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봉과 구룡계곡 산행이 있던 날 나는 반대편 영제봉으로 외도를 한다.
산행 들머리인 ‘육모정(六茅亭)’에서 ‘용호석문(龍湖石門)’· ‘방장제일동천(方丈第一洞天)’각자와 구룡구곡 중 1,2곡, 그리고 ‘여궁석(女宮石)’을 찾아본 뒤
영제봉북릉으로 오르기로 하였다.
이 영제봉북릉 코스는 고도차가 제법 나는 데다 힘든 편이어서 함께 하겠다는 일행을 완곡히 사양하였다.
영제봉(靈帝峰 1048)은 지형도엔 나와있지 않지만 그 위용이 예사롭지 않다.
가까운 880.9봉을 영재봉으로 따로 부르면서 이 영험스러운 봉우리는 자연스럽게 신령스러운 영(靈)들의 제왕(帝王)이 된 것.
처음엔 호기롭게도 영제봉과 숙성치를 꼭지점으로 삼아 육모정으로 회귀하는 삼각형 모양의 궤적을 그리기로 하였다.
그러나 시·공간의 제약으로 ‘용궁산촌산장’으로 탈출하고 말았다.
남원팔경 제1경 구룡계곡(용호구곡)은 곳곳에 소(沼)와 단애(斷崖) 그리고 반석(盤石)이 자연경관을 이룬 약 3.5㎞ 길이의 협곡이다.
육모정과 용호정을 시작으로 석벽에 새겨진 시사명단(詩社名單)과 암각자, 그리고 여궁석과 비보풍수 등으로 볼 때 용호구곡은 유·불·선(儒·佛·仙)과
풍수지리사상이 습합(習合)된 독특한 구곡문화로 보인다.
용호구곡(龍湖九曲)의 제1곡은 송력동(松瀝洞), 제2곡은 옥용추(玉龍湫), 제3곡은 학서암(鶴捿岩), 제4곡은 서암(瑞岩), 제5곡은 유선대(遊仙臺),
제6곡은 지주대(砥柱臺), 제7곡은 비폭동(飛瀑洞), 제8곡 경천벽(擎天壁), 제9곡은 교룡담(交龍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제3곡을 제외하고 구곡을 알리는
각자(刻字)가 이끼를 뒤집어 쓴 채 남아있다.
여궁석을 마을 사람들은 ‘ㅂㅈ바위’라고 부르는데, 송력골 여궁석에서 발원되는 음기가 인근 호경 마을에 미칠 악영향을 차단하기 위해 소나무를 가꾸고
축대를 쌓은 것이 ‘비보풍수(裨補風水)’에서 생겨난 제1곡 ‘송력동(松瀝洞)’의 유래다.
영제봉으로 지나가는 견두지맥은 백두대간의 만복대와 정령치 사이의 1365봉에서 분기하여 견두산, 천마산, 깃대봉 천왕봉, 갈미봉을
지나 섬진강까지 이어지는 37.8km의 산줄기지만 지리산권으로 진입하는 솔재에서부터는 비탐방구역으로 묶여있다.
<클릭하면 원본크기>
약 9km의 거리를 5시간이 걸린 셈.
고도표.
<클릭하면 원본크기> 구룡구곡(용호구곡, 1곡~9곡)
<수락폭포에서 출발한 부산일보의 참고 개념도> 지금은 이 부산일보 가이드는 폐쇄되었다.
견두지맥
A팀을 여원재에 내려준 후 바로 육모정으로 오지 않고, 덕치리를 빙빙돌아 구룡폭포 상류에서 두 명을 내려준 뒤 40분이 넘게 걸려 육모정에 도착이다.
산행 완료시간이 16:00이니 이렇게 마음이 급한가? 일각여삼추(一刻如三秋)다.
육모정에서 도로를 따라 100여m 정도 내려가면 도로변 석벽에 커다란 ‘용호석문(龍湖石門)’ 각자가 있다.
이 각자는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1770~1847)의 글씨. 선생은 전북 정읍 출생으로 이광사(李匡師)의 제자로 알려져 있다.
그 좌측 ‘방장제일동천(方丈第一洞天)은 김두수가 8세 때 쓴 것이라고 한다. 각자의 좌측에 조그마하게 김두수(金斗秀)라는 작은 글체를 확인할 수 있다.
두 각자 사이에 자연석불이 있는데, 눈여겨 보지 않으면 놓치기 십상이다. 사진의 우측에 이목구비가 선명한 돋을새김 모양의 자연석불을 확인할 수 있다.
자연석불 아래에 군수 이화익공적비가 세워져 있어 석불의 하반신을 가리고 있다.
<블로그 '돌구름'에서 가져온 사진> 자연석불의 모습이 자연양각으로 확연히 드러난다.
다시 육모정 쪽으로 올라와...
남원원동향약 비석과...
안내판을 일별하고...
육각정자인 육모정을 카메라에 담으며...
그 편액도 당겨 잡는다. 편액의 좌측 낙관엔 정축 성하(丁丑 盛夏). 정축년 한여름이니 1938년 또는 1998년도.
육모정복원기와 안내판에 따르면 육모정은 '원동향약'과 역사를 함께 하여 계원들이 친목을 도모하는 공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1961년 홍수로 유실된 육각정자 '용호정'을 '육모정'이라는 별칭으로 불러오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육모정과 용호정이 따로따로 세워진 것.
춘향묘는 1962년 ‘서옥녀지묘’라고 새겨진 지석이 발견되어 새로 단장한 것으로 ‘마고열녀춘향지묘(麻姑烈女春香之墓)’라고 쓰여진 비석이 세워져 있다.
육모정 앞 다리 아래로 내려서...
국창 권삼득 유적비를 돌아...
펜스를 살짝 타고 넘었다.
구룡계곡 9곡 중 제2곡인 용소(龍沼)는 물이 옥처럼 맑아 용이 살았다고 해서 옥용추(玉龍湫)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를 다른 이름으로 불영추(佛影湫)라고도 하는데, 이는 부처(佛)의 그림자(影)가 비치기 때문으로 부처는 아까 보았던 자연석불을 일컫는 듯.
옥용추 각자를 찾아 주위를 둘러보지만...
시사명단만 빼곡하고...
용소엔 고요한 침묵만 흐른다.
널따란 반석은 거북바위로 음력 사월 초파일에 춘향명창대회가 열리는 곳.
옥용추 각자 찾기는 갈길 바쁜 사람의 발길을 붙잡기만 하고...
조바심만 난다.
눈을 닦고 보아도 보이지 않고...
다만 용호육우(龍湖 六愚)라는 각자만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용호육우는 용호의 여섯 사람을 일컫는 말.
소송 정종묵(小松 鄭宗默)/ 묵재 노용현(默齋 盧鏞鉉)/ 소산 김용현(小山 金庸鉉)
우송 류영욱(又松 柳永郁)/ 소회 박선화(素晦 朴善和)/ 추원 박창규(秋園 朴昌圭)
갑자 단양(甲子 端陽)이니 갑자년 단오(1924년 5월 5일).
그래서 자료용으로 2곡 옥용추((玉龍湫) 각자를 빌려왔다.
정자가 있었던 터인가?
그 우측에 팔각정자가 세워져 있다.
용호정이다.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잘 단장된 산책로를 따르다...
계곡으로 내려섰다.
제1곡 송력동(松瀝洞) 각자를 찾기 위함인데...
이리 보아도 저리 보아도...
또 당겨 보아도 찾을 길 없어...
하는 수 없이 자료용으로 제1곡 송력동(松瀝洞) 각자를 빌려왔다. 언제 한번 다시 찾아와 느긋하게 구곡의 각자를 일일이 확인하리라.
송력동 각자를 찾지 못하고 다시 산책로로 올라오면...
용도 불명한 돌담이 보인다.
이것이 아까 말한 여궁석과 관련한 비보풍수에서 나온 것.
높이 2~3m, 폭 2m, 길이 15m 정도의 돌담은 여궁석에서 흐르는 물빛이 보이면 마을 부녀자들이 바람이 나기 때문에 그것을 차단하기 위해서 쌓은 것이다.
풍수지리상으로 여궁석이 마을의 을자 방위에 있어 마을을 향해 해로운 기운이 있으므로 이를 막기 위해서 숲과 담을 쌓았다고 한다.
돌담에서 계곡을 따라 조금 오르면...
평범한 자연석 암반에 좁은 수로를 이루고 흐르는 물줄기가 보여 가까이 다가갔더니...
마치 1인용 욕조같이 움푹 들어간 작은 석탕(石湯)이 보인다. 호사가들은 이 작은 바위의 생김새를 여궁석(女宮石)이라며 호들갑을 뜬다.
'ㅂㅈ바위'라는 쌍스럽고 노골적인 표현을 하는데...
이는 차라리 그렇게 하므로서 객관적 사실을 노골화 시키고 또 구체화시키는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요즘에 와서는 호기심과 재미를 더하는 이만한 스토리텔링도 드물 것.
계곡에서 왼쪽 능선으로 바로 붙는 산책길이 나 있었지만...
나는 송림사지를 곧장 오른 뒤 좌측 능선으로 붙든지, 아니면 이곳 지계곡 직전에서 우측 능선(영제봉북릉)으로 붙든지 잠깐 망설이다...
우측 영제봉북릉으로 바로 붙기로 하였다. 이는 경사도 면에서 좌측 능선보다 수월하다고 보았기 때문.
묘지를 지나 반듯한 산길은 아니지만...
이따금 조망도 열리며...
영제봉북릉으로 접속해 간다.
10분이 조금 넘어 우측에서 올라오는 영제봉북릉의 산자락을 붙잡는다.
그리곤 한바탕 된비알을 오르자 국립공원 경계석을 만나고...
조금 진행하니 잘록한 안부에서 갈림길도 만난다.
다시 우측으로 빼꼼하게 열리는 전망사이로 영재봉인 듯 봉우리가 솟아있고...
나중에 내가 탈출한 능선이 영재봉 직전에서 가까이 보인다.
영재봉 우측으로 견두지맥이 고개를 내민다.
잘록이와 영재봉 직전에서 내가 탈출한 능선.
여의치 않다면 이 지점에서 우측 용궁산촌산장으로 내려서는 등로를 확인해 두었다. 다시 한바탕 중력과의 전쟁을 치룬 뒤...
거북이를 닮은 바위가 엎드려 있는 신령스런 기운이 감도는 영제봉 정상(1048m)에 올랐다.
그런데 지친 산객을 맞아줄 참하고 예쁘게 생긴 정상석은 보이지 않는다. 순간 실망한 건 힘들게 올라온 과정을 보상받지 못한 데 대한 아쉬움이다.
지리산 국립공원 관리공단에서 비탐방 구역이라는 이유로 치워버린 듯한데, 이것만이 능사였을까?
그래서 영제봉 정상석이 있는 예전의 사진을 빌려왔다.
이제 남은 건 유일한 보상으로 주위 조망을 누리는 호사다. 멀리 구름모자를 쓴 만복대. 왼쪽 정령치 가라앉았다가 솟은 봉우리는 고리봉.
고리봉을 지나 세걸산으로 이어지는 지리산 서북(태극)능선.
가까이 보이는 잘록이는 다름재.
방향을 틀어 견두산 방향을 바라보니 가까이 볼록 솟은 산이 영재봉이고 그 뒤는 솔봉인 듯. 잘록한 밤재를 지나 계속 견두산으로 지맥이 이어진다.
산정에 홀로 머물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그만 갈길을 서두른다.
가파른 산죽숲을 헤치고...
바위구간은 에두르며...
둘러 가는데...
눈에 익은 비실이부부 표식기. 취권은 취한 척하며 싸움에 이기는 권법인데, 비실이부부는 비실한 척하며 전국의 산을 다 헤매고 다닌다.
누가 지리산 아니랄까봐 이처럼 산죽으로 덮었을까,
찢어진 샛길 금지 현수막.
등로는 계속 거칠고 갑갑하여 시간을 확인하니 산행마감 시간이 촉박하다.
설상가상 (雪上加霜)으로 다리에 쥐가 나서 주물러 보았지만 증세만 악화되면서 오만 방증맞은 생각이 다 든다.
한동안 잔조리 후 작은 오르막을 차고 오르다 우측으로 탈출로를 확보한다. 지형도의 등고선을 확인하니 능선으로 타고 내려가면 용궁산촌휴양림.
처음엔 급한 내리막이지만...
어느덧 유순해지고...
산죽밭이 등로를 매운다.
잇따라 묵묘가 나오며...
잊혀져 가고 있고...
그렇게그렇게 자연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제 유택(幽宅)은 산짐승들의 보금자리로 내어 주었고...
그 비석마저 땅속 깊숙히 묻혀져 간다.
군데군데 이어지는 묵묘를...
벗어날 즈음...
쏴아하는 계곡 물소리.
작은 내를 건너면서 길은 더욱 선명해지더니...
취수댐을 만난다.
이 계곡은 남원시 상수원 보호구역..
임도급 산길을 따르면...
물탱크가 나오고...
우측 계곡변으로 실외 풀장이 보인다.
용궁산촌휴양림이다.
숲속 군데군데에 펜션이 들어서 있고...
공사 중인 용궁2저수지를 지난다.
이제 지리산용궁휴양촌을 벗어나며...
길가의 예쁜 찔레꽃과도 눈맞춤을 한다.
큰 길가 아스팔트에 나오면...
맞은 편에 예쁜 화장실이 있고...
육모정으로 회귀하면서 우리 팀들이 넘었을 봉우리들을 살핀다.
우측으로 고개를 돌려 견두지맥도 살피고...
기도도량 천혜수암을 지나면...
이내 우리차가 기다리고 있는 내촌교에 닿는다.
내촌교 다리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구룡계곡 하류.
길가의 우리 버스에는 목마른 일행들이 목을 축이고 있다.
차에서 옷보따리를 주섬주섬 챙긴 뒤...
도로변 맑은 수로에서 등산화를 벗었다.
첫댓글 산행기 잘 보고 갑니다
덕분에 제가 가보지 못한 다른 쪽의 기록들을 공부합니다~
수정봉과 구롱계곡은 몇번 다녀왔기에 땜빵으로 영제봉을 올랐죠.
반대편 수락폭포 원점회귀 가이드는 부산일보에서 오래전 올려져 있었지만 국립공원 비탐지역.
언젠가 선인들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구룡구곡(용호구곡)의 각자를 찾아나설 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