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가 때이니만큼: 비루함과 영광의 공존
베들레헴에서 그 밤에 발생한 일에서 가장 먼저 발견하는 것은 극단적인 두 개의 상태가 병존하는 것입니다. 하나는 극단의 비하이고 다른 하나는 극단의 영광입니다. 놀라운 대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당시에 여행객이 머물 수 있는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가셨습니다. 곧 제대로 된 숙소를 얻을 수 없어서 마구간 구유 곧 가축에게 여물을 주는 여물통에 누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그곳에서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낮고 누추한 곳에 누이셨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서울역 지하도 노숙자의 상자 속에 뉘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하늘의 천사들이 내려와서 그 일의 의미를 노래로 불렀습니다.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해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 2:13~14) 구유에 누이신 예수님은 하늘의 수많은 천군과 천사가 동원될 만큼 영광스러운 분이었습니다. 가장 비루한 것과 가장 영광스러운 것이 아기 예수 안에 공존한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그가 이렇게 영광스러운 존재인 까닭입니다. 그런데 이 영광이 세상에서 비루한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것에 신앙의 묘미가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영광이 세상에서의 영광으로 드러난다면 별로 맛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이 세상에서 비루한 모습으로 드러난다는 바로 이 사실에 놀라운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속임입니다. 가장 비루한 옷을 입은 가장 찬란한 영광….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겸비한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이 사실이 위로이지만, 세상에서 영광을 얻기 원하는 악인에게는 바로 이것이 치명적인 속임입니다. 그들은 바로 이 절묘하고 정치한 진리에 속아서 세상에서 영광을 추구하다가 망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렇게 세상의 영광을 추구하지 마십시다. 그리고 그렇게 영광을 추구해 마침내 세상의 영광에 도달한 사람들을 마음껏 불쌍히 여깁시다. 그렇게 세상의 영광을 추구한다는 것은 결국 그들에게 영광이 없다는 증거일 뿐입니다. 이미 영광스러운 우리는 세상의 영광에 아무런 욕구를 느끼지 않습니다.
첫댓글 예수님 탄생의 공간적 배경 자체가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말씀하시는 듯.
가장 비루한 옷을 입은 가장 찬란한 영광….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겸비한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위로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