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는 다른 지역에 비해
유난히 교방문화가 성행했던 지역으로 손꼽힌다.
자랑스러운 진주문화유산 가운데 하나인 의암별제 또한
교방문화, 즉 기생들이 만들고 계승해온 교방문화인 것이다.
진주권번은 현재 우리은행(옛 상업은행) 진주지점 자리에 있었다.
권번의 건평은 500여평 정도였고 건물 내부에는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여러 개의 방이 있었으며 그곳에서 몇 명씩 그룹이 되어 수업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진주 권번에 입학하는 사람들의 연령은 제한이 없었지만 대체로 열살 전후부터 열 다섯 전후까지가 대부분이었다. 간혹 자신의 예능을 살리고 생계를 이어가고자 나이든 사람들이 입학하기도 했다.
그러나 권번은 입학은 있어도 졸업이라는 특별한 형식이 없었다.
권번에 다니는 학생은 '학예(學藝)'라고 하는 학습이 끝나면 대부분 놀음채를 받는 '놀음기생'이 되었기 때문에 놀음기생으로 권번에 계속 나와야 했다.
당시 진주 권번에는 50명 정도의 인원으로 3반이 있었다고 한다.
1반은 새로 입학한 학예 2반은 2년 된 학예 3반은 3년 된 학예로 편성되어 있었다. '학예'는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 학습하는 오전반과 개인지도를 받을 수 있는 오후반이 있었다.
권번에서는 주로 '교양학습' '일본어학습' '기예학습'을 받았다고 한다.
'교양학습'은 처음에 걸음걸이부터 시작하여 인사하는 법 앉는 법 말하는 법 옷 입는 법 등 기초적인 예의 범절에 대해 배웠는데 필수과목이었다.
'기예학습'은 악(樂) 무(舞) 기(器)로 나누어 몇 명씩 조별로 나누어 학습을 했다. 소리는 시조 단가 진양조 판소리의 단계를 배우는데 판소리 단계에 와서는 개별적으로 지도를 받았다.
논개, 산홍
진주 교방문화 되살리기
조선후기 가객 안민영이 진주를 찾았을 때, 진주 기생 비연(飛燕)을 애타게 찾았다. 하지만 진주 외촌에 사는 성진사의 총애를 받고 있는 비연을 만나기 쉽지 않았다. 안민영은 포기하지 않고 중간에 사람을 넣어 비연을 만났다. 그리고 시 한수를 읊어 비연을 만난 감회를 드러 내었다.
자못 붉은 꽃이 일부러 숨어 보이지 않네/ 장차 찾으리라 생각하고 굳이 헤쳐 들어가니/진실로 그 꽃이거늘 문득 꺾어 드렸노라//
당시 우리나라 제일의 가객 안민영이 보고 싶어했던 진주 기생 비연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김소월이 좋아했던 진주기생 채란 등 많은 진주기생들이 문학의 소재로 등장했다. .
진주는 예로부터 평양과 더불어 ‘기생문화’ 즉 ‘교방문화’가 유명했던 곳이다.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없지만 그래도 명맥을 이어오는 교방무가 있다. 진주 검무, 진주 포구락무, 진주 교방굿거리, 진주한량무다.
최근 진주시에서 이들 무형문화재 전승을 위해 ‘진주전통예술회관’을 새로 건립하고 개관을 눈앞에 두고 있다.
첫댓글 교방문화를 되살리면 진주에 기생과 기생집이 많이생기는건가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