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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에 공헌하는 인재 육성, 정선전씨 필구公 문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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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판( welcome everybody) 스크랩 복날의 풍경
한강의 언덕 추천 0 조회 100 16.08.15 06:3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한국고전번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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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산문
2016년 8월 15일 (월)
사백마흔 번째 이야기
복날의 풍경
번역문
   복날에는 모여 개를 잡아먹는 게 풍속이다. 정묘년(1747) 6월 1일은 초복이었다. 이날 마침 일이 있어 다음날로 미루어 현곡의 청문당에서 복달임을 하였다. 술이 거나해지자 광지(光之, 강세황(姜世晃))에게 부탁하여 그림을 그리게 하여 뒷날의 볼거리로 삼고자 하였다.
   모인 사람은 모두 11명이었다. 방안에 앉은 사람이 덕조(德祖, 유경종(柳慶種)), 문밖에 책을 들고 마주 앉은 사람이 유수(有受, 유경용(柳慶容)), 가운데 앉은 사람이 광지, 옆에 앉아서 부채를 부치는 사람이 공명(公明, 유경농(柳慶農)), 마루 북쪽에서 바둑을 두는 사람이 순호(醇乎, 박도맹(朴道孟)), 갓을 벗은 채 머리를 드러내고 대국하는 사람이 박성망(朴聖望), 그 옆에 앉아있는 사람이 강우(姜佑), 맨발인 사람이 중목(仲牧)이다.
   관례를 하지 않은 젊은이는 두 사람인데 책을 읽고 있는 자가 경집(慶集, 강흔(姜?)), 부채를 부치고 있는 자가 산악(山岳, 유성(柳?))이다. 대청마루 아래에 서서 대기하고 있는 자는 심부름꾼 귀남(貴男)이다. 이때 장맛비가 막 걷히자 초여름 매미 소리가 흘러나왔다. 거문고와 노랫소리가 번갈아 일어나는 가운데, 술 마시고 시 읊조리며 피곤함을 잊고 즐거움을 만끽하였다. 그림이 완성되자 유경종이 기문을 짓고, 다들 각각 시를 지어 그 아래에 붙였다.
원문
伏日, 設家獐會飮俗也. 丁卯六月一日, 爲初伏. 是日有故, 其翌日追設, 玆會于玄谷之淸聞堂. 酒?, 屬光之爲圖, 以爲後觀. 會者凡十一人, 坐室中者爲德祖, 戶外執書而對坐者爲有受, 中坐者爲光之, 傍坐搖扇者爲公明, 奕于軒北者爲醇乎, 露頂而對局者爲朴君聖望, 側坐者爲姜佑, 跣足者爲仲牧. 童子二人, 讀書者爲慶集, 搖扇者爲山岳. 軒下侍立者爲家?貴男. 于時積雨初收, 新蟬流喝. 琴歌迭作, 觴詠忘疲, 致足樂也. 畵成, 德祖爲記, 諸人各爲詩, 系其下.

유경종(柳慶種, 1714~1784)의 강세황 그림 ‘현정승집도(玄亭勝集圖)’에 부친 기문

해설
   여름철 복날에 개고기를 끓여 먹는 우리 민족의 풍속은 꽤 오래되었다. 조선 후기의 세시풍속집 『동국세시기』에는 “개장국을 먹으면서 땀을 내면 더위를 물리치고 허한 기운을 보강한다”고 하였고, 『농가월령가』에도 “황구의 고기가 사람의 몸을 보충해 준다”라는 구절이 있다. 다산 정약용도 흑산도에 유배 중인 중형 정약전에게 섬의 개를 잡아 몸을 보신하라는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

 

   복날을 전후해 서민들은 개고기를 먹고, 시원한 계곡을 찾아 더위를 식혔다. 이를 복달임 또는 복놀이라고 한다. 사대부들도 복달임을 즐겼다. 그러나 이들의 복날 풍습은 서민들과는 조금 달랐다. 개고기를 먹은 것으로 끝나지 않고, 풍류를 즐기며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는 시회로 이어졌던 것이다.

 

   영조 23년(1747) 6월 2일(음력) 안산의 문인들이 청문당(淸聞堂)에 모였다. 이날은 마침 초복 다음날이어서 복달임을 하였다. 모임에는 청문당의 주인 해암 유경종과 그의 친척인 유경용(柳慶容, 1718~1753), 유성(柳?) 그리고 해암의 매부인 표암 강세황(姜世晃, 1713~1791), 강세황의 두 아들인 강우(1729~1791), 강완(1739~1775) 등이 함께했다.

 

   문인들은 개장국을 끓여 먹으며 술을 곁들였다. 거나하게 술기운이 돌면서 문인들의 풍류가 살아났다. 거문고를 퉁기며 한시나 시조를 읊조렸을 것이다. 흥이 가라앉으면서 참석자들은 독서나 바둑 등 각자의 취미나 흥밋거리를 찾아 시간을 보내기 시작하였다.

 

▶ 표암 강세황의 ‘현정승집도(玄亭勝集圖)’(부분), 1747년. 개인 소장

 

   그때 누군가가 이날의 즐거움을 그림으로 그려 기념하자고 제안하였다. 붓은 그림에 소양이 있는 표암 강세황이 잡았다. 표암은 270년 전 안산 청문당에서 있었던 여름날의 풍경을 마치 스냅사진을 찍듯이 되살려 냈다. 오늘날까지 전하는 ‘현정승집도(玄亭勝集圖)’가 그것이다. 그림 속에는 책 읽는 이, 바둑 두는 이, 부채질하는 이, 멀리 바깥을 내다보는 이, 마루 아래에서 대령하는 심부름꾼 등 모습도 다양하다. 거문고와 술병이 뒷전으로 놓인 것으로 보아 술자리가 끝난 직후였던 것 같다.

 

   강세황이 그림을 완성하자 모임을 주선한 유경종이 그림에 대한 설명을 곁들인 기문을 썼다. 모임의 취지, 진행 과정 그리고 참석자들의 이름뿐 아니라 그들의 자세, 위치도 자세히 밝혔다. 그림 속 인물의 자세를 보며 이름을 적시하고 있어 참석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 현정승집도는 조선 후기 문인들의 여름날의 풍경을 담은 그림과 함께 시, 산문이 어우러진 풍속화라고 할 수 있다.

 

    현정승집도에는 ‘玄亭勝集’이라는 큰 글씨의 제목 아래 그림·기문·시 8편이 차례로 이어져 있다. (원래는 두루마리 상태였는데, 지금은 제목 및 그림 부분과 기문·시 부분으로 분리되어 전한다.) 그림과 글씨는 모두 강세황의 친필이다. 현정승집도에 실린 강세황의 시는 ‘정묘년 6월 현정의 승경을 읊다[丁卯六月玄亭勝景]’라는 제목으로 『표암유고』에도 실려 전한다.

 

     탁 트인 산 위 누각엔 술잔들이 널려 있고/ 敞豁山樓列?盤
     졸졸 흐르는 시내가 난간까지 닿았네/ 淙潺石磵??干
     거문고 가락 바람 부는 소나무 사이로 아득히 퍼지고/ 風松琴曲悠揚遠
     바둑돌 맑은 날에 우박 치듯 그 소리 차갑구나/ 晴雹棋聲剝啄寒
     내키는 대로 시를 읊조리며 다투어 화답을 재촉하고/ 狂詠篇章爭屬和
     자세히 그림으로 옮겨 자랑스럽게 돌려보네/ 細移??侈傳看
     촛불을 쥐고 흠뻑 취하는 것 사양하지 말게나/ 莫辭秉燭千?醉
     모름지기 흐르는 세월 짧음을 아쉬워해야 하나니/ 須惜流光一指彈

 

   강세황은 서울에서 태어났으나 32세에 안산으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처가인 진주 유씨의 유경종, 유경용 등과 어울려 지냈다. 성호 이익을 찾아가 학문을 익혔으며, 단원 김홍도를 제자로 받아들여 그림을 가르쳤다. 강세황이 뒷날 시·서·화 삼절(三絶)로 일컬어지며 ‘예원의 총수’로 불린 데에는 안산 문인들과의 교유가 뒷받침되었다고 할 수 있다.

 

   현정승집도의 배경이 된 안산 청문당은 진주 유씨가 대대로 살아온 집으로, 안산 지역 시인과 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다. 특히 이곳은 조선 후기 정치권력에서 소외된 남인 학자들이 모이면서 조선 후기 문예와 실학의 산실이 되었다고 한다. 청문당은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부곡동에 있으며 경기문화재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그러나 건물이 신갈~안산 고속도로와 서해안고속도로 사이에 끼어 있어 강세황 당시의 그윽한 문향은 찾아볼 수 없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조운찬
글쓴이조운찬
경향신문 후마니타스연구소장

- 경향신문 편집국 문화부장과 문화에디터, 베이징특파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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