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갑은 공자, 을은 플라톤이겠죠. 문제되는 선지는 ㄹ입니다.
"ㄹ. 구성원의 역할이 분담되면 자연스럽게 이상적 국가가 실현된다."
평가원은 이 선지를 갑과 을의 공통입장이 아니라고 발표했습니다. 아마 역할을 나누는 것만으로는 이상 국가 실현이 되지 않으리라는 생각으로 출제한 것 같습니다. 지금 이의제기 게시판에 수많은 학생들이 이 선지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고 있더군요.
그냥 선지를 딱 보면 출제자가 말장난으로 '낚시' 효과를 노렸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죠. 과연 이런 걸 가지고 '매력적 오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저는 잘 모르겠네요.
그건 그렇고, 저는 그냥 간단하게 교과서만 가지고도 선지의 문제점을 증명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상교육 생활과 윤리 83쪽을 봅시다.
"정명(正名) 사상을 주장한 공자는 각자가 자신의 이름에 걸맞은 행동을 할 때 이상 사회가 완성될 수 있다고 보았다. 정명 정신은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중요한 직업의식이라고 볼 수 있다."
공자의 정명 정신에 대한 교과서의 설명입니다. 이를 보면, '자신의 이름에 걸맞은 행동'을 하는 것은 곧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네요. 그리고 이렇게 할 때에 이상 사회가 완성된다는 겁니다. 구성원이 각자 분담한 역할에 최선을 다하면 이상적인 국가가 실현된다는 거죠.
선지 ㄹ을 다시 봅시다.
"ㄹ. 구성원의 역할이 분담되면 자연스럽게 이상적 국가가 실현된다."
출제자가 내놓을 답변은 충분히 예상이 됩니다. 교과서는 역할을 분담하는 데서 그친 게 아니라 분담한 역할을 잘 수행해야 한다고 서술했다고 하겠죠. 그래서 이 선지는 교과서와 달리 수행한다는 말이 적혀 있지 않으니까 아무 이상이 없다고 나올 겁니다.
그런데 미래엔 생활과 윤리 교과서 81쪽에 이런 서술이 있습니다.
"직업은 사회적 역할을 분담할 수 있게 한다. 즉 인간은 직업을 통해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사회 발전에 기여한다."
교과서에서 '역할 분담'이라는 개념을 직접 규정해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적어도 교과서에 의한다면 '역할 분담'에는 단순히 역할을 나누는 것만 들어가는 게 아니라 역할을 수행하고 사회 발전에 기여한다는 것까지 포함됩니다. 현 교육과정상의 용법으로서 '역할 분담'은 '수행'의 의미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두 교과서의 서술을 나란히 정리해보겠습니다.
1. 공자의 정명론은 구성원 각자가 자기 역할을 최선을 다해 행할 때 이상 사회가 완성된다는 것. (비상교육)
2.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역할 분담' 개념에 포함됨. (미래엔)
이 두 내용을 하나로 꿰면, 공자의 정명론에서 구성원 각자가 '역할 분담'을 하면 '이상 사회'가 완성된다는 것이 되겠네요. 교과서의 규정에 따른다면 '역할 분담' 개념은 '역할을 수행하고 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실천적인 개념이니까요.
"ㄹ. 구성원의 역할이 분담되면 자연스럽게 이상적 국가가 실현된다."
이 선지는 '교과서'에 의해 공자 정명 사상에 부합하는 내용이 되겠습니다.
사실 이렇게 말장난하는 거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문항 선지 자체가 깨끗하지 못하기 때문에 궁색하게나마 교육과정 근거들을 찾아보았습니다.
교과서만 보고 끝나면 재미없으니까, 관련 원문 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 『중용』 20장에 애공이 공자에게 정치를 묻는 장면이 있습니다. 거기서 공자가 이런 말을 합니다.
"적절한 인물이 있으면 정치가 흥하고 인물이 없으면 정치가 쇠락합니다. (其人存則其政擧, 其人亡則其政息.)"
적절한 인물[其人]이란 제 역할을 알맞게 분담해 가진 사람을 말하겠죠. 여기서 공자는 그 인물이 뭘 '행해야' 정치가 흥한다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냥 그 인물이 '있으면[存]' 곧 정치가 흥한다고 했을 뿐입니다. 이게 그 인물이 아무 짓도 안 하고 가만히 존재하기만 하고 있다는 뜻은 아닐 겁니다. 이는 역할을 갖고 있는 것만 언급해도 사실상 정치에 기여하는 행위까지 다 포함해 말하는 것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다른 원문도 보죠. 정명(正名) 개념의 출처. 『논어』 「자로」 3장입니다.
"자로가 말하였다. '위나라 군주가 선생님을 기다려 정치를 하겠다고 하면 선생님은 뭐부터 하실 겁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반드시 정명(正名)해야지.'"
이 장에서 죽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마지막에 나오는 말이 이것입니다.
"군자가 名하면 반드시 말할 수 있고, 말하면 반드시 행할 수 있다. 군자는 그 말에 있어서 구차함이 없을 뿐."
名하면 言을 거쳐 行으로까지 이어진다고 합니다. 이때 名은 당연히 나쁜 것이 아니라 올바른 명을 말하죠. 이때의 名도 결국 각 구성원에게 적용하면 '역할'을 포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역할을 바르게 나눈 것이 行으로까지 이어진다는 점을 읽어낼 수 있는 대목이지 않을까 싶네요.
이런 자료들로 보아, 선지 ㄹ은 아무래도 재고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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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가. 『수능완성』 연계 혐의 문항 및 해설


첫댓글 저는 평가원이 ㄹ을 정답에 포함시켰다고 해도 나름대로 변명할 수 있었을 거라고 봅니다. ㄹ 선지를 봤을 때(정답 확인 전) 많은 생각이 교차하더라고요. 내가 만일 ㄹ을 정답에 포함시켜서 사이트에 올렸다면(물론 '이상하다'는 코멘트와 함께) 또 나중에 알바 애들이 "3점짜리 틀린 교사다" 이러면서 난동을 부렸겠죠?ㅎㅎㅎ
아무튼 이 선지에 대한 글을 곧 올리겠습니다만, 학생들 입장에서는 이것은 그냥 '찍기'죠. 공부 수준과는 아무 관계없습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오랜만에 보네요. 인터넷이 어느 정도 자유로운지는 모르겠지만 종종 놀러오시길..