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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설명 |
02-774-3890
소재지 : 서울 중구 명동 2가
서울대교구의 주교좌 성당인 명동성당은 서양 중세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로 사적 제 258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명례방에서 처음으로 신앙 집회가 시작된 때는 1784년 겨울이다.
이 책들은 새로운 사상에 목말라 하던 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면서 이 땅에 천주교회가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 당시 젊은 학자들의 지도자였던 권철신은 1777년부터 주어사와 천진암에서 강학회를 여는 등 새로운 사상과 진리를 탐구하기 시작하였다.
천주교회에 대해서 좀더 깊이 알고 싶어하던 이벽은, 동지사 서장관인 아버지 이동욱과 함께 북경에 가게 된 이승훈에게, 서양 신사를 만나 교리 서적을 구해 오고, 가능하면 세례를 받고 돌아오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이승훈은 북경에 도착하는 즉시 북당 성당에 가서 그라몽 신부에게 필담으로 교리를 배워 영세하고 돌아왔다. 그는 중국에서 가지고 온 책을 이벽에게 넘겨주었고, 이벽은 너무나 기뻐한 나머지 한적한 여관에 가서 그 책을 탐독하고 나서, 자기 집에서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유학자였던 정약전, 정약용 형제와 실학자인 권철신 권일신 형제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리고 중인 지식층인 최인길, 최창현, 김범우, 지황 등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리고 권일신의 제자인 내포 지방 이존창과 전라도 지방의 유항검도 세례를 받았다.
처음엔 이들이 이벽의 집에 모이다가, 명례방에 살던 김범우의 집으로 옮겨 신앙 집회를 갖던 중, 노름판으로 오인한 형조의 포졸들에게 발각됨으로서 모두 체포되었다. 이때 교리서와 성화, 성물들을 압수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양반과 상민의 신분 차이가 심했던 시대라 양반들은 모두 풀어 주고, 중인이었던 집주인 김범우는 귀양가서 매 맞은 장독으로 죽으니, 우리나라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1785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을사 추조적발 사건이라 한다. 이 사건으로 명례방 공동체는 완전히 해체되면서 신자들은 뿔뿔이 헤어졌다. 그러나 하느님의 섭리는 참으로 오묘한 것이다.
교회는 박해하면 할수록 엄청난 전교의 힘을 발휘하게 되는데, 그리스도교의 첫 순교자 스테파노가 순교하자 신도들은 이방인 지역인 다른 나라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였듯이, 우리나라도 서울에서 박해를 받자 전국으로 퍼져 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1786년 명례방 사건이 잠잠해 지자 이승훈은 북경에서 본 기억을 되살려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활성화하기 위해 10명의 신자를 신부로 임명하고, 각 지방에 파견하여 성사를 집전하게 하였다. 이러한 가성직제도는 초기 교회를 활성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전라도의 유항검이 큰 문제를 발견하였다. 자신들이 하고 있는 성직 행위가 독성 죄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성교절요(聖教切要)라는 책에서 발견하고, 1789년에 윤유일을 북경에 보내어 문의한다. 이에 북경 교구 구베아 주교는 가성직제는 물론 조상 제사까지 금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미 성사를 맛본 교회 지도자들은 그때부터 성직자를 모셔오는 일에 온갖 정성을 쏟게 되었다. 그래서 그 무서운 박해 중에도 주문모 신부를 입국시키고, 1831년 9월 9일 조선 교구까지 설정되면서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계속 들어오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교회 창설 초기부터 크고 작은 박해가 열네 차례나 일어났다. 그중 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오박해, 병인박해를 4대 큰 박해라고 한다.
1801년에 일어난 신유박해는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시는 주문모 신부님을 비롯하여 정약종, 이승훈, 강완숙, 황사영 등 200여명이 순교하였고, 400여명이 귀양을 간 대 박해였다.
다음은 1839년에 일어난 기해박해로 앵베르 범 주교, 샤스땅 정 신부, 모방 나 신부와 평신도 으뜸인 정하상 바오로등 103위성인 중에서 70위가 성인 품에 오른 대 박해이다.
1846년에 일어난 병오박해는 우리나라에 첫 사제인 김대건 신부 등 아홉 분이 성인 품에 오른 대 박해이다.
1866년에 일어난 병인박해는 주교님 두 분과 신부님 다섯 분 등 모두 24분의 성인이 탄생한 박해로, 1866부터 1872년까지 무려 7년 동안 8.000여명이 순교한 대 박해이다.
한국 교회가 창설 된지 100여 년 동안 이렇게 끊임없이 혹독한 박해를 받아 오다가, 1882년에 와서 한미 통상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종교 자유를 예견한 조선교구 제 7대 교구장 블랑 주교는 명례방에 윤 대감 댁을 매입하고, 그 후 30여 차례 토지 매입으로 지금의 명동성당 터를 마련하였다.
명동성당은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신부님이신 코스트 신부님께서 직접 설계 감독하였다. 이 성당을 건축하는데 어려운 점도 많았다. 당시 외무부장관 격인 조병직이 이를 제지하려고, 1888년 1월에 천주교회에서 구입한 대지를 정부 소유권을 억류하였다. 이때 조병직은 명동성당 터가 국유지임을 주장하고 또 풍수지리설을 내세우면서 역대 임금들의 영정을 모신 영희전의 수호신을 어지럽히는 일이라는 이유를 들어 불법이라고 하였다.
그는 천주교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성당 건축을 방해하였다. 이 사건은 프랑스 공사의 중재로 1890년에 대지 문서를 교회측에 되돌려 줌으로써 끝이 났다. 그 뒤 블랑 주교가 사망함으로 제 8대 교구장에 임명된 뮈델 주교는 1891년 4월 19일 주교관 강복식을 집전하고 1892년 5월 8일 명동 대성당 정초식을 거행하였다. 성당 건물을 건축하는 도중 1896년 코스트 신부가 사망함으로 프와넬 신부가 인수받아 2년 후에 준공하였다. 정초식을 거행한지 6년 만에 이 성당이 완공되었다. 마침내 한국 천주교 주보인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마리아를 종현(명동)성당의 주보로 뮈델 주교에 의해, 1898년 5월 29일 성령 강림 대 축일에 대성당을 축성하였다.
이 성당을 지으면서 여기에 쓰인 벽돌은 순교자들이 매장되었던 와고개 흙으로 구운 벽돌이다. 지금 용산 우체국 뒤 육군본부 성당 자리에서 구워 온 벽돌이다. 이 와고개 성지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제 4대 교구장 장경일 베르뇌 주교님과 다섯 분의 신부님, 그리고 지도급 순교자들의 유해가 묻혀 있던 성지이다. 코스트 신부님은 그 흙으로 20가지가 넘는 벽돌 모양을 직접 만들어 지은 성당이기 때문에 이 벽돌 하나 하나에는 순교자의 피가 섞여 있는 성당이다.
1831년 9월 9일 설정된 조선 대목구를 1911년 4월 8일 교황청에서 서울 대목구와 대구 대목구로 분리하였다. 그리고 1962년 3월 10일 서울 대목구와 대구 대목구와 광주 대목구가 대교구로 승격되었다. 서울 주교좌는 조선 대목구에서 서울 대목구로, 또 서울 대교구로 이름이 바뀌었어도 여전히 한국 교회로 상징된다. 그것은 이 명례방에서 처음으로 신앙 집회가 열렸고 그 후손들이 전국으로 퍼져나갔기 때문에 한국교회의 얼굴인 것이다.
2.지하 묘소
명동성당 지하 묘소에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하신 앵베르 범 주교님과 샤스탕 정 신부님, 모방 나 신부님의 유해와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 김성우(金星禹) 안토니오 성인 등 다섯 분의 성인 성해를 모시고 있다. 또 아직 시성 되지 않은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하신 배론 신학교의 푸르티에 신 신부와 프티니콜라 박 신부님의 유해와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무명 순교자 두 분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곳이다.
1836년 1월 12일에 입국한 모방 나 베드로 신부, 1837년 1월 15일에 입국한 샤스탕 정 신부, 그 해 12월 18일에 입국한 앵베르 범 주교님도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으로 목숨을 걸고 입국하였다. 모방 나 신부가 제일 먼저 입국하여 구산에서 조선말과 풍속을 배우고 미사를 집전하면서 방인 사제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836년 2월 6일 안양 수리산에 사는 최경환의 아들 최양업과, 3월 7일에는 홍주에 살던 최형(한지) 베드로의 동생 최방제를 선발하고, 7월 11일에는 용인에 살던 김제준의 아들 김대건(유홍열한국교회사300)을 선발하였다. 모방 나 신부는 그들에게 라틴어를 가르치는 한편 성직자에게 필요한 성덕을 쌓게 하다가 1834년 1월 3일 입국하였던 중국인 여항덕(余恒徳) 신부가 1836년 12월 3일 귀국할 때 마카오에 유학을 보냈다.
또한 모방 나 신부님은 신분 위장을 위해 상복을 입고, 방갓을 쓰고 충청도 일대 교우촌을 찾아다니며 200여 명에게 세례를 주었고, 이듬해 1월 15일 샤스탕 정 신부님을 맞아 두 분은 험한 산길을 헤매며 빵, 버터, 치즈, 고기 대신 시래기로 허기를 채우고, 거적때기 위에서 새우잠을 자며 새벽 2시에 일어나 미사와 세례를 집전하고, 날이 새기 전에 상복으로 갈아입고 서리와 이슬로 옷깃을 적시며 다른 마을로 발길을 옮겨야만 했다. 모방 나 신부님이 입국할 당시 4.000명이던 신자는 2년 만에 8.000명으로 늘어났다.
1837년 12월 18일에는 앵베르 범 주교님께서 입국하여, 평신도에 의해 우리나라 천주교가 탄생한지 53년 만에 완전한 교계 제도가 이루어졌다. 앵베르 주교님도 조선 사람 성직자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아들 정하상 바오로와 이승훈의 손자 이재의(李在誼)토마스와 이문우 요한과 최방제 신학생의 형 최형 베드로 등 어른에게 라틴어와 신학을 직접 가르쳐 빨리 성직자를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교우들이 체포되고, 배교자 김순성의 간계로 주교님의 은신처마저 노출되자 포졸에게 먼저 자헌(自献)하시고, 두 신부님께는 편지를 보내 더 이상 박해를 막기 위하여 자수하게 하여, 9월 21일 새남터에서 세분 모두 군문 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처형된 세분 성직자는 새남터 모래사장에 버려 두었다가, 20여 일이 지난 뒤 군인들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박 바오로와 이문우 등 몇몇 교우들과 같이 목숨을 걸고 시신을 거두어, 지금 서강대 뒷산인 노고산에 안장하였다가 4년 뒤에 삼성산으로 옮겨 모셨다.
그리고 1901년 박 바오로의 아들 박순집 베드로의 도움으로 세 성직자의 묘를 발굴하여 명동 지하 묘소에 모셨다.
3.명동성당 내부
명동성당 제대 뒤쪽을 보면 가운데 성모마리아 상이 있고, 그 아래 벽면에는 장면 박사의 동생인 장발 화가가 제작한 열두 사도와 바오로, 바르나바 등 14분의 사도 성화가 있다. 제대를 향해 보면 중앙 왼쪽은 베드로 사도가 있고, 맨 끝이 배신자 유다 대신 마지막에 뽑힌 마티아 사도이고, 오른쪽은 바오로 사도이고 맨 끝에, 바오로 사도와 늘 함께 전도 여행을 다니던 바르나바 성인까지 열네 분의 성화(서양화가장발작품)가 있다. 제대 위쪽에 스테인드 글래스의 그림은 왼쪽 위에서 아래로 환희의 신비, 이어서 고통의 신비, 영광의 신비 각 5단, 총 15단이 새겨져 있고, 성당 내부를 살펴보면 왼쪽에 김대건 신부님, 이승훈, 오른쪽에 이벽 성조, 명례방 집주인 김범우의 초상화가 있으며, 명례방 신앙 공동체 그림 속에는 양반들과 중인, 천민까지 신분을 초월한 신앙 공동체인 종교 집회 광경이 걸려 있다. 우측에 성 분도상은, 이 성전을 건축할 당시 여러 차례 사고로 많은 사람이 다쳤으므로, 건축사의 주보를 모시고 기도한 후로는 한 건의 사고도 없이 성당을 완성할 수 있었기에, 제대 우측 벽면에 성분도상을 모시고 있다.
명동 지하 성당에 모셔져 있는 성해
○ 범세형 앵베르 성인님. (프랑스. 새남터. 1839. 9.21. 43세. 주교)
○ 모방 나 베드로 성인님. (프랑스. 새남터. 1839. 9.21. 35세. 신부)
○ 샤스탕 정 야고보 성인님. (프랑스. 새남터. 1839. 9.21. 35세. 신부)
○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님. (홍주. 옥사. 1839. 9.12. 34세. 장)
○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님. (구산. - . 1841. 4.29. 46세. 회장)
○ 신 푸르티에 안토니오 순교자님. (프랑스. 새남터. 1866. 3.11. -- 세.)
○ 박 프티니콜라 미카엘 순교자님. (프랑스. 새남터. 1866. 3.11. -- 세.)
○ 무명 순교자님
○ 무명 순교자님
성가 18. 주님을 부르던 날
방 다봉 신부의 편지 |
說明 |
그대는 한 사람의 입교 소식을 흐뭇한 마음으로 들을 것으로 믿습니다. 천주께서는 아마 그로 하여금 아직 어떤 선교사도 들어간 적이 없는 알지 못하는 나라에 복음의 빛으로 비추게 하실 것입니다. 그 나라는 중국 동편에 있는 반도 조선입니다.
그 나라 왕은 자기의 종주로 생각하는 중국 황제에게 해마다 사신을 보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에게는 손해가 안됩니다. 조선왕이 황제에게 많은 예물을 바치지만, 황제는 그에게 더 많은 선물을 보내기 때문입니다. 이 조선 사신들이 작년 말에 왔는데, 그들과 그들의 수행원들이 우리 성당을 찾아왔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종교서적을 주었습니다. 동지사 중 한 분의 아들은 나이 27세인데 박학하여 그 서적들을 열심히 읽어, 거기에서 진리를 발견하였고, 또 천주의 은총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에 교리를 깊이 연구한 다음, 입교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성세를 주기 전에 그에게 많은 문제를 물어 보았는데, 그는 모두 잘 대답하였습니다. 우리는 그 중에서도 만일 왕이 그의 행동을 못마땅히 생각하여, 신앙을 버리라고 강요하는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결심이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는 서슴치 않고 자기가 그 “진리를 명백히 아는 이 종교를 버리기보다는 차라리 모든 형벌과 죽음까지도 감수하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또 ‘복음이 가르치는 순결은 여러 여자를 데리고 사는 것을 용인치 않는다’는 것도 잊지 않고 알려주었더니, 그는 ‘법적인 아내 밖에 없고 또 다른 여자를 결코 얻지 않겠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마침내 그는 조선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출발하기 전에 그 아버지(이동욱)의 승낙을 얻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라몽 신부가 베드로란 본명으로 그에게 성세를 주었습니다. 그의 성은 이가이며 왕족의 인척이라 합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면 인간의 공명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시골로 물러가 자기 구령에만 전력하고자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해마다 우리에게 ‘소식을 전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사신들도 그들의 왕에게 ‘서양 사람들을 그 나라에 불러들이기를 제청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북경에서 조선 한양까지는 육로로 약 3개월이 걸립니다.
우리는 조선 사람들과 글씨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글자와 중국 글자는 모양과 뜻이 같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 하여도 아주 미미합니다. 그러나 발음은 전혀 다릅니다. 조선 사람들이 말하고자 하는 생각을 글씨로 써 놓으면, 우리는 그 글자를 보고 뜻을 이해하였고, 그들도 우리가 대답으로 써 놓은 것을 보고 그 뜻을 즉시 알아들었습니다.
서소문 성지
성지 설명 |
소재지 : 서울 중구 의주로 서소문 공원
서소문 밖 성지는 조선시대 아현 고개와 남대문 밖 칠패 시장으로 통하던, 소의문(昭義門) 밖에서 사형을 집행하던 지정된 사형장이었다.
그런데 이 곳이 우리 순교자들의 피로 물들기 시작한 것은, 1801년 신유박해 때부터 시작되었으며, 기해박해를 거쳐 마지막 병인박해까지 70여 년 동안 수많은 교우들이 주님을 증거하며 순교하였다.
현재 이곳에서 치명한 것으로 밝혀진 순교자는 모두 98명으로, 그 가운데 기해박해 때 순교한 정하상(丁夏祥) 바오로를 비롯한 41분과 병인박해 때 순교한 3분 등 모두 44분이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여의도에서 시성 되었다. 그러나 초기 우리나라 천주교를 기초하고 이끌었던 정약종(丁若鍾), 이승훈(李承薫), 강완숙과 황사영(黄嗣永) 등 1801년 신유박해 순교자들은 아직 시복도 되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신유박해는 1801년 2월 2일(음력1월10일) 대왕대비 김씨가 사학(邪学) 금지령을 내렸고, 1802년 2월 4일(음력12월22일) 토사교문(討邪教文)을 반포함으로 박해는 마무리되었다.
한국 천주교회는 이들 순교자들에 대해서 그 행적과 증언들을 정리하는 등 시복, 시성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어, 앞으로는 더 많은 성인들이 시성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아무튼 이 곳은 새남터와 더불어 한국의 최대 순교 성지임에 틀림없다.
현재 서소문 성지는 중림동 성당에서 관리하고 있다. 옛날 성당 주변에 약초 밭이 많아 약현 성당이라 불리었던 중림동 성당은 1891년 5월 8일 본당이 설립되었다. 조선 교구 최초의 본당인 명동성당이 그 규모와 수많은 난관으로 인해 건립이 지연되는 가운데,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건물로 완성된 건물이다. 이 성당은 명동성당과 마찬가지로 코스트 신부가 설계하고 공사를 감독하였다. 이 성당의 벽돌은 와고개 연와소에서 병인박해 때 순교자들의 선혈로 물들인 흙으로 벽돌을 구워 건축하였고, 그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사적 제252호로 지정되었으나, 1998년 화재로 소실되어 2000년 9월 17일에 다시 복원하여 축성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성당 건물이었던 이 성당에는 당시 선교사들이 몸에 지니고 다녔던, 사도 바오로와 바르나바 등 초기 사도들의 성해(聖骸)가 모셔져 있다.
서소문 공원에는 1984년 한국 천주교회 창립 200주년을 기념해 순교자 현양탑을 세웠으나 서울시의 공원 공사로 인해 헐리고, 지금의 현양탑은 1999년 성령강림 대 축일에 새로 축성하였다.
조선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형틀인 칼 모양을 형상화한 화강석 3개의 탑은 죽음과 박해를 상징하며, 주 탑과 좌우 탑의 원형 형틀에서는 7성사(七聖事)를 뜻하는 7개의 선이 흘러내리고 있다. 따라서 현양 탑은 주님의 진복팔단 중 마태오 복음 5장 6절의 “복되어라 의로움에 목마르고 굶주린 이들!” 하는 이 말씀을 전체 주제로 하였다.
중앙 탑의 청동 조각은 참혹한 순교의 현장을 형상화하였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순교자의 모습은 예수님을 품에 안은 성모님과 같이, 오늘날 순교자를 우리 품에 받아 드려야 함을 의미한다. 주 탑을 중심으로 우측은 44분의 성인 성녀들의 명패이고, 또 좌측은 54분의 순교자의 이름을 새겨 이곳의 순교 역사를 현장화 하였다.
칼의 형상이 죽음을 상징한다면 물은 생명을 나타내며, 물 속에 비친 탑을 통해 죽음을 극복하고 부활하는 생명의 이미지를 극대화하였다. 분수대를 통하여 솟아오른 물이 투명한 판유리를 타고 부서져 내리고, 또 여기에 물소리 효과를 주어 생명의 환희와 신비를 한껏 고조시키고 있다. 또 물 속에 잠긴 조약돌은, 이 곳에서 순교한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의 영원한 생명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야간에는 수면 아래의 조명기구에서 탑과 유리벽을 환하게 비춤으로써 현양탑의 상징을 더 효과적으로 나타내도록 하고 있다.
탑의 뒷면에는 나자로의 회생(回生)과 죽은 사람을 살려내시는 예수님을 부조로 설치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부활에 이르게 되리라는 것을 암시하였다.
이곳에서 순교하신 분들을 생각하며 묵상합시다
이 서소문 성지에서는 정약종의 다섯 가족에 대하여 알아보자.
정약종은 그의 형 정약전과 동생 정약용, 그리고 수많은 친구들은 1791년 신해박해 때 마음이 흔들렸지만 정약종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더욱 열성적이었다.
정약종은 명도회 초대 회장으로써 배를 타고 가거나, 심지어 말을 타고 가면서도 묵상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어리석은 사람을 만나면 힘을 다해 깨우쳐 주었고, 아무리 답답한 사람이라도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없었다. 어떤 사람이 교리에 대해 물으면 마치 자기 주머니에서 물건을 꺼내듯 척척 풀어 주었고, 자기가 모르는 교리를 발견하면 모든 일을 전폐하고 반드시 알아내고야 말았다.
정약종은 무식한 사람들을 위하여 한글로「주교요지」를 저술하였다. 주교요지는 여러 가지 책을 인용하고, 자기 의견을 덧붙여 아주 쉽고 명백하게 썼으므로, 어리석은 부녀자와 어린 아이들까지도 주교 요지를 읽기만 하면 교리를 쉽게 배울 수 있었다.
‘사람은 스스로 하느님이 계신 줄을 아느니라’ 라는 첫 대목에서 주교요지는 이렇게 설명한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까지도 병들고 어려운 일을 겪게 되면, 누구나 하늘을 우러러 바라보며 “하느님 이 괴로움에서 빨리 벗어나게 해주소서” 하고 빌며, 또 먹구름이 몰려오고 천둥 번개가 요란하면, 자기가 지은 죄를 생각하고 무서워서 숨으려고 한다. 만일 하느님이 계시지 안는다면 사람이 어찌 그런 마음을 가지겠는가. 라고 설명한다.
그는 사형장에서 땅을 보지 않고, 하늘을 우러러 바라보며 죽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벌벌 떨던 희광이의 칼에 맞아 목이 반쯤 잘렸음에도 불구하고, 벌떡 일어나 십자성호를 크게 긋고, 힘없이 쓸어졌다. 이때 그의 나이는 마흔 두 살(2월26일) 이었다. 정약종의 큰아들 정철상 가롤로는 아버지의 옥바라지를 하다가 연좌 죄로 붙잡혀 아버지가 순교 한지 35일 후인 음력 4월 2일 같은 자리에서 순교하였다.
정하상 바오로는 아버지 정약종 아오스딩과 형 정철상 가롤로가 1801년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할 때 일곱 살이었고, 여동생 정정혜 엘리사벳은 다섯 살이었다.
그 당시 모친 유소사 세실리아와 여동생과 함께 풀려났으나, 가산은 몰수되어 호구지책도 마련할 길이 없어서 고향 마재로 내려갔다. 그러나 천주교를 믿지 않는 가족으로부터 천주교를 믿어서 가문이 풍비박산되었다고 천주교를 믿는 정하상 가족을 학대하였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정하상은 어머니로부터 기도와 교리를 배우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였다.
정하상은 20살이 되었을 때 모친과 누이를 마재에 남겨 두고, 서울에 올라와서 조증이 발바라 집에 머물면서 박해로 흩어진 교우들을 모으고, 성직자 영입 운동에 자문을 구하기 위해 신유박해 때에 함경도 무산으로 귀양간 한학자이며, 아버지 친구인 조동섬 유스티노를 찾아가서 자문을 받고 서울로 돌아왔다.
정하상은 교회 활동과 성직자 영입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816년 양반임에도 불구하고 역관의 하인 행색으로 북경을 찾아갔으나, 북경교회로부터 성직자 파견이 어렵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왔다. 그러나 결코 실망하지 않고 매년 북경을 방문하여 성직자를 간청하는 한편 서울에 성직자를 모실 집을 마련하고,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올라오게 하였다. 1823년에는 사절단의 역관인 유진길 아우구스티노와 마부인 조신철 가롤로와 함께 북경 5,000리 길을 무려 9차례나 왕래하면서 로마교황청에 조선교회의 상황을 알리고, 성직자를 보내 줄 것을 간청하였다.
이때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선교사의 전교 없이 기묘하게 복음이 전파되어, 200여명의 순교자까지 낸 조선교회가 탄생했다는 소식에 감격하여 무릎을 꿇고, 교황강복을 주시면서 눈물을 흘리셨다. 마침내 1831년 9월 9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임된 조선 교구가 설정되고, 모방 신부님. 샤스탕 신부님. 그리고 앵베르 주교님이 조선에 입국하였다. 정하상은 성직자를 자기 집에 모시고 사목 활동을 도왔다. 앵베르 범세형(范世亨) 라우렌시오 주교는 모방 나 신부가 보낸 신학생 외에 또 다른 3명의 소년을 유학시키고자 적당한 인물을 고르는 한편, 정하상의 성실함을 높이 평가하고, 하루 빨리 성직자로 만들기 위해 라틴어와 신학을 주교 자신이 직접 강의하고 가르쳤다.
그는 42세이며 신부 되기를 자원하여 독신을 지켜 온 정하상 바오로와 32세인 이문우(李文祐) 요한과 이승훈의 손자 이재의(李在誼) 토마스와 마카오 신학교에 간 최방제(崔方済)의 형 최형(崔炯) 베드로를 발탁하여 그들에게 라틴어 읽는 법을 가르치고 사천성의 아멜 신부가 만든 한문책으로 신학을 가르쳐 이들 중 정하상과 이문우는 2․3년 안에 신품을 받게 될 것이라고 전망(유홍열한국교회사307)하였다
바로 그 무렵에 기해박해가 일어나 정하상은 주교님을 다른 곳으로 피신시켜 드리고 자신은 가족과 함께 체포되었다.
정하상은 천주교를 변호하여 당시 재상이던 우의정 이지연(李止淵)에게 올리는 상 재상서(上宰上書)를 작성하여 올렸다. 이는 천주교를 유교 사상에 비추어 설명한 한국 최초의 호교론(護教論)으로서, 당시 사람들이 오해하였던 “무군무부(無君無父)” 즉 ‘천주교인들은 임금도, 부모도 몰라보는 금수같아서 조상 제사도 지내지 않는다.’는 잘못된 인식을 해명하고, 천주교에 대한 박해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호교론을 써 올렸다. 이 상 재상서는 그 내용이 훌륭하여 후에 중국에서 ‘포교서’로 사용되기까지 하였다.
그의 죄목은 양인을 데려온 역적이었다. 또한 열성적인 교회 활동의 주역이었기에 그에 대한 고문과 형벌은 너무나 처참하였다.
1839년 9월 21일 앵베르 주교님, 모방 신부님, 샤스땅 신부님이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로 처형된 이튿날 9월 22일 독신인 정하상도 서소문 밖 형장에서 45세에 참수 치명 하였다.
정하상 바오로는, 11월 23일 79세에 늙은 나이에 포청옥에서 옥사한 어머니 유소사 세시리아와 12월 29일 서소문에서 순교한 동생 정정혜 엘리사벳과 함께 1984년 성인 품에 올랐다.
정하상 가족은 오직 하느님을 위하여 살았고, 다섯 식구 모두가 목숨 바쳐 순교한 성가정이었다.(정하상 바오로,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묘는 천진암)
정약종의 가족 모두는 로마서 8장 18절에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추어 보면,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라는 말씀에 힘입어 오로지 주님을 증거하는데만 모든 것을 바친 고귀한 분들이다.
당고개 성지
성지 설명 |
소재지 : 용산구 신계동 1번지
성지에 설치된 청동 부조에 나타난 순교자들을 보면 왼쪽부터 첫 번째 박종원(朴宗源)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서울의 전교 회장이었으며, 고순이(高順伊) 바르바라 성녀와는 부부 사이이다. 두 번째 최영이(崔栄伊) 바르나바 성녀는 세 번째 손소벽(孫小碧) 막달레나 성녀와 모녀 사이이다. 최영이 바르바라 성녀의 남편은, 조신철(趙信哲) 가롤로 성인이고, 손소벽 성녀의 남편은 최창흡(崔昌洽) 베드로 성인이며, 장인․장모․사위․딸이 모두 순교 성인 성녀가 되셨다. 네 번째가 이문우(李文祐) 요한 성인은 모방 나 신부님의 복사였으며, 새남터에서 순교하신 앵베르 주교․모방․샤스탕 신부의 유해를 신자들과 같이 남몰래 노고산에 매장한 분이다. 그리고 다섯 번째 한복을 입으신 분은 예수님이시고, 여섯 번째가 동정녀 이경이(李憬伊) 아가다 성녀, 일곱 번째 아기를 안고 있는 분이 최양업 신부의 모친인 이성례(李聖礼) 마리아 순교자, 여덟 번째 권진이(権珍伊) 아가다 성녀인데, 한영이 막달레나 성녀의 따님이고, 선비 차림의 아홉, 열 번째는, 충청도 여사울의 전교 회장인 홍병주(洪秉周) 베드로, 홍영주(洪永周) 바오로는 형제 성인이고, 신유박해 때 순교한 홍낙민(洪樂敏)의 손자이다. 마지막으로 열한 번째 이인덕(李仁徳) 마리아 성녀는 이영덕(李栄徳) 막달레나 성녀과 자매 사이다.
그중 아홉 분은 1984년 성인품에 올랐지만 우리나라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는 아직 성녀품에 오르지 못하였다.
이 성지에 올라서면 새남터, 서소문, 와고개가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앞이 확 트인 높은 이곳 성지에는 한가운데 당고개 순교 현양탑이 있고, 한쪽으로는 기념 제대가 있다. 이 제대는 여성 순교자가 많이 시성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카톨릭 여성회에서 봉헌하였다. 제대 뒤로 당고개 순교자 상의 청동 부조에는 10분의 순교자와 한복 차림의 예수님이 돋보이고 우리의 시선을 끌어당긴다. 현양탑 오른쪽 뒤에는 1917년 파티마에서 여섯 번 발현하신 성모상이 있고 성지 주위에 14처가 있다. 여기에서는 가정을 위한 기도를 많이 바치게 되는 곳이며, 매주 목요일 정오에 삼각지 성당에서 미사를 주관한다. 앞으로 여기에 경당과 성지 확장도 필요하다.
아직 성인품에 못오르신 이성례 마리아의 생애
우리는 당고개 성지에서 이성례 마리아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성례 마리아는 교회 창립 초기에 내포 지방의 사도였던 이존창(李存昌)의 손녀로,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씩씩하였다. 18세에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결혼하여 여섯 아들을 두었다. 박해를 피해 고향과 재산을 버리고 서울과 춘천, 그리고 부평으로 피해 다니다가, 마지막으로 안양 수리산 교우촌에서 살다 남편과 40여명의 교우들이 함께 포졸에게 끌려서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본래 부모와 어린이를 함께 투옥시키는 예는 국법에도 없었으나, 이 집은 열다섯 살에서 세 살 된 막내 스더왕까지 함께 갇혔다. 또한 국법에 없다 하여 아이들의 밥은 나오지 않았으므로, 어쩌다 밥 한 덩어리가 생기면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고 어머니는 굶었다. 더러운 감방에서 아이들이 축 늘어져 있는 것을 보는 어머니로서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이때 남편 최경환 프란치스코가 모진 형벌 끝에 옥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이성례는 어떻게 해서든지 목숨을 부지하여 나머지 아이들을 구하겠다는 마음으로 배교하고 감옥에서 나왔다(최양업 신부의 여덟 번째 편지). 그러나 그의 아들 최양업 도마가 신학생으로 마카오에 보내진 것이 탄로 나서 다시 형조로 이송되었다. 옥에서 정 하상의 동생 정정혜 엘리사벳과 현 석문의 누님 분다 등 여교우들이 간곡하게 죄를 기워 갚으라고 권고하였다(최바리시오이력서220). 마리아는 다시 열렬한 구변으로 관장 앞에 자복하고 치명 예비로 지내고 있었다. 이때 세 살짜리 막내 스더왕은 유두가 끊겨 굶어 죽고 말았다.
밖에서 문전걸식하던 둘째 아들 희정 야고보는 어린 동생들과 함께 다니다가 어머니가 갇혀 있는 옥에 찾아와 창살을 붙들고 목메어 불렀다. 그러나 이성례 마리아는 다시 마음이 변할까 두려워 돌아앉았다. 일찍 철이 난 희정 야고보는 어린 동생들을 달래며 발길을 돌렸다. 거지로 떠돌아다니던 4형제는 어느 날 부잣집에서 얻은 인절미를 식지 않게 가슴에 품고 옥에 찾아와 어머니에게 넣어 주었다. 어린 아들의 손가락 자국이 남아 있는 그 떡을 목이 메어 어떻게 넘겼겠는가? 하루는 야고보가 찾아오자 이성례 마리아는 아들의 머리를 빗겨 주면서 “아무쪼록 어린 동생들을 사랑으로 보호하고 어려우면 친척집에 데려다 두고 지내다 마카오에 간 네 형이 신부가 되어 돌아오면, 너희들이 고생을 면할 것이니 그때까지만 참고 지내거라. 그리고 며칠 있으면 엄마가 치명 당할 날이 닥칠 것이니 그 날은 여기에 오지 말아라.” 하고 당부하며 흐르는 눈물을 삼켰다.
어린 야고보는 가슴이 막히고 슬프기 그지없었지만 이리저리 수소문하여 희광이를 찾아갔다. 한 푼, 두 푼 동냥한 돈과 쌀자루를 희광이에게 주면서, 고생을 많이 한 우리 엄마가 순교할 때 아프지 않게 단칼에 하늘나라에 보내 달라고 간청하였다.
이에 희광이도 감동하여 밤새 칼을 갈아 이튿날 이곳 당고개에서 약속을 지켜 주었다. 먼발치에서 장렬하게 순교하는 어머니를 바라본 네 형제는, 어머니의 용감한 순교 장면을 보고, 저고리를 벗어 하늘에 던지면서 “우리 엄마 천당 갔네, 우리 엄마 천당 갔네” 하며 울었다.
이성례 마리아는 39세로 순교하였지만 인간적인 모성애로 한번 배교한 것 때문에 성인품에 오르지 못하였다. 우리는 이성례 마리아와 그 아들 최양업 도마 신부님이 하루 빨리 성인 반열에 오르도록 많은 기도를 드리자.
당고개에서 순교한 성인 성녀
○ 박종원 아우구스티노 성인님.( - . 당고개. 1840. 1.31. 48세. 회장)
○ 최영이 바르바라 성녀님. (서울. 당고개. 1840. 2. 1. 22세. )
○ 손소벽 막달레나 성녀님. (서울. 당고개. 1840. 1.31. 39세. )
○ 이문우 요한 성인님. (이천. 당고개. 1840. 2. 1. 31세. 회장)
○ 이경이 아가타 성녀님. (서울. 당고개. 1840. 1.31. 27세. 동정녀)
○ 권진이 아가타 성녀님. (서울. 당고개. 1840. 1.31. 21세. )
○ 홍병주 베드로 성인님. (서울. 당고개. 1840. 1.31. 42세. 회장)
○ 홍영주 바오로 성인님. (서울. 당고개. 1840. 2. 1. 39세. 회장)
○ 이인덕 마리아 성녀님. (서울. 당고개. 1840. 1.31. 22세. 동정녀)
○ 이성례 마리아 순교자님. (홍주. 당고개. 1840. 1.31. --세. )
새남터 성지
성지 설명 |
식당 02-713-3113
소재지 : 서울 용산구 서부이촌동
새남터의 이름은「노들」혹은「사남기」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었다.
여기는 조선 초기부터 군사들이 연무장과 국사범을 비롯한 중죄인의 사형장으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던 성삼문(成三問) 등 사육신(死六臣)이 충절의 피를 뿌린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새남터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중국인 주문모(周文模) 신부를 처형하면서 천주교 신자들의 선혈을 뿌리기 시작했다.
주 신부를 잃은지 38년만인 1839년 기해박해 때 세 명의 외국인 사제 앵베르 범 주교, 샤스탕 정 신부, 모방 나 신부도 주 신부님이 그랬던 것처럼 새남터의 군문 효수형으로 처형되었다. 그리고 1846년 한국 최초의 방인 사제인 김대건 신부님과, 기해 일기를 남긴 현석문(玄錫文) 가롤로 회장도 이곳에서 참수되었다.
다시 1866년 전국적으로 8천명의 목숨을 앗아간 병인박해 때 베르뇌 장 주교, 브르트니애르 백 신부, 볼리외 서 신부, 도리 김 신부, 푸르티에 신 신부, 쁘띠니꼴라 박 신부 등 여섯 명의 프랑스 사제들이 순교하셨고, 정의배(丁義培) 마르코, 우세영(禹世英) 알렉시오 등 10여명이 순교하였다.
이렇게 새남터에서는 20여명의 순교자 중 11분은 1984년 5월에 시성 되면서 이곳은 천주교의 중요한 성지가 되었다.
이 곳에 1981년에 새남터 본당이 설립되었고, 1987년 한국 복자수도회에서 현재의 성전을 봉헌하였다. 다음은 새남터 성당의 내부에 대해 알아보면, 새남터 성당은 한국의 전통 양식으로 건축한 것이며, 대성당 안에 대형 십자가 뒤에는 우주를 상징하는 문양이 있다. 또 사방 팔방으로 뻗쳐 있는 선은 세계 만방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상징한다. 십자가 아래 바치고 있는 백합꽃은 순결을 뜻한다. 돔 아래에 있는 비둘기는 성령을 의미하고, 어린양은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지구 모양을 하고 있는 감실은 한 덩어리의 통 돌에 무궁화 꽃을 조각했고, 감실 문은 인간의 심장을 나타내는 하트(♡)모양을 하고 있다. 제대는 경전을 읽을 때 쓰는 경상 모양이며 역시 통 돌에다 밀과 포도를 조각했다. 제대를 중심으로 오른쪽 성수 대는 우리나라 고유의 도자기 모양이고, 왼쪽의 독서대는 장구 모양으로서 장구 소리처럼 복음이 널리 퍼져 나가라는 것을 상징한다.
정면에 있는 부조는 제대를 중심으로 103위성인 성녀 상인데,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오른쪽에는 임금 중의 임금이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한국의 임금님으로 표현했고 왼쪽에는 성인 성녀를 따로 조각한 것이다. 왼쪽에 아기 도령의 모습인 예수님을 안으신 성모마리아 역시 우리나라 왕후의 옷을 입으셨다. 성모님을 중심으로 새남터와 갈매 못에서 순교하시고 성인 품에 오르신 주교․사제․평신도를 표현한 것이다. 아래쪽에 출렁이는 파도는 세상의 세파를, 배는 그리스도를 표현한 것이다. 또 성전 양쪽 벽면 십 사처에 예수님과 로마 병사들도 우리나라 사람으로 표현했다.
종탑은 목조 3층 모양으로 지었으며 그 안의 종은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순교 성인들의 후손들이 보내 준 헌금으로 주조한 것이다.
우리나라 첫 사제이신 김대건 신부님 순교
다음에는 새남터에서 순교하신 김대건(金大建) 신부님에 대한 이야기다. 김대건 신부님은 1821년에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솔뫼에서 김제준(金済俊) 이냐시오와 고 우르슬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대건 신부님의 가문이 천주교를 믿기 시작한 때는, 김대건 신부님의 증조부 김진후(金震厚) 비오 때부터 내포의 사도 이존창(李存昌)의 권유로 천주교를 받아 드렸다. 이존창의 조카딸이 김대건의 증조모이다.
김진후 비오는 위패를 모시지 않아 일어난 1791년 진산 사건 때 이미 신앙을 고백하였고,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해미에서 10여 년 간 옥고를 치르다가 옥사하였다. 김대건 신부님의 집안은 증조부인 김진후 뿐만이 아니라 그의 동생인 선후와 그들의 손자를 포함해서 10명이 순교하신 순교자 가문이다.
김대건 신부님이 7살 되던 때에 박해를 피해, 용인 한덕골로 이사하셨다가 다시 골배마실로 이사하였는데 이곳에서 15세 때에, 정하상 바오로 집에 계시던 모방 나 신부님이 김대건의 굳센 성격과 진실한 신심을 보고, 천주님이 선택한 아이라 생각하여 최양업과 최방제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다.
김대건 신부님은 사제 서품을 받기까지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마카오에서 민란이 일어나 두 차례나 필리핀 마닐라로 피난하는 고역을 치르고 있을 때에, 국내에서는 기해박해로 앵베르 범 주교, 모방 나 신부, 샤스탕 정 신부와 최양업의 부모님, 김대건 부친과 많은 교우들이 순교했고, 그의 어머니는 걸식한다는 소식을 접하지만 거기에 좌절하지 않고, 더욱 열심히 신학을 공부하여 1844년 당시 만주 소팔가자에서 페레올 고 주교에게 최양업과 같이 부제품을 받고 일단 조선에 입국하였다. 입국할 때 교회의 밀사와 만나기 위해 엄동설한에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맨발로 걷기까지 하였다. 김대건 부제는 한양에 도착하여 중병에 걸려 힘든 중에도, 신학생 두 명을 지도하고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그러면서도 보고 싶은 어머니에게는 알리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주교님과 선교사를 모셔 오기 위해 11명의 교우들과 함께 길이 25자(8.1m) 넓이 9자 높이 7자 되는 작은 배를 가지고 상해로 떠났다. 가까운 섬에만 다니게 되어 있는 목선을 타고 제물포를 떠나 구사일생으로 상해에 도착하였다. 상해에서 만 24세가 되어 페레올 주교에게 사제 서품을 받고, 15일 후 조선에서 타고 갔던 목선을 수리하여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님을 모시고, 그 배로 상해를 출발하여 천신만고 끝에 제주도까지 표류했다가 50여일 만에 강경 나바위에 도착하였고, 서울과 용인 은이 공소에서 사목 활동을 하면서 걸식하던 어머니를 만난다.
그러던 중 조선의 입국을 기다리고 있는 메스트로 신부와 최양업 부제를 맞아들이기 위해 뱃길을 알아보고, 지도와 편지를 백령도에 와 있던 중국 어선에 전하고 순위도에 들어왔다가 배를 빌리려는 일로, 관장과 문제가 생겨 신부님의 본색이 발각되어 체포된다. 그 후 100일 동안 40여 차례 문초를 받으며 그동안의 행적과 천주교회의 교리에 대해 묻자, 천지창조, 강생구속, 영혼 불멸, 상선 벌악 등을 합당하고 이치에 맞게 설명하였다. 이에 감탄한 관장이 국왕에게 그의 생명만은 보존해 달라고 상소까지 올렸다. 그리고 김대건 신부에게는 배교를 권유했지만 신부님은 ‘한번 나고 한번 죽는 것은 인간에게 정해진 이치요. 천주님을 위해서 죽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하면서 오늘 묻고 내일 묻고, 때리고 죽여도 똑 같다고 대답했다.
그 당시 영의정인 권돈인(権敦仁)은 저 지독한 자를 죽이지 않으면 나중에 큰 일이 일어날 것이니 죽여야 된다고 주장해서 사형 선고를 받게된다.
새남터에서 형리가 사형 선고문을 낭독하자, 김대건 신부님은 일어나 힘차게 말하였다. ‘여러분도 죽은 후 영복을 얻으려면 천주님을 믿으시오’ 하고 큰소리로 외쳤다. 형리들이 달려들어 양 귀에 화살을 꽂고 얼굴과 온몸에는 물을 뿌리고 회칠을 하는 등, 잔인하게 형벌을 가했지만 조금도 굴하지 않으시고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하였다. 시퍼런 칼을 들고 춤을 추던 희광이의 칼에 여덟 번만에 목이 떨어졌다.
그 당시 국사범이나 중죄인은 처형 한지 3일 후에 가족들이 장사를 지낼 수 있었는데, 김대건 신부님의 몸은 모래사장에 묻고, 목은 장대에 높이 올리는 군문 효수형을 당하여 40일쯤 지난 후,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서 이민식(李敏植) 빈첸시오와 교우들이 신부님의 시신을 몰래 거두어 밤에만 옮겨 미리내에 안장하였다.
신앙을 위해 죽음을 맞이하신 김대건 신부님과, 나라에 충신이었던 유명한 성삼문(成三問)의 죽음을 비교해 볼까 한다.
비록 두 분의 이상은 서로 달랐지만 그들은 충절을 다한 신념의 의인들이었다. 마지막 죽음에 임했을 때 성삼문은 사세시에서
북소리는 목숨을 앗기 위해 재촉하는데
머리를 돌려 바라보니 해는 저무누나
황천길에는 객사도 하나 없다는데
오늘밤엔 뉘 집에서 머물까!!
피 비린내나는 곤장과 노린내나는 담근질에도 굴복치 않던 성삼문도 죽음 앞에서는 내세에 대한 불안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김대건 신부님은 ‘천주님을 위해 나는 죽는다. 바야흐로 나에게는 영원한 생이 시작된다.’ 라고 하였다. 이 말씀에서 신앙인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옮겨가는 희망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준다.
성가 62.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새남터에서 순교하신 분
○ 범세형 앵베르 성인님. (프랑스. 새남터. 1839. 9.21. 43세. 주교)
○ 장경일 베르뇌 시뫼온 성인님.(프랑스. 새남터. 1866. 3. 7. 52세. 주교)
○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님. (솔뫼. 새남터. 1846. 9.16. 25세. 신부)
○ 모방 나 베드로 성인님. (프랑스. 새남터. 1839. 9.21. 35세. 신부)
○ 샤스탕 정 야고보 성인님 (프랑스. 새남터. 1839. 9.21. 35세. 신부)
○ 백 브르트니애르 성인님. (프랑스. 새남터. 1866. 3. 7. 28세. 신부)
○ 서 볼리외 루도비코 성인님. (프랑스. 새남터. 1866. 3. 7. 28세. 신부)
○ 김 도리 헨리코 성인님. (프랑스. 새남터. 1866. 3. 7. 27세. 신부)
○ 현석문 가롤로 성인님. (서울. 새남터. 1846. 9.19. 49세. 회장)
○ 정의배 마르코 성인님. (서울. 새남터. 1866. 3.11. 71세. 회장)
○ 우세영 알렉시오 성인님. (서흥. 새남터. 1866. 3.11. 21세. )
○ 주문모 야고버 순교자님. (중국. 새남터. 1801. 5.31. 49세. )
○ 신 푸르티에 안토니오 순교자님. (프랑스. 새남터. 1866. 3.11. -- 세. )
○ 박 프티니콜라 미카엘 순교자님. (프랑스. 새남터. 1866. 3.11. -- 세. )
○ 김면호 토마스 (안동. 새남터. 1866. 9.10. -- 세. )
○ 김문원 바오로 ( 새남터. 1866. 9.10 .--세. )
○ 이연식 이서방 (대원군하인.새남터.1866. 3.11. -- 세. )
○ 이유일 안토니오 (연풍. 새남터. 1866. 7.20. -- 세. )
성가 489. 보았나 십자가의 주님을
절두산 성지
성지 설명 |
소재지 : 서울 마포구 합정동 96-1
절두산 성지는 한강변에 위치한 작은 산으로 세종 때 이곳을「가을두」또는「들머리」라 불렀고, 산 모양이 용머리 같다 하여「용두봉」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며, 또한 성종 때는 누에 머리 같다 하여「잠두봉」이라고도 불렀다.
이날 정부에서는 의병을 모으고 1866년 10월 22일 흥선대원군이 「양인에게 화친을 허락하는 것은 곧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 라는 척화비를 세우고, 서양 오랑캐를 물리치고 나라를 지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당시 강화도를 점령한다는 것은, 남부지방에서 물자를 서울에 올라오지 못하게 뱃길을 막는 것이다. 그래서 서울에서는 물자 부족을 겪게 되는 큰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이러한 사건이 일어나게 된 이유는 천주교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서양 오랑캐에게 더렵혀진 한강을, 서학의 무리들의 피로 씻어야 한다며 천주교도들의 처형지를 서소문과 새남터에서 프랑스 함대가 침입했던, 양화진 근처 잠두봉을 택하여 처형함으로써, 서양 사람들의 침입에 대한 보복이자 오랑캐에 대한 배척을 표시했던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이곳에 첫 순교자는 이의송(李義松) 프란치스코 일가족으로 1866년 10월에 부인 김엇분 마리아, 아들 이붕익(李鵬翼) 바오로와 함께 참수됐다는 기록이 있다. 그 일가족을 비롯해서 30여명만이 기록에 남아 있을 뿐, 이곳에서 수천 명의 교우들이 목숨을 잃었는데도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이것은 먼저 참수하고 나중에 보고하라는 선참후계(先斬後啓) 명령으로 천주교 신자들은, 재판의 형식이나 절차도 없이, 무조건 참수 당했기 때문에 기록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곳의 지명이 많은 사람의 목을 잘랐다 하여 절두산(切頭山)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되었다.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병인박해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1966년 3월에 시작하여 1967년 10월 21일 축성하고 28분의 성해와 2000여종의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우뚝 솟은 벼랑 위에 3층으로 세워진 기념관은, 박물관과 종탑, 그리고 성당으로 구성되었는데, 접시 모양의 지붕은 옛날 전통인 선비들이 의관을 갖출 때 머리에 쓰던 갓 모양이고, 종탑은 목 칼 형태이며 지붕 끝에 늘어진 사슬은 족쇄를 상징한다. 지하 경당은 우리나라에서 순교하신 28위 성인의 성해(聖骸)를 모셨으니, 순교자 기념관은 우리의 전통 문화와 순교자들의 고난을 대변해 주고 있다.
그리고 1972년 5월 14일 우리나라의 애국 선열 동상 건립위원회에서는 절두산 광장에 김대건 신부의 동상을 세워 그의 행적을 기리고 있다.
병인박해가 일어난 원인은, 1860년 중국에서 영국과 프랑스군이 천진과 북경을 점령한 사건이 전해졌고, 우리나라는 1865년 러시아의 남하 정책으로 통상을 요구하며 남침의 위협이 겹치자 흥선대원군은, 이 난국을 천주교의 협력을 얻어 극복해 보고자 하였다. 이때 남종삼(南宗三) 승지와 베르뇌 주교님의 집주인 홍봉주(洪鳳柱) 등은 교회의 지도급 인물로 이 기회를 이용하여 신앙의 자유를 얻고자, 한불 동맹의 체결을 조정에 건의하였다. 바로 이때 사신으로 가던 이홍교는 북경에서 선교사 살해 사건이 일어났다는 거짓 편지를 보냈고, 러시아군의 남하 기세도 수그러들자 흥선대원군은 마음이 돌변했다. 천주교를 반대하던 대신들은, 신자들과 외국 선교사들을 체포하도록 요구해서 9명의 프랑스 신부들이 처형되었다. 이때 리델 신부가 중국으로 탈출하여 박해 사실을 알리는 한편, 아직 조선에 남아있던 깔레 강 신부와 페롱 권 신부를 구출하고 조선교회를 도와줄 것을 로즈 제독에게 요청하여 프랑스군에 두 차례에 걸쳐 침입했다.
흥선대원군은 병인양요를 승리로 이끌면서 혹독한 박해가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한편 로즈 제독은 닥쳐올 추위와 패전으로 강화도에 소장되어 있던 고문서와 은괴만을 탈취하고 철수하였다. 또 1868년 덕산에 있는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묘를 도굴한 독일인 오폐트르 사건은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었다. 그래서 오가작통법으로 붙잡힌 신자들은 재판도 하지 않고 선참후계로 처형되었다. 또 1871년 신미양요로 참혹한 박해가 절정에 이르면서 1872년 흥선대원군이 실각할 때까지 무려 7년 동안 천주교 신자를 학살하였다. 이때 병인박해로 순교하신 분들이 전국에서 8.000에서 20.000여명으로 추산되지만 확실한 숫자는 알 수가 없다. 양반 계급이 아닌 신분이 낮은 중인 이하는 거의 재판을 받지 않고 형장으로 직행하여 처형하였으니 대부분 이름조차 밝혀지지 않은 순교자들이다.
성가 55. 착하신 목자
한국초대교회선교사동향
(1794~1877)
이 름 |
한국명 |
본 명 |
국 적 |
연령 |
입국년월일 |
생 몰 일 |
재직기간 |
베로조 |
주문모 |
야고보 |
중국 |
49 |
1794.12.24 |
1801. 5.31순교 |
6년 5개월 |
여항덕 |
여항덕 |
빠치비꼬 |
중국 |
|
1834. 1. 3 |
1836.12. 3귀국 |
2년11개월 |
모방 |
나 羅 |
베드로 |
불란서 |
35 |
1836. 1.12 |
1839. 9.21순교 |
3년 8개월 |
샤스탕 |
정 鄭 |
야고보 |
불란서 |
35 |
1837. 1.15 |
1839. 9.21순교 |
2년 8개월 |
앵베르주교 |
범세형 |
라우렌시오 |
불란서 |
43 |
1837.12.18 |
1839. 9.21순교 |
1년 9개월 |
페레올 주교 |
고 高 |
젠 |
불란서 |
45 |
1845.10.21 |
1853. 2. 3.병사 |
6년 3개월 |
다블뤼 주교 |
안돈이 |
안토니오 |
불란서 |
48 |
1845.10.21 |
1866. 3.30순교 |
20년5개월 |
김대건 |
김대건 |
안드레아 |
한국 |
26 |
1845.10.21 |
1846. 9.16순교 |
11개월 |
최양업 |
최양업 |
도마 |
한국 |
41 |
1849.12. 3 |
1861. 6.10병사 |
11년6개월 |
메스트로 |
이 李 |
암브로스 |
불란서 |
49 |
1852. 8.12 |
1857.12.20.병사 |
5년 4개월 |
장수 |
양 楊 |
프란코 |
불란서 |
26 |
1854. 3. |
1854. 6.18병사 |
2개월 |
베르뇌주교 |
장경일 |
시메온 |
불란서 |
52 |
1856. 3.15 |
1866. 3. 7순교 |
10년 |
프티니콜라 |
박덕로 |
유스토 |
불란서 |
36 |
1856. 3.15 |
1866. 3.11순교 |
10년 |
푸르티에 |
신요안 |
챠레스 |
불란서 |
36 |
1856. 3.15 |
1866. 3.11순교 |
10년 |
페롱 |
권 権 |
스테니라 |
불란서 |
41 |
1857. 3.31 |
1866.10.26탈출 |
11년6개월 |
리델 주교 |
이복명 |
휄릭스 |
불란서 |
54 |
1861. 3.21 |
1866. 6.29탈출 |
5년 3개월 |
1877 가을 |
1884. 6.20병사 |
6년 4개월 | |||||
오조안느 |
오 呉 |
삐에르 |
불란서 |
31 |
1861. 3.21 |
1863.4.13병사 |
2년 2개월 |
칼레 |
강 姜 |
알퐁소 |
불란서 |
36 |
1861. 3.21. |
1866.10.26탈출 |
5년 7개월 |
랑드르 |
홍 洪 |
쟌마리에 |
불란서 |
35 |
1861. 4. 7. |
1863. 9.15 |
2년 5개월 |
오매트르 |
오 呉 |
베드로 |
불란서 |
29 |
1863. 6 |
1866. 3.30순교 |
2년 9개월 |
위앵 |
민 閔 |
마르띠노 |
불란서 |
30 |
1865. 6 |
1866. 3.30순교 |
8개월 |
브르트니에르 |
백 白 |
유스도 |
불란서 |
28 |
1865. 6 |
1866. 3. 7순교 |
8개월 |
볼리외 |
서몰례 |
루도비꼬 |
불란서 |
26 |
1865. 6 |
1866. 3. 7순교 |
8개월 |
도리 |
김 金 |
헨리코 |
불란서 |
36 |
1865. 6 |
1866. 3. 7순교 |
8개월 |
마르띠노 |
남 南 |
알렉산델 |
불란서 |
34 |
1868 |
1875. 8.10. |
약 7년 |
리새트 |
채 蔡 |
삐에로 |
불란서 |
36 |
1868 |
1880. 9.28. |
약12년 |
코스트 |
고의선 |
엔게네 |
불란서 |
54 |
1875. 7.15. |
1896. 2.28 |
10년7개월 |
블랑 주교 |
백규삼 |
죤 |
불란서 |
46 |
1876.5.11. |
1890. 2.21 |
13년9개월 |
드게트 |
최진승 |
빌토르 |
불란서 |
41 |
1876.5.11 |
1889. 4.29 |
12년11개 |
두세 |
정가미 |
가밀로 |
불란서 |
64 |
1877. 9.23 |
1917. 4.19 |
29년7개월 |
로베르 |
김보록 |
아칠레 |
불란서 |
65 |
1877. 9.23 |
1922. 1. 2. |
44년3개월 |
조선 대목구 역대교구장
1931~1911~1998
대 |
재 직 기 간 |
이 름 |
원 명 |
생 몰 년 도 |
비 고 | ||
제 1대 |
1831. 9. 9. ~1835.11.21. |
소 蘇 |
Barthelemy Bruguiere |
1792. 2.12. ~1835.11.21. |
파리외방전교회, 대목병사 | ||
제 2대 |
1836. 4.26. ~1839. 9.21. |
범세형 笵世亨 |
Laurent, Imbert |
1796. 3.23. ~1839. 9.21. |
파리외방전교회, 대목순교 | ||
제 3대 |
1843.12.31. ~1853. 2. 3. |
고 高 |
Joannes, Ferreol |
1808.12.27. ~1853. 2. 3. |
파리외방전교회, 대목병사 | ||
제 4대 |
1854. 8. 5. ~1866. 3. 7. |
장경일 張敬一 |
Simeon, Berneux |
1814. 5.14. ~1866. 3. 7. |
파리외방전교회, 대목 순교 | ||
제 5대 |
1866. 3. 9. ~1866. 3.30. |
안돈이 安敦伊 |
Antoine, Daveluy |
1818. 2.16. ~1866. 3.30. |
파리외방전교회, 대목순교 | ||
제 6대 |
1869. 4. 27. ~1884. 6.20. |
이복명 李福明 |
Felix, Ridel |
1830. 7. 7. ~1884. 6.20. |
파리외방전교회, 대목 | ||
제 7대 |
1884. 6.20. ~1890. 2.21. |
백규삼 白圭三 |
Jean, Blang |
1884. 5. 6. ~1890. 2.21. |
파리외방전교회, 대목 | ||
제 8대 |
1890. 9. 2. ~1933. 1.23. |
민덕효 閔德孝 |
Gustave, Mutel |
1854. 3. 8. ~1933. 1.23. |
파리외방전교회, 대목 | ||
1911년 4월 8일 조선대목구를 서울대목구․대구대목구로 분할 | |||||||
서울 초대 |
1933. 1. ~1942. 1.12. |
원형근 元亨根 |
Adrianus, Larribeau |
1883. 2. 4. ~1874. 8.12. |
파리외방전교회, 대목 | ||
서울2대 |
1942. 1.12. ~1967. 3.24. |
노기남 盧基南 |
Paul, Ro |
1902. 1.22. ~1984. 6.25. |
서울대주교, | ||
1962. 3. 10. 서울대목구․대구대목구․광주대목구를 대교구로 승격 | |||||||
서울3대 |
1967. 3.24. ~1968. 4.27. |
윤공희 尹恭熙 |
Victorius, Youn |
1924.11. 8. ~ |
교구장서리 | ||
서울4대 |
1968. 4.27. ~1998. 5.29 |
김수환 金壽煥 |
Stephen, Kim |
1922. 5. 8. ~ |
서울대주교, 추기경 은퇴 | ||
서울5대 |
1998. 5.29. ~현제 |
정진석 鄭鎭奭 |
Nicholas, Cheung |
1931.12. 7. ~ |
메리놀회 서울대주교 |
☞천주교 전국 성지 순례 코스☜
1. 전국 성지순례의 의미
전국의 주요 성지와 유적지를 15개 코스로 나누어 성지 안내 봉사자의 안내를 받으며, 교회사에 나타난 역사적 의미와 관련된 행적들을 묵상하고, 성직자와 신자들의 박해 상황, 서간이나 기록에 나타난 순교자들의 행적을 되새겨 보는 1일 성지순례 피정입니다.
2. 순례코스
제 1차 어농, 단내, 천진암 강학터, 남한산성 성지.
제 2차 전동성당․풍납문, 전주숲정이 성지.
제 3차 배론 성지, 묘재, 용소막성당, 부엉골신학당.
재 4차 초남이 유항검생가터. 치명자산.
제 5차 갈매못 성지, 다락골줄무덤 성지, 홍성읍성 성지.
제 6차 마원 성지, 최양업 신부 선종지, 연풍, 감곡성당.
제 7차 황새바위 성지, 수리치골, 여사울, 신리 성지.
제 8차 풍수원 성당, 마재 정약종 유적지, 구산 성지
제 9차 여산 숲정이 성지, 천호산 성지,
제10차 삼성산 성지, 수리산 성지, 미리내 성지,
제11차 배티 성지, 죽산 성지, 은이 공소, 골배마실.
제12차 나바위 김대건 신부 귀착지. 김대건신부 출생지.
제13차 해미 성지, 성거산 성지, 공세리 성당
제14차 갑곶돈대 성지, 이승훈 묘 성지, 남양 성모 동산.
제15차 대구 관덕정 성지, 한티 성지, 신나무골 성지,
부록 명동성당, 서소문, 당고개, 새남터. 절두산성지.
3. 준비 사항
◉ 안 내 : 한국순교자 현양회 성지안내 봉사자회
◉ 출발 도착 : 매월 3번째 주일 사당역 1번 출구 아침 8시출발․오후 8시 도착예정
◉ 신 청 : 본당 또는 단체별로 버스 1대 40명 기준
◎ 순교자현양회 주소 : 서울 중구 명동 1가 2-3 가톨릭 회관
◎ 안 내 전 화 : 순교자현양회 사무국 02-2269-0413~4 F 02-2269-0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