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의 자녀가 반항한다면 그건 아이가 거리에서 방황하지 않고 집에 잘 있다는 것이고, 지불해야 할 세금이 있다면 그건 나에게 직장이 있다는 것이고, 이른 아침 시끄러운 자명종 소리에 깼다면 그것은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다.
거리, 아름다운 사랑의 공간
이제 서울에 와 머문다. 그래도 주말이면 내 사는 산으로 간다. 1주일 가운데 4-5일은 서울에서 살고 2-3일은 산에서 산다. 산에 가면 비로소 숨을 쉰다는 느낌이 든다, 산문을 들어서면 먼저 호흡을 크게 한다. 폐 깊숙이 와 닿는 정다운 산과 하늘의 숨결들, 반갑다. 4-5일을 헤어졌다 만나는 공기는 상큼함을 넘어 친근하기까지 하다. 마치 ‘어디 갔다 이제야 왔느냐’고 공기가 속삭이는 것만 같다. 그때마다 공기가 어머니처럼 느껴진다. 부드럽게 다가와 폐부로 스며드는 공기가 어머니 손길같다. 공기에는 지금까지 나를 있게 하고 앞으로도 존재하게 할 커다란 힘이 있다. 나를 길러 오늘의 나를 있게 한 내 생명의 근원이 어머니와 공기는 닮았다는 것을 느낀다.
며칠 만에 산으로 돌아가면 나는 고마움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떨어져 있음이 그 고마움에 눈뜨게 한다. 그 속에 늘 살 때는 몰랐던 것이 떨어져 살면서는 분명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고 보면 이 떨어져 있음도 내게는 고마운 일이다.
어느 날 서점에 가서 시집 하나를 잠깐 보았다. 안도현 선생이 쓴 <거리>라는 제목의 시였던 것 같다.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나무와 나무 사이의 거리가 숲을 키운다는 대목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나무와 나무 사이의 거리가 숲을 키우듯 그대와 나 사이의 거리가 사랑을 키우는 것이었으면 좋겠다는 내용으로 끝을 맺는 시를 읽고 나서 나는 ’거리’가 분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와 서로를 이어주는 사람의 다리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다.
나는 요즈음 그 거리에 대해서 아주 잘 느끼고 있다. 잠깐씩 떨어져 있다가 다시 산과 공기와 어둠과 별과 바람을 만날 때면 떨어져 있는 시간만큼의 거리가 오히려 서로의 존재를 잘 확인시켜 준다. 산과 내가 서로 떨어져 있던 그 시간의 거리에는 궁금함과 보고픔이 있었다. 어둠이 사라진 서울에서 잠자리에 들 때마다 산사의 어둠을 그렸고,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가 사라지지 않고 들려올 때마다 고요를 그렸고, 별이 사라진 하늘을 바라볼 때마다 별이 빛나는 내 산사의 하늘을 보고파 했다. 그런 그리움 끝에 만나는 산사의 하늘과 어둠과 별은 반가움이었다.
우리는 어쩌면 서로가 너무 붙어 있거나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너무 붙어 있으면 다투기 쉽다. 반대로 떨어져 있는 거리가 너무 멀면 서로의 존재를 잊기 쉽다. 그것은 사람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진다. 우리 살아가는 모습이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적당한 거리, 그것은 어쩌면 이해와 관심 그리고 배려를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산으로 돌아가는 길, 맑은 별을 바라보며 이 적당한 시간의 거리가 내게 조용한 기쁨을 일깨워준다는 것을 실감한다.
출처 ; 성전 스님 / 관심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