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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02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성령강림 후 제10주)
벧엘에서 브니엘까지
창32:22~31; 롬9:1~5; 마14:13~21
오늘 창세기 본문은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씨름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몇 주 전 창세기28장에서 읽은 장면은 고향을 떠나 멀리 타향으로 도망가는 길의 어느 밤이었다면, 오늘 읽은 32장 장면은 반대로 외삼촌 집 하란에서 고향땅 가나안으로 돌아가는 길의 어느 밤이었습니다. 그는 하란에서 20년이 넘는 오랜 타향살이를 하면서(머슴살이라고 해야겠지요) 아내 넷과 10명이 넘는 자녀를 얻었고, 많은 식솔과 소유와 가축 떼를 거느린 가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출발은 가볍게 했을지 모르지만, 고향에 점점 가까워 졌을 때, 그의 마음에 있는 돌맹이는 점점 커져서 크고 무거운 바윗돌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형 에서와의 문제였지요. 오늘 읽은 32장 본문 앞부분을 보면, 야곱은 사람(심부름꾼)을 넣어서 형의 속내를 타진합니다. 하지만 심부름꾼이 형 에서를 만나고 돌아와서 전한 말은 그에게 절망적인 소식이었습니다. 에서가 400명의 사람을 거느리고 자기를 치려고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재빨리 여러 가지 전략을 짜기 시작합니다. 우선, 자기 일행과 가축 떼를 두 패로 나눕니다. 한 패를 치더라도 남은 한 패는 피할 시간을 벌려고 하지요. 또한 형의 마음을 누그려뜨릴 볼 요량으로 여러 종류의 많은 가축들을 선물로 준비합니다. 하지만 이것도 한꺼번에 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몇 패로 나누어서 줄 계획을 세우지요. 말하자면 시간차 선물공세를 하려고 하는 것이었지요.
오늘 본문에 보면, 야곱은 밤에 식솔들과 딸린 모든 소유를 먼저 강 저편으로 건너보냅니다. 오늘 25절에 보면, “그 밤에... 뒤에 홀로 남았는데” 그랬습니다. 한밤중에 그는 홀로 남았습니다. 이렇게 만반의 준비를 끝내고, 형의 반응을 기다려보지만, 여전히 두려움과 외로움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는 20년 전 한 밤에 벧엘에서 느낀 두려움과 외로움을 기억해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번 밤은 뭔가 좀 달랐습니다.
창세기28장에서 야곱이 고향집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도망치는 그날 밤에도 두려움과 외로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야곱의 두려움과 외로움은 도망자 야곱이 갖는 매우 수동적인 두려움과 수동적인 외로움이었습니다. 수동적인 두려움은 숨게 만들고, 수동적인 외로움은 그 외로움을 달래줄 밖에서 오는 뭔가를 원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제 야곱은 적극적으로 두려움과 고독에 맞닥뜨리게 됩니다. 밤에 홀로 남는다는 것은, 스스로 고독 속으로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이제 야곱이 만난 “홀로”는 소극적인 홀로가 아닌, 적극적인 홀로가 되었습니다.
“홀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러바도>라고 하는데, 직역하면, “자기의 몫을 위하여”라는 뜻입니다. 세상에서 “자기의 몫”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얻는 길은, 바로 홀로 있어 보는 것입니다. 자기의 진정한 삶의 몫이 무엇인지를 깨달으려면, 이 땅에서 자신의 일이 진정 무엇인지 깨달으려면, 홀로 있어보아야 합니다. 홀로 있어보는 것, 이것은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는 아주 적극적인 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유대 광야에서 홀로 있는 시간을 가집니다. 모세도 백성의 지도자가 되기 전 미디안 광야에서 홀로 있는 시간을 가지죠. 사도바울도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난 뒤에 아라비아 사막에서 홀로 있는 시간을 갖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 야곱의 얍복 강가에서의 씨름 경험을 하루 밤새 일어난 일로 보게 되지만, 사실은 이 사건은 우리에게 어떤 경험의 본보기를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야곱의 이 경험을 단지 하룻밤에 일어난 사건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이 “홀로”의 시간은 예수님처럼 40일이 될 수도 있고, 모세처럼 40년이 될 수도 있으며, 바울처럼 2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야곱의 이 적극적인 홀로를 “고독”이라고 부릅니다. 소극적인 홀로는 “외로움”입니다. 고독은 외로움과는 다릅니다. 외로움은 관계의 단절에서 오는 결핍의 경험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밖에 있는 대상을 통해서(그게 사람이든, 사물이든, 오락이든) 외로움을 해소해 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고독은 적극적으로 홀로 있음으로써 자신의 내면과 연결을 시도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진정한 자기를 발견하고 또 모든 것의 바탕이신 하나님을 발견하는 자리입니다. 이 땅에서 “자기의 몫”을 발견하는 것, 그것이 “고독”이 주는 열매입니다.
야곱은 한 밤중에 홀로 있습니다. 그때 “어떤 이”(히브리어:<이쉬> “어떤 사람”)가 (나타나) 그와 함께 씨름을 했습니다. 언제까지? 동이 틀 때까지. 이 어떤 사람(이쉬)가 누군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보통 천사와 씨름했다고도 하는데, 사실 이 말은 해석된 말입니다. 뒤에 야곱을 축복하고,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하나님의 얼굴)이라고 했으니,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것으로 해석된 것이지요. 우리의 전래 민담 중에는, 한밤중에 “어떤 사람”을 만나(나중에 도깨비로 판가름나지요) 밤새도록 씨름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그러면 야곱의 이야기에서 야곱이 씨름을 한 인물은 과연 누구였을까요? 저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은 이 “사람”은 야곱의 내면의 그림자일 수 있습니다. 야곱은 그 밤에 홀로 있으면서 자기 속에 깊이 뿌리내린 쓴 뿌리를 보아야 했습니다. 어떻게든 남의 발꿈치를 붙잡고 먼저 나오려 하고, 남을 속여서라도 축복을 가로채야 하는, 자기 속에 깊이 뿌리내린 그 “원죄”를 보아야 했습니다. 그날 밤, 야곱은 모태에서부터 지금 여기에 있기까지 모든 시간 속에 있는 자기의 모습을 보아야 했습니다. 쟁쟁거리며, 아웅다웅하며, 어떻게 해서라도 살아남으려 했던 그 처절한 몸부림을 뿌리 채 보아야 했습니다. 그로인해 생긴 상채기와 그림자를 보아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씨름한 “어떤 사람”은 실은 야곱의 “과거”였습니다. 앞으로 나가려는 그를 붙잡고 늘어지는 과거! 그 원죄가, 그 그림자가, 그 상채기가, 그 과거가 괴물이 되어 그날 밤 야곱에게 싸움을 걸어온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쉬)의 또 다른 의미는, 야곱의 큰 자기, 야곱을 넘어선 야곱, 야곱의 미래일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야곱이 반드시 만나야 하는 또 다른 야곱입니다. 그래서 그의 원죄, 그림자, 상처, 과거가 어떠하더라도, 그것들이 있는 그대로의 야곱 그 자신을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해야 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그 “어떤 사람”을 신적 존재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침내, 어떤 사람은 야곱과의 씨름에서 야곱을 이길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아마도 야곱에겐 이 씨름이 그만큼 절박했고 절실했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래서 그는 결정적으로 야곱의 엉덩이뼈를 치게 됩니다. 우리말로 엉덩이뼈라고 번역된 <야렉>은 본디 “허벅다리”를 의미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허리”를 의미할 때도 있습니다. 아마도 이 “어떤 사람”은 야곱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야곱의 <야렉>을 치면, 그가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 인생의 고통과 괴로움은 우리의 약점을 파고듭니다. 어디가 우리의 약점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어디를 찌르면 발작을 하듯 통증을 느끼는지 알고 있습니다. 루미가 했던 말이 있지요. “한번 문지를 때마다 그렇게 투덜거리면 어떻게 네 거울을 닦으란 말이냐?” 그런데 신은 아무데나 문지른 것이 아니지요. 악 소리가 나는 곳을 알고, 바로 거기를 문지른 겁니다. 우리에게 오는 고통은 그렇게 옵니다. 그러니, 내가 뭔가로 계속해서 고통을 받고 있다면, 그 고통 받는 자리를 제대로 잘 봐야 합니다. 그 자리는 나의 약점이자 나의 힘을 쓰는 자리이기 쉽습니다. 사실은, 힘을 쓰는 자리기 때문에 약점일 수 있습니다. 그 자리만 치면, 싸움은 끝나기 때문입니다.
에니어그램이 지혜에서는 자신이 힘을 쓰는 자리가 바로 자신의 함정/약점이라는 사실을 잘 간파하고 있습니다. 개혁가인 1번의 이상주의는 그 이상적인 비판 때문에 힘이 듭니다. 그의 눈에는 세상이 온갖 고칠 것 투성이거든요. 남을 돕는 이인 2번은 바로 그 밖으로 향한 도움 때문에 힘이 듭니다. 정작 자기 자신은 소외되고 있거든요. 지적인 탐구자 5번은 그 앎과 지식 때문에 힘이 듭니다. 진짜 자기 자신은 그 앎과 지식 뒤에 숨어 있거든요. 자기가 힘을 쓰고 있는 자리를 잘 봐야 합니다. 힘이 든다는 말은 힘을 쓰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힘을 쓸 수 없다는 말은, 어쩌면 삶의 반전을 이룰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야곱은 어떤 사람과의 씨름에서 엉덩이뼈 <야렉>이 부서짐으로서 더 이상 자신의 힘을 쓸 수 없었습니다. 쟁쟁거리며, 아웅다웅하며, 어떻게 해서라도 살아남으려 했던 그 처절한 몸부림을 더 이상 부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약점인 이 엉덩이뼈 <야렉>, 파쇄되고 어긋나서, 절뚝거리며 걸어야 했던 그의 부서진 자리를 성경은 기억하고, 놀라운 얘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1장 5절에 보면, “이미 이집트에 내려가 있는 요셉까지 합하여, 야곱의 혈통에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일흔 명이다.” 여러분, 이 구절을 우리 번역으로 보면 그저 자연스럽게 보입니다. 그런데, 개역성경은 “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사람이 모두 칠십인이요, 요셉은 애굽에 있었더라”라고 번역합니다. “야곱의 혈통에서 태어난 사람” 또 “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사람”, 이 말은 <(네페쉬 요쯔에) 예렉 야아콥>을 번역한 것입니다. <예렉 야아콥> 야곱의 허리, 야곱의 엉덩이뼈는 야곱이 씨름하다가 부서진 그 <야렉>입니다. 그런데 그 부서진 <야렉>에서 야곱의 후손 일흔 명이 태어났고 그들이 불어나 마침내 그 땅(이집트 땅)에 가득했다고 성경은 전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때부터 약속하신 그 약속, “너의 후손이 바다의 모래 같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지게 하겠다”는 그 약속이 어디서 이루어졌냐면, 야곱의 위골파쇄되었던 그 허리<야렉>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이런 것입니다. 야곱의 지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남을 속이고 남의 뒤꿈치를 잡아서라도, 나 잘살아보겠다고 힘을 쓰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지혜는 야곱이 더 이상 자신의 힘을 쓰지 못하는 그 자리에서 당신의 약속을 이루는 그런 지혜였습니다. <콜 네페쉬 요쯔에 예렉 야아콥> 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모든 사람들!
사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지혜를 신뢰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세상은 전혀 그렇게 돌아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경험치는 그런 지혜를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짧은 인생 중에 짧은 경험은 부서진 자리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받지 못하게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내 힘을 길러서 내 인생은 내가 살아남아야 한다고 늘 배웠기 때문입니다. 사실, 내 힘을 길러서 내 인생은 내가 살아야 한다는 말은 옳은 말입니다. 하지만 헷갈리지 말아야 할 것은, 내 힘이 밖을 통제하기 위해 길러진 힘이냐 내적인 힘이냐 하는 것입니다. 내 힘을 기른다고 할 때, 우리는 주로 밖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말하겠지요.
세르비아의 영적 지도자였던 타데우스 장로는 이런 말을 합니다. “주변 사람들을 변화시키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대신 당신 자신을 변화시켜 내면의 평화를 얻으십시오. 그러면 당신 주변의 천 명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타데우스 장로는, 내 힘은 내면의 평화에서 나온 내적인 힘임을 말합니다. 바로 이런 힘은 한번 부서진 <야렉>에서 나오는 법입니다.
날이 새려고 했을 때, 이 어떤 사람은 자기를 놓아달라고 합니다. 하지만 야곱은 자기를 축복해 주지 않으면, 놓아 주지 않겠다고 떼를 썼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야곱이 형의 축복을 가로채서 이 사단이 난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또 축복을 원합니다.
형의 축복을 가로채서 받은 축복은, 그를 한평생 “험악한 세월”로 몰아세웠습니다. 여러분, 늙은 야곱이 나중에 아들 요셉이 총리로 있던 이집트로 내려가서 이집트 왕 바로를 만나서 그가 했던 말을 기억하십니까? “이 세상을 떠돌아다닌 햇수가 백년 하고도 삼십년입니다. 저의 조상들이 세상을 떠돌던 햇수에 비하면, 제가 누린 햇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험악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라아>인데, “질이 나쁘고 열악하다”는 뜻입니다. 어느 성경은 “고단한 세월”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형의 복수가 두려워 시작된 이 밤샘은, 또 한번 축복을 비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오늘 야곱이 원했던 축복은 무엇이었을까요? 여러분, 히브리어에서 “축복”을 <버라카>라고 합니다. “축복하다”는 <바락>입니다. 그런데 <바락>은 “무릎을 꿇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히브리어에서 “무릎”은 <베렉>입니다. 진정한 축복은 “무릎을 꿇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축복을 받으려면,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야곱이 무릎을 꿇지 않고, 속여서 가로챈 축복은 한평생 그를 “험악한 세월”로 몰아세웠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의 남은 삶은 진정한 축복, 무릎을 꿇음으써 오는 축복을 받으려고 합니다. 이 무릎을 꿇는 것이 바로 자신의 약점이 하나님의 약속의 자리가 되는, 진정한 내가 태어나는 자리가 되는 자리입니다. 야곱의 한 밤중의 씨름은 바로 진정한 축복을 바라고 그 축복을 받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내적으로 내가 진정 힘을 가지려면 무릎을 꿇는 자리가 있어야 합니다. 요즘은 현대인들에게는 뉴에이지가 환영받고, 종교가 아닌 영성이 환영 받는 시대입니다. 하지만 뉴에이지나 많은 영성이, 우리를 모두 축복으로 인도하지는 않습니다. 뉴에이지나 가짜 영성에는 한 가지가 비어있습니다. 그것은 “무릎꿇음”입니다. “그동안 종교라는 이름으로 무릎을 꿇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또 무릎을 꿇으라고? 그거 하기 싫어서 종교에서 영성으로 갈아탔는데?” 그들은 이렇게 주장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사실 우리 현대인 모두는 무릎을 꿇고 삽니다. 문제는 무엇에 무릎을 꿇는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 무릎을 꿇어야 한다고 하면서, 실은 하나님이 아닌 것에 무릎을 꿇은 적이 한 두번이 아닙니다. 그럴 때 교회는 더 이상 내적인 힘을 가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밖에 있지 않고 우리의 안쪽, 아니 우리의 근저/바탕이 되십니다. 진정 하나님께 무릎 꿇는 태도는 “승복”(surrender)이라고 하는데, 이는 진정 하나님께만 무릎 꿇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아빌라 데레사의 그 유명한 노래의 의미를 진정 알게 될 것입니다.
아무 것도 너를 괴롭히게 말고, 아무 것도 너를 두렵게 하지 말라.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 부족함이 없느니.
아무것도 너를 괴롭히게 말고, 아무 것도 너를 두렵게 하지 말라.
하느님 한 분이면 충분하도다.
여러분, 오늘 야곱의 이름이 바뀝니다.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겨루다”라는 뜻입니다. 그 겨룸의 결과, 그는 다리를 절룩이며 걷게 되었지만, 그때 아침 동산에 해가 솟아올랐습니다. 마침내 길고 긴 밤이 끝난 것입니다. 벧엘(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된 어둔 밤이 마침내 이곳 얍복강 가에서 끝이 났습니다. 그는 그곳 이름을 “브니엘”(하나님의 얼굴)이라고 불렀습니다. 벧엘에서 브니엘까지! 우리의 삶은 벧엘과 브니엘 사이 그 어디쯤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밤이 끝나는 날, 비로소 아침 해가 솟아올라 우리를 비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