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롬 8:18-26)
19)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24)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오? 25)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26)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서론)
이 문단을 시작하는 18절은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입니다. 현재는 모두가 고난을 받고 있으나, 장차 우리에게는 큰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는 소망의 말씀입니다. 또한 24절에는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오?”라고 했습니다. 곧 장차는 큰 영광이 기다리고 있지만, 현재는 너무 힘들어서 ‘탄식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본문에 세 번이나 나옵니다. 첫째는 피조물들의 탄식이고, 둘째는 성도들의 탄식이고, 셋째는 성령의 탄식입니다. 탄식한다는 말이 영어로는 ‘groan’인데, ‘신음한다’는 번역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탄식’은 “후회할 때나 역부족으로 아쉬울 때”에 쓰지만, ‘신음’은 “많이 아프거나 괴로워서 앓는 소리를 낼 때”에 씁니다. NIV는 “지금까지 계속하여 해산의 진통으로 신음하고 있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가 안다고 했습니다. 당신도 알고 있습니까? 바울은 이 소리를 들었고, 또한 알았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이 소리를 들어야 하고, 그 가련한 현실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 장차 올 영광의 새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1. 모두가 너무 괴로워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1) 피조물들이 신음합니다. 여기서 피조물이란 동식물뿐이 아닙니다. 사람도 다 포함됩니다. 인생은 고생을 위해 태어났습니다(욥 5:7). 짐승들도 사는 것 자체가 고생입니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보람이 있습니까? 모든 것이 허무합니다. 그래서 괴로워하고 신음하는 것입니다.
①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다른 말로 해서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을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를 사모합니다.”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계속하여 신음합니다. 불신자는 물론이고, 교회에는 다녀도 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영혼들이 이렇게 신음합니다. 문제는 그들의 육신이 자기 영혼의 이런 신음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② 피조물의 탄식(신음)이라고 하면 모두가 인간의 죄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죄가 많아지면 땅이 소산을 내지 않습니다(신 11:17). 비도 내리지 않습니다. 조금 남은 것까지도 가뭄에 타들어갑니다. 질병이 창궐합니다. 지진이나 화산폭발이나 대형 사고가 계속하여 일어납니다. 최근에 잡힌 고래의 배를 갈라보니 페트병, 프라스틱 봉지와 온갖 쓰레기들이 가득했다고 합니다. 인간들로 인해 짐승이나 물고기까지 이런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③ 우한 폐렴이 2년째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하물며 지진, 기근, 전쟁 등이 일어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유도 환경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자유가 아닙니다. 지구 온난화로 인해 이상기후가 나타나 생태계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최근엔 독일에서 폭우와 홍수가 나서 많은 사람이 죽고 대피하는 것을 보고, 중국 사람들이 좋아했더니, 곧 중국에 태풍과 함께 물 폭탄이 쏟아지고, 영국과 일본에도 무서운 재앙이 가득하게 임했습니다.
2) 성도들이 신음합니다.
① 성도들도 이 타락한 세상을 살아가기는 결코 녹녹지 않습니다. 거기에 교회생활도 잘 해야 합니다. 주변의 모든 눈들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도덕적으로도 완전을 지향하며 삽니다. 똑같은 잘못을 해도 기독교인에게는 온갖 화살을 쏘아댑니다. 산상수훈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들을 잘 지킬 수 있습니까? 탄식하고 신음할 줄 모른다면 바른 신앙인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② 성도들은 사회의 부조리와 부패를 보면서 신음합니다. 하나님은 먹그릇을 찬 천사에게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려라.”라고 하시고, 그의 뒤를 따르는 천사들에게는 “너희는 그를 따라 성읍 중에 다니며 불쌍히 여기지 말며 긍휼을 베풀지 말고 쳐서,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이와 여자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하지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지니라.”라고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더라고 했습니다(겔 9:4-6). 이 세대를 보면서 탄식(신음)할 줄 알아야 합니다. 눈물로 호소해야 합니다.
③ 하나님의 심판은 성소에서부터, 늙은 자들로부터 임합니다. 예수님은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라고 하셨습니다. 또 “그 때에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 24:11-12)라고도 하셨습니다. 지금이 말세입니다. 어디서 진실한 신앙인을 찾을 수 있을까요? 어느 시대에나 어느 곳에나 하나님이 감추어두신 의인은 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에 성전에는 시므온과 안나라는 무명의 선지자가 있어서 주야로 탄식하며 기도하고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3) 성령께서도 신음하십니다.
① 피조물들은 자기들의 힘으로는 행복을 가져올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야만 가능하기에 그들이 나타나기를 신음하기까지 하면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②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시고 있었습니다(창 2:4-6). 경작할 사람이 없으면 땅에 비가 아니 오고, 풀도 나무도 나지 않습니다. 몽골 사막에 한인이 가서 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랬더니 드디어 비가 내렸습니다. 경작할 사람이 생기면 비가 내립니다. 하물며 의인이 생기면 어떻게 될까요?
러시아 땅, 체첸에 접해 있는 모즈독이란 곳에 고려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 이소영 선교사님이 가셔서 교회를 세우고 전도하여 교회가 많이 생겨났습니다. 한국말을 가르쳤더니 고려인 4세, 5세 되는 사람들이 금방 배웠습니다. 내가 갔더니 사람들이 나에게 간증을 했습니다. 전에는 날씨가 우중충하고 안 좋았는데, 이 목사님이 오셔서 교회를 세운 후로는 날씨가 화창해지고, 농사도 잘 되고, 온 동네에 행복과 희망이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곳의 고려인 청년들이 한국에 유학도 가고 학위를 받아서 대학 교수가 되어 러시아인들에게도 놀라운 희망을 심어주었다는 것입니다.
③ 주님은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일꾼을 보내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마 9:37-38). 하나님은 추수꾼도 찾으시고, 의인을 찾고 계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의인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합니다. 그런데 의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도인(道人), 곧 진리의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디에 있나요?
2. 왜 신음합니까?
1) 하나님의 아들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의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성도를 뜻합니다.
①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립니다.” 성령을 받으면 하나님의 양자가 됩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신다.”(15-16절)고 했습니다. 그러나 육신적으로는 많은 제약 가운데에 있어서 십자가의 고난이 커져갑니다.
② 성도란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사람”입니다. 곧 성령의 첫열매인 그리스도께서 자기 안에 계심을 확신하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아쉽습니까? 그들에게는 무거운 십자가가 있습니다. 언제쯤에 이 십자가를 벗어버리고 저 아름다운 천국에 가서 주님과 함께 있게 될 것인가? 늘 그날을 바라보지만 그날은 속히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라나타!’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하지 않습니까? 결코 “여기가 좋사오니 ⋯”라고 말하지 마세요. 육신의 편안함에 안주하려고 하지 말고 오히려 신음해야 합니다.
③ 노아 시대에는 사람들이 얼마나 타락했는지 노아 외에는 의인을 찾을 수 없었고, 롯의 때에는 소돔 성에 롯 한 사람 외에는 의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노아시대엔 홍수로, 롯 시대엔 불벼락으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금방 잊어버립니다.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고, 오히려 신화라고 가르치고, 애써서 하나님의 심판을 부정합니다.
2) 피조물들이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를 바라지만 이루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① 이 말씀을 공동번역은 “피조물에게도 멸망의 사슬에서 풀려나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에 참여할 날이 올 것입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대관절 언제쯤이면 이런 날이 올까요? 수많은 사람들이 막연하게 유토피아를 상상하고 기대하면서 삽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유토피아! 그래서 애가 탑니다. 정말 있기는 한 것일까요?
②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아무 죄도 없는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도 고통 속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아담이 죄를 지었으니 그의 후손인 모든 인류가 고통 속에 빠진 것은 당연하다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왜 다른 피조물까지 고통을 당해야 합니까? 신명기 28장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라고 하시면서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라”(신 28:1-5). 그러나 반대로 사람이 죄를 지으면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소와 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모두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③ 세상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아주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많이 나오면 됩니다. 소돔은 죄악이 관영하여 무서운 불벼락 심판을 받아야 했지만, 만약 그곳에 의인 10명이 있었다면 그런 심판은 비껴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의인의 가치’라는 비밀을 모릅니다. 그래서 의인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교회가 바로 이것을 일깨워주어야 합니다. 이 시대의 의인들을 일으켜야 합니다. 우리나라에 가장 무능하도고 사악한 문재인 주사파 정권, 곧 역대급 대재앙 정권이 들어왔는데도, 지진과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우리나라는 비껴가고 왜 일본과 중국에만 쏟아질까요? 바로 대한민국에는 의인들과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남다른 박해를 받고 있습니다. 가짜 신자, 거짓 선지자들은 환호를 받으면서 삽니다. 그러나 의인들은 박해 속에서 신음하면서 기도를 합니다. 갈수록 태산입니다.
3) 세상 사람들의 무지(無知)가 모두를 신음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① 의인들의 신음소리도 못 듣는 인간들이 피조물들의 신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요? 더구나 성령의 신음소리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기도하는 성도들에게만 이 신음소리를 들려주십니다. 이 소리를 듣는 성도들은 그래서 위로를 받고 용기를 얻습니다. “덕불고(德不孤) 필유린(必有隣)”입니다. 하물며 신음하면서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의인들은 외롭지 않습니다. 성령의 위로와 평강이 임합니다. 함께 신음하는 동료가 많음을 깨닫기에 용기백배합니다.
② 하나님은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라고 탄식하십니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 4:6)라고 경책(警責)하십니다. 무슨 지식입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이며,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이 아닙니까?
③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지식을 갖기 위해 노력하지 않고 열심만 많으면 다 되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탄식합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 10:2-3). 지식이 없으니 거짓에게 속습니다. 지식이 없으니 헛된 것을 믿고, 거짓을 따라갑니다. 우리가 이런 위험에서 ‘exodus’해야 합니다. 옛날엔 ‘출애급’이지만, 지금은 ‘출바벨론’입니다. 지금은 승승장구하는 것 같아도, 결국엔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계 14:8; 18:2)라는 힘찬 소리가 들려오게 됩니다.
3. 이 깊은 신음에서 벗어나는 길이 있습니까?
1) 벗어나려고 하지 말고 현실을 직시하면서 함께 신음해야 합니다.
① 하나님의 일은 피하려고 하면 더 큰 것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도 “살려고 하면 죽고, 죽으려고 하면 산다(生卽必死 死卽必生).”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가 바벨론의 침공을 예언하면서 그들이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 목으로 바벨론의 왕의 멍에를 메지 아니하는 백성과 나라는 내가 그들이 멸망하기까지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그 민족을 벌하리라.”(렘 27:8)라는 엄중한 경고를 전했습니다. 그러자 거짓 선지자 하나냐가 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를 빼앗아 꺾고, 모든 백성 앞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빙자하여 “내가 2년 안에 모든 민족의 목에서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의 멍에를 이와 같이 꺾어 버리리라 하셨느니라.”(렘 28:10-11)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하나냐에게 전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나무 멍에들을 꺾었으나 그 대신 쇠 멍에들을 만들었느니라.”
잠시의 안락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는 자들은 나무 멍에 대신 쇠 멍에를 만드는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당장엔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고, 자기에게도 편할지 모르나,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심판은 너무도 속히 임합니다.
우리는 죄를 많이 짓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장차 지옥에서 큰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우리에게 자기의 십자가를 달게 지고 주님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고난을 많이 당하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고난을 당해야 주님의 고난을 이해할 수 있고, 함께 고난당하는 사람의 사정도 이해하며 위로해 줄 수 있고, 자기도 바른 길을 가게 됩니다.
② 주님을 믿는다고 해도 사람들은 고생스러운 것을 싫어하고 편하고 영광 받는 것만 찾습니다. 그러므로 신음한다는 것은 아예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는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7)라고 경고하셨지만, 이를 귀담아 듣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모두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는 하지 않고, 크고 넓고 편한 길로만 가려고 합니다. 뿐 아니라 교회에서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찬양하고 눈물도 흘리지만,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거기에 못박혀 죽어야 한다고 전하는 사람은 찾기 어렵고, 듣는 사람도 거의 없습니다. 오늘의 강단에서는 순수한 그리스도의 말씀은 사라지고,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는 소리가 요란합니다. 진실로 생명의 길을 찾으려는 사람은 어디에 있나요?
③ 예레미야를 보세요.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죽임을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울리로다.”(렘 9:1)라고 하지 않습니까? 찬송가 487장 4절에서는 “고생한 후에 기쁨 있고 십자가 후에 영광 있고, 죽음 온 후에 영생하니 이러한 도가 진리로다.”라고 노래합니다. 당신은 이것을 믿으십니까? 또한 이렇게 살기를 소원하십니까? 그때에야 비로소 신음이 나옵니다. 주님 앞에서 몸부림치게 됩니다. 전에는 돈과 권세와 명예와 인기가 나타나기를 소원하며 살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소원하게 됩니다.
2) 최근에 우리나라를 둘러싸고 일어난 신기한 자연계의 현상을 봅시다.
① 중국에는 작년에 이어서 금년에도 무서운 홍수와 태풍이 끊임없이 찾아와 온 땅을 초토화(焦土化)시켰습니다. 메뚜기 떼가 습격하여 농사도 망쳤습니다. 그럼에도 중공정부는 기독교회에 대한 탄압에 채찍질을 합니다. 일본도 지진과 홍수와 태풍이 쉬지 않고 몰아칩니다. 올림픽으로 경제를 회복해보려고 했지만, 오히려 더욱 깊은 수렁에 빠졌습니다. 14호 태풍 찬투가 대만을 거쳐 상해에 머물다가 갑자기 90도로 방향을 틀어 일본 열도를 관통하였습니다.
중국에서는 천멸중공(天滅中共)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회자되고 있습니다. 무신론자들도 이는 하나님이 심판을 내리시는 것이라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온갖 잡신을 섬기는 일본도 이러한 무서운 천재지변에는 분명 하나님이 벌을 내리신다고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어떻습니까? 폭풍과 홍수로 농사는 완전히 망쳤고, 식량난은 갈수록 더 심해져서 아사자가 끊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래도록 복음의 문이 닫혀 있었어도 옛 성도들의 후손이 많이 남아 있기에 지하교회에서의 기도소리가 주님께 상달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점차 하나님의 심판을 깨달아갑니다.
② 중공이나 일본이나 북한에게는 가장 중요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절대로 잘못을 인정하거나 진심으로 사과하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신론자들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으니,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고, 따라서 잘못이나 죄를 인정한다는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후에 독일은 유대인들을 학살한 일을 진심으로 회개한다고 했습니다. 자기들이 학살한 현장을 보전하고, 박물관을 만들어 솔직하게 사과했습니다. 기독교적인 양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본, 중국, 북한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들은 무신론자들입니다. 절대로 사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잘못을 상대에게 뒤집어씌웁니다.
③ 이 세 나라와 우리나라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또 있습니다. 불의에 항거할 줄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물론 민주주의 국가와 공산주의 국가는 체제가 다르니까 정권을 가진 자들에게 항거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오래되면 아예 항거할 마음조차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기가 센 민족입니다. 일제 때에도 끊임없이 항거했습니다. 일본은 우리나라를 교두보로 대륙에 진출하기 위해 우리 백성들에게는 비교적 잘 대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이민족의 불의나 억압 그 자체를 싫어합니다.
하나님은 항거할 줄 아는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로마교회는 권위에 무조건 순종하여 교황이 가르치는 대로 그대로 믿고 교황을 신격화하면서 따르지만, 그래서 온갖 부정과 부패의 온상이 됩니다. 끊임없이 개혁해야만 정의의 사회가 유지됩니다. 개신교회는 일체의 인간 권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권세에 복종하지만, 부정과 부패에도 복종해서는 안 됩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자유민주주의의 나라를 건국하고, 기독교국가 건설을 목표로 했기에 항거(protestant)정신, 곧 개혁정신이요, 부정과 불의를 대적하는 정신을 진작시켰습니다. 그런 정신이 의로운 후손들을 배출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는 최단시간에 선진국이 되었습니다.
④ 하나님의 아들들이 많이 나타나야 세상은 밝아집니다. 대한민국은 어떻습니까? 100년 전 기독교인의 수는 얼마 되지 않았어도 그들은 기도했습니다. 나라를 잃어버렸음에 울부짖었습니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 신음하며 기도했습니다. 소돔에 의인 열 명이 없었고, 예루살렘엔 의인이 한 명도 없었지만, 우리 한반도에는 기도하는 의인, 주님을 사랑하는 의인이 많이 있었습니다. 전심으로 진리를 구하는 도인(道人)들이 많았습니다. 하나님은 국가적 환난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깨닫고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도록 역사하셨습니다.
3)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서 큰 소리로 주님께 “우리 피를 어느 때에야 갚아 주시려 하나이까?”(계 6:10)라고 기도합니다.
① 이들은 땅에 있을 때에 신음하며 기도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영이 살아 있기에 육신이 살아서나 죽어서나 끊임없이 신음하며 기도합니다. 기도생활이 습관화했기 때문입니다.
② 하나님은 피조물들의 신음소리도 들으시고 역사하십니다. 하물며 성도들의 신음소리를 못 들으실까요? 그 소리를 외면하실까요? 아닙니다. 절대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겠다고 수없이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피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셨기에, 주님을 사랑하며 따르는 성도들도 피땀을 흘리며, 신음하면서 기도를 올립니다.
③ 참 성도에게는 신음하며 기도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어주십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라는 말씀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2:9)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랑합시다”(마 22:37). 주님은 우리의 사랑을 시험해보십니다. 용광로 속에 던져 넣어보십니다. 순금이 되어 더욱 광채를 발하며 나올 것입니까? 아니면 불에 다 타버린 쇳물 찌꺼기가 되어서 나올 것입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