우리의 국가적 정체성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역사 속 특정 개인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전쟁에 대한 역사적 기억이 우리와 그 시대 사이의 본질적인 연대감을 구성할 수 있을까? 역사학이 고발의 역사학(控诉史学)이나 성패에 따라 선악이 갈리는 역사학(成王败寇史学)을 넘어서는 것이라면, 역사학의 의미는
12 王奇生:《真实的历史比小说精彩——读王鼎钧回忆录》,新京报书评周刊,2013.3.29. 13 王鼎钧:《关山夺路》,三联书店,2013年版,p.78.
14 王鼎钧:《关山夺路》,三联书店,2013年版,p.78.
무엇일까? 패자에 대한 온전한 이해와 존중의 논리에 익숙해질 때, 성찰과 비판은 휘청대는 신기루에 그치지 않을까? 다시 말해, 전쟁에 대한 기억이 도달할 수 있는 역사적, 도덕적 목표를 어디에 두어야 할까?
결론
인류학자 왕밍커(王明珂)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역사에는 단 하나의 목소리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의 시간 속에서 다양한 사회 집단이 자신들의 과거를 애써 이야기하려고 한다. 또 그런 이야기를 일반화하고 보편화 하여 당대의 사회적 기억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에는 타인의 기억을 삭제하는 작업도 따른다. 자서전, 전기, 그리고 구술사를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과거를 사회를 향해 강력하게 드러내는가 하면, 또 일부 사람들의 과거는 사회에 의해 의도적으로 발굴되고 재구성된다는 점이다. 이는 과거에 대한 해석권을 둘러싼 싸움이며, 또 인정과 권력을 둘러싼 투쟁이기도 하다. 15 20 세기 중반의 중국의 역사적 기억은, 정부 주도의 역사적 기억이든,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구성한 회고록이나 구술사든, 혹은 작가와 학자들의 역사적 글쓰기를 포함하여, 모두 자신들의 20 세기 중반 중국에 대한 역사적 이해와 인식 구조를 ‘일반화'하고 ‘보편화'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런 글쓰기와 기억의 정서적 동기를 파헤쳐보면, 일반적으로 휴머니즘적 가치관, 혹은 역사의 성패에 대한 이성적 반성이 그 이면에 자리잡고 있다. 전자는 종종 비평가들로부터 ‘연민이 이성을 가리고 있다'는 비난을 받았고, 후자는 종종 ‘이성적인 반성이 역사적 구조와 행동 속에서 희생한 개인을 묻어버리고 있다'는 지적을 받아 왔다.16 특히 일부 학자들은 이 시기에 개인적인 역사적 기억들이 크게 늘어난 것(예를 들어, 수년 동안 출판된 수많은 회고록과 구술사 등)이 사람들 사이, 정당간, 세대간의 화해를 촉진하는 대신 중국 사회를 더욱 분열시키며, 역사적 기억의 가치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 것이라고 지적한다.20세기 중반 중국의 역사적 고통을 인지하고 기억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단순히 정치와 전쟁의 비극을 비판하는 것을 넘어서 역사의 구조를 더 깊이 이해하고, 장엄한 역사의 시간 속에 숨겨진 근본적인 구조적 요인들을 발굴해야 할 것이다. 이는 역사적 기억과 역사 쓰기를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방법이다. 역사적 기억과 글쓰기는, ‘부분적'이긴 하지만 깊이와 구체성을 갖춘, 어쩌면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과정과 비슷하다. 그래서 각기 다른 역사적 회상자와 작가들이, 자신 ‘장님’(즉 개인의 편향성, 지식과 정보의 제한성, 표현력과 기억력의 미흡함 등)임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코끼리가 한 번에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는 넓은 전체인 것처럼,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작가는 자신의 역사적 글쓰기를 더욱 신중하고 겸손하게 다루게 된다. 20 세기 중반 중국의 역사적 기억을 조망하면, 룽잉타이의 역사 습작이나 왕딩준의 역사 기억이 중국 현대 사회에서 역사적 자원을 동원하여 계몽의 불씨를 지피는데 결코 부족함이 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여기서 심도 있게 고민해 볼 가치 있는 주제 중 하나는‘가치적 계몽이 반드시 역사적 진실성을 전제로 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이다. 역사와 현실을 비추어보면, 계몽과 역사 사이에는 변하지 않는 긴장감이 존재하며, 이 긴장감과 딜레마로 인해 발생하는 논란과 충돌은 항상 중국의 당대 공공 생활에 거친 파도를 몰아왔다. 우리가 특정한 역사 페이지를 되짚어보고, 재평가하고, 기록할 때 반드시
15 王明珂:《自传、传记与口述历史的社会记忆本质》,台北:《思与言》,34卷第3期,1996年。 16 这部分的思考,得益于与中国社科院近代史研究所李志毓博士的一次深入讨论,谨致谢意。
신중하게 대해야 할 심층 이유는 바로 이런 점에 있는 것이다.
■ 탕샤오빙 (唐 小兵/TANG, Xiaobing)
화동사범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역사학 박사, 박사과정생 지도교수, 하버드 옌칭 방문학자.
연구 분야는 주로 청나라 말기 신문사, 20 세기 중국 지식인사와 사상문화사,
좌익문화와 중국혁명, 회고록, 구술사 등 20 세기 중국의 역사기억에 집중되어 있다. 선후로 “현대 중국의 공공여론 - <대공보> '주간 논문'과 <신고> '자유담'을 중심으로”, “사거리의 지식인”, “민국과의 만남”, “서재 위의 근대 중국-어느 누군가의 독서사”, “북미학종(北米学踪): 밴쿠버에서 보스턴까지” 등 저서를 출판했다. 주요 성과는 “China Information”, “뉴스 및 커뮤니케이션 연구', “사림(史林)”, “중공당사연구”, “21 세기”(홍콩), “사상”(타이베이) 등 중국 국내외 저널에 발표했다. 화동사범대학 제 1 회 청년교사 육인(育人)공로상, 2014 년 '동양역사평론'지가 선정한 중국 우수 청년역사학자 명예칭호(전국 15 위)를 수상했다.
주요 저서: ‘전쟁, 고난 및 뉴스 - 항일전쟁기 민간 신문의 여론 동원’, “뉴스 및 커뮤니케이션 연구”, 2015 년 제 8 호. ‘민국시기 지식 청년들의 결사 및 좌익화 - 1920- 30 년대의 상하이를 중심으로’, “중공당사연구”, 2017 년 제 11 호. ‘포스트 5· 4 시대의 가족혁명 및 사회개조 사조-“중국청년”, “생활주간”, “신보”를 중심으로’, '톈진사회과학”, 2022 년 2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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