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의 여러 대장경들이 모두 없어져 전해지지 않으나 해인사에는 팔만대장경,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 재조고려대장경(再彫高麗大藏經)등으로 불리워지는 81,258장의 대장경판이 1962년 12월 20일 국보 32호로 지정 받아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다. 왜 팔만여 장의 경판을 새겼을까? 우연히 만들다 보니 이렇게 된 것인가? 불가에서 팔만 혹은 팔만 사천이란 숫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즉 많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데, 부처님의 많은 가르침을 일컬을 때 팔만사천 법문(法門)이라 하고 사바세계의 수많은 번뇌도 팔만 사천 번뇌라고 부른다. 팔만대장경의 팔만이라는 숫자에는 부처님의 법문을 새겨서 인간의 번뇌를 씻어낸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우선 이 대장경판의 내력을 간단히 알아보자. 수 십 년에 걸쳐 완성된 초조대장경과 의천의 속장경은 고종 19년(1232)몽골군에 의하여 무참히 모두 불타버리고 말았다. 무력한 고려 조정은 몽골과의 항쟁을 위하여 서울마저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기게 된다. 이에 고려는 다시 한번 부처님의 힘을 빌어 외침에 대처하고 민심을 수습코자 대장경을 새길 계획을 세운다. 대장도감을 새로이 설치하고, 고종 23년(1236)부터 38년(1251)년까지 장장16년간에 걸쳐 다시 대장경을 조성했다. 경판은 처음 강화도성(江華都城) 서문 밖의 대장경 판당(板堂)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후에 같은 강화도의 선원사로 옮겨졌고, 그 후 조선 초기에 서울 근처의 지천사로 옮겼다가 다시 해인사로 옮겨져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는 것으로 지금까지 알려져 왔다. 그러나 아직은 이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다.
팔만대장경판은 상당 부분 초조대장경 인쇄본을 그대로 나무에 붙여 복각했다는 일부 일본인 학자들 중심의 주장도 있으나 항상 우리의 역사를 부정적으로만 보는 그들의 못된 시각일 따름이다. 초조대장경을 바탕으로 하고 송 · 거란본과도 비교하여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 고쳤고 빠진 것을 찾아 넣었으며 초조대장경에는 없었던 경서도 참고하여 본문을 다양하게 보완하였다. 이런 노력 끝에 이루어진 팔만대장경은 북송의 칙판대장경을 효시로 20여종에 이르는 각종 대장경이 잇달아 나왔다고 하나 다른 어느 대장경보다 본문이 충실하여 오자와 탈자가 거의 없는 완벽한 대장경이다. 초조대장경에서 속장경, 팔만대장겨으로 이어지는 경판의 제작은 현종 2년(1011)에서 고종 38년(1251)에 걸쳐 고려가 가장 어려웠던 국가적 위기에 시기에 장장 240년이라는 긴 세월을 통해 이룩한 거국적 대사업이었다. 대장경의 완벽한 제작은 문화국으로서 고려의 위신을 드높였을 뿐 아니라 인쇄술과 출판술의 발전에도 크게 공헌하여 그 문화사적인 면에서도 우리 민족의 영원한 자랑거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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